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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호 / 빈 서판(書板)으로서의 몸

이선영




빈 서판(書板)으로서의 몸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치호가 여태까지의 작업에 붙인 ‘floating’이란 키워드는 우선 현대인의 떠도는 삶을 떠올리지만, 그가 태어난 곳이 섬이고 도시에서 학업을 마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작업하고 있는 삶과 예술의 여정을 반영한다. 현대적 삶에서 부유(浮游)는 은유이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실제였다. 현대화의 격랑 속에서 고향을 떠난 이들이 대부분 돌아가지 못한 채 도시와 그 인근을 떠도는 것에 비한다면, 고향에 작업실을 짓고 작업에 전념하는 생활을 부유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지역의 작가 및 문화단체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면서 여수에서 비엔날레를 추진하는 등의 공공 활동 또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삶의 맥락을 짜 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하지만 작가의 외적 활동력이 작업의 중심을 잡아주지는 않는다. 예술적 작업 그자체가 표류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형식을 물신숭배적 기표(상표)처럼 가다듬으면서 생산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바다983233 500x80x80cm 복제노, 스틸 조형설치 1994



바다06833 120x120x250cm 폴리된 물고기,스틸,유리공 설치 1994



그의 주된 작업은 서양화로 분류되지만, 학부에서는 동양화를 전공했고, 1994년 첫 개인전 때는 설치미술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모태 언어로서의 동양화 기법은 서양화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지 않는 모노톤의 작업은 스며드는 먹의 느낌을 떠올린다. 회화를 주로 하고 있는 지금 보면 다소간 생경한 설치미술을 할 때조차도 노를 소재로 작업을 하는 등,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자기 정체성이 반영되거나 찾아가려는 방향은 명확했다. 1997년 이후 자화상 작업을 주로 했지만, 자신의 표현을 넘어서 인간이라는 보다 큰 맥락을 가졌다. 예전에는 신이나 자연과 비교되었지만, 이제 기계라는 또 하나의 강력한 비교 대상에 의해 ‘인간’ 이라는 기준은 다시 설정되어야 할 즈음, 이전 시대의 휴머니즘이나 주체성은 재맥락화된다. 1997년 [변색 동물] 시리즈에서는 암수 동체인 기이한 동물군이 등장한다. 그러나 동물 그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같이 인간사회에 대한 풍자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들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인간이 등장했을 때 변색동물의 화려한 색은 싹 빠져나갔다. 풍자적 동물을 거치면서 인간은 그 내부로부터 변모했다. 현실적 몸 형태를 토르소로 표현하거나 눈코입이 사라진 두상을 그리는 그의 작업에서 이상적인 의미의 인간은 희미하다. 토르소의 경우, 예술형식으로 정립된 표준적 도상보다는 말 그대로 팔다리가 잘려 나간 것 같은 모습이며, 한 개인을 특징짓는 가장 대표적인 신체 부위인 얼굴은 익명적이다. 사지절단형을 받은 것같은 몸통은 ‘인간’ 할 때의 그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돌처럼 묵직한 덩어리는 육체의 실재성에 가지는 작가의 관심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 실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불확실하다. 그의 몸은 표정 없는 얼굴처럼 불투명하다. 가장 확실한 듯한 얼굴이나 몸에 드리워진 불확실성은 실재와 관련된 작가의 화두이다. 몸은 실재의 위상을 대변해왔다. 몸은 말하지 않을 때도 말을 했다.




변색동물1 73 x 91cm acrylic colors on canvas 1997



변색동물2 91x73 cm acrylic colors on canvas 1997



변색동물3 91x73 cm acrylic colors on canvas 1997



물론 몸의 언어는 온전한 기관이 갖춰진 상태를 전제한다. 하지만 몸(=실재)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실재는 자명하지 않다. 라깡이 말하듯이 ‘실재는 언어의 이면에 위치한다’. 페터 비트머는 [욕망의 전복]에서 라깡에게 언어는 실재의 심연 위에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고 풀이한다. 페터 비트머가 해석한 라깡의 이론에 의하면, 파악할 수 없는 실재가 역사의 동인이며 이것이 합리성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합리성을 벗어나는 자신의 다름 때문에 실재를 한편으로 은폐하면서 동시에 드러내 주는 환상의 장소가 된다. 라깡의 이론에서 실재는 중요하면서도 배척된 어떤 것으로 파악되며 더 나아가 불가능한 것이다. 박치호의 작품에서 몸 이미지가 조각으로도 그대로 만들 수 있을 듯한 묵직한 덩어리면서 동시에 기관을 제거함으로서 불가능한 모습으로 제시된다. 몸의 실재성과 그 불가능성은 동전의 앞뒷면의 관계처럼 보인다.


페터 비트머는 실재의 비규정성, 비포착성, 논리를 벗어나는 이러한 장소를 지칭하기 위해 라깡은 존재와 구별되는 탈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마단 사럽도 라깡의 해설서 [알기 쉬운 자끄 라깡]에서 라깡의 실재계는 표현 불가능의 영역,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의 영역이라고 풀이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언어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실재계는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다’(라깡) 표현 불가능한 쾌락과 죽음처럼 말이다. 박치호의 작품에서 지워지거나 아예 그려지지 않은 눈코입은 망각이나 퇴행을 떠올린다. 토르소나 두상들은 인간 삶의 조건에서의 비극성이 의식되지만 잔인함의 연출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작가는 토르소나 두상이라는 미술에서의 오랜 관례를 동원해서 현실을 아름다움의 자리에 배치한다. 즉 삶에 치여 제대로 관리받지 못한 몸에 미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확연해진다.




자화상 65x 91 cm acrylic colorson canvas. 2010



oblivion 98x 130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20



Floating 80x100 cm acrylic colors on fabric. 2018



증명사진처럼 배경이 중성적이기에 흐트러진 몸의 선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두상이나 초상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작품에 보이는 정면성은 사진이 가지는 특성을 공유한다. 사진은 정확하게 재현하고 박치호의 작품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 아멜리아 존스는 [몸]에서 사진의 명백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자화상은 또한 상실과 부재의 냉혹한 기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사랑했던 사람, 지금은 없거나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의식은 그림의 의식적 가치를 위한 최후의 수단을 제공한다’(벤야민)고 인용하면서, 사진 초상이 부재하는 주체의 몸을 대신하고, 유일무이한 예술작품의 상실한 아우라를 대체하는 것을 본다. 롤랑 바르트 또한 사진의 존재했음이라는 특징은 시간의 흐름의 냉혹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했음을 기록하는 사진은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의 필멸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몸으로서의 사진은 살아 있는(신체) 동시에 죽어있다(물신)’(아멜리아 존스)고 했을 때, 박치호의 화면 속 얼굴이나 몸은 색바랜 사진의 미학을 공유한다. 그의 작품에서 지워지고 흐트러지는 기관들은 사진에서 부재나 죽음의 흔적을 보는 미학자들의 관점이 있다. 또한 아멜리아 존스는 후기 르네상스 미술에서 초상화가 부분적으로 데스마스크의 전통으로부터 나왔다고 지적하는데, 그것은 사라진 주체의 죽은 얼굴의 명백한 지표적 각인이라는 것이다. 심리적으로는 망각, 육체적으로는 죽음, 또는 죽음을 향한 퇴행을 떠올리는 박치호의 얼굴/몸 이미지는 대개 얼굴과 몸을 재현할 때 작동되는 이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작가가 이상/현실을 선/악으로 놓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박치호의 작품이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에는 신의 완전한 창조물인 인간에 새겨진 불완전성은 악의 징후로 간주되었다. 몸의 손상은 영혼의 손상과 동급이었던 것이다.




Floating 98x130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14



Floating 98x130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14



Floating 98x130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14



Floating 98x130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18



하지만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대 또한 극복되어졌다고 믿어지는 관례를 복귀시킨다.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듯이 ‘몸은 전쟁터’다. 화장품 판매자들이나 성형외과도 그렇게 주장할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물론이고 기술과 자본이 최후의 식민지인 몸으로 달려들고 있다. 몸은 불평등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인간사회가 악착같이 벌려 나가고 싶은 차이가 ‘자연스럽게’ 각인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박치호의 작업실에 켜켜이 놓여진 수많은 초상과 몸들은 그것들이 결코 초월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몸을 초월해야 한다는 주류의 사상이 있어왔다. 인간이 호명되는 것은 그러한 형이상학적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인간은 초월적이면서도 성스럽다. 수전 보르도의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은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 말하자면 무입장의 관점을 얻기 위해서 몸의 구체적인 위치성을 초월해 버리는 철학자들의 환상을 지적한다.


아멜리아 존스는 [몸]에서 그러한 환상의 대표자로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철학자 데카르트를 지목한다. 그에 의하면 데카르트적 사고는 인간이 자신을 체현된 존재보다는 논리적인 존재로 신과 동일시됨으로서 자신의 최고의 역할을 얻기 위해서, 몸이 초월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실체가 없고 무관심하고 권능을 부여받은 주체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개념은 미술사 담론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박치호에게 몸은 세상이라는 대양을 항해하는 데 있어 초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출발 지점이 된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는 특정한 관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수전 보르도) 박치호의 작품 속 우중충해 보이는 몸들은 우리 주변을 둘러싸는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가 화려해질수록 인간은 더욱 초라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어둡게만 표현되는 인간이라는 소재를 벗어나려고 애써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최후의 기준은 인간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간공간인간 130x162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12



시간공간인간 130x162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12



2013년 이후 등장하는 공간은 주로 작업실인데, 그 또한 그 안의 인간의 연장 선으로 이해된다. 공간은 그 안의 인간과 함께 할 것이다. 지배적 사회는 인간을 소비자로서만 인간으로 대우해 준다. 자신의 작품에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중심에 놓으면 놓을수록 인간의 실재는 불투명해진다. 어떤 작품들을 보면 얼굴이고 몸이고 거의 돌덩이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조각이 내재되어 있고 작가는 목조각 등을 통해 입체화시키기도 한다. 물론 차이는 있다. 작가에 의하면 그림은 페인트 롤로 계속 밀어서 살을 입혀가는 과정이지만, 조각은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무엇을 하든지 비슷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있지만, 덮고 끄집어내고 하는 과정은 망각과 기억이라는 연동되는 두 과정을 표현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일어난 국가 폭력 사건인 여순 사건의 발원지이기도 한 여수 출신의 작가는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덮히는 소소한 망각 뿐 아니라, 악의적 목적으로 덮이는 역사적 사건도 염두에 둔다. 뇌뿐 아니라 몸이 가지는 기억도 있다.


평론가 조은정은 ‘그의 토르소는 전체를 드러내지 못한 인물, 완성되지 못한 서사, 드러나지 못한 역사를 은유 한다’고 평가한다. 이 어두컴컴하고 단단한 덩어리에도 상처의 흔적은 선명하다. 험한 세상을 맨몸으로 굴러다녔던 이 ‘돌덩이’는 늙어감의 상징인 신체 불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여수의 시장통 등을 다니면서 관찰한 노동자, 할머니 등이 모델이다. 현장에서 스케치해 와서 작업실에서 그리곤 한다. 두상의 경우 눈코입, 전신상의 경우 두손 두발이 다 생략되어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표현에 필요한 구체적 기관들을 삭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질처럼 남은 덩어리 하나는 불완전한 상태로 말한다. 벙어리의 화법이다. 말하기 힘든 상태에서 발설되는 말은 그만큼 절박하다. 말을 위한 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처받고 기억하는 몸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인생의 비극을 연기하는 자인 인간이 나타나지 않은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시간공간인간 130x162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12



시간공간인간 130x162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13



1994년 첫 개인전 [노좆바다] 전의 바다는 도시인들이 보는 휴식과 관광지로서의 바다가 아니다.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삼는 이들이 몸을 던져 일해야 하는 장소이다. 배의 부속기구가 복제되어 설치된 작품은 프로펠러가 달려 있고 날카롭다. 작가의 회고에 의하면 조업 중에 이러한 기계에 휘말려 손발이 잘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얼마 전 여수에서 요트에 붙은 따개비를 떼어내기 위해 작업하던 중 익사한 청년 실습생 사건을 보니 민초들이 안전장치 없이 일해야 하는 것은 수십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 박치호는 이 전시에 대해 ‘작가로서 첫 항해와 같은 전시였다’고 평가한다. 1997년 변색동물 시리즈에 잠시 몰두하다가 현재 작업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두상(고뇌)’ 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1999년 이후다. 두상은 자화상의 일환으로 그려진 것이며, 이후 ‘현대인들의 삶 속에 자리한 개인들의 고독한 감정들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후 토르소 작업으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원은 그의 토르소가 일종의 얼굴임을 말해준다.


수많은 두상 시리즈와 수많은 토르소 시리즈들이 놓여있는 그의 작업실에는 합체되지 못한 채 각자 분열 중인 단편들로 다가온다. 한편 2013년부터 시작된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이라고 붙여진 시리즈들은 얼굴과 몸이 붙어있을 뿐 아니라 손과 발도 있는 나름의 완전체다. 물론 여전히 얼굴은 지워져 있지만 어떤 공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것, 그가 작가 자신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작업실 속의 작가 모습이다. 두상이나 토르소 시리즈의 배경과 달리, 추상적이지만 원근법도 적용되어 있다. 정면성 등 몇 가지 각도에 한정된 두상과 토르소 시리즈와는 달리,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거나 이젤에 붙어서 작업하는 모습 등 여러 정황이 포착된다. 인간과 그 연장인 공간은 인간이 어떤 작업에 몰두하는가에 따라 배경도 달라질 것이다. 수많은 두상과 토르소를 그려왔던 그의 작품의 맥락에서 보자면 짝을 찾은 기관들처럼 안정적이다. 그 존재가 놓인 장소가 작업실이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어떤 인간은 작업실에서만이 전체가 될 수 있다. 그가 바로 작가이다.




oblivion 98x 130 cm acrylic colors oncanvas. 2020



oblivion 98x 130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20



oblivion 98x 130 cm acrylic colors on canvas. 2020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드물게 남아있는 자기주도형의 실천이 바로 예술이다. 박치호 또한 한동안 작업을(정확히는 작품발표를)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floating’이라는 다소간 부정적 어감의 키워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손발이 묶인 익명의 세월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 주제가 다름 아닌 인간이기에 삶에 보다 충실했던 기간들 또한 작업의 밑바탕이 되어 주었고, 201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전시회 활동을 하는데 공백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14년 쿤스트독에서 토르소를 중심으로 전시한 [실체라는 부유] 전은 ‘실체’와 ‘부유’라는 자못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념을 동격으로 제시했다. 대개 실체는 부유하지 않고, 부유하는 것 또한 실체화되지 않는다. ‘실체라는 부유’란 현실과 허구라는 대립 쌍처럼 서로를 포함한다. 이데올로기나 기만, 좋게는 상상 등은 현실에서 허구가 차지하는 몫이 상당함을 알려준다. 그 반대도 사실이다.


목 위와 다리는 화면에 의해 자연스럽게 잘려있지만, 팔을 그렇지 않은 토르소들은 주요 기관들의 상당 부분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중한 느낌이다. 단지 군살이 많이 붙어서도 색이 어두워서도 아니다. 시장통 등 삶의 현장에서 찾아낸 현실 몸매들은 삶의 무게를 담고 있는 주머니처럼 축 처져 있다. 대개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자신을 보살피지 못한 중년의 몸매가 그렇게 생겼다. 중력에 강하게 반응하는 몸체들은 실체감이 있다. 하지만 그 삶이 방향성을 잃은 풍선같은 것이라면? ‘실체라는 부유’라는 전시 부제는 부유하는 삶의 보편성, 그리고 실체의 표류 등을 포괄한다. 연장선에서 열린 2015년의 ‘Floating’ 전에는 단어 하나가 빠졌다. 두 단어가 서로를 포함한다면 동어반복적인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가벼운 것도 무거운 것도 다 부유한다.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는 정보화 사회에서 현실 전체가 경량화 된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된다.




oblivion. 목조각, acrylic on canvas 회화설치 2020 여수국제미술제 전시전경



2020년 행촌미술관과 박치호 스튜디오에서 동시에 공개된 망각 시리즈는 두상이기보다는 얼굴이라는 느낌이 더 강한, 화면과 보다 가까와진 형태가 두드러진다. 대개 자신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면적 안에서 복잡미묘한 메시지를 송수신하는 얼굴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작가는 그 표면을 화면에 밀착시킨다. 눈 코 입은 없지만, 거기에 있는 자가 젊은 사람인지, 여성인지, 심지어는 잘생긴 사람인지도 추측할 수 있다. 아무리 희미해도 기어코 그 표정을 읽고야 마는 관객에게 모더니스트들이 말하는 화면의 평면성 따위의 언어유희는 자리 잡을 수 없다. 빈 얼굴은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매번 다시 써지는 빈 서판(書板)과도 같은 곳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몸처럼 ‘문화에 의해 씌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백지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수전 보르도는 그러한 관점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택하는 의미대로 몸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포스트 모던적 견해가 몸의 물질성을 말살해 버린다고 한다. ‘현대 영화들은 몸의 유연성과 해체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수전 보르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창조’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SF 영화는 신화와 종교적 담론이 지배적이다. 물론 당대에 지배적인 한 줌의 현실성과 함께 말이다. 몸이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에, 몸과 텍스트를 연결짓는 사고는 설득력이 있다. 피터 부룩스는 [육체와 서사]에서 육체가 과거와 미래에 의해, 즉 시간적으로 구조화된다는 사실은 육체의 서술에 있어서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본다. 언어중심주의, 또는 언어지상주의라고 할만한 관념적 사고와 달리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터 부룩스가 말하듯이 고통과 죽음은 결코 텍스트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무게감을 담고 있는 박치호의 작품 속 지워지고 잘려진 얼굴과 몸은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자리를 가리킨다. 다시 써지기 위해서 기존의 것은 지워져야 한다. 기억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기억과 연동되는 망각은 인간이 예술작품이나 자연처럼 거듭해서 해석하고 다시 씌여져야 하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것은 작업재개 이후 줄곧 인간 존재에 매달려 왔던 작가에게 중요한 문제다.


출전; 공립미술관 추천작가-전문가 매칭 지원 사업(국립현대미술관-전남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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