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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미 / 타자들과의 공명

이선영

타자들과의 공명

 

이선영(미술평론가)

  


필름포럼에서 열린 정경미의 [흘려보내는 자: 영원의 돌림노래]는 특별한 사람의 노랫소리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전시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니고, 벼룩시장에서 어렵게 구한 카세트를 플레이하면 들을 수 있다. 굳이 그런 낡은 기기를 사용한 것은 노래의 주인공이 90세가 넘은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전시 안내문처럼 ‘그 목소리에 담긴 세월을 들어보실래요?’라는 제안이 있다. 어릴 적부터 가수가 꿈인 할머니가 그 꿈을 꾸면서 끼고 살았을 기기는 낡은 카세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날이 업그레이드되는 기술환경이지만 카세트는 CD나 mp3가 사라진 것보다 더 오래 버텼다. 정경미의 작품 속에 만다라처럼 중심을 잡아주는 검정 플라스틱 LP 판들도 마찬가지다. 이 카세트를 젊은이들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를 것이다. 작가가 굳이 이런 고물로 약간의 문턱을 제시한 것은 작가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던 한 시대의 인물과 만나는 작은 의식(儀式)일 수도 있다. 




필름포럼 전시장면 2021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이 90에 [평화]라는 음반을 통해 가수로 데뷔한 길원옥 할머니다. 그 할머니가 특별한 것은 위안부로서의 고통스러운 삶과 그 이후 50 여 년 간의 긴 침묵 이후에 전쟁 반대를 외치는 여전사로, 가수로 다시 탄생한 이력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위안부 문제가 수면에 드러난 이후 여러 방식의 접근이 이루어졌지만, 정경미의 작품이 특별한 것은 역사적 사연이 있는 소리를 조형적 어법으로 풀어낸 방식 때문이다. 작가는 ‘죽음에서 살아난 한 사람의 삶의 노래는 누군가를 살리는 영원의 돌림노래가 되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고 도도히 흘러간다’고 말한다. 전시장에 비치된 카세트는 그 노래를 듣고 떠오르는 단상이나 이미지를 그리는 기회를 제공하며, 전시된 작품에도 그러한 기회를 한껏 발휘한 결과물들이 포함된다. 특히 천진한 아이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이런 판이 벌어졌을 때 편견 없는 아이들이 가장 잘 참여하기 마련이지만, 길원옥 할머니가 일본군에 끌려갔던 나이가 불과 12살이었음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른이라 할지라도 일반인들은 조형 어법은 아이와 다를 바 없는데, 그것이 놀이터부터 난장에 이르는 자유로운 화면을 만든다. 작가가 판을 깔아주고, 누군가 공조하며 여기에 최소한의 가필을 통해 완성되는 작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전시 부제에 포함된 ‘돌림노래’라는 키워드는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는 대화적 관계를 상징한다. 만약 독백의 방식이었다면 무겁고 심란할 수도 있는 주제다. 미셀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성적 담론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탐색한 후 내린 결론처럼, 고백이라는 과정은 권력적이다. 내밀한 체험을 온통 고백하라는 요구는 성을 억압적인 것으로 만들기 보다는 생산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푸코의 예지에 찬 주장은 오늘날 미디어라는 나르시시즘의 거울에서 끝없이 생산/소비되는 고백의 상품화에서 그 예가 찾아진다. 자기 선전의 또 다른 방식이랄까. 누군가 주체가 돼서 타자를 재현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필름포럼 전시장,카세트 플레이어



관객참여 작품



자기표현과 연결되어 이해되기 쉬운 예술작품 또한 대부분 자기 안에 갇혀있다. 타자를 만나도 동일자로 환원한다. 타인에게서 자기만 확인한다. 정경미는 기가 막힌 사연의 주인공을 소재로 하면서도 독백을 대화로 선회한다. 대화적 상상력을 중시한 것은 작가가 ‘나 중심주의’를 현대문명의 병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강한 자기애와 공격적 성향의 밀접한 관련을 지적하곤 한다. 할머니의 말보다는 노래를 먼저 접하게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래는 말보다 모호하지만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그것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지는 것은 아직도 위안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지어준 고향, 평양의 밥 냄새가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할머니가 역사의 악몽 속에 빠졌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이 세상에 전쟁이 있는 한 여성의 운명은 반복될 수 있다. 히틀러같은 독재자들은 남성은 전방에서 여성은 후방에서 싸운다며 여성을 출산 도구로 삼았다. 

세계대전만 해도 먼 역사 같지만, 요즘의 뉴스에서도 전쟁과 여성의 불행한 관계를 찾아보기는 쉽다. 얼마 전에 독일의 람슈타인 미군기지에 머물고 있던 1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한 달 사이 2,000명이 임신했다는 소식 (mbn 뉴스 10월 4일자)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종교와 국가 등 큰 힘이 맞부딪힐 때 받는 여성의 고난을 알려주는 단적인 사건이라고 하겠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작업한 것에서 추린 이번 전시의 출발이 되었던 것은 몇 년 전에 참여한 그룹전이었다. 2017년 세마창고에서 열린 [다시 꽃을 보다] 전이 그것인데, 작가는 전쟁과 여성을 테마로 다룬 이 전시에 참여하면서 멀리서만 봤던 위안부에 대해 깊이 탐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회귀는 아니다. 작가는 미래 또한 중시한다. 작가는 재현적 어법으로 어떤 기억이나 주장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는 마치 선문답처럼 화면에 꽃을 던질 뿐이다.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 생명수, monotype, drawing on arches  , 75x53cm, 2019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사랑합니다. 75x53cm,  2021



 흘려보내는 자-합창,75x53cm,2021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아리랑 1 , monotype, drawing on arches  , 75x53cm, 2018



흘려보내는 자:절규 ,monotype, drawing on arches  , 75x53cm, 2018



꽃이라는 평범하지만 보편적인 도상은 읽기와 듣기, 참여하기 등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다. 다시 피어난다. 정경미의 작품에 아이들이 참여가 눈에 띄는 것도 미래에 대한 비전과 관련된다. 생명 또한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으며, 불길한 지표들은 매일의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한 개인의 기구한 운명을 넘어서 세상을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고 죽음에 가까운 침묵의 세월을 거친 후 다시 탄생한 인생 여정이 종교적 서사와도 비슷하다. 작가는 ‘기억하고, 읊조리고 생각하라.(시 143:4-6)’는 종교적 메시지를 강조하면서, ‘살아있지만 죽은 자처럼 살았던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이 생명인지,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들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죽음으로서 사는 역설적 서사는 희생양의 신화에 선명하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모든 문화를 초월하여 집단적 폭력의 도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모든 신화는 실제의 희생물에게 행해진 실제의 폭력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아주 원시적인 제의에서는 항상 점차 어떤 희생물에게로 집중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 희생물에게 달려드는 한 무리의 무질서한 집단이 있다. 실제로 제의 속에서 신봉자들은 그들 선조들의 집단적 폭력을 되풀이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 폭력을 모방한다. 대체로 전쟁은 ‘---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고 이때 타자화된 이들이 주요 희생자가 된다. 프로이트는 사회의 기원에 대해 성찰하면서 ‘집단, 역사, 언어의 탄생에 범죄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원초적 범죄를 역사를 통해 끝없이 모방되기에 그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문명의 과제가 될 것이다. 작가가 전시라는 공적인 기회를 통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엄청난 사회적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일단 할머니의 노랫소리에 화답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대화적 방식은 큰 부담이 없다. 시작은 소박해도 울림은 크다.



흘려보내는 자:내 맘속에 이뤄지니,75x53cm, pigment print on fineart paper, 2021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 무엇을 주었는가?53x38cm ,monotype  , drawing on arches 2017  꽃물연작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 무엇을 주었는가?53x38cm, monotype, drawing on arches 2017 꽃물 연작



워낙 많은 작품이라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작가는 관객들이 쓴 단어 중 가장 많은 것이 ‘사랑’이었다고 전한다. 12세에 일본군에 끌려갔던 소녀의 사랑은 짓밟혔지만, 이후 할머니가 상처를 극복하는 모든 과정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노래에 대한 사랑, 양아들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등이 포함되지만 넓게는 다 사랑이다. 사랑은 소리라는 기표를 통해서 흘러나오며 이미지와 문장 등의 반응을 끌어낸다. 작가는 꽃이라는 소재의 변주를 통해 할머니의 ‘사랑’을 표현한다. 작가가 접해본 길원옥 할머니는 이제 약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는, 미운 사람 없다’는 성녀 같은 인물이다. 처음부터 성녀는 아니었을 것이고, 죽음과도 같은 심연에서 부활했기 때문에, 이 극적인 전환이 평범한 사람을 성녀로 만들었을 것이다. 특히 소리는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주요 통로로 주목된다. 


음악사에서 최초의 작곡가로 평가되는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1098–1179)으로 알려진 베네딕트회 수녀가 바로 성녀다. 그녀가 어디서 영감을 얻었든, 들어야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성스러움과 소리의 연결은 종교를 포함한 여러 신비체험의 중심이 된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많은 학자들이 인간의 언어는 본래 일종의 노래였는데 그 발전과정에서 말과 음의 언어로 나누어졌다고 추정한다. 굴곡진 인생만큼이나 할 말이 많은 화자는 언어의 원초적 형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초적 언어로서의 소리는 성자들의 전기에 많이 등장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시각과 청각을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시각적 관점의 세계는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으로, 그러한 세계는 공명적인 다양성을 낳는 구어(口語)와는 먼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음향적, 혹은 청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 방향적인 공간성을 중시한다. 




흘려보내는 자-상흔,pigment print on fineart paper, 75x53cm,2021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 무엇을 주었는가?53x38cm, monotype, drawing on arches 2017 꽃물 연작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 무엇을 주었는가?53x38cm, monotype, drawing on arches 2017 연작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 무엇을 주었는가?, 53x38cm,monotype, drawing on arches 2017 연작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 무엇을 주었는가?-상한 마음,53x38cm, monotype, drawing on arches 2017



마샬 맥루한은 정보혁명 이후의 현시대가 동시성(simultaneity)이라는 특징을 가지며, 그것은 구어적 그리고 청각적 양식으로의 회귀를 야기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다시 선호되고 있는 지난날의 ‘순간의 신성’은 구어적 ‘주술’에 그 뿌리를 둔 사회를 말한다. 가장 원시적이었던 사회는 이 시대처럼 청각적 공간이 동시적 관계의 장이 된다. 소리는 타자의 현존을 일깨우며 사라진 공동체를 호명한다. 정경미는 작품 소재인 꽃은 정확히 재현되지 않는다. 시각중심주의의 결과인 선적 명확성이 부족하다. 어떤 작품은 그냥 얼룩으로 나타날 뿐이다. 시간은 그 얼룩조차도 희미하게 만든다. 마치 사라지는 소리처럼 말이다. 작품들은 꽃의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객의 참여 또한 소리처럼 다중심적이다. 시각적 관점은 선명하지만, 소리는 여러 곳에서 들려온다. 더구나 작가가 제시하는 것이 돌림노래라면 청각적 미디어에 내재된 다중심성은 극대화된다. 


마샬 맥루한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보기 위한 시점이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이, 어떤 특정한 소리를 듣기 위한 귀는 없다고 지적한다. 구술문화의 특징은 나와 공동체의 분리, 사고와 행동의 분리, 행위와 텍스트의 분리, 주체와 객체의 분리 등이 없다는 것이다. 마샬 맥루한은 지구촌 시대가 선형적인 시각적 공간에 대비되는 청각적 공간(acoustic space)이 요구된다고 본다. 그것이 진정한 다문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경미 또한 다문화 관련 공동체 활동을 열심히 해왔음을 덧붙이고 싶다. 그녀의 작품에 깔린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synesthesis) 또한 ‘다섯 개의 감각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상태’(마샬 맥루한)를 말한다. 꽃, 즉 식물은 동물과 달리 스스로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정경미의 작품 속 꽃은 명백히 사람을 떠올리며, 짓밟히고 피 흘리고 비명을 지른다. 그렇지만 재생한다. 화면 한가운데 검은 LP판 모양의 도상은 소리의 시각화를 말하면서도 식물적 존재의 순환하는 주기와 공명한다. 




영원의 돌림노래:이야기 꽃1 monotype, drawing on arches, 2019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감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75x53cm, pigment print on fineart paper, 2021



예전 작품에서는 판의 소리골을 따라 노래 가사 같은 것이 둥글게 배치되기도 했다. 카페이자 전시장인 필름포럼의 한 면을 차지한 4개의 작품에서 3개가 레코드 도상이 등장하며, 그 중 하나에서 물이 폭포처럼 흘러나온다. 몸의 모든 구멍들에서 터져 나오는 그 무엇처럼 강력한 정동(情動)을 내포한다. 나머지 섹션들에도 레코드 판 이미지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서로 다른 벽에 걸린 작품군들 끼리도 돌림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3개의 벽면에 나뉘어 걸린 것은 세 가지 시리즈 13점이다. 꽃이 피를 토하며 절규하는 듯한 꽃물 시리즈, 할머니의 노래와 관련된 음반 시리즈, 그리고 놀이터처럼 펼쳐진 아이들과 함께한 작품군이다. 섬유질을 많이 포함하는 질긴 판화지는 물에 강해서 물에 담그고 프레스로 찍고 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다. 대부분 꽃을 눌러서 만든 꽃물이 이미지(때로는 바탕)의 출발점이 된다. 


작품 [흘려보내는 자-생명수](2019)는 고풍스러운 매체인 LP 음반 가운데에서 터져나오는 것은 생명수다. 튀는 물방울이 마치 꽃모양 같다. 마치 벙어리가 처음 말문을 튼 듯한 폭발적 에너지는 소리의 주인공의 인생사와 연관이 있다. 작품 [흘려보내는 자-합창]에서 관객이 그려놓은 다양한 꽃송이들은 선창에 대한 답가이다. [흘려보내는 자-I hear you!](2018)는 헤이그의 관객들이 색색의 펜으로 문장을 적어넣었다, 그 중 ‘I HEAR YOU!’ 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당신을 본다보다 당신을 듣는다가 훨씬 우호적이다. 시각예술이 타자와 교감하기 위해 시각성보다는 청각성에 더 민감해야 하는 이유다. 레코드 도상이 등장하는 작품의 경우 뭔가 축제처럼 확산하는 이미지도 있지만, 음반 안팎에 배치된 꽃 얼룩 일부는 시커멓게 썪어 가기도 한다. 죽음에 가까운 고독과 고통 속에서 건져진 소리다. 레코드판의 골을 따라 노랫 가사를 옮겨적은 듯한 이미지는 레코드의 동심원 구조가 소리를 우주로 확산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I hear you! 헤이그,75x53cm ,pigment print on fineart paper, 2021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상흔,75x53cm ,pigment print on fineart paper, 2021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눈물꽃,75x53cm ,pigment print on fineart paper, 2021



플라스틱 레코드판의 원형 이미지가 다소간 기하학적 안정감을 준다면, 꽃은 아름다우면서도 다치기 쉬운 생명체의 상징이다. 꽃은 존재의 아름다움의 정점을 상징하며, 열매와 씨앗이라는 미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정경미의 작품에서 여러 꽃에 점점이 박힌 붉은색이나 흘러내리는 붉은 물감은 선혈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꽃이라는 은유적 도상이 등장하는 것은 고통의 재현이 또 다른 고통을 낳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성찰한다. 그에 의하면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가지고 있다. 흔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고통이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핏물처럼 붉은 체액을 흔적으로 남기는 꽃물 또한 직접적 재현 못지않다. 살아있는 것이 얼룩으로 변하는 것 또한 폭력이다. 


수전 손택은 시몬느 베이유의 [전쟁에 관한 성찰]을 인용한다.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 정경미의 작품에는 노랑과 보라 계열이 같이 등장하는 것이 자주 보이는데, 이러한 조합에 추가되는 붉은색은 화면의 악센트같은 역할을 한다. 천진함과 신비함, 그리고 격렬함의 조합이다. 내장기관이 터져 흘러내리는 듯한 얼룩 위에는 꽃이 실루엣으로 표현된 작품이나 인체 실루엣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려있고, 옆에는 꽃다발이 있는 작품은 상처의 치유 또한 꽃일 수 있음을 말한다. 지천에 널린 꽃을 많이 활용하는 작가는 실제로 꽃을 으스러뜨려 발색한 형태 그대로이거나 물감을 가필하는 식으로 작업한다. 작품 [흘려보내는 자- 상흔](2017)은 연한 얼룩 위에 붉은 얼룩이 있는 꽃송이들 배열되어 있는데, 자연물을 사용한 색은 변색이 되며 이는 아무는 상처처럼 시간의 경과를 느끼게 한다. 작품 [흘려보내는 자-눈물꽃](2017)은 밝은색 꽃다발과 붉은 흔적이 대조된다.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애통,75x53cm ,pigment print on fineart paper, 2021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화관,75x53cm ,pigment print on fineart paper, 2021



작품 속 꽃은 부분으로 또는 전체로, 또는 여러 종과 여러 상태로 나타나지만, 붉은 부분은 상처를 떠올린다. 작품 [흘려보내는 자-애통](2017)는 봉오리와도 같은 심장을 화면 한가운데 배치했다. 기관 밖으로 나온 붉은 선들이 혈관처럼 보이고. 심장은 자체의 생명을 가진 듯 어디론가 간다. 이번 전시에서 피 흘리는 심장은 맨 왼쪽에 걸려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뭔가 읽는다면 상처는 노래와 축제로 아물어질 것임을 예시한다. 규격 판화지를 활용한 정경미의 작품은 글도 있어서인지 삽화가 있는 책의 낱장처럼도 보인다. 어디서부터 봐도 상관없는 책장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시하면서 서사가 구축되는 것은 변함없다. 이전의 전시장 설치 장면을 보면 같은 규격의 작품들을 나무 액자를 해서 죽 이어서 붙이는 방식이 많이 사용되었고, 전시장의 상황에 따라 위아래 줄도 활용한다. 또한 작가는 관객이 참여하는 종이 또한 여러 개를 연결하는 개방형 구조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노래를 듣고 ‘마음의 울림소리가 떠 오르면’ 준비된 도구로 꽃물 드로잉지 위에 자유롭게 쓰고 그리라는 것이다. 


[흘려보내는 자-영원의 돌림노래](2021)에는 ‘할머니 힘들겠었어요’같은 공감 메시지는 물론, 위기의 몸이 안녕한지에 대한 ‘코로나 뿌셔!’ 같은 단어들도 보인다. [영원의 돌림노래 길고 긴 세월](2021)에는 ‘할머니 멋있어요!!’라는 낙서와 아이들의 영원한 로망인 공룡 등의 이미지도 보인다. 작가는 관객들이 참여한 복잡한 화면에서, 각각의 참여를 소리로 간주한다. 그것은 돌림노래와 합창으로 들려온다. 작가의 독백을 대신하는 것은 대화적 상상력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끝없이 흐르는 사랑의 이야기꽃이 지천에 펼쳐지기를’ 바란다. 모든 예술작품이 소통을 지향하지만, 정경미의 경우 고통을 매개로 한 소통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 위험사회의 유일한 대안이 될 공동체가 다시 의식될 수 있다. 경계를 넘는 대화는 소통과 치유를 넘어 모두가 어우러지는 축제를 향한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와글거리는 소리는 이제 한 영혼과 몸을 옭아매는 억압적인 비밀은 사라졌음을 말한다. 또는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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