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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향 / 어느 날 다가온 육체의 감옥을 직시하며

이선영

어느 날 다가온 육체의 감옥을 직시하며

  

이선영(미술평론가)


  

가장 이상적인 예술은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삶과 예술은 같이 가야 하지만, 작업을 위한 삶의 조건이 풍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 따른다. 특히 자신이 선택한 것을 더 완벽하게 해내겠다는 신념이 강한 이들에게 병행은 더욱 어렵다. 작업은 물심양면으로 거의 쏟아 넣는 과정이다. 삶을 사는 것과 작업, 요컨대 가장 소극적인 차원에서 기록의 경우도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예술이 내적인, 외적인 삶의 기록이라면 사는 것과 기록하는 것이 자명하게 일치되지는 않는다. 사진 한 장 없이 수 천 년을 지내온 그동안의 인류 문명이 무색하게 기록하는 하는 삶이 일상화된 SNS 시대는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이 고민했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미향의 사진 작품들은 그러한 두 갈래 길에서의 긴장을 표현한다. 자신의 삶이 담긴 작품들은 지나간 일에 대한 추체험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도 아닌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내용을 담는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 스타일은 아니다. 최미향은 절제되고 압축된 상징어법을 구사한다. 사진을 찍느라 정작 체험이 온전치 못하거나 일생일대의 순간이었지만 마침 그때 사진기가 없는 순간도 많다. 기록이란 대상과의 거리감을 전제한다. 삶 자체는 예술이 아니다. 예술이 삶이 되는 경우는 더욱 희귀하다. 작품 및 작업하는 삶 그자체가 예술적 담론의 중심부에 서는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그전에는 신화와 종교 등 선행하는 지배적 가치를 담아내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러한 중심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 예술 그자체에 대한 관심이 우선시되었고,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며 사는 예술가 주체에 대한 관심도 병행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개인에게도 되풀이될 수 있다. 작업의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최미향에게도 계통발생적 상황은 반복되었다. 역사 인류학자 리하르트 반 뒬멘은 [개인의 발견]에서 개인의 어원에 내재 된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개인은 어원상 ‘in-dividuum’, 즉 더이상 나뉠 수 없는 개체를 뜻한다. 그러한 개인은 ‘집단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개체’를 말한다. 대부분의 역사 동안 여성은 가족과 동일시되었기에 개인으로서의 여성은 새삼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최미향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의식하자마자,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개인의 발견이 낳은 또 다른 의식이다.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만들기 위해 밑밥이 되었던 존재인 이 또 다른 개인은 자신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예술과 함께한다. 이기적이고 협소한 개인이 아니기에 개인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현대사상의 흐름과도 배치되지 않는다.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 휴먼과의 만남]에서 ‘자의식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대서사시이며, 집단적인 창작품이고 언제나 변화하는 공동의 구조물’이라고 말한다. 리하르트 반 뒬멘 또한 개인을 자명한 출발점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발견]이라는 책 제목처럼, 개인은 발견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하는 등, 역사적으로 변화한다. 




특히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커지는 현대에 개인이 자유가 아닌, 규율화 과정과 관련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하르트 반 뒬멘은 푸코를 따라서 규율화는 개인화를 배제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전자는 후자에 대한 전제조건이라고 본다. 규율화 과정은 새로운 독자성, 즉 성찰적 독자성에 대한 전제조건을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여성 정체성과 규율과의 관계는 복잡하다. 가정에서 여성은 자녀에게 사회적 규율을 주입하는 교육자의 역할을 담당해 왔기 때문이다. 육체의 생산자일 뿐 아니라 관념의 재생산자 역할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자신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 기존의 규율은 재고되어야 했다. 최미향의 작품 속 여성들이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과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 사이의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극화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무대에서 거울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낼 거울을 직시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을 매개로 자신을 바라보는 권리는 오랫동안 도덕률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왔다고 말한다. 육체는 시각적 영역에서 배제된 것이다. [거울의 역사]에 인용되는 바에 의하면, 체액으로 되어 있고, 또 그 때문에 질병에 걸리기도 하는 육체는 무엇보다도 죄악의 기회이자 죄악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영혼의 감옥이다. 최미향의 작품 속 거울, 그리고 또 다른 거울이라 할 수 있는 사진은 그렇게 갇혀있는 몸을 비춘다. 인간이나 주체에 대한 의심이 커진 시대, 여전히 작업은 자기 주도형의 과정으로서의 기대치와 만족감이 있다. 30대가 되어도 거의 미성년자 취급을 당하는 요즘과 달리, 여자는 ‘대학 졸업하고 바로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던’ 세대에 속한 그녀는 맏며느리로서의 분주한 삶을 살다가 50대 전후로 다시 작업을 시작한 경우다. 그래도 중년은 너무 늦은 것 아닌가? 그러나 이제 가족을 위해 내가 빠진 삶을 이제 바꿔야 할 시점이 왔다고 본 것이다. 




1900년경 미국인의 평균 수명이 불과 47세 였다는 통계가 있다. 그 후 백 여 년이 흘렀을 뿐인데, 100세 시대까지 예측되는 시점에서, 최미향의 경우 반환점을 돈 지 얼마 안 되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늦은 시작은 아니다. 어차피 삶에서 치러야 할 총량의 희생은 있기 마련이다. [The turn of life]는 자의식이 가득한 전시 부제다. 일찍 진을 빼고 그 즈음에 자기복제나 꾸미기로 작업을 대신하면서 마음만 작가인 이들도 꽤 되는 만큼, 전환점을 찾기 위한 여정은 어느 시기도 늦은 출발은 없다. 여성에게 50세 전후는 인생 2막이 펼쳐지는 생애주기의 시작임과 동시에 심리 생리학적으로는 갱년기와 겹친다. 날씨가 흐린 날 온 몸이 쑤시는 날굳이를 하는 필자의 노모를 보면, 여성과 자연의 연대는 각별하다. 여성의 육체적 정체성과 관련되는 월경은 달의 주기와 일치하지 않는가. 자연과의 연대가 더 강하다고 믿어지는 여성은 퇴화의 고통 또한 유별나다. 좋은 의미든 아니든 여성은 몸(자연)과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아멜리아 존스는 [몸]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의 관점을 취하면서, 몸이 여성성으로 규정됨을 밝힌다. 몸은 데카르트주의로 대변되는 순수한 사고를 통하여 억압되거나 초월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수전 보르도도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육체의 고유한 모든 속성이 여성에게 덧씌워진다’라는 보부아르의 말은 인용하면서, 이와 대조적으로 남성은 자신을 ‘순수 이데아, 하나이며 모든 것인 절대정신 같은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됨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유아기의 혼돈스러운 육체적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나, 오염되지 않은 인간성은 남성에게 속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여성성으로부터의 자율성은 이상이지만, 이상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현실로 변화한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이원론은 관념이자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은 페미니즘 계열의 필자들이 말하듯이 육체적 존재로서의 여성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여성 뿐 아니라 인간이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인식하게 한다. 



최미향의 작품 속에서 몸과 여성의 관계는 이원론이라는 도식에서 작동하지만, 동시에 이원론은 미시적인 권력의 그물망의 가장 큰 범주일 따름이다. 작가는 여러 상황의 연출을 통해 이원론의 세목을 열거한다. 여성은 몸인데 그 몸이 망가진다면? 그 이전에 정상/비정상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다. ‘여자란 낭만화 된 구성물이다’(안드레아 드워킨)라는 페미니즘적 관점도 있지만, 여성을 포함한 인간의 몸이 주시의 대상이 되었을 때 작동하는 권력이 하나둘 드러난다. 수전 보르도는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여성의 몸의 진실이 아니라 다름을 상상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여성의 몸을 자연이나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각인되고 역사적으로 그 위치가 정해진 몸(또는 전개된 실천)으로 보는 것이다. 최미향의 작품 속 고통받는 여성 또한 ‘몸이 싸움터’(바바라 크루거)라는 은유와 밀접하다. 


작품 속 그녀들이 홀로 겪는 것이 육체적이자 정신적인 고통인 이유는 호르몬 상의 문제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각에도 존재한다. 성장통을 앓는다며 요란하게 조명되는 사춘기에 비해 각자 감내하며 넘어가야 하는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최미향은 자신의 문제부터 시작한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 그 여성의 절반이 겪는 문제지만, 그다지 예술적 소재의 대상이 된 적이 거의 없는 것은 원초적으로 여성이자 작가가 역사적으로 너무 소수였고,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작가로서 살아남은 이들이 별로 없어서일 것이다. 성이 사라진 여자는 여자인가, 여자라면 어떤 여자인가. 나이가 든 여자들은 어머니라는 전형적 역할 이외에는 유령화 되어 있다. 그(녀)들은 현실에 편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최미향은 널리 공유되어 있지만, 정작 예술적 표현으로서는 드문, 말하기 힘든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이다. 




최미향은 나중에 남성 갱년기도 다루어볼 계획이 있지만, 자신이 당면한 문제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늦은 나이에 관련 학과에 입학도 하고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 살자’고 했지만, ‘하려고 하는데 할 수 없는’, ‘의기소침하고 작아진’ 내가 된 것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몸과 마음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려 한 이번 전시는 전체적으로 진중한 분위기다. ‘힘든 것도 슬픈 것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최미향의 사진에는 비장미가 흐른다. 각각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검정, 회색, 보라, 초록 등의 의상은 차분하다. 최미향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집중하는 절제된 선택들로 채워져 있다. 회색이나 검정 같은 무채색은 어둡고 묵직하며 초록이나 보라같은 유채색 또한 수동적이며 우울한 느낌을 준다. 색감에서의 전체적인 세련됨은 같은 느낌의 이면에 불과하다. 


사춘기만큼이나 격렬한 변환기의 몸과 마음을 감싸는 의상은 심란한 상황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대부분 오랫동안 그렇게 있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적인 자세 또한 그렇다. 그녀들이 속한 일상의 공간이자 표현의 무대는 단순하고 깔끔한 중산층 환경을 반영한다. 얼굴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기에 소품이나 자세의 역할은 크게 다가온다. 몸의 대표적인 부분인 얼굴 없이 무엇인가 설득력 있게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2대 3 비율의 프레임을 택함으로서 초상화의 기본 틀을 활용했다. 관객이 마주하는 화면에는 그 무엇이 있더라도 초상의 느낌을 주는 암묵적인 시각의 관습이 있다. 그것은 얼굴 없는 초상화도 가능함을 알려준다. 작품 속 작가 동년배의 여자들은 작가의 분신과 다를 바 없는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이들이다. 작품 속 그녀들은 특정 세대와 성별이 각인된 전형성을 가진다. 작가의 지인을 중심으로 여럿이 모델이 되었지만, 대부분 얼굴은 익명적으로 처리되었고 한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보편적 코드를 잡아내고자 했다. 




작품들은 관객에게 차분하게 말을 걸고 있지만, 감정 이입을 야기하는 설정이 많다. 취미로 시작된 사진들이 그러하듯, 최미향도 아름다운 대상을 먼저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면 풍경으로 관심을 돌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다. 작품들은 치열한 자기 응시의 장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사는 일상공간을 심리극의 무대로 삼는다. 작가는 연출자지만 모델들과의 소통도 중요시한다. 작품은 독백보다는 대화적 상상력의 결과다. 여성들이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소통하면서도 풀어가는 방식은 작업에도 관철되었다. 소품이나 자세, 의상, 색감 등은 메시지에 따라 섬세하게 조율되었다. 작품마다 강조점이 다른 세부가 드러난다. 각각 독립된 장면이라도 전시 전체가 같은 주제를 반향 하고 있기에 상호적으로 참조되어 읽혀진다. 사진이라는 무언극에서 사물의 역할은 크다. 작가는 상징적 어법을 구사한다. 가령 소품으로 등장하는 공은 여성의 반복되는 일상을 암시하기도 하고, 생명을 품는 여성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그 위의 여성 만큼이나 ‘낡은’ 소파에 누워서 작은 공을 굴리는 여자가 있는 작품은 공 굴리듯 한 일상의 담당자 여성을 상징한다. 작품 속 인물은 결혼한 만큼의 시간이 흐른 낡은 소파 위에서 변화 없이 돌고 도는 공을 들고 있다. 맥빠진 듯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치 천체의 운동을 관장하는 듯한 초월적 입장도 발견된다. 이상은 일상을 통해 가능하다. 가정이라는 재생산의 장이 있기에 인류의 역사가 가능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는 말이 있다. 알을 소중하게 들고 있는 익명의 여성은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상념을 표현한다. 최미향의 작품에서 생략된 얼굴을 대신해서 연기하는 것은 손이다. 손은 상징적 사물과 연결을 자연스럽게 한다. 전경에 산처럼 솟은 손과 벽에 붙은 십자가 상이 조합되어 나타난 작품은 누운 채 손을 모은 자세와 종교적 상징의 조합이 절묘하다. 손은 사진기의 각도 때문에 생략된 얼굴을 대신하여 그녀가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냐 대체로 작품 속 여자들은 위축되어 있다. 작품 속 상황들 하나하나가 위기의 여성들에 대한 징후들이다. 





목티 속으로 얼굴을 넣고 손으로 감춰진 얼굴을 감싸는 여자는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심리가 나타난다. 커피를 접시에 쏟고 있는 여자는 차분한 검은 색 의상을 입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정신 줄을 놓은 것같은 위기감이 있다. 벗어 놓은 옷은 빠져나간 몸의 흔적을 보여주며, 알맹이가 쑥 빠져나간 듯한 인간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 빈 껍질은 죽음이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다가온다. 베개를 꽉 움켜쥐고 있는 여자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다른 것에 고통을 전가한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결합이다. 한 편 그것은 갱년기의 주요 증상 중 하나인 불면의 밤을 자학적으로 표현한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여성이나 욕조 끝에 쓰러지듯 위태로운 발끝은 권태와 위기가 공존한다. 변신에의 의지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머리칼을 자른 여성이 손에 든 가위는 섬뜩하다. 몸은 변화의 바로미터다. 사춘기 때 몸이 생식을 준비한다면, 갱년기 때는 생식을 마감한다.  


생식이 주가 되지 않는 현대적 삶에서 여전히 생식 가능성은 중요한 가치라서, 이게 아니면 뭔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전환기이다. 몸은 물질일까 정신일까. 그것은 아직도 중요한 논쟁거리겠지만 적어도 호르몬은 물질과 몸을 매개하는 것이다. 호르몬의 변화가 야기한 몸의 변화 또한 미묘한 차원에서 드러난다. 가령 작가는 갱년기의 전형적 증상이기도 한 비만을 표현하기 위해 배 부분의 단추를 풀어 놓았다. 비만을 칼로 벤 상처럼 날카롭게 표현한 역설 어법이다. 검은 옷 사이로 살짝 드러난 뱃살이 칼날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은 두 손의 자세 때문이다. 작품 속 여성은 결코 비만은 아니지만, 신체의 균형이 흐트러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같은 호르몬의 지배 아래 있는 정신 또한 그럴 것이다. 호르몬이 아니어도 인간의 정신은 자유롭지 않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채 태어난 지배적 질서인 상징계는 부드러운 뇌 위에 건설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진실을 볼 수 없게 하는 상상과 환상이기도 하고, 위반 시 제재가 가해지는 법률이기도 하다. 각도에 의해 천정의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 쓴 왕관같은 여성은 위태로운 삶의 균형을 잡아 온 인생의 모습일 수 있다. 선인장 앞에 엎드린 여성이 마치 남근에 복종하는 여성처럼 보이는 작품은 사진이 각도의 예술임을 보여준다. 20여 점이 걸린 이 전시에서 유일하게 남자같은 모습이 있다. 실은 여자다. 남편의 양복 정장 입은 여성인데,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무색한 갱년기 여자의 몸매를 나타냄과 동시에 여자 가장 노릇을 하는 지인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여성은 가부장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대로 가정에서 평생 일하고, 이제 일터에서도 일한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인류학적 관점에서 가부장제 사회를 논한다. 그에 의하면 가부장제는 ‘여자들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치가 하락되고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회’이다. 


가부장제에 고전적인 정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물론 억압을 억압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더 섬세하게 작동된다. 몸, 특히 성은 권력의 주요 통로다. 서사의 중심이기도 하다. 피터 부룩스는 [육체와 서사]에서 성이란 단순히 생식 능력뿐만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아의식을 형성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과 금지의 복합물을 모두 의미한다고 말한다. 미시적 권력의 그물망과 관련된 작품 속 여성은 몸을 통해 침묵으로 말한다. 작가는 의상과 소품, 자세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중에서 거울은 가장 은유적이다. 작가는 B컷 작품들을 포함하여 거울을 여러 번 등장시켰다. 여성과 거울은 밀접하다. 여성은 보여지는 대상으로 수동화되어 왔고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를 늘 신경 쓰는 존재로 생각되었다. 남성/여성을 나누는 전형적인 이분법은 남성을 독립적 주체로 간주하고 여성은 관계적 존재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독립적 주체가 독단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쉽다. 여성이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그녀의 주변적 지위 때문이다. 



최미향의 작품에는 아버지-남편-자식을 넘어서 이제는 반려동물까지 담당하는 여성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사회적 태도이기도 하다. 거울은 주체/객체의 관계가 심리극처럼 펼쳐지는 장이다. 여성과 거울의 관계는 밀접하다. 여성이 작가적 입장을 통해 표현의 주체가 되자 거울을 상대화되었다. 얼굴 자리에 빈 거울을 놓은 충격적인 작품은 실재가 아닌 상상을 투사하는 거울을 비워 놓는다. 보여지는 여자가 아니라 보는 여자로의 변신이 일어나기 위해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상상의 무대는 치워져야 했다. 이 작품은 흰 벽을 보고 찍은 것으로. 포토샵 같은 별다른 처리를 하지 않았다.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 작가는 정교하게 연출할 뿐 거의 그리기 차원의 조작을 하지 않는다. 거울이 등장하는 다른 B컷 작품들은 옷을 입는 장면이 비춰지거나 얼굴이 살짝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거울과 엮인 여성의 억압적 상황이 드러난다. 


거울에 비친 여성은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거나, 눈물을 받아내는 것이다. 사진기 또한 일종의 거울이다. 백미러 대신에 카메라를 장착한 차도 있지 않은가. 고성능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은 그 자체가 거울로서 작동한다. 사진 작품 속의 거울이라는 장치는 거울의 메타적 차원을 예시한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은 ‘너 자신을 알라’의 보조자라고 말한다. 이는 모방의 수동적 거울이 아니라 변형의 능동적 거울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네가 참고하는 라깡이 말하듯이, 거울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이상적으로 그렇게 되어야할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즉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거짓말쟁이이며 동시에 훌륭한 조언자인 이 반사상의 이중성을 마주해야만’(보네) 한다. 새로운 단계를 위해 벗겨져야 할 상상의 단계로서의 거울은 내면 성찰의 자리가 된다. 최미향의 작품은 사진이라는 거울로 인간-여성-자신을 상징적 해부대에 올려 놓는다. 이 육체적 심리적 해부대는 잔잔하면서도 파장이 큰 서사가 짜여지는 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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