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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일곱 개의 질문 전 / 끈 떨어진 인간을 다시 잇다

이선영

끈 떨어진 인간을 다시 잇다 

인간, 일곱 개의 질문 전 (2021. 10. 8 ~ 2022. 1. 2, 리움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10월 8일에 재개관한 리움 미술관은 11월 초로 예상되는 일상으로의 회복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받아들여진다. 엄격하게 방역수칙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사람들 많은 미술관 한가운데 있다 보니 그자체로 감격이다. (아직 다 지나지 않은) 펜데믹 기간 동안 전시관계자가 불 켜주고 나 혼자 본 전시도 꽤 되었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제 끝나가는가. 특히 휴관의 원인인 펜데믹 상황을 반영하여 인간의 안녕함을 묻는 기획전은 시의성을 가진다. ‘소통과 치유’라는 가장 많이 요구되는 과제를 넘어서, 탐구적이며 역사적이고, 때로는 한도를 초과하는 확장성을 통해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시험에 붙이는 실험적 전시다. 비교 대상이 없는 실험은 모호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가장 자명한 듯한 기준이 출발점이 되면 변화를 가늠할 수 있기에 효과적이다. 몸의 경계는 조금만 변화해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의식적. 무의식적 기준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열락에 이르는 승화도 비천에 이르는 퇴행도 모두 이 기준 속에서 움직인다. 미술이라는 가장 구체적인 언어는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몸과 친근하다. 


사회적 인간은 보고/보이는 게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해체한다. 이 몸은 펜데믹 기간 동안 극도로 움츠러들었으며,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리움미술관의 재개관은 그저 일상의 회복은 아니고, 업그레이드 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위기를 변신과 도약의 기회로 만든 셈이다. 전면 개편된 상설전은 [검은 공백], [중력의 역방향], [이상한 행성] 등의 주제로 열렸는데, 여기에 나온 76점의 작품은 새롭게 맥락화 되었다. 얼마 전 이건희 컬렉션의 사회 환원이라는 이례적인 사건이 가능할 만큼 미술관의 소장품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술이라는 무형의 자산에 꾸준히 해온 투자는 계산 불가능한 공익적 역할을 했고, 그것이 리움 재개관에 거는 기대를 더 크게 한다. 전시 외에 홈페이지에 소개된 한국 작가 60명의 작업 공간과 예술세계를 인터뷰한 코너는 무형적 자산에 대한 투자의 진면목이다. 보다 융통성 있게 치고 나갈 수 있는 민간영역의 문화예술이 공공영역의 그것과 선의의 경쟁을 하며 백가쟁명의 시대가 열리길 바라는 마음이다. 


국내외의 작가 51명이 참여한 기획전인 [인간, 일곱 개의 질문] 또한 자체 소장품이 많이 활용되었다. 여기에 대화적 관계로 설정될 수 있는 국내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이 함께한다.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130여 점의 많은 작품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난삽하지 않은 구성이 돋보인다. 물론 그것은 인간에 관련된 7개의 질문이 서로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해서다. 어떤 질문은 다른 질문의 답을 이미 포함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질문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답이 도출되기도 한다. 각각의 질문과 잠정적 대답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하면서, 사유를 자극한다. 미술사적 지식이 많이 동원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이미지가 많기에, 또 다른 인간인 관객과의 만남은 용이하다. 선택된 작가들 하나하나가 국내외의 미술관급 전시를 주무대로 해왔던 작업 이력이 두툼해서 이번 기획전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이전 작품도 다시 읽게 되는 탐구적 성격도 있다. 오늘날 인간에 관련된 담론을 ‘일곱 개의 질문’으로 나눈 전시의 출발점인 인간은 이제 자명하지 않다. 


인간이라는 중심적 사고를 뒤흔든 것은 기술의 영향이 컸다. 몸은 새삼스럽지 않은 주제지만, 이 전시는 점점 혁신의 속도가 빨라지는 현대 기술 문화에 반응하는 몸의 상황이 다면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고도의 기술력으로 경쟁하는 모기업의 배경 때문인지, 과학기술이 변화시킨 현대문화 속 인간의 위상 변화가 눈에 띄었다. 물론 기술 그자체 보다는 기술이 바꾼 일상의 문화가 침전되어 있는 것은 기본이다. 예술에 더하여 기술적으로도 인상적인 작품도 많았다. 가령 본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로비에 설치된 작품은 화질 5천만 화소 이상에, 크기 11.3 X 3.2m (462인치)인 디스플레이를 보여주는데, 여기에 담긴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화려한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화질의 초대형 화면에 내재된 건축적 스케일은 미디어가 환경으로서 인간을 감싸는 시대를 기념비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이때 인간 위상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밖에 작품 감상을 위한 디지털 가이드 등은 미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술혁명의 결과다. 육안으로 보기 힘든 영역이 기술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무)의식에 파고드는 것이다. 


펜데믹은 보이지 않는 미시적 존재가 가지는 위상을 새삼 깨닫게 했다. 인간은 이 보이지 않는 것들과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워낙 눈에 익은 유명작품이기도 해서지만, 기획전의 입/출구에 배치된 작품은 자못 차분하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안토니 곰리, 조지 시걸의 작품은 단편으로 해체되어 재조합되면서 인간 주체의 동일성, 통일성에 대한 질문으로 점철되어 있는 그 안의 수많은 작품들에 비하면 잔잔한 도입/마무리로 다가온다. 인간상에 가해진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어쨌든 온전하게 서 있는 것이다. 미술관 소장품이기도 한 이 세 작품은 각각 세 가지 방향성을 예시한다. 사방에서 침투하는 보이지 않은 힘에 의해 위로 잡아당겨지거나 쪼그라든 듯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은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힘의 압도적인 위상을 알려준다. 현대의 추상적 삶을 반영하는 안토니 곰리의 반듯한 작품은 조각의 신인동성동형적인 전통을 보존하고 있지만, 인간의 경쟁자로 부각된 로봇과도 비슷하다. 조지 시걸의 작품은 어떤 개성도 없는 익명적 대중을 표현한다. 똑같은 표정으로 한 방향을 향하는 그들은 현대적 생산과 소비의 구조가 인간에게 가한 변화를 상징한다. 


미술사의 반열에 오른 이 세 작가의 작품은 양차 대전 전후의 피폐한 상황과 연결되어 읽혀졌다. 리얼리즘이 가정하는 인간해방보다는 소외의 측면이 더 강조되었고, 소외는 사회적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인간 존재가 무기력하게 생각될수록 영웅적인 인간상 또한 부각되었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니이체) 해법은 의문에 붙여졌다. 포스트 휴머니즘을 비롯한 많은 ‘포스트-’ 국면은 불확실성을 증가시켰다. 누군가는 여기에서 더 큰 자유를 볼 수도 있고, 근본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역설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측이든 혼란과 파괴는 마찬가지다.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이 확산 된 20세기 중반의 전후 미술을 필두로, 휴머니즘의 위기 및 포스트 휴먼 논의와 더불어 등장한 다양한 작품들’을 선정했다는 기획의도가 말하듯이, 자연은 물론 사회, 더 나아가 우주에 이르는 여러 차원의 환경에서 끈이 떨어지기 시작한 순간을 기점으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는 이후에 또 다른 연결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개체 대 개체의 온전한 만남은 아니다. 


더 많은 기회를 위해 또는 위험의 분산을 위해 여러 접속지점을 가져야 하는 존재들은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이 전시의 한 작품은 자라나는 수정과 결합된 인간을 통해 광물까지도 접속 대상으로 삼는다. 이전 시대에 이미 기계로 간주된 동물은 물론 기계 그자체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유기체든 기계든 단편과 단편의 횡적인 만남은 거듭될 뿐 고정되지 않는다. 지금도 진행 중인 팬데믹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앞으로도 죽어갈 것이다. 인간은 현대미술의 중심부에서 다시 호명되었다. 하지만 펜데믹 이전의 상황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자명해진 현재, 인간 또한 이전의 인간중심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작품들은 이전 시대의 인간 정체성을 해체 구성한다. 작품에 나타난 인간들은 정상과 표준에 대해 질문하며, 이미 여러 개의 입구와 출구를 가지고 다양한 존재들과 접속하는 ‘인간’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병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인간의 확장이다 못해 죽음에 이르는 파국적 경로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태는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몸은 이제 실재가 아니라 시뮬라크르에 가까워진다. 시뮬라크르는 본질을 전제하지 않기에 보다 유연하다.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난 현대미술의 방향과도 맞는다. 전시기획자인 곽준영이 쓴 에세이 제목 [인간. 사이. 너머의 질문들]에 나온 바와 같이, 인간 만큼이나 ‘사이’와 ‘너머’가 중요하다. 전시는 질문을 하지 답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전시를 이루고 있는 작품/작가들 또한 마찬가지다. 전시는 거울 보기, 펼쳐진 몸, 일그러진 몸, 다치기 쉬운 우리, 모두의 방, 초월 열망, 낯선 공생 등 7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다. 거울은 깨져 있으며 경계 지워진 몸은 풀어헤쳐져 일그러진다. 타자들과의 낯선 만남이 늘 우호적이지는 않다. 지극히 취약한 존재인 인간은 공동체를 요구한다. 물론 이 공동체는 인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시는 인간만큼이나 인간과 동행할 이질적 타자들의 다양한 계열을 보여준다.   


출전; 월간미술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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