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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 다차원적 우주 속 시공간 여행

이선영

다차원적 우주 속 시공간 여행

정수진 전 ‘전지적 작가 시점이 존재하는 형상계’(2021.12월 16일–2022.1.22, 이유진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존재하는 형상계’라는 제목으로 열린 정수진 개인전은 복잡하고 난해하다. 예술에서 휴식을 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실험과 도전을 원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 작품들은 후자에게 호소력이 있다.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균질화된 통일적 시공간은 작품 속에 자주 출몰하는 구겨진 평면처럼 변형돼 있다. 뜬금없이 출몰하는 도상들은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했던 것들로 작가가 조성한 새로운 맥락에 끼어든다. 하지만 완전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역설이 산재한 작품에는 엄격함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계속 퍼즐을 맞추다보면, 큐브를 돌리다보면, 또는 주사위를 많이 던지다 보면 언젠가는 전모가 드러날 것 같은 우주다. 수수께끼와 부조리, 명암법이 잘 적용된 대상의 자세한 묘사, 그리고 화면에 툭 흘리는 듯한 추상적 형상이 어우러진다. 구상적 형태든 추상적 형상이든 세부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그림으로서의 질적 기준을 충족시킨다. 



[apple inbudozi](2021) (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이유진 갤러리)


정수진의 작품은 예술이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개인의 표현을 넘어서, 세상에 대한 인상과 지각, 기억, 인식 등을 펼치는 장 중의 하나임을 말한다. 크게는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가 던지는 그때그때의 과제에 대해 예술가 또한 자신만의 규칙으로 참여할 수 있다. 예술은 과학처럼 공통된 언어로 검증되기 이전에 예견된다. 예술은 추상적인 수식을 보다 직관적인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 정수진에게 그림은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도구이면서, 끝내 명확한 대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거듭되는 장이다. 고심하는 인물과 함께 등장하는 복잡한 선 뭉치들이 암시하는 바가 그것이다. 잭슨 폴록 이래 현대 회화의 화면은 스크린이나 스펙터클과 경쟁하면서 나날이 거대해졌지만, 정수진의 작품은 대개 아담한 크기다. 이번 전시에서 40여 점의 작품들은 책의 낱장처럼 서로를 반향 하는 우주를 이룬다. 마치 중세의 채색 사본처럼 정성껏 그려진 밀도 높은 상징적 우주다. 


여기에서 던져진 질문이 저기에서도 계속되며, 대답은 잠정적일 따름이다. 예술은 자연의 법칙이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법칙, 즉 작가가 정한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다. 정수진의 작품은 현대 수학이나 물리학의 사고가 내재해 있지만, 작품이라는 것이 무슨 과학 법칙의 도해가 아니며, 심지어 오랫동안 작가가 탐구해온 회화이론의 도해조차도 아니다. 작품은 견고한 현실 속의 고정장치들을 느슨하게 하고 자기만의 사유와 감성을 따라 재배치된 것이다. 작가는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괴물과 혼돈을 기꺼이 작품에 불러들인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 장치들이 선전하는 만큼 현실이 그다지 합리적인 것도 효율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은 의미 있다. 견고한 현실원리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쾌락원리에 의해 대체된다. 이 지점에서 정수진의 작품은 꿈과 무의식, 욕망에 충실하다. 하지만 라깡을 비롯한 현대 정신분석학을 참고해 보면, 이 무법의 영역 또한 구조화되어 있다. 프로이트 시대의 층층 구조는 유연한 뫼비우스 구조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converted memories](2021)



[converted memories](2021)



[converted memories](2021)



[in the deep thought](2021) 


예술은 현실의 억압과 권태에 대해 자유와 유희라는 대안의 세계에 자리한다. 정수진은 그림으로 사유하는 작가다. 하지만 사유의 요소가 단순할 경우 환원이나 초월에 빠지기 쉽다. 그림을 ‘다차원의 기하학’과 관련시키는 작가에게 작품의 요소는 많다. 2014년에 전시와 함께 출판한 ‘부도이론’에는 형상계를 보는 방법이 서술돼 있다. 현실계와 구별되는 형상계는 ‘64개의 형상소와 64개의 개념소’로 이루어진다. 정수진의 형상계를 이해하기 위한 코드들은 상형문자보다는 적지만, 과학적이라고 평가되는 표음문자인 알파벳이나 한글보다는 많기에 복잡하고 난해하게 다가온다. 미술은 물론 여러 분야에서 공히 적용될 수 있는 구조는 의미 있는 변형을 위한 조건이다. 현실의 한계를 확장하기 실험은 유쾌한 파격이나 신비로움을 낳는다. 열림의 조건은 닫힘이고, 경계 넘기의 조건은 경계이다. 필요하다면 세부 묘사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배경이나 무엇인가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얼룩 등은 자유로운 붓질을 남기기도 한다. 


구겨진 평면을 통한 위상기하학의 예시부터 선과 색의 미묘한 이행이 있는 물컹한 덩어리까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알리는 방식은 다양하다. 아담한 화면은 자족적 소우주를 이루기 보다는, 또다른 차원을 촉발하는 단서 또는 단편으로 작동한다. 그의 그림은 들어가는 구멍과 나가는 구멍이 많은 다공질이다. 작가는 ‘의미의 구조’를 강조한다. 의미도 그렇고 구조도 그렇고 그것은 다소간 확실한 것을 기대하게 한다. 의미와 구조를 강조하는 가운데, 정작 그것이 불확실성은 높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어떤 논리적 체계도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러한 논리적 난점은 단순한 불가지론이 아니라, 닫힌 체계, 즉 형식주의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과학부터 인문학, 사회학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작동하는 구조는 세계를 특정 구조로 환원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가 생성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구조 전후에 발생과 변형이 있는 것이다. 



[egg shells on the table](2021) 



[in the deep thought](2021) 



[in the deep thought](2021)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단편들이 상호작용하는 작품들은 안정된 소우주가 아니라, 찻잔 속의 소용돌이 같은 사건들이 빈번하다. 구조와 생성은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하는 이항 대립이 아니라 세계의 온전한 인식을 위한 상보적 조건이다. 작품 속 인물은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사고의 파노라마의 주인공이자, 작품을 사고의 실험의 장으로 삼는 작가의 상황이며, 그러한 작품을 해석하는 관객의 모습이다. 40여 점의 작품은 크게 8개의 군으로 나눠지며, 같은 제목의 시리즈는 나란히 배치되어 나름의 서사를 만든다. 만화같은 화법에 배경이나 인물이 비슷하게 설정된 경우에는 잠재적 운동감, 그리고 이에 따른 서사가 발생한다. 기존의 언어에서 새로운 화법이 나올 수 있듯이, 관객의 상상력이 가세하여 생성될 새로운 문장의 범위를 늘려나가는 것이 작품의 생명력이다. 예술 작품은 변형 문법인 셈이다. 


작품 [apple in budozi] 시리즈에 붙인 작가의 설명은 전시 부제의 키워드 중 하나인 ‘형상계’의 의미를 밝힌다. ‘형상계에 존재하는 사과와 실재의 사과는 다르다. 실재 사과를 보고 그렸다고 해도 그것이 평면이라는 개념적 장소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다양한 감각들의 조합으로 재구성되어 나타나기에 새로운 것이다...’ 그림 속 사과는 대상을 의미와 등치시키는 재현의 관습을 거부하고 그것이 그림이라는 개념적 장소의 구성요소임을 강조한다. 작품 속 과일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다. 단순히 주어진 대상을 담아내 중성적 용기와도 같은 뉴턴적 공간에 대한 거부이다. 정수진의 작품에서 공간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처럼 대상과 상호작용한다. [converted memories] 시리즈는 기억의 문제를 건드린다. 기억 또한 여기와 저기, 지금과 그때를 갑자기 연결한다. 일상 속 자연스러운 인과적 관계는 찢어진다. 말풍선처럼 만화적 인물 위로 떠 있는 구름과 여러 선의 복합체들의 병렬은 사유하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pink sea](2021)



[pink sea](2021) 

 

구름처럼 덩어리진 것들은 그 옆에 도표처럼 제시된 계열화된 사고로의 이행을 준비한다. 구름의 가장자리를 확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날씨처럼 완벽한 예측이 어렵다. 카오스 이론에서 선호하는 이미지인 구름은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세상에서 개인이 쏘아올린 정보라는 또 다른 비유로 재탄생한다. 또 다른 작품에서 독서하는 남자와 장미꽃, 그리고 구겨진 종이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은 피고지며, 펼쳐지고 접혀지는, 유기체와 기하학에 공히 적용되는 가변적 상황을 독서와 비유한다. 차원의 변주는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쉬운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 우주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면 내딛는 바닥은 제자리를 벗어난다. 작가는 중력이나 원근법, 명암법 등 개연성 있는 형식을 지키면서도 위반한다. 관객을 향해 걸어 나오는 듯한 인물은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검은 머리 부분이 밤하늘의 별로 반짝이는 것이다. [egg shells on the table] 시리즈는 테이블 색이 푸른색이다 보니 바다같은 공간감이 있다. 


사유하는 인간은 거인이 되며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른다. 물론 그 반대의 방향, 즉 가라앉는 방향일 수도 있다. 더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존재만이 질서를 향유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번개 마크와 함께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깨진 알의 내용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오렌지색 머리털을 가진 인물이 나오는 작품들은 연속 동작처럼 보이며, 얼룩의 점도와 색, 형태로 서로 간의 차이점을 드러낸다. [in the deep thought] 시리즈는 사유하는 인간의 겉모습과 속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얼굴 중에서 이마 부분은 뇌의 영역이다 그 부분에 배치된 이미지는 뇌에서 진행되는 생각에 해당된다. 잘려있는 구조체들, 변신 중인 색/형태들, 직선, 사선, 곡선 등의 무더기를 잔뜩 진 채 어디론가 달려가는 발은 광인의 머릿속처럼 부조리하다. 하지만 바깥으로 돌출된 뇌라고 할 수 있는 두 눈만은 초롱초롱하다. 



[the arched enterance](2021)



[the arched enterance](2021)



[the projective plane](2021) 



[the projective plane](2021)


눈은 단독의 존재로 이 작품 저 작품에서 출몰한다. 작품 [in the deep thought]에서 부스스한 머리 부분에 맹렬하게 분열 중인 형태와 찢어지고 접혀있는 종이는 화면 왼편의 견고한 건축적 구조와 대조된다. 사고의 과정에 대한 비유적 이미지는 질서와 무질서가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생각하는 인물은 반듯한 구조체와 함께하기도 하고 무정형 형태에 먹혀들어 가기도 한다. 그 와중에 자세히 묘사된 숙고하는 인물의 금발 머릿결은 어디로 구부러질지 모를 사유의 지형학을 가시화한다. 머리 위에 떠 있는 접힌 종이나 과열된 기운이 상형문자처럼 변화한다든가, 사유를 위해 감겨진 두 눈과 달리 가슴팍에 무늬처럼 박힌 제 3의 눈은 초롱초롱한 모습을 보이는 이미지 등은 사유의 여러 면모들이다. [pink sea] 시리즈는, 제목을 보기 전까지 푸르지 못한 그 색깔 때문에 흙탕물로 생각했다가 의미가 반전된 경우다. 흙탕물과 핑크바다는 얼마나 다른 느낌인가. 거기에는 파동과 입자가 빛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이듯, 어느 한쪽으로 몰고 가기에는 힘든 면모가 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위상기하학처럼 요소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두 인간의 얼굴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지는 신화적 형식을 가지며, 구겨진 정도가 다른 두 종이라는 맥락에 끼워진다. 그 사이에 에메랄드빛 우주가 펼쳐져 있다는 점도 매혹적이다. 정수진의 작품에 상이한 맥락에서 다양하게 등장하는 접힌/구겨진 종이는 평면에 합리적으로 구현된 유클리드적 기하학의 체계와 구별되는 시공간을 상징한다. 요컨대 그것은 여기와 저기를 급격하게 단절 또는 연결하는 유동적 공간의 상징이다. 열매처럼 보이는 붉은/노랑색/형태 또한 접힌 종이와 미지의 상황을 펼친다. 종이가 기하학적 변모의 장이라면 색 덩어리는 유기체적 변모의 장으로 읽힌다. 어떻게 펼쳐지고 접혀질지 모를 주름은 다양한 세계를 상징한다. 작가는 [pink sea]의 한 작품에 ‘뫼비우스 구조를 가진 이중계의 풍경’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뫼비우스 띠처럼 차원을 넘나드는 우주다. [the arched enterance] 시리즈는 사유의 단계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결정적 지점들을 가시화한다. 



[the various multi dimention creatures in the room](2021)



[the various multi dimention creatures in the room](2021)



[the various multi dimention creatures in the room](2021)



[the various multi dimention creatures in the room](2021)


가장 유명한 비유는 뉴턴의 결정론적 우주관을 반박했던 낭만주의자 윌리엄 블레이크의 ‘인식의 문’일 것이다. 작품 [the arched enterance]에서 무중력 공간처럼 배열된 단편들은 보이지 않는 그리드를 가정한다. 문밖으로 뛰어나가는 구겨진 덮개를 쓴 두 다리는 그 안에 몇 명이 어떤 상태로 있는지를 수수께끼로 남겨둔다. 안과 밖에 불연속을 가정하는 초현실주의적 방식이다. 또 다른 시리즈에서 사유의 전쟁은 피를 튀길 정도로 치열하다. 노랑 바탕에 붉은색 기호들은 전쟁의 흔적이며, 구겨진 표면 밖으로 삐져나온 다리들은 견고하지 못한 지지대를 딛고 서 있다. 기관 없는 신체인 눈깔 하나는 목전에 펼쳐진 광란의 질서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the projective plane] 시리즈는 구겨진 평면과 조합된 형상들을 통해 기하학적 차원의 유희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 시리즈의 작품에 대해 ‘사영 평면구조와 원통 구조와 클라인 병 구조로 결합하여 뫼비우스 구조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구겨진 평면은 이국적인 수도승같은 얼굴부터 노랑머리 소녀까지 무엇과도 접속될 수 있는 괴물같은 기하학의 몸체를 이룬다. 구겨진 평면과 나비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들은 ‘나비효과’같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암시한다. [the various multi dimention creatures in the room] 시리즈에서 방으로 설정된 공간의 원근법은 복잡하게 뒤틀려 있다. 나무 바닥은 벽처럼 서 있고 가구를 연결시켰던 부속들은 빠져 나와 있다. 소파 위에서 생각하는 남자 아래로 푸른 눈을 가진 얼룩은 남자가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도 제 3의 눈으로 작동한다. 또 다른 작품에서 나무판은 바닥으로부터 탈주한다. 리플렛 표지의 작품에는 ‘파편화된 다차원인 사각형 세계를 엿보는 시선이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견고한 현실과는 구별되는 상상의 세계에서 동질이상(同質異像)의 형태들이 공간에 수직적으로 배치된다. 맨 마지막 작품은 ‘캠핑장에 나타난 토끼이다’ 토끼 모양의 형태들이 다양한 변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선으로 그어진 형태는 마치 게임의 도상처럼 ‘게임오버’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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