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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안에 든 나무

이선영

씨앗 안에 든 나무

  

이선영(미술평론가)


  

졸업 전시를 축하하며


대학진학이 보편화된 이래, 학부까지는 아니어도 대학원에 진학한 예술계 청년층은 미래를 작업하는 삶으로 정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부분 대학입시까지는 정해진 궤도에만 익숙했고, 대학에 와서야 청년기의 몸살을 겪어내곤 한다. 아직 여러 가능성에 열려있는 젊은이로서는 학부에서 미술을 전공했음이 미술 분야에 계속 몸담는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학원 과정은 다른 전공 및 직업 중 하나의 선택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비로소 작업이 시작되는 시기다. 시작이 반이라고, 평생에 걸친 작업의 소중한 씨앗들이 배태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씨앗 안에는 이미 나무의 형상이 내재해 있다. 이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 아직까지는 작업량이나 발표 등의 경험은 부족하지만, 일생에 있어 감수성의 촉이 가장 살아있는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빛나는 만큼이나 그림자도 짙다. 작가로서의 삶이라는 소원이 다 이루어질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수의 성취래도 일단 하루라도 먼저 시작한 사람의 몫이다. 열심히 몰입했던 시간이 길수록 쉽게 포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술계가 아니어도 자신의 선택에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질질 끌려다녀야 하는 냉혹한 경쟁사회다. 요즘 한류 영화로 세계의 관심도 1,2위를 다투는 [지옥]이나 [오징어 게임]은 한국 사회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고 본다. 하지만 경쟁력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작업을 잘하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좋아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경쟁력을 가능하게 한다. 기성세대들이 깔아놓은 여러 부정적 인프라 때문에 청년층의 삶이 전반적으로 힘들어진 상황은 예술이라는 애초부터 가혹한 분야의 의미를 더욱 살려줬다.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들다면, 짧지 않은 인생,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선택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은 방황마저도 빛나는 결실로 뒤집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심민정


심민정의 작품은 평면에서부터 현실 세계로 점점 밀고 나가려는 듯한 형식의 실험이 보인다. 형식은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지만, 현대미술에서 그 관계는 전도되었다. 형식의 비중은 커져서 어떤 형식 자체에 내장된 내용도 생각하게 된다. 심민정은 전통적인 그림 도구 외에 닥죽부터 우레탄폼까지 다양하게 활용한다. 종이 위에 우레탄, 그 위에 닥죽을 얹은 화면은 환영보다는 촉각성을 강조한다. 우레탄은 닥죽을 종이 위에 고착하기 위한 중간 재료였지만, 단독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종이 위에 한정된 환영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는 도구는 자신의 투명성을 버려야 했다. 보통 연필이나 붓도 매체이기는 하지만 그자체의 물성 보다는 내용을 표현하는 투명한 도구로 인식된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투명한 도구는 점점 부풀어 올라 자기 목소리를 내고, 3차원 공간에서 스스로 서 있기도 한다. 우레탄폼으로 만들어진 조각적 형태는 견고하지 않아 이리저리 떨어지고, 그것을 ‘제자리로’ 놓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관객참여형 작품이 된다. 


견고하게 고착되어 있지 않아 떨어진 부분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걸쳐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전히 서 있기 위해서는 좀 더 견고한 조각적인 처리가 더 필요하지만, 심민정은 떨어진 것들을 그대로 놓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부풀면서 형태가 변하는 우레탄폼은 최종형태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불완전성조차도 활용한다. 작품 [괴아]는 전체적으로 인간, 특히 여성의 실루엣을 하고 있다. 우레탄폼의 둥글둥글한 덩어리는 여성을 특징짓는 부드러운 지방층의 표현에 적합하다. 하지만 그것은 여체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승화된 것이 아니라 울뚝물뚝 괴물스럽다. 인간은 태내에서 진화의 전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 이전의 퇴행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표준의 편파성이 여성운동에 의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만큼 인간으로의 승화 자체가 답이 되지는 않는다. 심민정은 아트북 [염염별 : 여성창작자들이 왜 뭉쳤을까](2021)같은 실천적 활동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타자화된 동물과의 연대 등이 평면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손수민


손수민은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 도시 구석구석을 탐색한다. 거닐기는 하릴없는 행동이 아니라 작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작업의 주된 과정은 다니다가 눈에 띄는 것을 포착하여 수집하고 그리는 것이다. 무심한 소비자의 눈을 공격하다시피 하는, 누구의 눈에도 띄게 만들어진 도시의 스펙터클은 통과한다. 그런 것들이 더욱 커지고 화려해질수록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작고 초라해진다. 도시를 지배하는 시각 이미지의 조그만 부문을 차지할 따름일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손수민은 그러한 작고 보잘것없고 때로는 무엇의 일부인지도 불확실한 것들을 다시 살핀다. 그것들이 워낙에 하찮은 것들이었기에 화면 안에서도 작게 그린다. 반대급부로 여백은 매우 커졌다. 그래서 여백은 원래 그것들이 놓인 맥락을 과감하게 지운 것과 같은 모습이 됐다. 여기에서 여백은 비워진 것이면서도 지워진 것이다. 맥락이 생략된 대신에 작품으로 포착된 것은 밀도를 높인다. 되비치는 창 등 여러 겹이 쌓인 평면들이 대표적이다. ‘위험’, ‘올라가지 마시오’같이 글자가 포함된 것들은 생각할 꺼리를 남긴다. 


작품을 통해 수집된 것들은 인간 삶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쓰레기를 포함하여 도시, 인간의 흔적은 역력하지만 정작 인간 자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연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까지 관심을 가지기에 너무 젊은 탓일까. 대체로 자연은 나이가 들면서 눈에 들어온다. 손수민의 작품에서 인간은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존재 자체도 보는 눈으로 축소된다. 그렇게 발견하고 수집한 것에 큰 변형을 가하지 않는 사물 그자체로 제시된 소재들은 예술에 있어서 작가의 위치에 대한 변화를 암시한다. 작가를 포함한 인간들 또한 결정적 지위를 잃고 사물로 축소된다. 그러나 그것이 불행은 아니다. 작업의 단초를 티끌같은 존재로부터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큰 야심에 속한다. 그만큼 탐구할 것들이 많다는 말이다. 기존의 것들도 날 것으로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작은 것들을 전시하는 문제는 다르다. 단지 물리적 확대나 과장이라기보다는, 관객에게도 손수민의 눈에 들어왔을 때 만큼의 시각적 강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것은 그저 작은 것으로 남을 수 있다.

 


이소희


이소희는 ‘사람이 지는 다양한 무게’나 ‘막연한 믿음’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가령 이소희의 작품에서 무엇인가를 염원할 때 켜는 초는 ‘불에 타며 녹아 결국 자신 안에 파묻힌 모습을 보여주면서 마침내 스스로 꺼지며 녹아내리는 모양에서 사람이 열망을 비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것은 허무함일 수도 있고 고귀한 희생일 수도 있다. 소멸이라는, 존재의 유한성을 사유하는 것은 종교적 태도에 가깝다. 이소희는 지금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한때 믿었던 것에 대한 생각을 작업으로 표현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는 중요한 질문이다. 작업도 예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뭐든 지나가고 나면 더욱 객관적으로 사태를 평가할 수 있다. 반드시 종교적 주제가 아니라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또는 자명하게 보이는 것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시각예술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보이는 것은 보이게 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거나 하는 식은 동어반복이며, 이는 현대미술이 재현주의나 관념주의를 극복하려는 이유이다. 


이소희의 작품에서 형태는 쑥 빠져버리거나 깨지거나 무엇인지 모를 이상한 각도로 포착됨으로서 모호해진다. 대신에 그 주변의 울림을 선명하게 한다. 마치 자성을 띈 물질이 자력을 발휘하듯이, 영험한 존재가 아우라를 발산하듯이 형태 바깥, 즉 배경으로 간주 되는 부분에는 시각적인 메아리가 가득하다. 본질과 핵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보다는 그 영향력에 의해 확인된다. 물질이 아닌 에너지다. 순지에 채색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색이 강하지 않지만 야광을 포함한 빛을 깔고 있다. 진리를 나타내는 빛은 종교의 영원한 주제다. 하지만 진리의 빛은 물질문명이 24시간 쏟아내는 요란한 인공광선에 의해 위축되어 간다. 믿음은 그 무엇에 대한 것이든, 시작이 아니라 끝에 위치한다. 자명한 출발은 없다는 것이다. 이소희의 작품제목 중 하나인 [(괄호)속의 생]처럼 생은 괄호 안에 담겨있다. 처음부터 자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괄호안의 것들은 거듭된 해석을 요구한다. 해석은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술적 작업 또한 그러한 실천의 일환이다. 

  


박현주


박현주는 물질의 변환 과정에 관심을 가진다. 수년간 진행해온 [Ice Project] 시리즈는 얼음의 변환에서 의미를 길어낸다. 박현주는 얼음을 사람의 인식과 비유한다. 덩어리진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섞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고정보다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물론 변화는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박현주가 생각하는 좋은 방향은 성장을 위해 자신을 녹이는 것이다. 어디에 놓여지든 돌덩이같이 굳은 자아 관념에 갇힌 이가 말랑말랑해야 하는 예술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자기로 귀결시키는 유아론적 태도는 아집과 독선일 따름이다. 자기만을 지시하는 태도는 자아의 강함이 아니라 취약함을 알려주는 증후에 불과하다. 예술은 종교처럼 자기를 비움으로서 자기를 찾는 역설이 일어나는 장이다. 나쁜 방향은 변질이다. 종이 200장 위에 녹인 얼음의 흔적을 담아낸 설치 작품은 칸칸이 지나면서 서서히 형태가 바뀐다. 처음 출발과 전혀 다른, 실체 자체가 변화하는 모습을 조금씩 차이를 가지는 단면을 통해 보여준다. 


‘아’가 ‘어’가 되는 순간이다. 애초에 그럴 의도가 없어도 변질은 상수이다. 여기에 의도적인 왜곡, 가령 가짜 뉴스같은 것이 범람하기 때문에 메시지의 발신/ 수신의 투명성에 대한 기대치는 높다. 하지만 변화를 만들어내야 할 예술에서 오류와 오독도 중요하다. 박현주의 작품 자체는 좋은/나쁜 이라는 윤리적 판단을 보류한다. 하지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것은 반복과 차이를 각인한 시리즈 형식으로 나타난다. 박현주는 고장 난 컴퓨터의 푸른 화면에서 [Ice Project]의 색조와 연결고리를 가지는 작품을 보여준다. 컴퓨터의 코딩을 손으로 가득 적어 넣은 작품은 기계의 오류와 예술을 비교한다. [Error] 프로젝트는 지하철 안 기둥 모니터가 블루스크린으로 변한 모습에서 출발한다. 원래는 광고가 나와야 했지만, 코딩한 대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박현주는 공공영역에 설치된 컴퓨터가 고장을 일으켰을 때 보였던 노이즈 화면이 심미적으로 다가왔던 경험을 기억하면서 예술의 아름다움은 (기계의 고장과 같은)무목적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표현한다. 

 


양은진


양은진의 작품은 빛과 산소를 머금은 듯 신선한 녹색 계열로 충전되어 있다. 자연이 주요 소재이자 주제이기 때문이다. 화면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은 예술이 주는 축복이다. 화분 등 정물도 있지만 대부분 풍경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자연풍경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와도 ‘자연스럽게’ 융화시킨다. 반대의 경우를 통해 자연예찬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할 수도 있다. 자연이 아닌 것들, 즉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들은 대부분 상품과 그것이 유통되기 위한 인위적 시스템에 인간을 위치시킨다. 자연계보다 더 잔인한 계급적 구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애써 차지한 고지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에 비한다면 자연은 평온하고 편안해 보인다. 양은진은 ‘길을 지나다닐 때 흔히 볼 수 있는 이름 모를 꽃, 풀, 나무 혹은 주위 풍경들. 나는 그것들을 볼 때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자연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순수한 자연의 영역이라 할만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은 자연 예찬의 입지를 좁게 만든다. 물론 그럴수록 자연은 유토피아적 열망을 모아내는 해방구로 작용할 수 있다. 양은진은 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주로 그린다고 말하지만, 자연을 정확히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마음 속 자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자연은 양은진의 마음 속에 들어왔고 거기서 변형을 거쳐 작품으로 꺼내진 것이다. 복잡한 생각보다는 직관적인 감성을 바로 토로할 수 있게 하는 자연은 예술과 친근하다. 특히 동양화과에 다니면서 00산수, xx산수 등의 관념적 미학에 압박을 느꼈을 이에게 자연은 모든 것을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자아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이때 자아는 자연의 표면이 아니라 자연적 과정과 일치된다. 양은진의 풍경이 성장과 변화 같은 유동성이 두드러진 이유다. 조형 언어를 포함한 모든 문명의 산물은 자체의 진화과정을 거치기 마련이지만, 결정적 변화는 자연에 의해서이다. 예술은 문명과 자연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기록한다.     

  

출전; 성신여대 동양화과 대학원 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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