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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효민 / 보석으로 변한 응어리들

이선영

보석으로 변한 응어리들

  

이선영(미술평론가)


 

권효민의 전시에서 대부분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품은 세공사같은 작업의 결과물이다. 여러 형태와 색, 그리고 투명도를 가지는 플라스틱 조각은 바늘 하나 꽂을 틈 없는 구성이 특징이다. 벽에 붙은 채 정지되어 있지만, 빛의 각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잠재적인 동감이 있다. 중력과 상관없이 붕 떠 있는 듯한 이 결정체들은 환상적이다. 전시장 벽에 섬처럼 띄엄띄엄 붙어있는 작품들은 규모가 작으면서 밀도가 있고, 환상적이지만 엄격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또는 한 손에 잡힐 듯한 것들은 근대의 미학의 분류에 의하면 숭고보다는 미(美)에 해당 된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이러한 예쁘장한 미를 배제해 왔다. 근대에 순수예술과 함께 탄생한 대중문화는 키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미도 예술의 중요한 요소이고 모더니즘에서 배제된 나머지 음성적으로 번성하다가, 억압된 것들이 복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서 재평가 받는다. 



Gallstone_0.1186 레진, 안료, 아크릴 과슈, 포맥스, 7.6 X 9.5 X 6.5cm 2021





전시 전경





장식은 순수미술에 적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식을 장식 그자체로 인정하자는 것이며, 예술보다 더 뿌리 깊은 역사적 연원을 가지는 문화를 재평가하는 대안적 경향이다. 물론 그것은 장식을 주로 맡아왔던 여성의 지위도 높아진 이후의 담론이다. 정신노동에 해당하는 순수한 조형과 잔재주에 불과한 장식의 대조는 주로 남성이 예술가였던 근대 이후에 더 선명하게 대조되었다. 그러한 분류에 내재된 위계질서의 부당함을 인정한 이후에야 장식적이라는 개념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롱한 색 구슬의 집합체로 어둑한 전시장 벽에 떨어지는 그림자마저도 화려한 권효민의 ‘장식적’ 작품은 객관적 의미나 자유로움이라는 이상과 거리가 있다. 법칙과 규칙의 구별을 통해 현대문화를 다시 읽은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유혹에 대하여]를 통해 지지될 수도 있겠다. 다양한 구성이 있지만 자신만의 엄격한 게임 원칙에 따른 통일성을 보이는 권효민의 작품은 주관적 규칙의 결과물이다. 


진선미의 통일체, 또는 순수한 조형의 산물이 아니라 놀이나 장식에 더욱 가깝다.  장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장식이 확립하는 질서는 관례적인 것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필연적 질서(법칙)와는 무관하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모델들에 의한 장식, 그리고 그들의 불안정한 결합 관계가 장식의 세계를 특징짓는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법칙에 대립되는 것은 법칙의 부재나 자유가 아니라, 규칙이다. 규칙은 법칙과 달리 자신의 기원과 목적이 없다. 그렇지만 놀이의 규칙처럼 참여자들로 하여금 깊이 몰입하게 한다. 규칙에 따르기 위해 법칙에서 벗어난 것, 즉 의례적인 질서는 사회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논지다. [유혹에 대하여]는 사회성과 의례성을 대조하는데, 예술은 후자와 더 관련된다. 권효민의 작품에서 구와 사각형 등이 주요 구성요소를 이루는 투명하고 반짝이는 외형은 크게 확대되면 마치 유희적 기능이 탑재된 첨단 복합단지 같은 모습이 상상된다. 




Gallstone_0.1186 레진, 안료, 아크릴 과슈, 포맥스, 7.6 X 9.5 X 6.5cm 2021








확대해도 밀도가 떨어지지 않는 작품들은 그만큼의 집중과 기술의 결과물이다. 작지만 기념비적이다. 대개 이런 재료를 사용하는 작품들은 재료 구입의 용이성 때문인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식의 연극적 무대 연출이 대부분인데, 권효민은 정반대의 방향을 택했다. 작가가 색을 낸 플라스틱 조각들은 공간을 쉽게 채울 수 있는 풍선 같은 스타일이 아니라, 거의 귀금속처럼 다루어졌다. 제목에 붙은 숫자들은 대개 미량인 작품의 무게를 가리킨다. 그림처럼 걸려서 빈 벽을 더 넓게 보이게 하지만 시선을 잡아 끈 후 그 안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며 이모저모 뜯어보게 한다. 작품들은 한 손에 잡힐 듯하지만 짧은 길이에 많은 의미를 담은 문장같이 음미하게 한다. 현대적 환경을 이루는 광대한 스펙터클처럼 벽 하나를 또는 공간 전체를 가득 채워도 빈 곳이 많고 허술한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축소지향의 태도는 겸허함의 결과인지 자신감의 결과인지 알 수 없다. 


권효민이 사용하는 주요 재료인 플라스틱은 인류의 유용한 발명품이지만, 성형된 후 한 번 쓰고 나면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제품은 그것이 대량생산 시스템에 의하여 저렴한 생산비가 나오는 것이지 단품으로 만든다면 다르다. 아껴가며 사용한 듯한 재료들은 레디메이드를 활용한 것이 아니다. 원하는 색과 형태는 기성품에 없기에 안료를 섞은 레진으로 만든 작가만의 구슬, 또는 퍼즐인 셈이다. 이 퍼즐이 어디까지 맞춰져야 완성된다는 기준은 전적으로 작가에 의해 결정된다. 작은 면적에 요소들을 여러 방식으로 집적하여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요즘은 3D 프린터같은 편리한 기기가 있지만, 권효민이 주로 쓰는 레진은 3D 프린터에 적용하기 힘들다. 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을 위해 열어두고 있다. 이러한 재료도 미적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투여되면 보석 못지않은 영롱한 아름다움으로 거듭날 수 있다. 



Gallstone_0.0459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포맥스, 5.5 X 5.2 X 4.7cm 2021



Gallstone_0.0459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포맥스, 5.5 X 5.2 X 4.7cm 2021



Gallstone_0.013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포맥스, 3.5 X 6.5 X 3cm 2021 



Gallstone_0.013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포맥스, 3.5 X 6.5 X 3cm 2021



해변에 버려진 녹색 소주병 조각이 오랜 시간 동안 밀물과 썰물의 세레를 받으면서 에메랄드같이 보이는 정도의 변신일 수 있다. 무기물질과의 비교가 너무 무심하다면 몸에 박힌 작은 돌을 진주로 만드는 조개와 비교할 수도 있겠다. 작가는 [Gallstone]으로 명명한 자신의 작품을 가장 아프다는 담석과도 비교한다. 심신의 고통이 몸에 돌로 쌓이는 병이 있다. 작품 제목 끝에 붙은 숫자는 담석의 무게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의 무게다. 이 결정체는 담석같은 병적 징후를 넘어서 종교적 수련의 결과인 사리와도 비교할 수 있다. 그 무엇으로 불리든 권효민의 작업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집단 노동과 유통의 결과인 광산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표현도 있듯이, 귀금속의 채굴에도 전쟁과 수탈의 그림자가 있지 않은가. 아름다움을 쟁취하기 위한 개인적 인내와 사회적 투쟁은 그만큼의 열락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몰입은 인내와 열락을 하나로 만든다. 


의미 있는 예술인가/ 예쁘장한 장식인가의 물음에 대해 작가는 굳이 자신의 작품 속 장식적인 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장식과 예술의 경계는 반복과 차이에 있지만, 차이는 반복의 결과이다. 어떤 반복은 양적 수준을 넘어서 질적 변화를 야기한다. 무엇보다는 어떻게 다루는가 왜 그렇게 하는가가 중요할 따름이다. 최초의 출발은 작가의 취향에 있었을 것이다. 1985년생의 작가는 처음 컬러 텔레비전이 나올 때의 놀라움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미술을 접하기 전에 이미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는 더욱 늘어나고 있는데, 젊은 작가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규정하다시피 하는 이러한 지배적 문화에 대해 정규 교과과정은 키치나 팝아트 정도의 항목만으로 떼우고 있지는 않은가. 순수미술을 중심에 놓는다면, 권효민의 경우 흔히 말해지는 조형적 미(美)가 아니라, 뭔가 억압하고 감춰야 하는 주변화된 것들에 관심이 있는 셈이다. 작가는 지금의 작품보다 더 작은 면적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네일 아트 같은 장식문화를 좋아했다. 



Gallstone_0.013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포맥스, 3.5 X 6.5 X 3cm 2021



Gallstone_0.005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포맥스, 3.3 X 2.8 X 2cm 2021



Gallstone_0.0049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포맥스, 2.2 X 3.2 X 2.2cm 2021 





평소에는 가리고 다니다가 보이고 싶을 때 드러낼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사물에 대한 취향과도 맞아 떨어졌다. 겉으로는 개성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세계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은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발은 작가로 하여금 남모르는 고밀도 축적기술을 연마하게 했다. 이전 작품에서 캔버스의 일부를 차지하던 작은 영역을 이번 전시에서는 벽면에 그대로 제시했다.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이러한 방식으로 일반 갤러리에서 전시하기는 힘들다. 공공적 성격을 띄는 전시회를 이용하여 특이하게 작품을 배열했다. 작품이 있나 싶을 정도의 전시장은 작은 작품을 그림처럼 벽에 걸었기 때문에 더 훵 했다. 좌대에 놓지 않고 그림처럼 벽에 건 것은 단순한 공예 작품같은 느낌을 떨치기 위해서다. 벽에 붙어있는 권효민의 작품은 한 면은 볼 수 없다. 개인전 급에 해당되는 집단 전시의 한 켠을 차지한 전시장은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했고 1미터 폭의 출입구는 딱 한 명의 관객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밀도와 내밀함이 만나는 장은 장식이 아닌 예술에서만 제공된다.


출전; 가창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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