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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현실과 지배적 상징 사이에 자리한 여성의 상상계

이선영

원초적 현실과 지배적 상징 사이에 자리한 여성의 상상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여성/ 한국화/ 작가에 특화된 문제의식을 다루는 주제와 관련되어 호명된 이들은 미술계에서 ‘살아남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은 단순한 지속 이상을 요구하기에 이러한 새삼스러운 호명에는 한국화 부문 여성작가의 위상에 대한 특별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몇 년 전 20년이 넘는 연혁을 가진 유명 미술상의 역대 수상자들이 한데 모인 큰 전시에서 홍일점으로 포함된 한 작가를 기억하게 된다. 미술대학이나 화랑 등, 미술계 제도 속에서 여성의 숫자는 월등하게 많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이 작가로서 활동하는 든든한 기반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소비 사이의 문화적 불균형이 예술에서도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문화적 소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재생산하거나 심화시킨다. 번듯한 직장을 비롯한 시스템에 진입하기 위해 법 공부가 필수인 광명천지의 세상에서 왜 아직도 여성인가라는 물음이 유효한 이유이다. 




정종미,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열반, 2020, 가변설치, 이인성 미술상 20주년 특별전 중에서. (사진 출전;대구미술관)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권력이 편재하는 삶정치(biopolitics)의 장에서 예술 또한 팔루스(Phallus)가 특권적 기표를 차지하는 상징적 우주에 속한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학내 성 관련 비리에서 한국화과도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기성의 상징적 우주에 가부장적 권력 또한 선명함을 알게 된다. 미술대학을 포함한 아카데미는 단순한 쟁이의 산실이 아니라, 정신적 수행과도 관련되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고상한 관념에 실천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앞서 호명된 주체는 상징적 우주에서 타자화된 이들이다. 여성, 즉 세상의 반을 차지한 이들에게 억울한 면이 있다면, 그 문제는 결코 반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배적 질서는 한 부류를 타자화 시킴으로서 부당한 질서를 유지한다.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권력관계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 특징이다. 인류학자들은 동서고금의 문화에 깔린 희생양 메카니즘을 지적했다. 니콜라스 미르조예프는 [바디스케이프]에서 사람들이 제일 처음 주목하는 것은 바로 성(性)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은 ‘첫 대면에서 행동의 성격을 좌우하는 주된 요인으로, 무언의 행동은 당사자의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사회적 경쟁은 타자화를 필수적으로 요구했고, 성은 ‘자연스러운’ 차이에 선두에 서 왔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에서 유물사관의 중심을 이루는 계급보다 성의 차별이 선재했다는 주장을 피력한 바 있다. 성은 무한대로도 이어질 수 있는 제2, 제3...의 다른 차별의 원형이 된다. 차별의 계열에서 여성이 가장 중요해서가 아니라, 가장 전형적이고 보편적이기에 문제시된다. 여성은 지금처럼 사회적 재생산이 위기에 빠지기 이전, 역사의 오랜 기간 임신과 육아 등 ‘자연’의 영역에 묶여 있었고, 유전자와 재산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과업이 그녀의 창조를 대신해왔다. 과학 기술의 혁명은 이러한 육체적 ‘운명’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했지만, 오래된 전사(前史)에 바탕 한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작동한다. 


이원적 성으로 환원된 상징적 질서는 융합의 이미지를 강조해 왔다. 가령 한국화의 바탕을 기조를 이루는 동양적 철학에서 남성이 양(陽)이면 여성은 음(陰)이고, 음양은 조화를 이룬다는 식이다. 하지만 먹으로 그냥 갈려버리는가 주체의 분신이랄 수 있는 붓이 되는가의 문제는 남아있다. 조화의 이미지가 교조적이고 상투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가짜 화해이기 때문이다. ‘허위의식’(그람시) 또한 이데올로기처럼 제도의 망을 타고 작동한다는 점에서 체계적이다. 예술 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고 험악하게 표현된 그물망 안에 위치한다. 지배적 상징적 질서에 대한 도전은 조화보다는 다름으로 나타난다. 도전자들은 조화로운 총체성을 향한 상보적 결합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결연’(들뢰즈)을 추구한다. 여성이 꽃이었던 것처럼 예술도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꽃들은 무엇으로 펼쳐질지 모를 것이 접혀있는 배아(胚芽)의 이미지로 역행할 것이다. ‘퇴행과도 다른 역행’(들뢰즈)은 보다 큰 잠재력을 향한 이동이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배아와 비유될 수 있는 ‘기관없는 신체’는 양성의 구별에 바탕한 유기적 질서로부터 탈주한다. 음울하고 폭력적인 위계적 차별을 향유할만한 다양한 차이로 수평 이동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현실과 관련은 있지만 현실 그자체는 아닌 대안 세계의 제시이다. 그것은 물질이나 육체처럼 모호한 것을 조형적 언어를 통해 분명하게 표현함을 통해서다. 물질과 정신은 대립하지 않고 서로를 포함하면서 변화한다. 예술이라는 보다 원초적인 언어는 시각성을 넘어서 작가가 처한 물적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낸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작가는 자신이 던져진 상징적 우주를 재현하지 않고 상호적으로 반응한다. 물질은 언어로 고양되고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물적 조건을 창출한다. 여성은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이자 물질적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러한 자연과 물질은 이제 의식화되어 기존의 언어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기 시작한다. 객체가 주체가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김유정, Parasitic Air 기생하는 대기, 2021, tillandsia, artificial flower pots, wire, dimensions variable



주체는 많은 타자들을 배제해왔던 배타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몸은 물질(또는 자연)에 속하는가? 이항대립의 관계 속에서 설정되는 중심/주변은 차별로 정치화된다. 물질/정신, 자연/문화, 객체/주체의 이항대립은 여성/남성의 구별과 중첩되곤 한다. 주체의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아닌 타자들의 어법이 중요하다. 피터 부룩스가 [육체와 예술]에서 말하듯이 상징의 중심에는 몸이 있다. 타자를 만들고 그것을 억압하는 이원론을 극복하면서 여성문제도 해결하려 했던 저자 엘리자베스 그로츠가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말했듯이, ‘몸은 문화적으로 직조되는 자연의 산물’이다. 남성(문화)/여성(자연)이라는 전형적인 이분법을 털어내는 하나의 표면이 몸이고 현실이다. 예술 또한 하나의 표면이 어떻게 접혀지고 펼쳐지는가의 문제이다. 기존의 자연주의에 대항하여 몸을 담론으로만 보려는 흐름은 담론이 더욱 유연하게 변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지만, 그러한 관념론은 속류 유물론만큼이나 무익하다. 


육체를 담론으로 환원하는 것은 실재하는 고통과 희열, 죽음의 문제를 회피한다. 담론과 물질의 밀접한 관련은 예술이 힘을 발휘할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것은 말이 말만을 낳을 뿐인 공허한 형식주의를 거부한다. 오늘날 관료주의와 결합된 형식주의는 피상적인 평등 사어(死語)로 이루어진 지배적 법을 살아있는 법으로 대체하는 것, 그것은 여성작가를 넘어서 모든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바다. 지배적 상징질서로부터 타자화되 존재인 여성/작가는 질퍽한 현실과 딱딱하게 굳은 형식 사이에서 상상한다. 여성/예술은 말랑말랑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고 무엇과 만날지 정해지지 않는다. 대안적 예술은 지배적 상징질서로부터 타자화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여성작가가 주변화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술가 전체의 주변화와 맞물려있다. 여성 예술가의 조건이 문제를 다루는 이 기획에서 나이 또한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50대 이상이라는 나이는 경제적 조건과도 관련된다. 


경제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이에 대한 차별은 비교적 분명하다. 예술이든 뭐든 어릴수록 더 많은 투자를 받는다. 어른이 돼서도 아이같은 꿈을 지속한다면 상당한 저항이 따른다. 여성은 아이의 어머니로서 기성의 지배 질서를 성공적으로 계승하는 악역도 맡아왔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성과 세대를 관통하며 이어지는 것이다. 50대면 직장인으로 살아남았어도 은퇴를 준비하는 시기이고,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유령화 된다. 체력이든 사회적 관계든 빛의 속도로 멀어진다. 앞에 ‘전업--’이라는 접두어를 붙일 수 있는 여성의 어려움은 한없이 길어진 학업을 마치고 작가의 이력으로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에 상당 기간 육아 때문에 공백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때 놓친 끈을 다시 잡는 것에는 거의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심적, 육적, 물적 에너지가 소요된다. 예술적 작업은 여가활동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은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강도 높은 작업이다. 


물론 한국화 부문은 시서화(詩書畵)가 함께 하는 종합예술로서의 특수성도 있다. 하지만 이때도 누군가의 작업은 고도의 정신적 수행이고, 누군가의 작업은 생활예술 류의 아마추어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고색창연한 화론에 내재한 편파적인 미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평적 평가도 따라주어야 할 것이다. 비평 또한 작업만큼이나 같은 모순을 공유하기 때문에, 담론 부재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페미니즘에 대한 많은 학파의 주장이 있지만, 임신과 육아와 관련된 육체적 조건은 여성 문제의 핵심이다. 모순이 모이고 쌓여 결국은 인구의 사회적 재생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기 국면에 빠져들고 있다. 임금노동의 형식 이외의 활동에 대해서 인색한 사회적 인정은 끊김 없이 작업에 전념하는 삶을 먼 이상주의로 만든다.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에서 젠더가 아닌 섹스에 기반한 근대의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라는 패러다임을 비판한다. 




리경, More Light_Contemplation of the Void, 2014년. (사진 출전; 아트선재센터)


삶의 여러 과정을 경제적 차원으로만 환원하는 것은 노동과 자본 중심의 현대 사회의 질서와 조응한다. 이 국면에서 예술 또한 공적 사회에서 소외된 그림자 노동의 영역에 귀속됐다. 그러한 분리가 일어난 근대는 어느 시기보다 예술과 예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강력했다. 그림자 노동은 무시되고 있기에 경제로만 환원되는 근대적 패러다임은 공적 노동의 영역에 속하지 못하는 다수를 억압한다. 대부분의 예술 활동이 그림자 노동으로 여전히 머물러 있는 현실은 그러한 노동의 주체들이 개인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를 하나로 볼 것을 요구한다. 예술계가 여성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술 자체가 그림자 노동화 되는 것이 문제이고, 이는 남성 예술가에게도 치명적이다. 여성은 특정한 성에 국한된 이익이 아닌, 다수의 행복을 위한 사회적 모순 해결에 중요한 동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 이익은 없지만 삶에 필요한 무상의 노동에 대한 가치 부여는 ‘섹스’로 대변되는 모든 배타적 분리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한국화라는 범주를 타자의 문화라는 맥락으로 살펴보자. 한국화는 상당히 오랫동안 ‘위기’라는 말을 접미사처럼 달아왔다. 그것은 한국화 부문이 전통과 현대와 관련된 정체성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한국화 이외의 분야에서 전통과 현대의 문제는 그만큼 크지 않다. 물질적 발전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근대 이후, 고유의 전통은 중시되지 않았다. 물질적 궁핍을 포함하여 역사적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전통은 급격한 단절로부터 시작하게 했다. 그것은 한국화도 마찬가지다. 한편 전통과 현대의 부정적인 면이 합쳐지면--가령 가부장적 관념과 공/사영역의 분리 등—여성작가에게는 더욱 불리해진다. 무엇을 하는 학과인지도 불확실한 이상한 이름으로 통폐합을 거듭하다가 소리소문없이 과자체가 사라졌다는 말도 종종 들리곤 하는 것을 봐서는, 예술계 대학의 전반적인 위기 가운데 더 아픈 손가락인 것도 분명하다. 세계 10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한국의 문화적 주체성이 그만큼의 내실을 가지는지는 회의적이다.


예술적 주체를 생산하기도 하고 소비하기도 하는 제도화의 연쇄적 사슬 속에서 예술가가 되기 위해 많은 물심양면의 투자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한국화는 여기에서 성장해야 하기에 현실과 더 얽혀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열심히 할수록 이 바닥이 좁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나마 다행은 미술 현장이 그동안의 문화 권력의 중심이었던 대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 예술가를 비롯해서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된 이에게 거대 담론의 하나일 ‘한국적-’이라는 관념을 쉽게 자기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화과’라고 굳이 규정할만한 특징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형식이 실험되면서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는 경향은 이미 대학의 실기실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화과 출신이면서도 설치 미술가 등으로 자리매김된 몇몇 성공적인 예를 봐도 선적 표현이나 공간에 대한 감각 등에 있어서 모태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가들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다. 


출전; 월간미술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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