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박춘화 / 밤의 시작은 어디인가

이선영

밤의 시작은 어디인가

  

이선영(미술평론가)


  

[밤의 시작(詩作)] 전은 시작에 대한 동음이의어를 이용하여, 밤에 시를 쓰듯이 했던 작품들이 선보였다. 정작 작가는 문학적 표현을 어려워하며 차라리 그림이 쉽다고 말한다. 자기에게 맞는 언어의 선택은 무의식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것을 길어내야 하는 예술일수록 필수적이다. 작가는 수많은 시공간을 겹쳐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추상적 선으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이 최대한 자연스럽기 위해서 더 많은 밑그림이 필요하듯, 한 번에 휙 갈 수 없는, 즉 일필휘지로 그릴 수 없는 그림이 있다. 시공간의 단면들이 중층결정되는 회화에 비해 서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 보다 선명하다. 하지만 그림의 메시지는 영상이나 문학같은 시간예술처럼 정해진 시간의 축을 타고 단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시는 산문보다는 그림과 더 비슷한 소통방식을 가진다. 산문이 이해하기 쉽게 술술 풀어쓴 양식이라면 시는 은유적이기 때문이다. 산문은 투명한 메시지 전달에 유용하고 시는 강렬한 표현에 적합하다. 




박춘화-밤길I,150x210cm,장지에아크릴채색,2021



은유는 유전자처럼 여러 겹 꼬여있어 잠재형(genotype)이 어떤 표현형(phenotype)으로 결정될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지만, 때로 장황하지 않게 바로 공감된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아리스토텔레스)이라는 오래된 언명은 예술을 역사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 단순한 사실 확인은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예술 또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지만 그저 사실 확인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때로 환상적이지만 자신의 발길이 닿았던 곳, 지금 발딛고 서 있는 장소로부터 출발하는 박춘화의 작품은 사실의 재확인과 주체의 표현이라는 경계선이 중요하다. 공감의 방식을 두고 시와 산문, 문학과 미술이 갈린다. ‘詩作’은 시적 작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박춘화의 작품은 반복적으로 회귀하면서 이어가는 대화의 분위기가 있다. 깊이 있는 표면에서 시선은 오래 머물게 된다. 그런데 밤의 시작은 언제인가? 이에 대해 정확히 정의할 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해가 뜨는 광경에 비해 어둠이 내리는 모습은 신비에 가려있다. 전자는 요란하고 극적으로 다가오지만, 후자는 어떤 시점을 특정하기 힘들다. 풍경을 주로 그려온 박춘화의 작품에서는 밤의 시작은 어디인가로 묻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장소에 따라 해가 지는 시간은 다르다. 산책로를 그린 작품들에서 가로등은 밤의 기표가 된다. 밤이라는 시간은 직접적으로는 작업에 몰입하는 시간대를 말하지만, 밤이라는 설정으로 인한 상상력이 화면의 곳곳 어두운 구석에서 피어오른다. 이전 시대의 깊고 어두운 숲속에서는 호랑이도 여우도 나왔지만, 가로등 길이 나 있는 자연에서는 나올 것이 없다. 작가는 이 문명의 밤에 여러 겹의 막을 치면서 다시 무엇인가 나올법하게 만든다. 밤의 산책자는 깨어있는 채 꿈을 꾼다. 밤은 낮의 반대로 생각된다. 양극으로 나누어진 상징적 여건들에 대해 연구한 질베르 뒤랑은 [상징적 상상력]에서 인류학의 예들을 탐색한다. 




박춘화-밤길II,112x112cm,장지에아크릴채색,2021



그에 의하면 대립적인 것끼리 서로 균형을 취하는 광활한 체계가 존재하며, 그 안에서 상징적 상상력은 서로 대립하는 것들끼리 응집하는 체계라고 정의한다. 뒤랑에 의하면 상징적 상상력의 내용, 즉 상상적인 것은 상호 대립적인 두 개의 힘에 의해 조직화 된 광활한 분야이다. 상징적 상상력에 바탕 한 인류학은 상징에 내재 된 대립적인 긴장 속에서 밤과 낮을 대표적인 이원 구조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구분에 의하면 박춘화의 [밤의 시작]은 ‘이미지의 밤의 체제 쪽으로 다원 결정’(질베르 뒤랑)된다. 박춘화의 풍경은 그냥 보이는 장면을 넘어서 꿈과 무의식, 때로는 죽음에 이르는, 밤과 연관된 상징들이 작동한다. 단순히 보이는 한 장면 속에서 연동되는 상징들은 한 장에 불과한 그림을 풍부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계 안에서 동네 풍경들이 걸린 전시 동선의 끝자락에 거대한 바다 풍경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박춘화에게 밤은 무엇보다도 작업의 시간이다. 


밝을 때 작업을 시작하지만 집중하는 시간은 주로 12시부터 새벽 2-3시까지다. 12시간 가까이 작업하는 전업 작가로 오후부터 서서히 가속도를 붙이는 것이다. 가속도를 붙여야 몰입이 가능하다. 또한 밤이 깊을수록 높아지는 속도는 작품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을 더 자주 충돌시키면서 예기치 못한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다음 날도 작업을 해야 하므로 강제로라도 종료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하기도, 파트타임으로 하기도 힘든 것이 회화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회화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일상적 삶]에서 ‘나는 우리들을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으로서의 자정을 사랑하며, 우리에게 자신을 정오에 실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는 것으로서의 자정을 사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이러한 밤의 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양적일 뿐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 그렇다. 도시 근교의 산책로가 보이는 작품 [밤길 I]는 밤늦은 시간인지 인적은 없다. 




박춘화-적막,140x210cm,장지에아크릴채색,2021



박춘화-산책,112x162.2cm,장지에아크릴채색,2021



실제로 없을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한 생략이나 선택일 수 있다. 가로등만이 숲과 길을 밝혀준다. 가로등 덕분에 도시 근교의 하늘은 완전히 어둡지 않다. 어둠이 진정한 어둠의 역할을 하는 산골 같은 곳에서는 산책이 어렵다. 번화가에서 산책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곳에서의 산책은 자연도 무섭지만 사람 또한 무섭기 때문이다. 이러한 익숙함은 외부에 시선을 뺏기지 않고 자신에 집중하게 한다. 눈감고도 갈 수 있는 길에서 사색이 가능하다. 모르는 길이라면 경로 하나하나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이 인식해야 하는 과제는 의식을 활성화하지만, 익숙함은 무의식도 활성화한다. 아무 생각 없는 산책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걷기가 두뇌의 활동을 자극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반환점을 다시 돌아 매일 걷는 그 길은 일상의 반복과 그 반복이 쌓여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이다. 해가 지거나 뜰 무렵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화하는 하늘빛, 그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주변의 분위기는 색과 빛에 민감한 시각 예술가가 평생 도전 해 볼 만 한 오래되고도 새로운 풍경이다. 


밤의 시작과 끝은 장중하다. 산책은 박춘화의 작품 속 풍경처럼 가로등이 깔려있는 길, 즉 도시 근교가 이상적이다. 그곳은 완전한 야생도 완전한 문명도 아닌 중간 지대로, 마치 정원같은 위상을 가진다. 스스로 자라면서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정원은 주체와 객체 간의 이상적인 교감으로 예술의 훌륭한 모델이 되어왔다. 물론 박춘화의 작품 속 자연은 공공의 정원이다. 도시가 개발될 당시부터 시민의 세금 1/n로 조성된 장소다. 사회가 시스템화될수록 이러한 공공의 영역은 확대된다. 도시의 산책로는 타인의 눈을 대신하는 인공 빛이 산재하며 그만큼이나 CCTV 등이 많이 깔려있다. 누군가 나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걸어도 혼자가 아닌 곳이다. 박춘화가 보여주는 자연을 많이 포함한 풍경은 진기한 곳은 아니다. 즉 작가가 즐겨 산책하는 일상의 장소다. 풍경화는 미술사에서 탄생할 당시부터 이국취향 등 대리체험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그 후예가 풍경을 담은 엽서 사진일 것이며, SNS를 채우는 수많은 여행 사진일 것이다. 




박춘화-설경I,45.5x53cm,장지에아크릴채색,2021



SNS에서 한번 빵 터져 주면 그곳은 단번에 명소가 되어 그 비슷한 포토존들이 마구 생겨난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 다양한 코스를 그린 듯한 길은 작가 스스로 익숙한 곳이며, 같은 동네 사람이면 거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도 있을 만큼의 지형적 유사성이 있다. 약간의 첨삭을 한 산책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동시에 어디에도 같은 곳은 없는 위상학적(topological) 공간이기도 하다. 풍경은 약간의 재조정을 거칠 뿐 실제에 충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 느낌이 없지 않은 것은 작가의 감수성을 뒷받침해주는 기법에 있다. 장지에 아크릴 채색으로 그려지는 그림은 여러 겹의 층이 쌓인 결과다. 물을 많이 섞어서 여러 번 올려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한다. 스며든 듯한 화면에서 물감의 느낌은 최대한 배제된다. 희석한 아크릴 물감을 직접 화폭에 대지 않고 천에 닦은 다음 색을 올려 나가기에 자연스러운 느낌이 살아있다. 한 번에 칠해진 것이 아니라 반복되어야 하는데, 스미는 효과를 강조하다 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반복된 실행이 요구되는 것이다. 


화면은 물리적으로 두텁지 않으면서도 시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배어든 색감으로 깊이를 가지게 된다. 관객의 지나치는 걸음에도 미동을 보이는 그림은 두껍지 않지만 깊은 느낌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서양화보다는 동양화에 가깝다. 밤은 깊이를 추구하는 작가의 형식적 선택에 의해 자동적으로 호출된 소재이자 주제가 아닌가 할 정도로 내용과 형식의 밀착도는 높다. 낮이라면 분열되어 있을 사물들을 포용하는 밤이다. 꿈은 현실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있을 법하지 않은 모든 것이 실행되는 무대이다. 밤의 분위기를 꿈과 비교하는 장 그르니에는 [일상적 삶]에서 ‘우리는 태양 아래서 우리의 자리를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밤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창조해 낼 수 있다. 꿈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에게 공통적인 분위기에 잠긴다. 분열을 만들어내는 것은 각성상태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수 십 번 층을 올려 만든 색감, 또는 분위기는 작품 제작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후에 구체적인 묘사가 시작된다. 




박춘화-잔설,150x210cm,장지에아크릴채색,2021



박춘화-설경II,45.5x53cm,장지에아크릴채색,2021



작가가 만든 자리에 실제의 공간이 얹혀진다. 자리(place)와 공간(space)은 종교학에서 구체성과 추상성으로 비교되곤 하지만, 박춘화의 작품에서는 수렴된다. 두 갈래 길이 저 어디메쯤 만나는 듯한 각도가 보이는 작품 [밤길 I]이 늘 다니던 길이 다른 시공간에서 보게 될 때 다가온 낯설음이 포함되어 있다면, [밤길 II]는 그 길을 걷는 자의 시점과 보다 근접하다. 어딘가에서 내려다 본 길과 걷고 있는 길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무인지경이지만, 그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산책자가 전제된다. 길과 자연은 밤에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으며, 도시의 반사된 빛에 의해 숲보다도 밝은 저편의 밤하늘은 지상의 풍경과 깊이 접속한다. 작가는 어떤 과장법도 없이 평범한 산책로를 몽환적인 풍경으로 변화시켰다. 어둑한 곳에 감춰진 소실점에 걷는 이를 이끄는 힘이 있을지 모른다. 붙잡을 수 없고 가닿을 수 없어도 늘 한 뼘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미지의 시공간이다. 


밤이라는 설정은 실제 풍경을 마치 꿈이나 무의식의 차원으로 변모시킨다. 매일 마주하는 화폭에서 작업을 통해 끌어낼 미지의 풍경에 설렐 수 없는 이는 화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지상의 안락함이나 영광을 누리기는 힘들지만 그자체는 충만한 자질이 요구되는 것이 화가의 자리다.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좋았던 것, 가장 쉬웠던 것이 그래도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화가일 것이다. 작가가 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또한 한 길을 걷기 때문이리라. 자연과 예술은 반복 속에서 차이를 길어낼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새로움과 진보 또한 무수한 반복의 결과이다. 작품 [적막]은 산책로의 끝자락에 있을 법한 장소를 보여준다. 원경에는 희미하게 아파트 불빛이, 중경에는 야간 조명을 한껏 받는 체육시설이 보인다. 미세먼지 가득한 날인지 안개가 가득한 날인지 몰라도, 정상적이라면 더 보여야 할 풍경들이 많이 생략되어 있다. 




박춘화-포말몽환,210x600cm,장지에아크릴채색,2021



웬만한 아파트라면 비슷할 그 풍경은 어느 작품보다도 추상적 공간의 느낌이 강하다. 아파트가 그자체로 사회적 풍경이기도 한 한국에서 계급적 경계선으로 가득한 현대도시의 인공 빛은 사각지대를 더욱 어둡게 만든다. 중경의 테니스장은 둥 떠 있는 배처럼 보일 정도다. 이번 전시에는 바다 풍경을 그린 작품이 따로 있지만, 박춘화의 밤 풍경에는 이미 바다가 있다. 밤은 시간적 개념이고 바다는 공간적 개념이지만, 그림은 시간과 공간이 아스라이 섞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아파트든 테니스장이든 그곳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좌표가 보이지 않는다. 저편에 아파트 불빛이 보이는 또 다른 작품 [산책]은 전경의 산책자와 동일화하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그리 부조리하지는 않다. 길 따라가면 저편의 아파트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어느 풍경보다도 광원이 많아서 어두운 풍경일지라도 장소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다리 아래나 축대의 경사면까지 밝은 빛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적막]의 경우 초현실주의적이다. 배처럼 보이는 테니스장은 갈 길을 모른 채 표류한다. 주변의 우주적인 어둠은 지상의 땅 한 조각이 있는 풍경을 떠도는 우주선처럼 보이게도 한다. 이러한 둥 떠 있음은 환상적이면서도 사회적 은유가 있다. 한국에서 집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현대인 특히 수도권 주변에서 아파트에 사는 인구가 반이 넘는 한국에서 대지에 대한 감각은 추상적이다. 집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대부분 붕 떠 있다. 대지는 가난한 이 또는 부유한 자의 몫일 것이다. 어두운 공간은 드러나야 할 것을 더 많이, 그리고 깊게 숨기며 애써 그것을 묻는 이에게 암시적으로 대답한다. 설경은 눈이라는 요소 때문에 밝아 보인다. 눈의 색은 여러 가지지만 그래도 화이트를 기본으로 한다면 그것은 어둠과 대조되는 빛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설경 I]은 인공조명이 없다. 눈 자체가 빛이기 때문이다. 빛을 가로지르는 검은 선, 즉 나무는 드라마 없는 긴장감이 내재해 있다. 




박춘화- 밤길I 전시전경



박춘화-밤의시작詩作, 장욱진미술관 레지던스, 전시전경 2021



작품 [잔설]은 눈보다 숲의 비중이 더 크다. 눈/빛은 계절과 시간과 날씨에 따라 나타나고 물러서기를 반복할 것이다. 작품 [설경II]에서 눈은 아직 푸르름이 남아있는 산에 바람으로 나타난다. 아래에 뚫린 터널은 거의 파도치는 듯한 압도적인 숲 풍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문명은 점과 점을 잇는 최단의 거리를 통해 속도를 내지만, 자연은 그때 불었던 바람과 그때 내렸던 눈과 그때 푸르렀던 식물을 반복, 재생할 것이다. [포말몽환]은 다 합치면 가로 6미터가 가까운 스펙터클한 작품이다. ‘밤’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이 전시에 난데없는 바다 풍경은 그것이 밤바다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수평선은 화면 위로 한껏 당겨져서 이런 쓸데없는 질문은 확인할 길은 없다. 밤의 시작(始作)이 언제부터인지 묻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작품이 주로 밤에 작업하는 작가의 ‘밤의 시작(詩作)’인 것은 분명하다. 서로를 비추는 관계인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종종 무시된다. 


‘하늘색’이라는 용어가 있듯이 하늘은 푸르다고 지각된다. 그것은 공기의 역할 때문이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색의 수수께끼]에서 ‘우주적 암흑의 그림자들이 같은 공기를 뚫고 진입함으로서 필연적으로 공기의 흰색이 파랗게 보일 수밖에 없다....공기의 파랑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색이다’라고 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인용한다. 본래 무색이며 공간, 즉 창공의 깊이에 의해 색을 빌려 받는 공기의 파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이런 높은 곳의 하늘에 대해 깊은 곳의 또 다른 파랑이 응답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 두 번째 요소는 상부의 무한성에 못지않게 비이성적이고 야성적이고 파괴적이다. 이것은 곧 바다다. 파랑의 세계인 바다는 속세의 어떤 공간과도 비교될 수 없다. 마가레테 브룬스에 의하면 파랑은 ‘바다를 어두운 우주 공간처럼 바닥없는 깊은 곳으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파랑은 우주를 이루는 5 원소 중에서 ’에테르‘(아리스토텔레스)에 해당된다고 여겨졌다. 




박춘화-밤의시작詩作, 장욱진미술관 레지던스, 전시전경



박춘화-산책, 전시전경, 2021



고대적 우주론에 의하면 파랑은 4원소인 불, 물, 공기, 흙의 춤 즉 우주의 유희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색의 수수께끼]는 파랑이 두려운 허무로서의 가상이나 잠재성으로 침잠하는 무수한 색채 세계들의 근원이라고 결론 내린다. 파랑은 허무와 깊이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가치를 연결시킨다. 바다와 밤은 시학 뿐 아니라 물리학에 의해서도 연결된다. 달과의 관계 속에서 밀물과 썰물이 생겨난다. 또한 밤의 색이 블랙이 아니라 실은 깊은 블루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의 상상력은 두 세계를 기꺼이 연결시킬 것이다.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에너지 발전소도 있듯이, 파랑은 보기보다 큰 에너지를 가진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촛불의 중심이 파란 것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파랑은 물리적 실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에너지를 함유한 색이다. 가시적인 파랑 보라는 더이상 보이지 않는 세계로 연결되어 보다 더 강력한 자외선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푸른 분위기에 쌓인 밤은 얼마 전 있었던 박수근 레지던시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요즘 많이 그리고 있는 밤 풍경은 그 때 시작되었다. 그림을 그리다 우연히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을 본 것이다, 24시간 불 밝히는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어둠을 체험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전기가 발명된 것도 인류 역사상 그리 길지 않으니, 어둠의 강도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대적일 것이다. 가령 빛과 이성을 하나로 보는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암흑기’로 규정한 중세 시대는 어떠했을까. 절대적인 어둠은 신학을 비롯한 형이상학적 사유 또는 상상력의 조건이지 않았을까. 장 베르동은 [중세의 밤]에서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하면서 천지창조의 이야기 서두에 적는 창세기의 저자를 인용한다. 장 베르동에 의하면 일몰에서 일출까지의 시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밤 동안에는 움직임이 전혀 없기 때문에 시간이 부재한다고도 본다. 




박춘화-잔설, 전시전경



박춘화-적막, 전시전경



그는 중세인들은 사랑, 수면, 죽음이 연결된 이 피할 수 없는 밤을 자신의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고 말한다. 불빛이 거의 없는 강원도의 깜깜한 밤에서 시작된 풍경은 작가가 사는 분당 근교로 옮겨졌다. 야경은 깜깜할 때 보이는 것 또한 본 결과물이다. 얇은 층들로 밤의 깊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바다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박춘화의 작품에서 밤과 바다는 비슷한 존재 방식을 가지는 것이다. 세상이 생겨난 이래 수없이 반복된 밤과 낮의 교차는 멈춤 없는 바다의 운동만큼이나 지속적이다. [포말몽환]이라는 제목과 연관하여 수없이 생성 소멸했던 것, 즉 포말이다. 층이 많이 깔리는 작업 스타일 탓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작품 또한 밤과 낮처럼 밀물과 썰물처럼, 또 그것이 만들어내는 거품처럼 수많은 과정을 거쳤다. 이번 전시에 앞서 열린 [포말몽환](2021, 박수근미술관) 전과 같은 제목의 작품은 이전 전시에서 붙어있던 4개의 바다 풍경이 이번 전시에서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순서도 바꿔서 설치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화면이 아래로 자연스럽게 드리워졌다는 차이가 있다. 이번 전시의 많은 작품들은 벽보다는 모서리에 걸리는 것으로 선택됐으며, 관객의 이동에 의해 생겨나는 미세한 영향 또한 염두에 둔다. 중력에 반응하여 아래를 향하면서도 언뜻언뜻 다른 방향으로도 움직인다. 그림은 설치의 문법을 통해 창이 아니라 막이 된 것이다. 막은 창보다 불투명하다. 벽 밖으로 튀어나와 내걸린 그것들은 얇디얇아도 지나는 바람에도 자신의 물리적 조건을 드러낸다. 어둡고 깊은 화면에 액자는 번거로운 반사면을 보여주기에 피한다. 보존에 대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단단하게 박제해 놓기보다는 둥글게 말아서 보관하고, 때가 되면 펼쳐 보인다. 작가는 같은 소재로 다른 변주를 보여준다. 포말이 밀려오는 듯한 형상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연속적인 화면에 간극이 강조된 것이다. 관객은 전체를 보면서도 각각의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박춘화-포말몽환 전시전경



전체는 늘 부분이 축적된 결과일 따름이다. 각각의 단편에는 전체가 있다. 같은 크기의 4개의 풍경은 바다가 생긴 이래 억겁의 세월을 반복했던 물리적 운동 중 몇 개의 단면에 불과할 것이다. 실재에 대해 의심했던 라깡이 비유로나마 인정했던 실재가 대지와 바다다. 박춘화의 작품에서 대지는 인공포장과 정원술로 뒤덮여 간접적으로만 드러난다면, 바다는 자신의 야생성을 한껏 드러낸다. 바다와 대지라는 실재계는 최초에 바다처럼 유동적이었을 주름진 대지와도 유사하게 연결된다. 박춘화의 풍경은 밤처럼 깊고 신비롭기는 하지만, 비현실은 아니다. 작가가 직접 보고 알고 체험한 장소다. 그렇다고 재현주의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풍경 묘사의 경우 꼭 필요한 것만 그리려 한다. 가령 이번 전시작품에서 많이 그려진 산책로에서 근처의 아파트는 삭제되거나 흐릿하게 표현되었다. 작가가 현재 살고있는 분당에는 산도 아파트도 많다. 


문명의 기운이 있는 밤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일상을 다른 차원으로 변하게 하는 회화의 힘이 적용된 풍경이다, 오랜 밑작업은 그자체로도 제시될 수 있는 추상화일 수 있겠지만, 작가는 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재현도 추상도 아니다. 미켈란젤로가 돌에서 조각적 형상을 꺼내려했듯이, 작가는 풍경에 이미 있는 것을 꺼내려 한다. 이때 외적 풍경과 내적 풍경의 경계는 사라진다. 깊은 밤의 톤은 푸른색이 줄 수 있는 우울함을 연상시킨다. 사람이 없고 한적하고 촉촉이 젖은 듯한 풍경은 쓸쓸해 보인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파랑은 항상 어둠을 끌고 다닌다’는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또한 공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던 칸딘스키는 ‘블루가 검정으로 침몰하면서’ ‘슬픔에 동반되는 음향을 얻는다’고 말한다. 작가는 좋은 일들은 그냥 통과되지만, 자기에게서 안 나가고 내게 담겨질 때 풍경과 만난다고 말한다. 그 풍경들이 깊어 보이는 것은 기법을 넘어서 마음속에 담았던 것을 꺼낸 것이기 때문이다. 


출전; 장욱진미술관 레지던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