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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하 / 시각 이전 혹은 이후의 시각

이선영

시각 이전 혹은 이후의 시각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지하는 [Untitled Landscape 일련번호] 등으로 건조하게 붙여진 작품 제목들로, 그것이 풍경이라는 최소한의 암시만 제시한다. 2015년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처음 한 전시의 부제가 [풍경 없는 풍경](2019)이었으니, 풍경이라면 들어가 있을 법한 요소들이 건져지지 않는 점은 이번 전시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이전 전시인 [풍경 없는 풍경](2019) 전의 작품에 대해 ‘이 세상의 어느 장소도 아닌 오직 계속 변하고 소멸하는 에너지와 초현실적 공간과 풍경들이 만나 독특한 일루젼을 일으키는 비정형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무의식이 작용하는 초현실적 공간’이다.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적 공간에서 ‘꿈속에서 보아온 듯한 나무, 산, 하늘, 별 같은, 자연을 닮은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풍경’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은 어떤 대상으로 엮여질 만하면 의미를 추구하는 시선에서 쑥 빠져나가는 모호한 형상들로 가득하다. 밀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크기가 작은 작품에서조차 복잡성을 늘린다. 



[Untitled Landscape06], graphite and oil on canvas, 138x75cm, 2021



[감은 눈] 시리즈는 연필 가루와 파스텔을 이용한 드로잉으로, 얇게 여러 번 실행한 결과물이다. 박지하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연필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연필이라는 재료의 섬세함은 나의 모든 감각과 느낌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고, 마음의 상태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겸손한 도구가 된다’고 말한다. 선이든 색이든 확실히 하지 않고 힘을 뺀다. 동시에 자기를 하나씩 비워가는 수행성을 추구한다. 물감은 연필보다는 한 번에 가는 편이지만 무형태에 얇은 화면을 지향하는 점은 마찬가지다. 이전 작품에서는 연필로 작업한 모노 톤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번 전시에서 색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감 또한 수채화처럼 연한데, 이렇게 여러 매체들을 활용한 화면이 만들어내는 층들 사이에서 명상을 즐긴다. 여러 층이지만 두텁게 바르지 않기에 수면에 던져진 돌이 만들어내는 파장같이 다가온다. 여러 층이 얹혀지는 식의 화면 구성에서 아래층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 


층과 층은 불연속적이며 이러한 틈을 통해 생성하고 소멸하는 사유 또는 미지의 생명체를 표현한다. 작가가 ‘꼬물탱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하는 것들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작품에 따라서는 오일에다 바로 연필로 그리면서 즉흥성이 강조된다. 이 경우에는 층이 최소화된다. 작가가 직접 초현실주의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드로잉에 바탕 하는 작품은 자동기술법과 연관된다. 특히 박지하에게 자기를 비우는 과제는 자동기술의 수동적 측면에 부응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창조의 비결을 무관심의 단계인 꿈에서 찾는다. 앙드레 브르통은 ‘우리는 우리의 작품 속에서 수많은 메아리를 담는 말없는 그릇, 보잘것없는 녹음장치가 된다’고 하면서 스스로 여과시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단순한 기록 도구로 간주했다. 의식이 중심이 된 자아를 거부하는 초현실주의 작가는 자신의 의식을 명확히 재현하기보다는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자로서 만족한다. 




[Untitled Landscape07], graphite and oil on canvas, 91x116.8cm, 2021.



자동기술법은 1920년에 앙드레 브르통이 필립 수뽀와 함께 [자장]이란 작품에서 시도한 방식으로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작가가 자신을 외부세계와 완전히 분리시킨 상태에서 생겨나는 모든 형태의 사고를 가능한 빨리 기술하는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동기술은 완전히 무관심한 정신 상태에서 구술되는 것이기에 일종의 주문같은 효과를 가진다. 초현실주의의 몽환적인 경험들과 유희들은 심령술의 규칙을 따름으로서 이성에 의해 행사되는 모든 통제를 벗어나고자 했다. 자동기술은 프로이트가 제시한 두 원칙 중 현실원칙이 아니라 쾌락원칙을 따랐다. 우연적 요소를 품는 박지하의 개방적인 작품은 캔버스 천에 커피로 연하게 밑칠을 해서 얼룩진 형상들과 대화하듯이 진행되기도 한다. 주로 사용하는 연필 또한 선긋기라는 기본 기능 외에 캔버스 올과의 관계 속에서 입자들을 퍼지게 하는 식으로 활용한다. 스며듬, 퍼짐, 중첩 등 화면의 층을 늘릴 수 있는 여러 방식이 동원된다. 


작가는 실기실의 바닥을 보고도 감흥을 얻었다고 말한다. 바닥은 위에서 쏟아지는 것들을 모두 받아낸다. 바닥은 다른 시간성을 한 공간에 중첩시킨다. 작가는 자신으로부터 쏟아지는 모든 것들을 받아내기 위해 바닥에 깔고 작업한다. 물론 작품이 무의식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기에, 후반 작업은 이젤에 세워서 마무리한다. 작업실 한켠에 놓인 수집된 나무껍질처럼 작가는 자연에서도 발견되는 여러 층이 복합되어 형성된 실재를 중요시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무의식과 환상이라는 초현실적 세계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고정되지 않는 과정적 요소들은 그때그때의 심신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조합되며 느껴지고 읽혀질 것이다. [감은 눈(Closed Eyes)]이라는 전시부제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함을 암시한다. 그것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다. 시각예술이 아니어도 시각은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간주되어 왔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고대적 사유에서 모든 확실성은 가시성에 토대들 두고 있다고 말한다. 




[Untitled Landscape09], graphite and oil on canvas, 101x152cm, 2021



그에 의하면 로고스가 의거했던 것은 형태를 지닌 시선이며, 인식과 본질은 어원적으로도 본다와 매우 긴밀하게 결합한다. 하지만 시각만으로 충분한가에 대한 회의가 지속적으로 생겨났다. 현대미술에서 시각을 하나의 또는 유일한 인식 모델로서 사용하는 철학자들의 시각 사용법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존 맥컴버는 [데리다와 시각의 폐쇄]에서 시각이 인식이고 형식을 낳는 것이라면 사물은 그것이 형식인 한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박지하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시각에 의해 명료히 포착되고 의미화, 형식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흔적(trace)--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에 의해 유명해진 개념인—에 가깝다. 존 맥컴버에 의하면 우리는 순간적인 것은 볼 수 없다. 시각은 상대적으로 고정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시각중심주의와 결정적이고 안정적인 형식에 대한 선호는 밀접하다. 존 매컴버는 시각중심주의가 신체적인 눈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눈이라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감은 눈] 전은 ‘[풍경 없는 풍경] 전과 연결선 상에 있다. 2019 작업들은 연필로 전체 화면에 레이어를 쌓아가면서 화면을 완성하였는데, 이번에는 그것에 컬러를 더하고 있다’고 그 차이점을 밝힌다. ‘눈에 들어오는 빛으로 감지되는 물질의 풍경이 아닌,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비물질 세계의 이미지에 대한 풍경들’이다. 그곳에는 ‘떠오르는 어떤 형상을 지우고 덧씌우고를 반복하는 흔적들만이 남아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는 역설적으로 눈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눈이기보다는 돋보기나 현미경, 망원경, 렌즈 구멍처럼 기계(또는 기구)와 연결되어 시야를 미시적으로나 거시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외눈박이 시점을 전제한다. 타인들과 육안으로 자명하게 공유될 수 있는 풍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준점이 없는 이 극도의 자유로움은 금속공예를 전공한 작가가 뒤늦게 회화로 전공을 바꾼 개인적 이력과 관련된다. 




[Untitled Landscape10], graphite and oil on canvas, 73x53cm, 2021



요즘같이 장르를 자유롭게 오고 가는 시대에 금속공예와 회화에 무슨 경계가 있으랴만은, 공예 중에서 금속은 재료의 강한 저항력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엄격함이 특징적이다. 대학원까지 연장되었던 금속공예와 무의식적 과정에 몸과 마음을 실을 수 있는 최근의 회화 작업은 큰 차이가 있다. 작가는 회화에서 ‘순수’라는 말을 강조하며, 그것을 자유와 연관시킨다. 하지만 자신을 찾기 위해 30대 중반에 떠난 유학길에서 작가의 관심을 끈 것은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작품에 추상적인 형상이 많은 이유이다. 물리적 또는 정신적 공간 안팎에 퍼진 에너지가 대상의 외곽선을 해체하여 애매한 형태, 즉 형상이 된다. 작가는 불교 서적인 [선의 나침반]에서 받은 감명과 깨달음, 즉 ‘세상의 사물은 변하고 소멸’한다는 사실, 그래서 ‘내 마음이 문제’임을 말하면서 자신의 작업에 내재한 수행성을 강조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모두 2021년의 최근작으로 회화의 경우 제목이 없는 풍경들이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한 화면의 기법은 ‘graphite and oil on canvas’ 라고 나타나 있다. 풍경은 대개 가로로 긴 화면이지만, 작품 [Untitled Landscape 06]처럼 드물게 세로로 된 풍경도 보인다. 특정 형상을 형태로 만드는 외곽선은 느슨해지고 내용물을 바깥으로 유출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색이 여기저기 자리한다. 형태와 배경의 구별은 사라지고 뒤섞여 버린다. 의식이 또렷한 형태와 그에 따르는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면, 무의식은 의식의 잔해로 이루어진다. 그 잔해를 맞추기는 매우 힘들다. 박지하의 경우 잔해는 한 층이 아니라 여러 층으로 퇴적된 상태이며, 잔해들 간에도 어떤 중첩과 엉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의식/무의식의 관계가 구상과 추상으로만 대별 되는 것은 아니다. 달리나 마그리트 등 초현실주의의 한 일파가 그러했듯이 전치(displace)를 통해 재현적 요소를 보존하는 무의식도 있기 때문이다. 형태가 분명치 않은 추상적 화면과 무의식을 연결한다는 점에서는 이브 탕기나 앙드레 마쏭 등의 계열과 더욱 가깝다. 




[Untitled Landscape11], graphite and oil on canvas, 91x117cm, 2021



물질과 에너지가 같은 실재의 두 가지 양상이라면, 박지하의 작품에서는 물질에 잠재되어 있을 에너지가 더 전면적이다. 모든 작품에서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상승 중이다. 그것은 작가가 금속공예를 전공한 후 순수 예술로 방향을 틀었을 때 이미 정해진 방향이다. 소비자의 요구나 재료의 저항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작가에게 회화는 무조건 무한대의 자유 바로 그것이어야 했다. 자유가 무의미에 가까워질 무렵 다시 금속 작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이번 전시에 한 점 나온다. 물론 그것은 공예적 쓰임에 충실한 물건이 아니라, 아트 오브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와 물질, 이 방향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상호 전환 한다. 작품 속에는 눈이나 곤충 등 알아볼 만한 요소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조차도 합리적인 맥락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화된 선과 색이나 마찬가지다. 화면은 의미로 연결된 명확한 형태의 파열, 또는 형태 이전의 단계들이 꼬물거리는 장이 된다. 


작가는 이러한 장에서 풍경을 본다. 풍경은 불연속적인 무엇인가가 느슨하게 모여있는 상황을 싸잡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르다. 2021년 늦가을 풍경도 풍경이지만 내 마음의 풍경도 풍경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의 잔해나 단편은 원래의 무엇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관객의 심리적 육체적 상태에 따라 복귀의 방향성이 정해진다. 잔해나 흔적으로부터 무엇이 일으켜 세워질지는 불확정적이다. 작가는 주로 자신을 쏟아붓는 방식이기도 한 바닥(에 펼쳐 놓고 하는) 작업을 주로 하지만, 작품이 60-70% 진행된 이후에는 화면을 세워서 보다 정리하는 기분으로 그린다고 한다. 박지하의 작품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고 소멸되는 과정만이 지속될 따름이다. 화면이 두꺼운 것은 아니지만 얇고 엷은 층이 여려 겹 겹친 화면은 복잡하며 비정형적 형상이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상응한다. 




[passage to unconscious_시리즈], 혼합재료, 24x33cm, 2021



만약 그것이 실제라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시적 세계의 풍경이 그러할 것이다. 작품 [Untitled Landscape07]은 대지에 확실히 발을 딛은 장면은 아니지만 아래로의 중력의 방향이 느껴진다. 추상적이지만 위아래를 바꾸어 걸 수 없을 것이다. 검은 선으로 표시된 뾰족뽀족한 선은 산을 떠올리기도 한다. 마음의 진동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다양한 형상들의 집합은 마치 운무에 잠긴 것처럼 중간에 둥 떠 있다. 작품 [Untitled Landscape09]는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한 듯한 선적 형상들이 엉겨있는 부유물처럼 화면 가운데 걸쳐있다. 형상의 배경은 단지 밀도의 차이다. 작품 [Untitled Landscape10]는 마치 멀건 스프처럼 형상과 배경이 거의 구별이 안가는 풀어진 상태다. 작품 [Untitled Landscape11]는 외곽선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밝은 둥근 형태가 어두운 바탕과 구별된다. 입체감이 있어서 원이기보다는 구이며, 피붓빛 색감은 둥그런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얼굴의 부속기관들은 없다. 


그것은 일종의 몸 풍경이지만 그러한 몸 안에 기관은 없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이 말하듯이 기관들이 유기적 관계를 이루는 존재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의 심리적 투사에 의해 얼룩의 방향을 이리저리 조절하다 보면 두 눈구멍과 스마일 입이 찾아지기도 한다. 또한 이 얼룩덜룩한 구는 우주의 심연에 떠 있는 둥근 행성일 수도 있다. 혼합재료로 만들어진 [passage to unconscious_시리즈]는 작가의 눈알 하나하나가 꼴라주 된 화면처럼 불연속적으로 붙어있다. 감거나 뜨거나 위아래가 바뀌거나 하는 다양한 상태의 눈은 모두 외눈이며, 외눈을 둘러친 둥근 형태는 현미경적 관점을 예시한다. 작가는 무엇인가를 확대해서 보는 자신의 눈을 다시 본다. 낡아 보이는 화면은 보고/보이는 과정들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말한다. 인간 사회가 그러한 시선의 교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쌍으로 제시되는 작은 판넬 작업인 [passage to unconscious_시리즈]에서는 외눈이 하나씩 배치된 두 화면이다. 




두 개의 눈에 관련된 가장 자연스러운 배치인 좌안/우안의 대칭적 배치가 아니라 한쪽 눈이며 세로 배치다. 눈은 정면을 향하지만 초점은 흐려있다. 눈을 둘러싼 둥근 원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다. 색감이 다른 배경을 가진 눈은 하나의 행성에 하나씩 자리하면서 모종의 풍경을 보고 그 스스로도 풍경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재료인 금속 작업이 포함된다. 금속 작업에 필연적인 기계적 정확성과 작가의 무의식에 화답하는 오브제인 레디메이드의 결합은 무의식이 원초의 심연같은 곳에서만 출몰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프로이트로 시작되는 정신분석에서는 심층 모델이 우세했지만, 현대의 정신분석에서 심층적 모델은 해체된다. 중층적이지만 깊지는 않은 박지하의 작품은 무의식에 관한 두 개의 모델로 살펴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하여]에서 정신을 의식과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의식의 자료에 단절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찾아진다고 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의식은 아주 적은 양의 내용만을 담고 있다. 무의식 조직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무시간적이듯, 무의식적 과정들에 충실한 박지하의 작품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프로이트 이후 무의식이 주체를 규정하는 측면만 강조하면서 주체를 의식과 동일시하는 것과 비슷한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주체를 구조화하는 힘의 이질성을 강조한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꼬물거리는 무정형으로만 간주할 필요는 없다. 무의식은 현대의 대표적인 양식인 기계 또한 포함한다. [기계적 무의식]에서 강조되는 것은 보편의 존재가 사실 이질적인 지층 간의 우연적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가능한 침입, 모든 파국, 모든 출현이 지닌 다양성과 이질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펠릭스 가타리의 모델에 의하면 무의식은 심층에 숨겨져 있기보다는 표층에 편재한다. 그에 의하면 무의식은 우리 주위의 어디에나 있다. 




[manipulable dreaming machine(feat. 뒤샹의 조각)], 혼합재료, 33x41cm, 2021.



우리의 주변이 자연보다는 기계에 더 많이 에워싸여 있다는 점이 [기계적 무의식]이 설득력을 가지는 지점이다. 작품 [manipulable dreaming machine(feat. 뒤샹의 조각)]는 이전에 작가가 만들었던 심플한 금속 공예작품들처럼 정해진 용도를 가진 물건이 아니라 ‘추상기계’ 라고 할 수 있다. 펠릭스 가타리가 추상기계라는 개념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실의 다양한 수준을 횡단하고 지층들을 조립하거나 해체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만약에 그것이 주체의 어떤 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한다면, 어떤 확실한 의미의 기표가 아니라, 이질적인 구성요소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펠릭스 가타리에 의하면 주체성이란 원형적이지도 구조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다. 주체성은 무수한 창조적 배치, 구성요소, 지표, 탈영토화된(탈주하는) 선, 기계장치 등이 무의식 분석의 대상이다. 현대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를 계승하면서도 단절한 이유는 펠릭스 가타리의 다른 책 [카오스모제]에서 말하듯이,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 초심을 잃어버리고 ‘자아분석, 사회 적응 혹은 기표적 질서에의 순응에 다시 초점을 맞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무의식으로의 환원이 아니라 자유로운 횡단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한 작가에 대해 평한 것처럼 ‘결합 불가능한 것을 결합시키고 단절 불가능한 것을 단절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일찍이 기계적 오브제를 많이 활용한 초현실주의는 보다 현대적인 의미의 무의식, 즉 기계적 무의식과 조응한다. 뒤샹한테 영감을 받은 입체 오브제 작업 [manipulable dreaming machine(feat. 뒤샹의 조각)]은 금속으로 구성된 부조로 벽에 걸 수 있다. 작가가 직접 만든 둥근 틀 사이사이에 돋보기, 약병, 손잡이, 자, 필름 같은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조합되어 있다. 초현실주의적 오브제는 의식의 간섭 없이 형성되는 ‘꿈만을 감지한 물체들’로 정의된다. 꿈을 꾸기 위해 눈은 감겨야 한다. 마르셀 뒤샹은 전통적으로 미술이 단지 눈의 망막에만 호소할 뿐 정신과의 교감은 소홀히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박지하의 [감은 눈] 전은 뒤샹의 노선을 따른다. 뒤샹에 따르면 조형예술은 객관적인 시각에는 잡히지 않는 요소들, 즉 꿈, 욕망, 상상 등을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뒤샹이 창안한 레디메이드는 그가 말했듯이 가장 물질적인 사물을 정신의 사물로 만드는 기술이다. 손잡이를 돌리면 필름이 돌아갈 것 같은 모습, 필름 맞은편에 배치된 돋보기와 눈, 그리고 필름에 관계된 약병들(영상을 만드는 용액), 필름의 길이를 잴 수 있을 듯한 자 등의 배치는 나름의 이야기를 만든다. 필름에 맺혀지는 상은 환상적 풍경으로 돋보기 안의 큰 눈이 그것을 본다. 드림 팩토리로 칭해지는 문화산업들은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을 활용해야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 백지상태가 아니라 상징적 우주에 태어나는 현대인의 꿈과 무의식 또한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필름 아트처럼 구성되는 것, 즉 작품 제목에 포함되어있듯이 ‘조작 가능한’ 것이다. 레디메이드를 통해 현대미술의 어법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뒤샹은 피카비아와 함께 기계적 형태를 활용한 다다이스트이기도 하다. 합리적일수록 비합리성도 증가하는 현대문화의 역설을 풍자한 뒤샹은 무의식의 현대적 면모를 제시한다. 박지하가 작업을 ‘나를 비우는 것을 통해 서서히 나를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으로 생각할 때 이미 존재했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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