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민재영의 생활의 발견

이선영

민재영의 생활의 발견

  

이선영(미술평론가)


  

1998년 첫 개인전 이후 이번이 15회 째인 민재영의 전시는 지난 20여년 간의 시간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전시된 작품들은 긴 계단으로 이어진 지하공간에 자리잡은 90년대 학교 작업실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초기작부터 전시 개막 직전까지도 그린 현장 벽화까지 선별된 것들로 넓은 미술관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다. 준비기간이 길지 않았던 터라 작가의 평소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전시라고 생각된다. 2017년 가을 영은미술관 개인전 이후 근 몇 년 간은 부친의 병고로 3번(2018, 2019, 2020)이나 되는 개인전 기회를 포기했다고 하니, 원래 계획대로라면 첫 개인전 이후 거의 1년에 한번의 개인전을 한 셈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빈칸도 곧 복구되리라 본다. 민재영은 꾸준히 열심히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이러한 이력을 들추는 것은 작가의 일상이 온통 미술로만 엮여 있었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작가에게 개인전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해를 기억해도 거의 전시 준비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 아니겠는가. 




민재영_생활의발견_성곡미술관 1관_1층 전시 광경(사진 출전; 성곡미술관)



먼저 삶이 있고, 이후에 작업이 있는 듯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작업이 삶이 되는 상황을 민재영 또한 겪는다. 예술가들에게 전형적인 이 상황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대부분의 인생 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의 관성은 퇴직이라는 그동안 일상의 단절의 상황에서도 출퇴근하듯이 나가야 하는 어떤 부류의 예에서도 찾아진다. 인간은 생각보다 그리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상은 탈출하고 싶으면서도 삶의 기조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진실이다. 일상생활을 철학의 단계까지 올려놓은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고찰처럼 현대는 일상이 지배한다. 민재영의 경우 일상탈출을 비롯한 변신에의 몸짓도 없지 않았지만, 개인적 경험이 어떻든 간에 작업에 어떤 기조를 유지하려는 성향이 느껴진다. 전시장 한 켠에 작업 과정을 찍은 영상이 보여주듯이, 연하게 그려 넣는 가로줄처럼 기본 좌표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좌표는 모든 것을 환원하는 잣대가 아니라, 미세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 


민재영의 작업임을 알아볼 정도로 확립된 이 조형 요소에 대해 작가는 ‘작업 들어가기 전에 먼저 모필로 약한 농담의 수묵 가로 선을 그은 후에 스케치를 들어가는데, 이것은 이후에 무수히 겹쳐질 획 선의 방향을 어느 정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필법의 기본단위인 가로 중봉 선과 채색의 필획을 중첩함으로써 재현하고자 하는 화면에서 대상의 유동성과 구축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2021.9.2일 진행한 성곡 미술관에서의 인터뷰 참고) 하지만 선은 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초기작부터 모아 놓은 작품들에는 수십 년을 전시를 준비하거나 다른 작가의 전시에 구경 가거나 짬을 내서 강의를 하는 일상으로 채워진 생활의 단면이 반영되어 있다. 민재영은 자신의 일상만큼이나 대중의 일상을 소재이자 주제로 한다. 그 자신이 대중의 일원이기도 해서지만, 이러한 평범한 선택은 특별하다. 예술은 늘 특이한 것만을 다루려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민재영_내일이 오기 전 Before Tomorrow Comes 한지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100×136cm 2021



하지만 작가는 미학 용어라면 전형이라고 할만한 것에 관심을 가진다. 전형은 리얼리즘 미학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민중운동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한국의 1980년대에 전형은 과거와 현재의 억압을 끊고 미래사회로의 진보를 향한 전망을 가진 계급을 지칭하는, 다분히 문화운동적인 맥락에 있었던 관념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이미 80년대 말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했던 전형의 미학은 이후 본격 자본주의 문화의 개화라고 할만한 90년대들어서 문화의 지배종이 된 대중문화의 상투성과 조우했다. 90년대에는 민중문화와 키치가 한 배를 탔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 체제에 대한 공통의 반발을 보여주는 이러한 공조는 포스트 80년대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불, 최정화 등 개별 작가들의 약진 외에, 이러한 경향은 1997년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 [일상, 기억 그리고 역사: 해방이후 한국미술과 시각문화](큐레이터 김진송)에서도 집약된 바 있고, 이후에도 ‘한국적 팝아트’ 등으로 명맥을 이었다. 


얼마전 많은 공감을 받았던 소설 [82년생 김지영]으로 나타난 바와 같은 ‘XX 년생 OOO’하는 식으로 호명하는 대표 인물을 찾으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 표준은 선거라든가 마케팅 전략 같은 중차대한 계기의 중요한 지표로 정치경제학적으로 중요하기도 하다. 무엇을 보편으로 볼 것인가는 세계관에 따라 다르다. ‘1968년생 민재영’의 경우 작품 속 무리를 지은 인간상들은 80년대라면 소시민이라고 불리웠을 그런 무력한 모습도 있는 대중에 가깝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어떤 가치평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있음 그대로지만, 육안이 아닌 미디어에 의해 걸러진 듯한 모습은 철저한 거리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출퇴근 시간에 쫒기는 평균적인 삶을 사는 대중들의 모습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평균이란 무엇인가? 좀 더 중립적인 과학의 가설을 참고해보자.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사회가 존재하고 보존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평균적인 행동이 정당한 행동’이라는 사회물리학의 가설을 소개한다. 




회의실 Meeting Room 한지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57×100cm 10점 2021



케틀레의 사회물리학은 평균인의 개념을 근거로, ‘그 시대의 평균에 해당하는 사람의 특징을 모두 갖춘 사람은 모든 위대함, 아름다움, 선함을 갖춘 것처럼 보이게 된다’고 한다. 봉건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근대는 보편성의 파토스로 특징 지어진다. 칸트는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대표적 철학자이다. 칸트는 [세계주의적 관점에서 본 보편적 역사의 개념](1784)에서 ‘아무리 변덕스러워 보이더라도 현대 세계의 숨겨진 규칙성이라는 보편적 질서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계의 일부일 뿐이다’(버클)라고 인용한다. 필립 볼에 의하면 버클은 사회통계학적 규칙성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케틀레와 마찬가지로 출산, 사망, 범죄, 자살, 결혼의 빈도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세부적인 사항들을 크게 다르지만, 임계 행동은 똑같은 궤적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보편성이라고 부른다. 필립 볼은 겉으로는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규칙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감명받는다. 


그는 기체의 불규칙적인 운동을 추적하던 맥스웰의 이론을 인용한다. 맥스웰은 ‘평균의 규칙성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규칙성’을 만났다고 말한다. 통계학적 방법으로 미시적인 혼동에서 질서를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맥스웰이 정립한 기체 운동론은 물리학은 물론 사회학에도 통계적 방법론을 사용하게 했다. 즉 ‘움직이고 있는 엄청난 수의 거의 똑같은 대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아니라, 평균 움직임과 평균으로부터 벗어나는 정도’(필립 볼)이라는 뜻이다. 통계학에서는 확률의 개념을 사용한다. 필립 볼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사회현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통계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과학의 객관성을 흔들거리게 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도 낳는다. 평균 또한 통계적 개념이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평균에 딱 떨어지는 인간이나 현상을 만나기는 힘들다. 평균은 추상이다. 민재영의 작품 한 축이 추상이듯 말이다.




A동 Studio A Bldg._한지에 수묵채색_130x380cm_2017_영은미술관 소장(2018)



중첩된 색 선들 때문에 멀리서 봐야 더 정확히 보이는 작품은 동시대성이라는 공기 안에서는 발견하기 힘들지만, 시공간적 거리를 두면 비로소 변별점이 드러나는 삶의 양상을 표현한다. ‘생활의 발견’을 목표로 해왔던 작품 속 상황은 특히 시간의 축을 경과하면서 (반복 속의) 차이를 벌려 나간다. 가령 요즘 저렇게 지직거리는 듯한 노이즈가 많은 화면을 만나기는 어렵다. 한때 보편적이었던 것이 기능을 잃고 고고학이나 예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예술이 특별해야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예술이 일상인 그런 삶 말이다. 정년이 없는 작가에게 자기에게 맞고 그래서 잘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예술작품은 비록 현대의 분업화된 노동같이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지만, 거기에는 세계가 담겨 있다는 차이가 있다. 똑같은 단편이 아니다. 똑같은 것의 재현과 다를 바 없는 물건생산과 다른 설렘과 모험, 그리고 치명적 실패와 반전 등이 있는 단편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항상성은 유지되어야 한다. 


작품을 이루는 수많은 가로줄을 긋기 위한 평정심과 체력은 기본이다. 무한 반복되는 듯한 일상도 차이가 있다. 몇 십 년 동안의 ‘일상’이 한 공간에 나열된 것을 보니 당시에 너무 흔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이 예술이라는 입자가속기를 통해 낯선 면모를 드러낸다. 삶은 매 순간 입자들이 조금씩 교체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스스로도 변화하면서 이 변화를 주목하는 존재가 바로 작가이다. 민재영의 중간 회고전 격인 이 전시는 코로나 국면 때문에 산산이 깨어진 일상의 위상을 성찰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일상인 것은 아니고, 늘 일상을 주시해왔던 작가의 시선이다. 민재영의 가로줄 구조는 군중의 입을 막고 있는 그 마스크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핀트가 잘 안 맞는 저질 인쇄물같이 얼룩진 화면은 현대인의 시각을 규정짓는 다양한 미디어 환경의 불투명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바이러스처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면서 인간과 공진화하는 미생물, 자연 자원 남획과 공해산업의 결과물인 황사 먼지, 너무 고요하면 불안해서 필요한 백색소음 등, 비어있어 보이지만 무엇인가로 가득 찬 자연 및 문화 생태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홀로 Alone 한지에 수묵 Ink on Korean paper 183×91.6cm 2021



민재영의 작품에는 일상의 장면뿐 아니라, 일상을 지탱해주고 침해하고 회복시켜주는 잠재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움직이지 않는 회화지만 지글거리는 영상처럼 유동한다. 신인상파의 점처럼 딱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일련의 단위를 이루는 색 선은 끝없이 자리를 바꿔가며 조금씩 변화한다. 대부분 순수와 본질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달갑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지상태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미 선점 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인간이 자연이 아닌 상징적 우주에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스케치 전에 그려지는 횡단선들, 중첩되는 색 선들은 최초의 출발이 되는 백지를 ‘오염’시킨다. 대학 졸업 후 5년간의 다른 모색은 이후 작업만을 향한 길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뒤늦게 대학원을 진학하여 이런저런 동아리에서 늘 ‘왕언니’ 역할을 맡았지만, 이제 작가라는 홀로의 길을 걸어온 지도 꽤 되는 시점에 중간 정리격인 전시가 큰 미술관에서 열린 점은 작가에게도 관객에게도 행운이다. 


전시장 한 벽을 가득 채우는 현장 벽화나 엽서에 실린 대표 이미지에는 코로나 시국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의 부제도 [생활의 발견]이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를 당장에 반영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의 산물이기보다는 그동안 작가가 견지해왔던 태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다. 벽화를 가득 채운 택배 박스는 사람들 대신에 물건이 오가는 언택트 시대의 단면을, 엽서에 담긴 작품에는 마스크를 끼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감염병의 원인이기도 했을 사람들 간의 밀접한 접촉의 상황은 현대사회가 성장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대량생산과 소비, 시스템에 실려 가는 대중의 모습이 뿌연 미디어의 안개 속에 포착되어 있다. 선명하지 못한 이러한 중첩 이미지가 시작된 것 자체가 영상으로부터 왔다. 1980-90년대의 안 좋은 화질의 비디오 이미지가 딱 저 모습일 듯하다. 지금 같으면 ‘빈티지’ 스타일로 환영받을 노이즈가 많은 화면들, 사방에 깔려 있는 CCTV에 담긴 저화질 화면에 아무렇게나 담긴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달밤 In the Moonlight 한지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55×75cm 2007



작가 자신 또한 군중의 일원으로 급하게 지나치면서 촬영한 군중의 이미지들 또한 선명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일군의 작품은 모델들에게 포즈를 취한 동작에서 출발한 것도 있는데, 그 또한 민재영의 작품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반복과 차이라는 방법론은 재현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기하학적 리듬을 타는 대형서점의 휴게공간부터 자유분방한 클럽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관객이 알아볼 만한 일상의 공간은 많이 등장한다. 인간이 없는 경우는 물건들이 대신 연기한다. 화면 밖으로 떨어질 것같이 쌓인 택배 박스나 도로에 가득한 차의 행렬이 그것이다. 거기에서 사람은 없거나 사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이다. 사물, 대개는 상품은 인간보다 쉽다. 이제는 대놓고 사진을 찍기도 조심스러운 초상권 보호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군중을 포착하는 시점을 꽤 거리가 있다. 공간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 거리가 있다. 작가는 피곤한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언뜻언뜻 떠오르는 영상같은 현실을 그림에 담았다. 


민재영의 작품에는 기억이라는 기조가 깔려 있다. 한편 작가는 스미듯 번지는 자신의 화법이 딱딱한 현실을 조금은 부드럽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방금 지나 간 과거로서의 현재는 내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작품 속 군중은 핀트가 안 맞는 선이 아니더라도 익명적이다. 뒷모습도 많고, 어떤 것은 얼굴 부분이 과감하게 잘려 있기도 하다. 얼굴인 나타난다 해도 큰 차이는 없다. 민재영의 작품 속 인물은 ‘초상권 침해를 피해가는 미디어의 시점같은’ 것이 있다. 여기에 비대면 수업을 하면서 모니터로 봐야 하는 제자들 얼굴도 합류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무엇인가가 드리워져 있다. 말 그대로 인터페이스이다. 현대의 대중은 시스템이라는 좌표를 타고 움직일 수 밖에 없으며, 뭐든 직접적인 것은 없다. 민재영의 작품은 그렇게 중층적으로 매개된 현실을 표현한다. 매개의 차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추상화로 경도될 것이다. 




만찬중계 Men in Black 한지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145×145cm 2007(개인소장)



자기지시성은 추상미술 뿐 아니라,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미디어가 실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실재화 되는 상황이다. 그러한 미디어 사회와 짝을 이루는 관료주의도 그렇다. 그러나 작가가 전통과 쌍벽을 이루면서 현대성을 온통 대변하는 듯한 추상미술로 빠져들지도 않았다. 물론 가까이서 보면 인상파처럼 일련의 단위(기계적 매개라면 픽셀이라고 할만한)를 이루는 색 점들로 지시대상은 해체되지만 말이다. 민재영의 작품에는 생활이 있고 발견이 있다. 한편 순수한 원상이 있고 다른 악마적인 힘에 의해 왜곡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사람보다는 사람들을 그린다. 작품의 형식을 특징짓는 색 입자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입자들의 이합집산이 바로 인간이고 자연이며 미디어이고 예술인 것이다. 하나의 과정만 있다. 그것은 흐름이다. 재현적 요소가 보존된 민재영의 경우에는 정류(定流)이다. 가장 최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벽화에는 가로줄 대신에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이 눈에 띈다. 


작가의 제어를 넘어 아래로 흐르는 물감은 멜랑콜리한 느낌을 준다. 이 전시에서는 수직선 구조의 작품이 단 하나 출품되었지만, 수평선은 그자체가 직립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휴식이고 죽음이다. 벽화작품에서 물감의 물성을 지시하는 흐름에 대해 누군가는 택배기사의 땀과 눈물을 볼 수도 있다. 형식적으로 본다면, 물감의 물성은 이미지의 투명성을 저해하는 요소다. 명확한 외곽선이나 명암법이 흐트러진 화면은 떠도는 색 입자를 잡아주는 수평선들과 유희한다. 이러한 표현법의 출발이 되었던 미디어 또한 불투명하다. 지직거리는 화면이 떠오르는 작품들은 미술이 투명한 창이나 거울이어야 한다는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가장 강력한 시각적 관례를 배반한다. 하지만 인간이 주어진 한계, 즉 만들어진 인공 생태계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점 또한 분명하다. 동양화가라면 ‘OO 산수’ 등으로 이름 붙여지는 멋진 산수를 그려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민재영은 초창기부터 도시, 즉 빌딩 숲을 그렸다. 




출구 정체 Exit Congestion_한지에 수묵채색_108x148cm_2017



그것이 작가를 전형적인 동양화가의 길에서 비켜서게 했다. 동시에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게 했다. 동시대 도시적 현실에 대한 주목은 사회와 역사, 심지어 혁명과 같은 거시적인 담론을 뚫고 미시적인 문화의 힘이 갑자기 훅 다가왔던 90년대에 본격적인 작업을 한 작가의 감각, 또는 시대 의식이다. 민재영에게 동양화에서의 미의 원형이 되고있는 산은 아파트 세대의 작가에게 너무 멀리 있었다. 산은 다른 동양화가들이 많이 그리고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한국의 지형에서 70%나 차지한다는 산악지대는 산에 대한 사랑을 낳았을까? 오히려 평지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찾다 보니 과도한 집중을 낳았고, 결국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아파트 공화국이 되지 않았나? 민재영은 한국 사람들 반 이상이 거주하는 아파트 숲에서 산에 해당되는 것을 본다. 여담이지만 네팔 당국의 관광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기 인원이 너무 많아 줄을 서서 등반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물론 남들은 안 다니는 더 어려운 코스를 다니는 탐험가들도 있겠지만, 예술도 공유하는 ‘전대미문의 새로움’이라는 관념이 과연 ‘태양 아래 새로움은 없다’는 진리를 이길 수 있을까. 


새로움은 바로 새롭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곧 새롭지 않아지며, 대부분의 새로움이라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지 않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동양화가들이 늘 상 고민하는 ‘전통과 현대’의 문제 또한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자를 이항 대립의 관계로 설정하는 오류를 보여준다. 고상한 화론이나 관념 속에 존재하는 그런 산은 늘 초월을 요구한다. 민재영의 작품에서 산만큼이나 먼 것이 일필휘지의 선이다. 밑 선에 기대어 칠한 색 선들은 다소간 소심하게도 얼룩져 나타난다. 하지만 스미고 번지는 색 얼룩 그 또한 중봉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기본 필법이다. 민재영은 오랫동안 배워왔고, 본인도 가르치고 있는 기본 어법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자기가 늘 하고 있는 것과 삶과 일치시키고 싶었다. 삶과 예술을 수렴하는 것은 결코 쉽지는 않고 끝날 것같지도 안은 과제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미시적 변화는 자신도 모르게 기록되게 되어 있다. 




직장職場 A Work Place 한지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125×170cm 2007



민재영이 참조했던 사진이나 영상에는 발터 벤야민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시각적 무의식’이라고 규정했던 무엇이 담겨 있다. 시각적 무의식은 화면 전면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상과 달리, 의도되지 않았던 부분에서 활성화된다. 의식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변화가 더 근본적이며, 현실이라는 바다에 매일 그물망을 던지는 부지런한 어부는 그 변화를 각인한 특종 표본을 낚으려 한다. 민재영의 화면은 택배 박스 가득 그려진 벽화처럼 수많은 요소들이 구축된 결과물이다. 구축이라 함은 다른 방식으로도 쌓을 수 있음을 의미하므로, 해체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 오고 가는 거리, 쳇바퀴 도는 듯한 현대인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했다. 어디나 북적거리는 도시, 인간과 차로 가득한 그곳에서 시작했다. 거기에도 자연은 있었다. 좁은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이라는 섬에 갇혀 있었다, 빌딩 숲은 산이 되었고, 정체와 초고속을 넘나드는 교통 흐름은 강이 되었다. 원자 입자같이 이합집산 하는 군중들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 의미를 담은 형태소가 되었다.         


출전; 성곡미술관, 작가와의 대화(2021.10.23)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