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성필 김옥선 전 / 중심과 주변의 전도

이선영

중심과 주변의 전도

  

한성필 전 (8.19—9.25, 운중화랑)

김옥선 전 (9.1—10.3, 상업화랑)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옥선 전과 한성필 전은 전시장소가 있는 을지로와 분당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언뜻 사진이라는 공통분모 밖에는 없다. 양 작가가 이번 전시의 소재나 주제를 오랫동안 끈질기게 고수해왔다는 공통점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간을 다른 하나는 자연을 주목한다. 인간은 자연 보다 더 가까이 있다. 거의 프로필 사진과 다름없이 명확한 김옥선의 인물 사진은 육안으로 파악하기 힘든 부분까지 드러낸다. 하지만 극지의 풍경을 담은 한성필의 작품은 작품 속 한 장면인 오로라처럼 아주 멀리 있다. 아주 가까이, 또는 멀리, 요컨대 그들의 작품은 육안과도 비교될 수 있는 사진의 매체적 속성을 잘 활용한다. 물론 한성필의 작품에도 마이크로 코스모스에 대한 주목이 있지만, 그 또한 일상의 스치는 눈으로는 찾기 힘든 자연의 깊은 부분이다. 눈에 띄지 않는 식물을 한가득 포착한 김옥선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작품에서 인간과 자연은 같이 등장하지만, 그 비중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간과 자연을 같이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인간이 자연의 척도가 된 이후 양자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것, 지배와 소유라는 관점을 배제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악하기는 힘들어졌다는 점에서, 작가가 어디에 방점을 찍었는지에 따라 메시지는 달라진다. 김옥선의 작품은 거의 실물 크기의 초상이 전면에 배치되고 푸릇한 자연은 존재감 없는 배경 막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한성필의 작품은 광대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자취는 미미하며, 사람 사는 동네나 도시를 찍을 때도 인간은 거의 안보인다. 이러한 무인지경에서 현실의 환상적 측면을 보여준다는 연속성은 있다.




(사진출전; 상업화랑)



(사진출전; 운중화랑)



김옥선의 작품에서 시늉으로만 나오는 자연은 다소간 풍자적이다. 거대한 시공간을 무대로 한 한성필의 작품에서 인간은 거의 미물이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이 바짝 앞에 당겨 서 있는 인간과 보통 사람으로는 접근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저 멀리의 대자연이다. 김옥선의 작품에서 인간은 주류에서 비껴나 있는, 하지만 분명히 여기에 함께 살고 있지만 유령화된 부류다. 한성필의 작품에서 자연은 거의 탐험가가 아니라면 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차원에 자리한다. 그들은 예외를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이라는 공통점에 의해 아무리 낯설게 다가오는 인간이나 자연도 그 존재를 증명받는다. 예술작품에 의해 부각된 존재는 그자체로 메시지이다. 두 작가에게 인간과 자연은 타자라는 공통점으로 엮어진다. 혼혈 청소년을 찍은 김옥선의 작품이나 극지같이 사람이 살기 힘든 장소를 찍은 한성필의 작품에서 인간과 자연은 모두 타자나 바깥이다. 김옥선의 작품 소재인 청소년 자체가 아이도 어른도 아닌 경계인인데, 여기에 혼혈이라 함은 주류사회에서 이중적으로 주변화된 타자임을 말한다. 한성필의 작품 무대는 극지나 험준한 산맥 등 인간이 살기는 힘들 만큼의 오지다. 그런데 거기조차도 기후변화 등 불길한 징조가 감지된다. 근대 이후 생산력의 수탈에 맡겨진 자연의 상황이 저 멀리의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들이 단순히 소외를 고발하는 것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정치판과 달리 네가티브가 아닌 포지티브라는 것, 만약 예술이 주변을 다룬다 할지라도,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전도시킬 만큼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아름다움이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두 전시는 보여준다.      

  

타자화된 인간, 바깥의 자연



 전시전경(사진출전; 상업화랑)



김옥선의 [Park Portraits] 전에는 이국적이긴 하지만 먼지가 가득 쌓인 채 별반 주목할 만한 특징이 없는 식물들이 인물과 함께 등장한다. 인물들은 대만과 한국의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다. 사람에 대해선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옆에 있는 이 볼품없는 식물들은 무엇인가? 플라스틱인지 진짜인지도 모를 만큼 허접하다. 이 하찮은 것들에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가? 베니어 판으로 거칠게 마감된 전시장 한 면을 가득 채우는 야자수 정원은 잘 꾸며졌다기 보다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이미 사라져 있는 방치된 자연같다. 아름다운 자연 이미지에 관한 한 볼거리가 지천인데 이렇게 아귀도 맞지 않는 풍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작은 화분에 담긴 이국적 식물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존재를 대변한다. 그것들이 완전히 뿌리 뽑혀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식물들과 함께 있는 혼혈 청소년들에서 비슷한 운명이 느껴진다. 작품 [ppk_ccs6728]에서 잎이 넓은 이국적 식물 뒤에서 관객을 응시하는 소년 또한 이국적이다. 이러한 인물 초상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늘 잘 찍혀진 사진 한가운데는 지배적 미의식에 부응하는 선남선녀들이 자리하는 스펙터클의 영향 때문이다. 만약 미모가 이러한 기준에 못 미친다면 어떤 조치가 취해졌을 것이다. 화장이나 포토샵, 심하면 성형수술까지...김옥선은 ‘하얗고 작은 얼굴’이라는 명백하게 어떤 종적 특성을 가진 기준이 아름다움으로 간주 되는 세상에서 주변화된 인물을 불러세운다. 


작품 [ppk_sst9108]에서 불그스름하게 칠해진 입술과 짧게 입은 교복 치마는 이 소녀 또한 예뻐 보이고 싶은 보통 소녀임을 알려준다. 평범한 배경의 평범한 미모는 해당 인물이 평범하게 살아주기를 바란다. 사진기 앞에서는 자동반사적으로 활짝 웃게 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에서 내면의 상처를 유추할 따름이다.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오래되었다. 당연히 많은 민족들이 섞이고 함께 살게 된 사태가 이해되지만, 인간 사회는 이성보다는 감정에 좌우된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도 순혈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다문화 사회지만, 차이에 대해 얼마나 개방적인지는 회의적이다. 겉으로만 다원주의지 이질적인 것에 대해 배타적이다. 특히 치열한 이해관계의 다툼 때문에 희생양이나 타자가 꼭 필요한 사회에서 차이는 차별로 가는 빌미다. 한눈에 파악되는 생김새는 차이의 대표적인 기표다. 김옥선이 찍은 혼혈 청소년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상징적 우주에서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나 합법적 장치들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직간접적 폭력에 비한다면 한참이나 나중에 온다. 그래서 그들을 사진으로나마 이렇게 똑바로 봐야 한다는 사실은 편치않다. 예술이 아니라면 힘든 과제다. 대중문화를 비롯한 지배적 문화는 자기연민과 값싼 위안을 소통과 치유로 포장한다. 연민이나 위안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이 계속 쌓이다 보면 결국 나쁜 것이 된다. 김옥선의 초상사진들은 예술이 불편한 진실의 드러냄으로서 문화와 길항작용을 함을 보여준다. 




  Cover-Ground-Cloud-036-2005-Archival-Pigment-Print (사진출전; 한성필 홈페이지)



[Blue Drama]라는 부제로 묶인 한성필의 풍경은 자연의 상당 부분이 푸르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린도 자연의 색이지만 그린보다 더 멀리 있는 자연의 대표색이 블루다. 블루는 지구 전체를 감싸는 공기를 매개로 빛의 산란이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성필의 작품은 산과 들, 하늘과 바다같은 풍경의 전형적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그곳은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사진가만큼이나 탐험가적인 성향을, 예술가만큼이나 종교적 비전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네 가지 특징이 교차 된 그의 작품은 오랜 기다림 속에서 건져진 찰나의 순간들이다. 작가는 그 순간을 ‘마법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발견되는 것이지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다른 별같은 미지의 세계같은 모습마저 있다. 그나마 블루는 그의 작품이 지구별에 여전히 귀속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물과 대기는 서로를 반사하는 관계로 푸름을 공유한다. 한성필의 작품 속 극지의 대지는 두 개의 푸름 사이에 끼어들며, 블루와 화이트를 층져있는 얼음 대지의 주름 안에 기입 한다, 전시는 6개 정도의 범주로 구별되는 시리즈 사진들과 [Blue Drama]라는 제목으로 묶인 영상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을 압축하는 영상작품들은 그가 찍은 사진의 맥락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자체도 무아경의 몰입을 자아내는 풍경이다. 그에게 사진과 영상, 즉 시간의 단면과 지속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상보적인 문제다. [Intervention Series]에서는 얼음 땅 위의 검은 바다, 그 위의 빙하가 있는 등, 자연이 많은 층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자연의 단면들이 포착된다. 하얀 얼음 덩어리 사이의 푸른 줄무늬는 주름 잡힌 자연을 보석처럼 보여준다. 


[Pollar Heir Series]는 낮은 지평선 위에 펼쳐지는 살아있는 캔버스와도 같다. 구름이 있는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는 색과 형태의 장이다. 길어야 100년 안팎의 인생을 상대화시키는 광대한 시공간은 숭고하다. 그토록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하늘이건만 그 아래는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라는 게 역설적이다. 그것은 한성필의 작품이 인간보다는 자연의 편에 선 것임을 알려준다. [Icelandic Summer Series]는 극한의 날씨 속에서 손톱만큼씩 자라는 이끼의 생태를 통해 부드럽고 촉촉한 자연의 속살을 전달한다. 화려한 색을 띄며 주름 잡힌 미지의 생물체들을 포착한 [Micro Cosmos Series]는 풍부한 색과 주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지구별은 인간에 의해 몸살을 앓는다. [Ground Cloud Series]는 언뜻 회오리처럼도 보이지만, 사실은 원전에서 나오는 연기가 구름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원자폭탄이 터지면 생기는 버섯 구름까지는 아니어도, 인간이 자연에 내뿜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기에는 충분하다. [Facade Series]는 다른 시리즈에 비해 인간의 흔적이 확연하지만, 여기에서도 작가는 사물에 더 주목한다. 벽화나 가림막에 그려진 그림과 실제의 연결망이 교묘한 그의 작품에서는 가상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유희가 나타난다. 또 다른 차원의 문을 바라보는 남자가 그려진 벽화에서 구름 떠 있는 하늘은 실제의 하늘과 연결된다, 두 개의 푸른 면이 하나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은 옆에 조금 나온 주변 거리 모습이다. 푸른 하늘 아래의 인간 문명은 멀리서 봐서 그런지 다채롭고 평화롭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1년 10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