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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랩 대전 2021 작가와의 만남

이선영

아트랩 대전 2021 작가와의 만남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재경


깔끔함과 기이함이 함께하는 김재경의 작품들에는 가구 디자이너였던 경력이 반영되어 있다. 정해지지 않은 기능을 가진 사물의 제작과 완벽한 마감처리가 특징이다. 심지어 이응로 화백의 수묵 산수화의 붓 스트로크를 만들어 벽에 붙인 작품은 한 작가의 필적이 유지되는 붓질마저도 형태화한다. 공산품에 특정 예술가의 작품을 무늬로 넣어 생산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이다. 민속 공예품에 자주 사용되는 방식인,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종이로 씌워 형태를 만든 다른 작품들 또한 표현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탑재한다. 방이나 함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담는 공간과 관련된다. 예술작품 또한 내용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최초의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김재경이 이전 작품부터 도량형 등에 대해 가졌던 관심에서 디자인과 예술이 갈라지는 지점을 생각할 수 있다. 대량 생산과 소비를 전제하는 기능적 사물에는 기준이 있지만, 예술은 기준을 끝없이 무너뜨린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디자인의 기준 역시 지속적으로 새로운 유행의 도전을 받지만, 처음부터 변화를 위한 변화가 강요되다시피 하는 현대 예술보다는 유효기간이 길다. 글로벌 기업의 치열한 경쟁에서 알 수 있듯, 기준이란 선점하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앉은 사람을 감금하는 괴상한 의자는 권력의 편재를 암시한다. 자리로 대변되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욕망은 스스로를 길들이는 장치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분업이 극도로 세밀해지면서 만드는 즐거움이 기계로 이양됨에 따라 장인의 영역은 줄어들게 됐고, 장인은 예술가와 마찬가지의 자유와 소외에 직면했다. 한편 ‘순수’ 예술은 자유를 남용하면서 소통에 문제가 생겼고, 자신의 작품을 명품의 대열에 합류시키고자 하는 작가에게 완벽한 기법의 문제는 중요해졌다. 기계에 바탕 한 대량 생산소비 시스템은 디자인과 예술의 수렴지점을 만들었다. 김재경의 작업은 이러한 경계 지대에 자리하면서 새로운 필요 자체를 창안하고 제작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고동환


고동환은 가장 익숙하기에 가장 낯설 수도 있는 집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발표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6개의 벽을 ‘세웠다’. 진짜 벽처럼 만들었다면 그다지 넓지 않은 전시장은 폐쇄공포증 또는 미로적인 공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벽이라는 물리적 소재를 들여오면서도 가상의 유연성을 살렸다. 전시장에서도 많이 설치되는 가벽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실제 실내의 벽으로 보이도록 연출했다. 구조물 빼고 작품에 동원된 모든 물건들은 구매 또는 수집된 것이다. 그것들은 벽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이 아니라 사물이다. 각각의 벽에는 실제 실내의 벽처럼 조명이나 시계 등이 달려있거나 그림 액자가 걸려 있기도 하다. 하지만 관객이 굳이 몸을 더 움직여 뒷면까지 본다면 추상적 패턴으로 채워진 벽의 이면은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은 마치 뒤집어 입을 수 있는 옷처럼 가변적이다. 연극의 무대같이 연출된 작품은 일점 원근법같은 시각성을 벗어나 시시각각 변화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염두에 둔다.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배치된 삼각형 구조물은 관객의 동선을 방해한다. 그것은 몸을 새삼 의식하게 한다. 현대인은 컴퓨터 앞에서 눈과 손만 움직이면서 몸의 감각이 둔해지고 위축되었다. 어떤 방해도 없이 전망을 두루 살피며 빠르게 목표물에 접근하는 시각적 관행은 원근법부터 시작되어 정보혁명 이후 현대까지 이르는 지배적인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시각이 애초에 전쟁 무기 개발로부터 연원했다는 점, 이후에 오락의 방식으로 재생산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가상현실 기술은 실제의 육체를 수동화하고 주시하는 눈만을 강조한다. 재현주의를 극복하려 했던 현대미술은 이러한 권력적 시각 또한 해체 하려 한다. 전시장에서 실물로 지각되는 미술작품은 무관심 또는 편향된 관심사로 인터페이스를 훑어내리는 관행과 차이를 둔다. 고동환의 연극적 공간연출은 관념화된 시각을 넘어서 지각하는 육체를 복권시키려는 대안적 흐름에 속한다.  

  


김자혜


김자혜의 작품은 압축된 시공간이 켜켜이 쟁여져 있다. 화가에게 그림은 세계의 여러 국면을 자신의 방식대로 접어 넣을 수 있는 유희의 장이다. 접혀진 시공간은 관객의 관심사에 따라 다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겹쳐진 커튼이나 문틀, 또는 난데없이 등장하는 색 면들로 이러한 주름을 삽입했다. 그 외에도 하늘과 물, 그림자 등 그자체가 고정적이기 힘든 현상 또는 공간을 자주 등장시켜 변화에 대한 잠재력을 높인다. 실제로 가능한 공간은 아니기에 인간은 등장하지 않으며, 인간은 의자로 대신한다. 작품들은 언뜻 비슷해보이지만 저마다 색다른 세부들이 발견된다. 이미지의 분포도를 보면, 현실적 대상 보다는 애매한 반사면의 활용이 더 빈번하다. 물을 화면 위에 띄워 놓는 등, 구성방식도 중력을 초월한다. 회화는 모든 것을 종합하여 그럴듯한 하나의 장면으로 봉합하지만 보여진 그대로 보다는 잠재성을 확대한다. 그것은 고정된 매체인 회화에 변화 가능성을 높여 준다. 


잡지 책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에서 기원한 건축적, 자연적, 지형학적 공간들이 꼴라주 된 후 회화로 옮겨지면서 복잡성은 증가하고, 단편들의 이음매는 보다 자연스러워진다. 가위가 잘랐다면 붓은 붙인다. 압축 폴더같은 작품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가 아나로그 식으로 진행된다. 영감은 몇몇 고정된 코드의 조합을 넘어서 현실에 열려있다. 꼴라주가 회화가 되었어도 불연속적 간극은 내재한다. 단편들이 미로처럼 연결된 공간에서 도약과 비약이 일어난다. 작품이 이렇게 복잡해진 이유는 세상 자체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처럼 단순한 사물을 원하는 흐름도 있지만, 세상은 더이상 단순하지 않다. 이전 시대에 각각의 세계로 존재하던 것들이 세계화를 추동한 자본과 더불어 공존과 경쟁, 소멸과 생성의 국면에 접어들었고, 그 주기는 더욱 빨라졌다. 작가는 한술 더 뜨기를 실행한다. 그것은 겉보기의 다양성을 무색하게 하는 지배적 방식에 대한 이의제기다. 


   

김정인


김정인은 자신의 작업을 ‘급류를 버티기 위한 붓질’이라고 말한다. 버틴다는 말은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그의 작품은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인류사에 변화는 늘 있어 왔지만, 말 그대로 변화가 급류임을 의식하게 된 때는 근대이다. 근대를 액체로 본 사회학자가 있을 정도다. 액체로 대변되는 변화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계급사회에서 변화란 약자에게 늘 상 불리하다. 근대에 자유를 찾은 예술가의 다수는 그의 작품 속 ‘밀려난 사람’처럼 약자가 되었다. 김정인의 주요 매체인 유화 또한 액체다. 미술의 역사는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위대한 이상의 시대를 기록한다. 작가는 대도시의 오래된 동네, 요컨대 대부분 허름한 동네에 살았던 기억이 자신의 성향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변화가 달갑지 않은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재개발을 기다리는 허름한 동네는 이미 뿌리 뽑혀서 중심지의 주변으로 이동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얼굴 없는 자본은 이들의 임시적 토착마저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자발적인 변화가 아니라 강제된 변화에 대해 비판적이다. 부의 재분배를 위한 의도적인 폐기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억압받는 나무 이미지 모음]이라는 작품을 보면, 뿌리뽑힌 존재에 대한 작가의 공감이 느껴진다. 지금을 그럴 수도 없는 보편적 지식인의 입장이 아니라, ‘단지’ 화가의 입장에만 서도 작업할수록 고난에 빠지는 현실적 상황은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게 한다. 김정인의 작품은 그의 세계관이 읽혀지는 투쟁적인 이미지들이 다수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의 체계에 고정되지는 않는다. 어떤 작품들을 갈갈이 찢겨지고 깨진 듯 신랄하다. 세상이 그동안 급속도로 변해왔다면 앞으로는 더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화가에게도 권력은 있다. 작가에게 그림은 다른 곳으로부터의 강제된 변화에 저항하는, 자발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장이다. 

 


강철규


강철규의 작품들에는 상실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자기 노출증이 있지 않고서야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세기말의 불안을 상징주의적이고 표현주의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받는 뭉크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 [그녀의 아름다움과 달빛]을 보면, 상실감의 원인을 추측할 수 있다. 개인적 체험의 반영을 넘어서 주목할 부분은 형식이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여인이 머리를 기댄 남성이 그림자처럼 재현된 것이다.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쓴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사람의 그림자 윤곽선을 베껴 그리는 것에서 회화가 기원한다고 본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의하면, 윤곽선의 주인공은 떠나는 연인이었다. 실물을 대신하는 그림은 애초에 부재감이나 그리움과 밀접하다. 그림자 이론에 의하면 윤곽선을 베낀 그림자 그림은 실물의 일부로 인식된다. 저자들은 이 대목에서 한 인간의 소유물이나 육체의 일부가 그 사람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주술적 사고를 발견한다. 


사람의 흔적인 그림자는 지표(index)적 특성을 가진다. 플리니우스의 비유 속 그림자, 즉 그림은 사람의 흔적인 것이다, 이번 전시의 부제인 [단편집; 죽지 않는 것들]은 ‘사라진 연인이 꿈에 찾아오는. 계속, 끝없이 반복되는 꿈’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작품 속 이미지들은 망상이나 유령과 가깝다. 그가 그림을 계속 그리는 한 ‘상실과 결핍’이나 ‘존재의 부재’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을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단지 가상이라고 믿고 싶어 하며, 반복적으로 회귀되는 상처와 그 노출이 버거워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객관화하려 한다. 형식적 장치로 오디오 북이나 영화적 내러티브를 빌어왔다. 영화적 주인공이면서 관객이 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이 된 트라우마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몇 개의 컷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는 기묘하다. 그림-영화는 작가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서사는 명료해야 하지만 감정의 덩어리처럼 뭉쳐있다. 자신에게 닥친 일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면 그 고난은 상당 부분 해소된 것이다. 


  

천찬미


독실한 종교인이자 작가인 천찬미는 자신의 이름을 활용한 [찬미의 정원]을 연출했다. 가림막을 제치고 들어가야 하는 전시장은 내밀하다. 정원은 야생과 문명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로, 예술과 비교되어 왔다. 모네의 연꽃정원이 대표적이다. 작가가 파리 여행 중에 본 어떤 집의 정원은 자유와 질서가 함께 있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잠깐 봤지만 뇌리에 깊숙이 남아 영감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작가가 즐겨 인용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언명처럼 창조의 영역에서 자유와 질서는 하나로 수렴되지만, 현실에서 자유와 질서는 대립각을 세우기 마련이다. 자유가 자의로 전락하고, 질서가 경직된 형식주의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기에 자유와 질서의 이상적인 조합은 삶은 물론 예술의 본이 될 만하다. 천찬미의 작품에서 자유는 무엇인가 퐁퐁 샘솟으며 활기차게 도약하는 이미지다. 


종교는 오래된 전통이지만, 현대의 젊은 작가답게 톡톡 튀는 색감이나 형태로 표현되었다. 기성의 종교적 도상을 빌어오는 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질서는 타자들을 초대하기에 적합한 집이나 실내, 정원의 구조로 나타난다. 전시는 작가의 창조물을 함께 나누며 소통하는 장으로, ‘찬미’의 정원에 초대하는 형식이다. 익명적인 다수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여섯명 정도가 함께 나누는, 요컨대 아담한 전시장 규모와 걸맞는 방식이다. 회화작품 외에 숲이나 바다를 담은 사진 작품들은 자연과 종교의 친화성을 말해준다. 자연의 산물이기도 한 인간은 자연을 조화롭게 볼 수 밖에 없지만, 이제 그 자명한 조화마저도 알아보기 힘든 혼탁한 문명의 시대를 통과하는 즈음, 복락원의 감성은 ‘오래된 미래’의 비전으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천찬미의 작품은 신이 만물을 창조했을 때의 상황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반복하는 예술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출전; 아트랩대전 2021 작가와의 만남(이응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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