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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주 / 죽음과 내기하는 삶

이선영

죽음과 내기하는 삶

  

이선영(미술평론가)


  

조은주의 [出] 시리즈에서 사각형 화분 속 식물은 다채로운 둥근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활발하게 운동한다. 살아있는 식물과 인공적으로 만든 식물의 차이는 살아있는 식물에는 먼지가 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정된 듯하지만 미세하게 운동한다는 증거다. 식물 또한 주변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이어간다. 동물과 달리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다른 진화의 전략을 개발했는데, 그것은 씨앗을 퍼트려 다른 동물과 공생하는 것이다. 조은주의 작품은 꽃을 입자로 표현함으로서 식물의 형태와 생태적 과정을 동시에 표현한다. [出]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작업은 꽃의 운동성을 강조한다. 시리즈라는 형식은 고정된 형식인 회화에 잠재적인 동감을 준다. 어떤 개체가 바깥으로 출발하는 조건은 각기 다를 것이다. 단순히 화분에 심어 있기보다는 박스 바깥으로 튀어나온 듯한 꽃은 제목처럼 출발을 말한다. 







겨우내 땅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다가 때가 되면 용수철 튀어나오듯이 일제히 싹을 틔우는 식물은 재생의 상징이다. 화면을 경쾌하게 가로지르는 하얀 면들은 식물에게 꼭 필요한 빛의 무리처럼 보이며, 마치 사통팔달의 길처럼 어디론가의 출발을 힘차게 지원한다. 식물이 등장하는 작품들의 제목인 [出]은 작은 화분부터 대지에 이르는 식물의 입지를 표현한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나무는 지상과 하늘을 잇는 전형적인 형태를 벗어나 마치 물결과 함께 나풀거리는 원시식물같은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원시 식물이든 고등식물이든 푸른 엽록소를 통해서 지상에 다른 생명이 가능하게 한 자연을 숨 쉬게 하는 생체공장 같은 역할을 해왔다. 나무 기둥 형태를 이루는 크고 작은 둥근 입자들은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처럼 보인다. 고대 원자론자들의 주장처럼 원자도 중요하지만 원자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비어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작가는 단단한 형태에도 빈 여백을 남겨둔다. 


원자적 형태는 이 빈 공간을 통해 움직이며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생명의 과정을 표현한다. 조은주의 작품은 자연의 외부이자 내부인 것이다. [Ecdysis] 시리즈는 바다처럼 짙푸른 바탕에 섬처럼 떠 있는 인물을 보여준다. 우울한 블루 속에 잠긴 인물은 잔뜩 웅크린다. 작품 속 인물은 성체이지만 마치 모체 속의 아이같은 자세다.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모든 생명체에게 모태는 삶의 기원이자 죽음의 기원이기도 하다. 생명의 기원인 바다는 모체처럼 양면성이 있다. 바다-모태는 삶과 죽음이라는 양면성을 한 몸에 연결시킨다. 작품 속 인물은 가혹한 현실원리에서 상처받은 존재는 치유를 위해 역행한다. 발생 이전의 단계로 소급함으로서 상처 이전의 단계로 리셋(reset) 하는 것이다. 인간을 이루는 입자들을 원래 충만하게 채워져야 하지만 얼룩덜룩한 빈칸을 남겨두었다. 이 여백들은 재생을 위한 운동이 일어나는 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시리즈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작품마다 여러 각도로 상처 입은 존재를 조명한다. 3부작 시리즈인 [Nomade –unlimited]에서 어두운 화면 아래 구석에 웅크린 자세의 인간은 성인이면서도 태내의 아이같이 수동적이다. 태어나기 이전의 단계로 소급 됨으로서 모태라는 완전한 보호의 시절로 회귀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충만하게 공급되는 시기로의 복귀는 복락원의 신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작가는 웅크린 인간의 어른 같은 체형을 통해서 또 다른 의미의 탄생도 암시한다.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실험실같은 비유이다. 성을 매개로 하지 않은 생식은 가지치기처럼 중간 단계에서 복제된다. 마치 밤하늘의 폭죽놀이처럼 배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신경세포의 연결망이다. 그것은 전기라는 에너지가 가해지자 움찔거리는 피조물의 메커니즘을 표현한다. 외형과 내부의 과정을 한 화면에 동시에 표현하곤 하는 방식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생명의 창조라는 금기를 어겨 저주받은 괴물의 운명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예술가는 거듭해서 태어나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괴함은 남아있다. 몸 위의 얼룩덜룩한 형상들은 정체성의 순수함을 보장하지 못한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프랑켄슈타인처럼 자아에 의해 창조된 타자는 초자연적이거나 초인간적인 존재가 아니고 조각나고 꿰매진 몸의 합성물, 시체의 집합, 살아있는 주검으로 다시 일으켜진 죽은 사회의 단편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타자로서의 자아는 그로테스크하고 구원받지 못한 변형물로서 단순한 변장과 패러디, 공포로 기록된다. 로즈메리 잭슨에 의하먼 죽음을 상징하는(memento mori) 해골 형상이 상징하듯이 기괴한 존재들은 직접적으로 묘사될 수 없는 죽음을 말한다. 조은주의 다른 작품에서 상자 속에서 출발을 기다리던 식물이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크다. 


실험실에서 창조된 존재가 깨어나지 못하게나 원래의 의도와 다른 괴물이 되어 죽음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 삶은 자명하게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늘 죽음과 내기한다. 웅크린 인간의 색과 위치를 달리한 시리즈 형식을 통해 생명의 과정이 진행되는 시간의 축을 암시한다. 3개로 이루어진 시리즈에서 붉은/노란/푸른색의 인간은 3원색처럼 근본적인 요소를 상징한다. 인물의 색감에 따라 열정이나 활기, 그리고 사색의 분위기를 띈다. 작품 [Ecdysis]는 수년간 전 세계의 삶을 마비시켰던 코로나 국면을 떠올린다. 인간을 잔뜩 움츠리게 하는 것은 둥근 바이러스같은 미시세계의 존재들이다. 연결망을 이루는 둥근 입자들은 인간을 뒤덮는 얼룩이 된다. 얼룩은 어떤 개체의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외곽선을 허문다. 형태가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설치작품 [아리아드네의 실]은 마치 다른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웅크린 인간들과 그 연결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작은 무대처럼 연출된 구조물 여기저기에 배치된 인간 형태들은 배우처럼 상징적 세트들 속에서 이야기한다. 청색과 백색으로 칠해진 인간들은 여러 크기를 가지고 있지만 자세는 같다. 조은주의 작품 속 인간은 아이와 어른의 크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작은 어른이고, 어른은 큰 아이같은 모습이다. 인간은 성장할 수 있지만 발전할 수 있는 것일까. 조은주의 작품에서 수동적인 인간과 대조될만한 항은 연결망이다. 연결망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기도 하고 툭 끊어져 어지럽게 널려 있기도 하다. 위에서 내려오는 실타래에 연결된 개체들은 언제 당겨질지 모르는 어딘가에 매어있는 운명적 존재를 상징한다. 불행하게도 실은 쌍방형적이지 않다. 생태계에 특징적인 연결망은 자연에 대한 구조적 모사를 통해 인공적으로 구축되었다. 그러나 구축은 동시에 해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결망은 인간을 확장시켰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인간은 더 수동화되었고, 긍정적인 것만큼이나 부정적인 것도 신속하게 공유하게 되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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