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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예현 / 자연의 거울

이선영

자연의 거울

  

이선영(미술평론가)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려진 고예현의 작품은 서양화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화를 전공한 탓인지 담백한 느낌이다. 미끄덩거리거나 텁텁하게 쌓이는 방식이 아닌 스미고 번지는 한국화는 자연과 보다 친근하다. 고예현은 제주에 살면서 제주를 에워싸는 바다를 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바다는 한 두 번의 인상에 그치지 않고 끝없이 치는 파도처럼 반복과 차이를 감지한다. 작가는 ‘조용히 바다를 바라볼수록 잔잔하다고 생각하는 파도와 잔물결 속에 엄청난 진동과 격랑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바다가 워낙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다 보니, 어느 시공간을 택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작품 [격랑의 시작](2021)은 언뜻 바다인가 싶은 색감과 재질이 특징이다. 고예현의 바다 풍경은 전형적인 바다의 색이 아닐 때, 가령 해질녘이나 해뜰 무렵 붉고 노란 따스한 기운이 돌 때의 모습은 마치 대지같다. 




격랑의 시작



푸른새벽



라깡으로 대변되는 현대 심리학에서 바다와 대지는 실재계와 비유된다바 있다. 여러겹으로 두툼한 대상의 표면은 바다나 대지조차도 넘어서 추상적이다. 이미지, 특히 추상적 이미지가 있는 회화는 현대와 잘 조응하지 않을까. 하지만 원리로만 그렇다. 시대와의 조응은 작가 개인이 각자 찾아내야 하는 과업이다. 원본을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복제되는 진공의 산물이 현실을 대체하고 있다. 가상현실은 더이상 가상이 아니다. 코드의 조합으로 파생 실재가 현실을 점령하는 정보혁명의 시대, 화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진정 실재하는 것을 찾고 싶어 한다. 물감과 화가의 몸이 만나는 회화 또한 대지와 바다처럼 실재에 가닿고자 한다. 바다-대지-회화는 실재에 대한 비유로 수렴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재는 재현될 수 없다. 단지 직관될 뿐이다. 고예현의 최근작이 주로 바다라는 정보 때문이어서 그렇지, [반추의 길](2021)처럼 빛을 가득 받는 바다는 추상화이다. 바다는 재현과 추상이라는 구별도 무색하게 한다. 


작품 [반추의 길]에서 화면 가운데를 관통하는 듯한 강한 에너지는 양옆으로 퍼져난다. 화면 안에 무언가 있다면 이 풍경은 후광이 돼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중심을 상정하지 않는다. 중심 없는 흐름 그자체를 주목한다. 자연에는 자세히 관찰할수록 불확실성이 더 커지는 역설이 있는데 변화무쌍한 바다가 그러하다. 인간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고예현은 바다의 외적인 묘사를 넘어서 자신을 본다. 작품 [내면을 보다](2021)에서 화면 한가득 잡혀 있는 바다에서 작가는 내면을 읽는다. 작가는 ‘어느 순간 내가 바다를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면서 ‘매일같이 바라보는 깊은 바다속에서 탐구하는 대상은 다름이 아닌 나였다. 풍경의 바다가 아닌 그 이상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신비하면서도 격렬한 바다에 인간이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다가 우주와도 비교될 수 있는 광대한 시공간에 대한 생생한 모델이 돼주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러한 하나 됨의 사유나 감정에 호소한다. 전체에 대한 느낌, 그 안에 내가 생생하게 속해 있다는 연결의 느낌 등은 종교적이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도 이유는 있을 것같다. 생명의 기원이 바다에 있어서도 그렇고, 개체발생의 단계에서 바다의 환경을 재현한 모체의 양수에 감싸있던 시절의 무의식적 기억도 깔려있다. 물에서 자신을 본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부조리 하지 않다. 다만 그 시점은 매우 오래된 것이며, 작가만의 기억도 아니고 집단 무의식이라 할 만하다. 원형을 강조하는 심리학에서 물은 태초에 대한 비유이다. 또한 인간은 반사상 없이 스스로를 볼 수 없는데, 최초의 거울이 되어 준 것도 물 아닌가. 거울 역할을 하는 반사상은 분리된 몸체를 상상적으로 봉합한다. 내면을 비추는 거울은 자아의 요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원초적 현실에 대한 욕구와 사회의 지배적 질서에 대한 주체의 욕망 사이에 자아의 상상이 자리한다. 고예현이 ‘내면을 보는’ 거울은 거울의 서늘한 기운에 잠겨있지만, 투명하지 않다. 


물살의 모습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주변의 환경은 미묘하게 반영하는 유동적인 표면으로 어른거리는 흐릿한 거울이다. 자아를 비추거나 자아의 연장인 바다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그것이 가능했을 때 위로받는다. 특히 바다라는 존재 그자체가 주는 위로가 있다. 늘 그곳에 같은 방식으로 있다는 것이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작품 [위로의 시간](2019)은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다. 오래된 나무나 문화재 등 기타 지상의 기념비적 존재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없어지는 일이 많으므로 바다만큼 항상성을 가진 대상이 없는 것이다. 물론 대규모 토목공사 등으로 바다 또한 바뀔 수 있고, 종종 일어나는 대규모 해양오염 사고같은 재난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바다 자체는 늘 거기에 있다. 바다에 갈 수 있기만 한다면, 바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고예경의 작품에서 바다는 늘 빛과 함께 한다. 


광원이 직접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빛은 바다가 수많은 살아있는 주름으로 가득 한 상태임을 표현한다. 이원 항의 대립이 아닌 하나의 표면으로 출렁거리는 주름은 접혀지고 펼쳐지면서 끝없이 변화하며, 경계가 불분명한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작품 [바다의 이중주](2021)에서 태양 또는 달빛의 이동에 따라 한 화면에 난색과 한색이 동시에 있는 바다 풍경은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 자연을 관찰하다 보면 그러한 절묘한 시점(또는 지점)이 있다. 자연을 무기력한 대상으로 삼고 도구화시키는 관점은 자연의 다양성을 볼 수 없거나 그저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예술이 자연 친화적인 것은 그러한 다양성 때문이다. 바다를 볼 기회가 많은 작가로서는 이러한 발견 때문에 바다는 퍼도퍼도 고갈되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작가는 대조되는 두 가지가 공존하는 이 작품에 음악적 제목을 붙이면서 공존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둘 중 하나만 택하라는 단선적 사회는 자연의 포용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빛과 어둠은 서로에게 속하면서 스며든다. 바다는 빛의 드라마가 상연되는 거대한 장 또는 무대가 된다. 작품 [여명II](2021)에서 바다라는 거대한 삶의 무대를 비추는 조명을 온통 붉은 색조다. 화폭은 대지(해안가), 밀려오거나 밀려가는 바닷물, 그리고 화면은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하늘로 구별된다. 각기 다른 것들이 그림으로 번역될 때 층층이 쌓인 물감의 겹으로 나타난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서로를 반영하면서 같은 색감을 가지듯이, 여명의 기운은 대지 또한 붉게 물들인다. 작품 [푸른 새벽](2021)에서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수평선은 사라져 있다. 물과 공기의 온도 차에 따른 물리화학적 현상이 화면 전체를 푸른색 그라데이션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다 풍경에 붙인 [푸른 새벽]이라는 제목은 새벽이라는 시간을 바다라는 공간과 비유한다. 이런저런 사념에 잠을 설치고 일찍 깬 사람에게 새벽은 푸른색이다. 


푸른색의 무한히 다양한 계열을 생각하면, 새벽을 단지 푸른색으로 명명하는 것은 폭력적일 것이다. 언제가 보았던 짙은 푸름 속 새벽녘은 바다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환상적인 색의 바다가 실제로 본 것인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상태에서 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어둠이 가시는 경계 지대에 놓은 새벽은 푸르고, 이를 느끼는 주체와의 경계도 불확실하다. 바다와 하늘의 구별이 비교적 확실한 작품 [어느 곳엔가](2019)는 막막한 자연 속에서 어떤 좌표를 잡고 싶은 생각이 반영된다. 평생을 길어도 다 못 퍼올릴 바다라는 소재/주제지만, 그러한 바다에도 길은 있어야 한다. 바다가 생명의 근원이자 죽음의 근원이기도 하듯이 작가로서는 대결적 구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풍경화라는 다소간 거리를 둔 시점을 선호하는 것은 대상에 매몰되지도 않고 주체가 지배하지도 않는 어떤 간격의 요구이다. 이 간격에서 파도가 밀고 밀리며 만들어내는 주름같은 다양성이 펼쳐질 것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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