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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 밤 같은 낮과 낮 같은 밤

이선영

밤 같은 낮과 낮 같은 밤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승연의 풍경은 밤/낮이라는 구별되는 이원 항을 교묘하게 뒤섞는다. 밤에는 낮이 낮에는 밤이 내재하는 풍경은 현실의 단면이자 환상의 절정이다. 그의 작품이 사실주의에 충실하기에 이러한 뒤섞음은 절묘하다. 모노톤의 메조틴트 작품은 연필로 한 정밀묘사나 흑백 사진 같은 사실성을 가진다. 그의 작품은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원근법, 색감, 명도 등 작가의 감각에 의해 변형된 부분이 많다. 예술은 세계를 반복하지만, 반복은 차이도 만든다. 빛을 잘 다루는 것은 어둠을 잘 다루는 것과 같다.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화려하게 진화된 도시의 밤은 검은/하얀 건반으로 이루어진 클래식 악기처럼 단순해진다. 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것을 포함하기 위한 단순함이다. 작가가 세계를 흑백으로 전환한 것은 거기에서 본질을 보았기 때문이다. 색이 제거된 세계에서 빛과 어둠, 그리고 그림자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될 만큼 묵직하다. 총천연색 현실을 한 꺼풀 벗기면 음화같은 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야경을 이루는 짙은 색조는 모든 색이 수렴하고 발산하는 바탕이 된다. 




Night Landscape-200132.



Night Landscape-20082



[Night Landscape] 시리즈의 한 작품은 강변에 고층 아파트가 가득 세워진 서울의 밤 풍경이지만, 굳이 흑백 화면인지 의식되지 않는다. 밤낮없이 불 밝히는 문명의 밤을 빛내는 광원들은 날카롭지 않다. 24시간 돌아가는 문명이 생산한 풍요의 몫이 평등하게 분배되는가를 따지는 사회적 관점은 노동시간의 연장일 뿐인 휴식 없는 풍경에 불편할 수 있다.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계층 간의 격차는 커진다는 사실이 화려한 풍경을 편안하게만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김승연의 야경은 대체로 중립적이다. 욕망과 타락, 범죄와 음모의 도시일지도 모를 야경은 멀찌감치 잡혀있다. 낭만주의자들이 밤의 세계에 몰두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김승연의 작품 목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야경은 낭만주의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야경이어도 특정 도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사실에 충실하다는 것, 그리고 낮 풍경이 담긴 작품은 현실이 허구보다 더 환상적일 수 있음이 특징이다. 야경의 낭만적 요소는 화면 위아래에 거의 여백처럼 보이는 공간이 빽빽한 도시의 일상을 상대화한다는 점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도 밤은 블랙이다. 블랙은 많은 것을 담고 있으며, 덮을 수도 있다. 블랙이 가지는 문화사적인 의미를 탐구한 저자 존 하비는 검은색의 풍부한 면모를 서술하는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의미는 어둠과 밤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빛은 어둠 속에서 드라마틱하다. 존 하비는 바로크 시대의 기법을 서술하면서 극적인 광원 뒤에 놓인 검은 어둠은 강렬한 공백이 된다고 말한다. 도시는 불야성이지만 밤하늘은 어둑하고, 강에 비춰진 도시의 불빛은 강물 따라 울렁거리면서 녹아든다. 김승연의 대낮 풍경이 직선들로 이루어진 문명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과는 비교된다. 파노라마처럼 길쭉한 야경은 빛의 궤적으로 만들어진 풍경이다. 현대인의 삶의 터전은 대지 위에 굳건하게 뿌리 내리기보다는 부유(浮游)하는 광경이다. 덧없음의 리얼리즘이다. 자본이든 노동이든 유행이든 빠른 회전만이 대도시에서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다. 남산 근처를 표현한 야경은 하늘과 숲 사이에 끼어있는 도시를 보여준다. 화면에 많이 할애된 밤하늘을 찌르는 타워의 불빛은 문명의 방향성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듯하다. 




Night Landscape-2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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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처럼 보이는 뾰족한 실루엣은 휴식 없는 밤의 상황을 시계침처럼 표시한다. 도쿄의 야경을 표현한 작품은 비슷한 소비/생산 방식으로 발전해온 각국의 도시 풍경이다. 그지역에 특수한 자연물이나 문화재가 없다면 비슷한 도로, 자동차, 상가, 심지어는 상호 등을 볼 수 있다. 맞딱뜨린 특정 상황에서 이국성이 느껴지는 것은 대개 문자와 언어다. 야경인 탓에 상호가 새겨진 전광판이 뚜렷이 보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세계화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서 적응된 산물임을 알려준다. 원근법에 충실한 풍경에서 밤하늘은 빽빽한 야경에 약간의 숨통을 틔워주는 계곡을 만든다. 그 사이에 달처럼 떠 있는 큰 광원이 신호등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빛을 늘려가는 문명, 도시의 야경은 하늘의 별을 지워버렸다. 별을 봄으로서 내가 서 있는 이곳도 수많은 별 중의 하나임을 깨닫게 되면서 다소간 초월적일 수 있다. 하지만 지상에만 고정된 근시안적 시각은 순간순간 바뀌는 신호를 따라 다급하게 공전하는 삶을 낳을 따름이다. 


김승연의 작품은 어둠의 배치를 통해 색다른 풍경으로 거듭난다. 근경을 홀로 비추고 있는 가로등은 마치 도시의 샘플처럼 부각 된다. 인공조명이 그 조명 아래의 인간 삶을 예시한다면 복잡하고 번잡한 도시를 고독한 단자들로 이루어졌다. 하늘 몫을 거의 제거한 빽빽한 도시의 야경은 실제로 그런 면이 있는 도시적 삶을 돌아보게 한다. 빛과 어둠으로 인간을 대신 표현하는 무인지경의 풍경이다. 대도시 내부로 근접해서 포착된 사람들 또한 익명적이다. 일본의 한 대도시를 표현한 작품 속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군중들이다. 도시의 야경에서 현대적 삶의 본질을 보는 작가에게 낮의 풍경은 어떻게 나타날까. [Street Landscape] 시리즈는 낮의 풍경이 담겨있다. 한낮의 햇빛을 가득 받는 이국적인 도시 한 켠은 야경 시리즈와 대조된다. 인구 집중 및 주거 밀도가 높은 건물에다 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Street Landscape-9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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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순간 멈춰진 듯한 세계를 순간의 매체라고 할 수 있는 화폭에 담았다. 사진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판화는 사진과 회화의 언어가 두루 활용된다. 하지만 우연적 순간을 영원한 순간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미세한 조율은 작가만의 감각과 재능에 의한 것이다. 창틀에 내놓은 작은 화분들만이 그곳이 사람 사는 곳임을 암시한다. 낮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직장인의 도시, 즉 배드 타운이라면 그럴 수 있다. 작가는 사람이 없는 순간에 감흥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사람이 있었지만 생략했을 수도 있다. 펜데믹 기간 중 페스트가 휩쓸고 간 듯한 텅 빈 거리를 자주 보아서인지 기시감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백일몽같은 화면은 현실이 되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적 삶에 끼어든 무명의 시공간은 시적이다. 그 자체가 삶의 여백같은 시공간에 예술가가 주목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알베르 베갱은 [낭만적 영혼과 꿈]에서 거친 현실에 의해 손상을 입은 자아가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자의식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낭만적 영혼의 첫 움직임이라고 표현한다. 


이 낭만적 영혼은 특별한 순간과 만난다. 갑자기 만물이 완전히 새롭게, 그들의 완전한 의미를 갖춘 채 바로 거기에 있으며, 예술가는 바로 그 순간들을 포착한다. 알베르 베겡에 의하면 가장 쾌적한 순간들은 깨어있는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꿈의 연속인 순간들이다. 작가는 한낮의 풍경에서 한밤중 같은 분위기를 포착했다. 김승연의 야경이 불야성이라면 낮은 백일몽처럼 신비하다. 그래도 하루의 반은 휴식이 있으니 다행이다. 또 다른 [Street Landscape]에서 신호등까지 있는 관공서같은 건물 앞을 차지한 것은 빛과 그림자이다. 태양을 거대한 인공조명으로라도 쓴 듯 한 텅 빈 무대는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한다. 그 앞에서 갖가지 삶의 드라마를 만들 배우 격인 인간이 있거나 없거나 그곳을 비출 빛은 무심하다. 그래서 계절도 알 수 없는 한낮의 풍경은 냉랭하다. 한편 우리는 빛이 주는 무상의 선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태양이라는 우주적 존재는 100년 남짓한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무대를 환하게 비춰준다. 문명의 산물인 건축은 빛과 그림자의 유희를 견고하게 받아낸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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