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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림 / 이미지의 충돌로부터 발생하는 의미

이선영

이미지의 충돌로부터 발생하는 의미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예림의 작품은 대개 여러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은 분할되거나, 서로 다른 화면이 붙여지거나 하는 등이다. 심지어 한 화면일 경우에도 미세한 분할 면이 발견된다. 각자 산산이 흩어질 수 있는 화면이지만, 다행히 인간이 등장하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단편들은 의미로 응집되려는 경향이 있다. 피터 부룩스의 [육체와 예술]의 논지처럼, 서사의 중심에는 몸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제작하기에 앞서 수집하는 것들은, 이미지, 즉 지시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호나 기표들이다. 애초에 불확실할 수 밖에 없는 단편이다. 현대의 이미지 소비자들에게 가장 주도적인 양식이 된 영상은 그 자체가 여러 장면이 편집된 것이다. 무엇과도 쉽게 붙을 수 있는 기표가 되기 위해서 지시대상이라는 묵직한 실재는 떼어버렸다. 수집된 이미지들은 최초의 출발이 무엇이든 해체는 필연적이다. 영상을 이루는 사진은 어떠한가. 시공간의 절편인 사진은 맥락 없이는 대부분 수수께끼다. 잘 찍은 사진은 그림처럼 그 전과 후를 내부에 포함하면서 해체의 정도를 줄인다. 




꿈에서 함께 쓰는 베개, 그러나 마일트레인이 우릴 깨우러 온다. 50F(116.8X80,3)2021



불과 피와 살, 116.8X80,3 Oil on canvas 2021



그러한 사진은 단 한 줄의 제목만을 추가함으로서(또는 그 조차도 필요없이) 상당 부분 의미가 전달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을 건지기는 쉽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서는 이미지 사냥꾼의 집요한 기다림과 정교한 포획 장치가 필수적이다. 연작이라는 방식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 그림도 한 장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러한 ‘문학적’ 주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더니즘 회화다. 그린버그가 그러한 주장을 펼쳤다. 재현적 요소가 있는 김예림의 작업은 화면을 여러 개 병렬시킴으로서 서사가 전개될 단초를 마련한다. 그래도 하나의 화면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지만 혹 붙인 것처럼 최초의 응집성이 분산될 수도 있다. 이완과 해체의 국면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즘 문화에서 중요한 화가로 평가된 데이비드 살르 또한 병치를 즐겨 썼다. 작가는 데이비드 살르의 경우 어디까지가 하나의 이미지인지 모르게 이미지를 쌓는다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자기 작품에는 보다 감정이 실려 있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이미지가 등장하는 김예림의 작품은 의식과 무의식이 조우하는 장이며, 작가 개인의 세계와 더 연관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행위 중의 손이나 타오르는 불은 모종의 의미를 향하는 것이다. 작품 [꿈에서 함께 쓰는 베개, 그러나 마일트레인이 우릴 깨우러 온다]는 몇 명의 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굳게 잡은 손들이 있는 왼편 화면과 여성/남성의 얼굴이 위아래로 배치된 작품에서 관객의 연상은 비교적 쉽게 형성된다. 각기 다른 화면이지만, 남성과 여성이 애틋하게 서로를 보는 듯한 얼굴 각도는 손들이 어떤 결속이나 약속을 의미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작품 [손 안에 든 인생]에서 무표정한 소녀와 포옹하는 사람 사이에 얽혀있는 손들은 무덤덤함부터 감동까지 이르는 인간관계의 복잡함이 느껴진다. 작품 [소각할 수 없는 슬픔]에서 나무 아래 숨어있는 듯한 사람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기를 보호한다. 다른 편의 불을 제목과 연관시킨다면 슬픔 또한 태워버리고 싶다는 희망이다. 




소각할 수 없는 슬픔 30P(90.9X65.1)2020



손안에 든 인생,91.0X207.8 2021



작품 [불과 피와 살]에서, 코피 흘리는 여성과 소파에 붙은 불은 일상을 깨는 어떤 사건을 떠올린다. 불은 피와 살을 삼켜서 자신과 같은 무기물로 만들 것이다. 작품 [나의 별 볼 일 없던 시절에 대한 동경]에서 불 앞에 있는 것인지 불 속으로 뛰어들기 직전인지의 아슬아슬한 여성이 있는 왼편 화면과 아들의 재롱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젊은 아빠의 모습이 있는 오른편 화면에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왜 여성은 불 앞에서 홀로 있는 것일까. 그 불을 따스한 것일까, 위험한 것일까. 젊은 아빠와 아이가 별로 사랑스럽지 않게 표현된 점, 요즘의 젊은 여성들이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가치 부여가 낮다는 점으로 두 화면이 엮인다고 상상한다. 이미지의 출처는 팔로우 해놓은 다른 작가의 작품부터 친구의 사진 등 거의 무분별하지만, 그것을 오리고 붙일 때는 선택에 선택을 거듭한다. 왠지 끌리는 어떤 부분들의 수집과 조합은 개인의 무의식을 암시한다. 자신도 모르게 선택되는 손, 불, 무덤덤한 표정의 사람 등은 명백한 기표가 된다. 


가장 표현적이어야 할 얼굴은 무표정 또는 익명적이고, 손은 얼굴보다 더 활발한 움직임이 있다. 손도 인간만의 특징이지만 얼굴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불이라는 무기물은 인간이라는 유기체보다 더 역동적이다. 유기체 자체도 서서히 타는 불꽃이기는 하지만, 대개 불은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사태를 상징한다. 작품 속 불은 유용성보다는 사건성에 가깝다. 김예림이 선택한 사진이나 영상의 한 장면은 자세히 재현되지 않는다. 작가는 붓으로 드로잉하듯이 거칠고 빠르고 성글게 그림으로서 애초의 불확실성에 불확실성을 추가한다. 인덱스로의 특징을 가지는 사진을 보고 그렸어도 결국 익명성과 임의성이 강조된다. 무관심의 모래밭에서 관심의 바늘을 찾는 듯한 이미지 인플레 속에서 사용자(소비자)를 지나치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특성은 이처럼 익명적이고 임의적이다. 하지만 어떤 관계는 익명성과 임의성을 거부한다. 가족, 특히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그렇다. 김예림의 작품 속에서 이 긴밀한 관계는 어떤 식으로 변질되는가. 




두 사람의 계절 72.7x60.6 Oil on canvas 2018



어떤 이의 슬픔과 어떤 이의 유년 50F(116.8X80,3)2021



작품 [두 사람의 계절]은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가장 많이 그려졌을 어머니와 아이의 상은 사뭇 자연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살이라기 보다는 아이 몸을 파고드는 나뭇가지같은 어머니의 두 손은 아이와의 관계가 그리 우호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배경 또한 부드럽지 않다. 모체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아이를 붙들고 있는 존재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바라보는 표정은 부드럽지만 표정의 반은 흐릿하게 지워졌다. 관객은 둘이 한 몸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작품 [어떤 이의 슬픔과 어떤 이의 유년]에서 여성과 아이는 많은 사연을 연상시키는 조합이다. 작품 제목에는 슬픔이라고 특정되어 있지만, 젊은 여인의 표정은 웃는 것이지 우는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세로로 조합된 두 화면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방향성은 슬픔에 빠진 여성으로 보면, 아래는 보호자 없이 홀로 있는 아이와 관련된 사연을 생각하게 한다. 


작품 [어린이와 케이크]에서 아이와 케이크가 병렬된 화면에서 케이크에 대한 관객의 태도는 아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욕구 불만에 가득한 표정의 아이는 케이크가 먹고 싶은 것일까, 익명성과 임의성을 벗어날 때 이미지는 관심과 필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의 인플레는 대부분 사용자/소비자의 끝없는 권태를 낳는다. 물론 의미의 강요 없이 부담 없는 선택들로 이루어진 일상은 편안하다. 하지만 예술은 소비의 편안함이 아니라 생산의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는 형식이며, 인간이 편안함과 익숙함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에 존재한다. 문화와 예술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김혜림의 시작은 문화적이다. 작가가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움에의 강박관념 없이 자신의 소비패턴을 자연스럽게 활용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회화작업을 통한 차이를 둔 반복으로 또 다른 감각과 의미를 만들고자 한다. 현대의 정보기기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려는 야심으로 경쟁한다. 가로로, 세로로 접히면서 이음매를 최소화하는 스마트 폰도 인기를 얻고 있다. 




나의 별 볼일 없던 시절에 대한 동경 50F(116.8X80,3)



어린이와 케이크,116.891.0, Oil on canvas, 2021



오래된 연인 72.7x60.6 Oil on canvas 2018



하지만 문화가 세계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려 할수록 현대 회화는 분열을 명백히 한다. 해체란 리얼리즘과 반대되는 의미였지만, 이제 해체가 보편적 리얼리즘이 되다시피 했다. 해체의 또 다는 표현인 병치와 공존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해체주의적 개념인 보충이나 계열은 열림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열림과 무의미는 한 끝 차이다. 그것은 예술이나 주체의 자율이나 자유가 곧장 그 반대로 곤두박질 칠 수 있음과 마찬가지다. 여러 화면이 헐겁게 결합 된 김예림의 작품은 그 간극과 균열 속에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품 [오래된 연인]은 한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경계가 있다. 이 경계는 각기 사랑에 빠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경계와 일치한다. 배경은 밤과 낮처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미지의 원천이 무엇이든 간에 등장인물의 개별성은 사라진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오래된 연인’은 인간관계의 진실을 시험하는 잣대가 된다. 인간은 이제 인간보다는 익명적 시스템과 더 밀접하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부각된 현실이다.  


출전; 레트로봉황 레지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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