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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 부재하지만 욕망으로 인해 현재하는 풍경

이선영

부재하지만 욕망으로 인해 현재하는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로맨스]라는 부제로 열린 박현진의 작품은 대부분 두 가지 색으로 제한되어 사진에 찍힌 원래 대상에 대한 정보량을 감축한다. 피사체를 흐릿하게 찍은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를, 그리고 누구를 찍은 것인지 불확실하다. 사진은 인덱스라는 고유의 특징이 있지만, 로맨스라는 개념으로 대변되는 허구의 몫 또한 상당하다. 4자 한자숙어인줄 알았던 ‘내로남불’이 선거판을 뒤흔들고 있는 시점이지만, 쉽고 간단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픈 작가의 의지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는 부제다. 로맨스에 빠진 사람은 냉정한 현실주의자와 달리, 핑크빛으로 세상을 보기도 한다. 작가는 사진에 대한 상식적인 믿음에 회의적이다. 그에게 사진은 현실만큼이나 허구적이다. 문예사조사에서 로맨스(고대 프랑스어인 로망즈romanz)는 소설과 관련이 있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로망스는 현실을 떠난 독립적인 모험에 관한 허구적인 이야기(history)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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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소설]에 의하면 로망스는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묘사한다. 또 다른 문학 이론가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리트레 사전]을 인용하면서 소설과 로망스의 관계를 말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이란 상상적인 것에 토대를 둔 romance에 가깝다’ 작가가 전시 부제로 끌어온 개념은 사실보다는 상상적인 면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하지만 박현진의 작품은 엄연히 사진이다. 현실은 탈색되었고, 원래 색과 다른 색이 입혀지는 과정에서 사실이 허구에 가까워지는 만큼의 변화를 겪었다. 형태의 경우 왜곡은 없지만, 작가가 선택한 부분만 제시된다는 점에서 상상의 여지가 있다. 사진이면서 무엇인가를 정확히 재현하지 않는 그의 작품은 소통 면에서 난점을 야기한다. 특히 소통을 의미나 현실의 재확인으로 간주할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작가가 이 전시의 한 작품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그 유명한 ‘몽셀미셀(Le Mont Saint Michel) 이요’라고 밝히면, 작품의 의미가 갑자기 명확해지기라도 하는가? 


그는 작품에서 단순히 현실만 확인하는 습관적 태도를 거부한다. 작품의 의미가 재현된 대상의 인지와 동일시되는 현실은 근대예술가들을 불편하게 했다. 근대는 신화나 종교 등이 맡아오던 전통적인 상징적 우주가 급격하게 해체되었고, 새로 생겨난 문물이나 발견된 자연 등으로 인식적 기능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전 시대에는 미술도 그 역할을 했다. 가령 근대 이전에 ‘세계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르네상스 시대의 사실주의가 그것이며, 이러한 관습은 19세기까지도 이어졌다. 사실주의로 수집된 세계는 알고, 이해하고, 지배하는 일련의 과정과 연동된다. 마샬 맥루한을 비롯한 미디어 이론가들은 중세 말 정보량의 폭발적인 증가가 인쇄술의 발명을 추동했다고 본다. 대상을 지시하고 재확인하는 것 또한 어떤 역할이 있지만, 특히 많은 이미지들을 사진적 형식으로 보게 되는 정보화 사회에서 예술은 다른 역할이 요구된다. 물론 재현은 단순한 동어반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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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반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복하는 와중에 차이는 발생하며, 차이 자체를 최대한 벌리고자 하는 흐름도 있다. 이때 조형 언어는 극도로 불투명해지며 조형 언어 자체가 대상을 대신할 수 있다. 요컨대 언어는 대상이나 의미를 실어나르는 중성적인 역할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킨다. 그것이 사실주의를 지양한 모더니즘의 입장이다. 원래의 색을 탈색하고 변조시키는 과정에서 특정 장면이 자유롭게 선택된 색면이 되는 작품들은 모더니즘적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각각의 예술은 자기만의 특이한 효과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효과를 통해 각 예술의 순수성이 확보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배타적인 효과를 통해 독자성과 질적 기준을 보증받는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회화만의 효과는 평면성, 즉 이차원성에 있다. 박현진의 작품이 언뜻 회화처럼 보이는 것은 이러한 추상적인 색감 때문이다. 


현대 회화는 신화적, 종교적, 역사적, 문학적 등등으로 구별될 수 있는 주제를 통해 의사소통을 꾀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추상적인 색면의 효과가 두드러진 박현진의 작품에 근대적 맥락에서의 주제는 희박하다. 그것은 그가 ‘사진’ 작품에 사실보다는 상상의 비중이 큰 ‘로맨스’라는 부제를 붙인 이유와 비슷하다. 여러 번 출력되어 색 입자의 추상적 효과가 극대화된 작업은 회화적, 특히 모더니스트 회화를 떠올린다. 사진이 주제 중심의 전통적 회화를 모더니즘으로 전환하는 큰 자극제가 되었던 미술사의 예를 떠올려보면, 사진과 회화의 구분을 넘어선 어떤 수렴점이다. 결과물은 심플하지만 제작과정은 복잡하다. 작가는 찍은 사진의 색을 빼서 흑백으로 만든 후 색감 테스트를 많이 한다.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할 때 여러 번 프리트를 실행한다. 사진보다는 판화같은 방식이다. 미세한 입자가 겹치면서 생겨나는 겹은 자연의 겹에 상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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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프린트하여 층이 겹치는 부분에서 미묘한 발색 효과가 생겨난다. 박현진은 주로 디지털카메라로 찍지만, 작업 과정에 내재한 물질성의 흔적은 핵심적이다. 본대로가 아니라 느낀대로 색을 칠하는 화가같은 작업에서, 사진은 사실이 아니라 예술적 표현이다. 사진이 사실이 아니듯이, 완전한 주관성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박현진은 청소년기에 아그리파를 그리면서 거기에서 자신의 얼굴이 보여 그림은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여러 풍경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풍경을 색채 실험의 장으로 삼는 것 같은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시대상을 완전히 지우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작품은 언뜻 회화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진 작품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회화와 사진의 중간 정도에 있는 판화와 유사하다. 그가 일부러 회화적 효과를 내려 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진적 특성을 고수하지도 않는다.

 

청소년기 때부터 만진 카메라는 작가가 세상과의 관계를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언어가 되었을 따름이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 감성이 중요하기에 대상 또한 감성의 중요한 짝패로, 생략될 수 없다. 추상미술은 조형 언어의 힘을 과신함으로서 실제와의 끈을 놓쳐버렸다. 이후 실제를 대신하는 것은 작가나 개념에 대한 신화들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자기지시성은 대상에 대한 단순 확인에 머무는 재현주의만큼이나 빈곤한 결과를 낳았다. 정반대의 선택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항대립은 구태의연한 현실을 지탱하기 마련이다. 추상이나 개념미술 또한 재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더니즘이 출발했을 때의 최초의 신선함이 미학적 강령으로 굳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대중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사조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등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풍경의 골격이나 피부가 남아있는 박현진의 작품은 대상과 조형 언어가 공존하며 상호작용했던 초기 모더니즘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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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적 재현이든 사진적 재현이든 재현은 대상에 대한 가상적 소유를 가능하게 하며, 그것은 정서적 만족감과 더불어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재현은 앎을 통한 대상의 소유, 더 나아가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특히 재현이 사회적 인증을 받는 순간 이러한 속성은 권력이 된다. 가령 요즘같은 코로나 시기는 매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사회가 요구하는 명령들을 수행했는지 재현해야 하지 않는가. 재현의 방식은 시대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재현이 유효한가는 지배적 사회가 결정하며, 재현될만한 가치 있는 대상 또한 그렇다. 화가들은 재현적 역할을 사진이 더 잘 수행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진 또한 예술의 반열에 오르면서 근대 화가들이 먼저 했던 질문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들은 지시대상에 괄호침으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적 형식에 주목하게 했다. 곧 그 형식도 코드화 된다. 아직도 대중들의 의혹을 받는 추상미술의 존재 의미는 미술사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는다면, 작가는 제시된 작품을 가리키며 바로 이것을 꺼내려고 했다고 말할 것이다. 의미있는 대상이나 현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찍고나서 찾는 것이 의미다. 그것은 작가가 작업을 시작하고 끝냈기 때문에 비로소 확실해진 무엇이며, 작가 또한 결과를 확신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방법으로 또는 정처 없이 그가 원하는 것을 끄집어내려 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나는 출발점이 아니라 도달점이다. 나는 타자이다. 사진을 찍겠다고 굳이 어디를 찾아다니지 않은 스타일의 작가에게 중심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짝패인 주체의 감성이다. 그의 발길과 눈길이 닿은 곳들은 그 어디든 간에 풍부한 색채의 느낌으로 남아있으며 작업은 이 느낌을 구체화하여 소통하는 매개가 된다. 그는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만난 것들을 자신의 가슴 속에 넣고 다시 꺼낸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코로나 이전 시기까지 아시아부터 유럽까지 여러 국가를 다니면서 찍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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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제목 등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곳 있다. 한국의 경우 제주나 통영 등 바닷가를 낀 장소가 포함된다. 작품은 그가 다닌 세계 곳곳에 대한 인상과 기억을 담았다. 하지만 작가는 기억의 객관성을 믿지는 않는다. 같은 장소를 가도 사람마다 기억이 다르다. 사진이 물질과 육체의 흔적이 담는다는 최소한의 인정이다. 후반작업이 중요한 박현진의 작품에서 기억은 과거의 기계적 재구성이 아니라 거듭되는 해석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A.A 멘딜로우는 ‘예술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통해 기억의 문제를 거론한다. 그에 의하면 과거는 단순한 집적에 의해 전진하지는 않는다. 그 전체의 형태와 의의는 쉴 사이 없이 변화한다. 사건과 회상의 시간 사이에 개재되는 경험에 의해 과거를 수정되었고, 순수한 과거는 되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멘딜로우에 의하면, 시간과 시간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된 과거를 되찾는 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 직관을 발전시키는 것, 즉 사건을 무시간적으로 만드는 것이 프루스트의 목적이었다. 세세한 정보의 재현이 아니라, 그때의 느낌만 남기려 한 박현진의 작품에서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관객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 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 [로맨스]는 끝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여정을 암시한다. 다니다가 찍지, 굳이 찍으러 다니는 것은 아닌 이에게 사진은 그러한 여정의 이상적인 동반자다. 명확한 목표설정과 이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대한 맹신에 빠지지 않은 작가가 공학을 전공하다가 예술로 선회한 것은 자연스럽다. 82년 학번이었던 박현진은 1989년 150 만원을 들고 프랑스로 건너가 사진을 공부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공학에서 예술로의 선회이기 보다는 늘 함께 했던 원래로의 복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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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onance-noneisnone, 1ch video, 2021, 세오갤러리 전시전경, 2021년 12월 


합창단 지휘자도 했을 만큼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통영의 윤이상 기념공원을 찍은 작품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색과 음의 상징적 연관을 말했던 초기 추상화가 칸딘스키의 공(共)감각적 사유가 있다. 이번 전시는 세 번째 개인전이다. 2012년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에 발표한 작품은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레디 메이드 모자걸이에 다양한 부류의 초상을 투사 한 다음, 다시 사진에 담았다. 여기에서는 정치가나 문인 등, 유명인과 다친 할머니나 폭행당한 여인 등 무명인이 동일하게 취급된다. 그에게 자연도 평등한 존재다. 2012년 스마트폰으로도 자연을 찍기 시작했다. 형식보다는 감성을 중시하는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관심과 관찰, 그리고 만남이 중요하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8분짜리 비디오 작품은 일상의 한 귀퉁이에 서 있는 볼품없는 화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는데, 코로나 국면을 반영하는 마스크 쓴 사람들이 등장하다 사라지지만 화분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킨다. 


죽어가던 화분이었는데 작가의 선택을 받은 후 비와 바람을 맞으면서도 생기를 유지한다. 화분에 주목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한 식물은 생존을 이어갈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은 정원을 비추는 유리면 때문에 공간성은 모호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결과만 보는 사회적 시선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상호과정을 가치 있게 보고자 한다. 자연 속을 걸으면서 명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는 봄에 씨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공명하는 것이 종교라고 말한다. 모든 존재가 저마다의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은 평등에 대한 사고이며, 전통적 종교의 위대한 유산이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에 근거한 평등을 인간의 규칙은 저버리고 있다. 특히 정보혁명의 시대를 통과한 후 인간의 규칙은 단선적이 되고 있다. 사진 또한 이러한 대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실제의 창보다 스마트폰 화면을 먼저 보는 현대인에게 세계는 사진과 동일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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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느끼기 보다는 그저 소비되는 경향이 있는 사진적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한 화면에 두 개의 시선이 함께 하는 이전의 작업은 육안처럼 2개의 렌즈를 사용한 것이다. 사진의 외눈박이 시점은 편견과 비교될 수 있으며 극복의 과제가 된다. 마틴 제이는 시각과 시각성을 다룬 논문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의 예를 들면서, 거기에서의 눈은 정상적인 시각에서의 두 개의 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일한 눈이라고 본다. 이는 곧 앞에 놓여있는 장면을 하나의 구멍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어떤 고립된 눈이라는 방식으로 착상된 것이다. 원근법은 사진기가 나오기 이전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공유한다. 이미지의 역사는 원근법에 따른 ‘과학적’ 형식과 사진적 원리의 공통점을 말한다. 반면 육안은 불규칙하고 단속적인 움직임들로 하나의 초점에서 다른 초점으로 옮겨 다니는 동적인 특성을 가진다. 정적이고 깜박거리지 않는 고정된 눈은 하나의 영속적인 시점으로 환원된 탈신체화된 시각이다.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은 원근법주의의 전통을 응시, 즉 ‘현상들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어떤 유리한 조망지점에서부터 시각 장을 관조하는 것’으로 요약한다. 신체의 전체적인 경험과 기억을 외눈으로 환원하는 시점은 기계적이면서도 초월적이었다. 마틴 제이는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눈이 우연적인 눈으로 변형된다면 원근법주의의 상대성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다른 구멍이 있는 자신만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각자 갖고 있다면 그 어떤 초월적 세계관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니이체에 동의한다. 박현진의 작품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하나의 시점을 물신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에 열려있다. [로맨스] 전에는 자연과 문화의 모습이 풍경이라는 방식으로 두루 담겨있다. 하늘과 그것을 비추는 물은 다양한 파장을 가진 빛의 유희로 가득한 곳으로, 어떤 색으로 변주되어도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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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dodu small island](2021)는 섬을 찍었지만, 형태만 본다면 정보량이 적어 구름 낀 산의 정상같기도 하다. 하지만 섬인지 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섬과 산이 만들어질 때 대지에 가해진 압력, 즉 에너지의 분포는 비슷했을 것이다. 산이든 섬이든 지구 표면에 진 주름들이다. 원래 섬과 산은 푸르스름했을 테지만, 작가는 따스한 색으로 변주했다. 어떤 색이든 모노 톤의 화면은 여백을 품은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 [joongmun-pink](2021)에서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의 흐름은 분홍 톤으로 흐르는 풍경을 영원한 현재로 만든다. 작가는 바다를 좋아하며, 이 작품에서 물이 주는 차가운 느낌을 따스한 색으로 변조시켰다. 그것은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에 바다를 포함한 물 이미지가 주었던 충격과 트라우마를 생각하게 한다. 작가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사건으로 수몰된 아이들 또래의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 [Normandie-fence](2021)에서 일렁이는 물결 안에 박혀있는 나무 기둥들은 펜스를 이룬다. 푸른 색조의 바탕과 강하게 대비되는 수직의 형태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친 자연 속 인간. 줄지어 있는 모습이 군상 같다. 작품 [dodu-cloud](2021)는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는 모습같지만, 원래는 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다. 마치 푸른색 바탕의 화면에 하얀 물감을 찍은 듯 회화적이다. 원래 하늘의 색은 변화무쌍해서,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은 하늘이 보여주는 수많은 장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작품 [joongmoon](2021)에서 바탕 면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언뜻언뜻 비치고, 노랑 색조로 표시된 둥글둥글한 형태는 하늘의 구름일까. 푸른 색조와 노랑 색조의 조합은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박현진의 작품에서 도시는 자연과 함께 한다. 그의 풍경들에는 지방색이 언뜻언뜻 비춰지지만, 자연은 문명보다 더 보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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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lisbon-tree](2021)에서 길가의 나무는 푸른색, 바탕은 노란색이다. 화면 왼편에 나무의 유기적 흐름과 대조되는 기하학적 선은 건물의 일부일 것이다. 어떤 지역인지 어느 시간대인지는 알 수 없다. 구체적인 시공간은 두 색감과 그 관계가 주는 느낌만으로 남는다. 작품 [St. jorge-tree](2021)에서 돌담 사이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나무. 아치형 돌문과 나무의 조합은 어디에나 있다. 작가는 장소의 특수성을 완화한다. 특수가 아니라 보편이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인용한 ‘Erewhon’처럼, 어디에도 없는 장소인 상상적 유토피아를 재해석한 장소에 가깝다. ‘에레혼은 원초적인 부재의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위치를 바꾸고 위장하며 양상을 달리하고 언제나 새롭게 재창조되는 여기-지금을 동시에 의미한다’(들뢰즈) 또한 그것은 현대의 도시가 점점 비(非)장소(마르크 오제)가 되어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비장소, 즉 누구에게나 속하기 위해 텅 비워져야 할 공공영역은 이제 사적인 영역까지 침식하는 경향이 있다. 도시이면서 자연물이 없는 유일한 작품 [st.malo](2021)는 건축사가라면 어느 나라의 무슨 형식인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형태가 강조되어 있다. 그곳을 지나가던 이는 건물의 창에서 붉은 더위 속 푸른 시원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작품 [tongyoung](2021)에서 사람의 눈과 입처럼 뚫린 창문들과 그 사이를 길처럼 가로지르는 나무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색들인 푸른 색조와 노랑 색조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멀리 성이 있는 풍경을 바라보는 전경의 두 사람이 있는 작품 [mont st michel-two peoples](2021)에서, 전경의 사람들은 원경의 대상보다 더 흐릿해서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전 세계가 알고 있는 관광지화된 문화 유산은 한 사람의 인생보다 더 길게 남을 것이 확실하다. 원경에 하늘을 향하는 뾰족한 부분은 수도원의 존재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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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해안으로 이루어진 지형학적 풍경이지만, 작가는 풍경을 두 개의 색조로 감축하면서 천상의 존재와 접속한 성스러운 건물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인간들에 와 닿는 것같은 느낌을 강조했다. 큰 우산을 쓰고 있는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 [saigong](2021)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붉은색과 여성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마르트 로베르가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이 늘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되풀이 된다. 사람도 장소와 마찬가지다. 신기루같은 여인은 비장소의 풍경에 속한다. 로맨스의 기조를 이루는 낭만적 사랑의 대상은 개체성을 구분할 수 없는 영원한 여성이다. 마르트 로베르에 의하면 낭만적 사랑의 대상인 ‘그녀는 무수한 얼굴로 끝없이 변하는 유일한 여성이다. 개인적인 여자가 아니라 영원한 여성이다. 사랑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사랑 그자체이다. 영원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만큼 더욱더 매혹적인 여성이다.’ 


로맨스는 이처럼 영원히 부재하는 것을 갈망한다. 건물과 가로수 사이를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는 작품 [spain-orange St](2021)는 스페인의 풍경이지만 그곳이 어디가 됐든 호환성이 있는 풍경으로 변조된다. 변조된 색이지만 빛은 분명히 현재한다. 빛은 만물을 가능하게 하고 사진도 가능하게 한다. 탈색된 후 변조된 색은 어디선가 비추는 빛이 아닌 자체 발광하는 빛을 예시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빛이다. 큰 나무가 있는 돌담 벽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가 있는 작품 [st.jorge](2021)에서 먹이나 물감으로 그린 듯한 나무의 모습이 회화적이다. 자연에 비해 인간의 크기가 작은 동양화같은 비전이다. 큰 나무 아래에서 풍경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 작품 [St.jorge-peoples](2021)는 단색조임에도 불구하고, 원래는 찬란한 색조로 가득한 풍경일 것이라 상상된다. 볼만한 풍경을 향유하는 작품 속 사람들과 관객은 비슷한 관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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