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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안 /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이선영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이선영(미술평론가)

  


수많은 스펙터클과 비교되는 회화는 한 화면에 많은 것을 압축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정지된 한 장면에 잠재적 운동감과 그에 따르는 서사를 접어 넣는 방식은 고전적이다. 회화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많은 정보량을 내장한다는 점에서 밀도있는 매체다. 동시에 이러한 밀도는 용이한 소통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현대의 화가는 그가 비록 물감과 붓만으로 작업한다 할지라도 다른 시각적 관습에 반응하며, 때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현대인의 몸의 일부가 되다시피 한 작은 고성능 컴퓨터인 스마트 폰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 한 작은 액정화면은 인터넷 이전의 장르들 또한 급격하게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럴수록 화가는 회화만이 가능한 표현방식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작년 말에 열린 구성안의 전시 [The stare of zooming]의 부제에서는 광학적 용어가 등장한다. 줌 아웃일 때는 풍경, 줌 인일 때는 추상적 드로잉으로 보이는 이중적 차원은 이번 전시에서도 이어진다. 




forest_Acrylic on paper_ 110cm×220cm_2021



구성안의 작품은 다소간 평범한 풍경을 밀도를 통해 또 다른 차원으로의 변주를 꾀한다. 그의 경우에는 관객이 보는 위치도 감안한다. 가까이 가서 보면 수많은 선의 그물망으로 뒤덮인 추상화가, 멀리서 보면 자연이나 고건축 같은 형태가 드러난다. 가까이 갈수록 대상은 멀어지지만 더 자세해지는 것은 조형 언어다. 정작 그 언어가 실어 나를 내용은 모호해진다. 우리는 대체로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마치 잘 알고 있다는 듯 자신 있게 말한다. 정치에 대한 생각이 대표적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대중들도 SNS 등을 통해 여론 조성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대중은 매체나 관료주의 등 시스템의 관리를 받는 존재다. 그가 정치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환골탈태하는 경험이나 도전이 요구될 것이다.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모를뿐더러 명확하게 말하기도 힘들다. 나, 특히 작업하는 내가 대표적이다. 구성안의 작품의 형식적 밀도를 지탱해주고 있는 수행성은 나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나를 잊음으로서 다시 찾는 역설적 방식이다. 


작업을 열심히 한다고 작품이 더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구성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고건축의 지붕이나 식물은 어떠한가? 그것은 잘 안다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다. 작가는 ‘자연은 우리에게 예술가에게 영원한 진리이며 철학’이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대상에 주목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 결말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삶도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2021)고도 한다. 작가는 전체가 아닌 일부를 선택함으로서 의미와 연결될 명확한 대상을 찾는 관객의 눈을 시험한다. 부분의 선택은 카메라를 비롯해서 여러 복제기계의 도움으로 용이하게 실험할 수 있다. 동시에 작가는 다른 복제기계와는 다른 그림만의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구성안은 그것을 여백과 필촉에서 찾았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칠해진 작품은 통상적이지 않은 부분에 배치된 여백이나 하나하나 손으로 그은 선들은 기계적 반복이 아닌 차이를 낳는 반복을 지향한다. 




forest_Acrylic on canvas_ 91.9cm×91.9cm_2021



part of field_Acrylic on canvas_ 112.1cm×112.1cm_2022 



이번 전시에서는 여백이 거의 없는 작품도 출품되지만, 대체로 여백은 동질이상의 작품에 차이를 낳는 요소다. 작업 초반기의 앙포르멜 스타일의 작품을 부분적으로만 계승한 이 방식은 2006년경부터 시작됐다. 요즘의 작업은 노동력이 많이 들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타협의 결과이기도 하다. 몰입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과 짬짬이 시간을 내서도 이어갈 수 있는 작업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얼마 전까지도 교육계에 몸담으면서 작업에만 전념할 시간을 내기 힘들었던 작가는 요즘 스타일의 작업에 대해 ‘자다가도 일어나서 선을 그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삶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하는 수행적 작업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작업 편의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얇은 선을 수없이 쌓아가는 기본적인 방법론은 유년기를 시골에서 보냈던 작가에게 자연에 내재하는 수많은 겹의 표현에 적절했다. 중첩되는 선들은 여러 색깔로 이루어져 있지만 작품마다 톤은 다르다. 


세필로 촘촘하게 그어진 선들은 그것은 시각성에 한정되어 오던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에 촉각성을 도입하는 요소이다. 마거릿 올린은 [현대문학 문화비평 용어사전](조셉 칠더즈, 게리 헨치 편집, 문학동네)의 ‘응시’를 설명한 장에서, 응시의 이론을 통해 시각예술을 다시 본다. 저자의 결론은 시각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배제되었던 촉각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마거릿 올린은 19세기의 심리학 이론을 활용하면서, 촉각은 무게와 견고함을 전달하는 가운데 현실과 접촉하게 만드는 반면, 시각은 비물질적인 색채와 빛을 전달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시각은 지성, 영혼, 상상력의 감각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촉각은 보다 현세적인 임무에 속한 것으로 남겨졌다고 한다. 이론가들은 시각예술이 시각에 고유한 색채와 빛을 묘사하는 데 머물러야 하며 윤곽선과 같은 촉각을 보다 잘 전달하는 요소를 재현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회화는 시각성에 특권을 부여하게 된다. 




part of field_Acrylic on canvas_ 130.3cm×91.0cm_2021



Field_Acrylic on canvas_130.3cm×89.4cm_2022



part of field_Acrylic on canvas_ 233.6cm×91.0cm_2022



마거릿 올린은 이러한 선택 또는 편중에서 시각과 정신주의의 연합을 본다. 시각성에만 충실한 ‘진정한’ 예술은 우리를 일상을 초월한 곳으로 데려간다. 촉각은 정신이 아닌 사물의 영역에 남겨졌다. 이러한 편중은 시각의 관념성, 그리고 권력과 얽힌 난맥상을 간과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권력관계를 보는 마거릿 올린은 메두사같은 응시로 인해 돌로 변한 시선의 폭력성을 언급한다. 마거릿 올린은 응시를 감시와 연관시킨 미셀 푸코, 그리고 구경꾼이 됨으로서 탈 인간화될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기 드보르의 이론의 예를 통해서 시각성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강조한다. 구성안의 작품에서 시각적 측면을 방해하는 요소는 복슬복슬한 편물 수세미가 연상될 정도로 촉각성이다. 작품마다 예측 불가능한 자유로운 여백의 운용은 까슬까슬한 필촉의 실루엣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작품 [forest](2021)에서 작가는 다양한 굵기와 굴곡 면을 지닌 나무들이 숲을 이룬 장면 아래를 여백으로 처리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선들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아서 더욱 추상적이다. 나무숲의 주인공은 화면 저편으로 사라지려 하고 조형적 유희로 가득한 선들이 베일처럼 화면을 뒤덮는다. 대상의 확실성에 기여하지 않는 선들은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텅 비워둔 화면 아래는 선의 실루엣이 드러남으로서 작업의 과정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구성안의 작업은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봄이 오면 새싹이 돋고 가을이 오면 낙엽이 떨어지는 자연의 과정을 회화적 과정과 중첩시킨다. 정사각형 작품 [forest](2021)는 큰 나무의 부분들이라서 그런지 다른 작품들에 비해 기하학적이다. 통상적으로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정사각형 화면도 인공성에 가세한다. 나무숲의 실루엣을 흐릿하게 하는 선들은 그 나무숲이 오랫동안 사계절을 통과하면서 물질을 순환시켜 왔음을 말한다. 가지 없는 식물들은 초록 계통의 색만이 그 대상을 유추하게 한다, 




piece of field_Acrylic on canvas_ 53.0cm×45.5cm_2021 



piece of field_Acrylic on canvas_ 53.0cm×45.5cm_2022 



piece of field_Acrylic on canvas_ 53.0cm×45.5cm_2022



piece of field_Acrylic on canvas_ 53.0cm×45.5cm_2022



작품 [part of field](2022)는 푸릇한 초목이 자라는 들의 한 부분이지만, 아래의 하얀 여백은 대지를 구름처럼 붕 떠 있게 한다.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작가에게 자연 풍경은 친숙할 터지만 그러한 친숙함을 바탕으로 이질적인 면들을 강조했다. 대지의 표면을 이루는 일부를 공백으로 남겨 놓는 것만으로도 땅이 꺼져버린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이러한 과감한 현실의 삭감은 조형 언어의 불투명성을 높인다. 그것은 관객의 눈앞에 펼쳐진 산야가 세로방향으로 그어 내린 선들로 이루어진 그림임을 강조한다. 작가는 농부가 모를 심듯이 화면에 녹색 계열의 선들을 빼곡이 심는다. 더 심을 것인지 그만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대상의 완전성이 아니라 조형적 완결성이다. 추상에 가까워질수록 선택의 폭은 커지며, 이는 구상회화에 비해 추상회화가 더 자유롭다는 생각을 낳았다. 하지만 자유 또는 자율에는 더 큰 에너지가 요구된다. 이미지가 컬러로 대량 출력되는 정보혁명의 시대에 화가는 작품의 방점을 현실에서 주체로 이동시키려 한다. 


작품 [part of field](2021)에서 한 방향을 향하는 대지의 줄기는 의도를 가진 노동의 산물임을 알려준다. 잔설이 남아있는 밭고랑 같은 모습이다. 작가가 잔설이라는 소재를 애호하는 것은 풍경에 자연스러운 여백을 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part of field](2022)에서 화면 가득한 노란 덩어리는 다른 작품의 맥락상 그것이 자연의 일부이며, 특히 가을 무렵 노란 단풍이 든 숲, 또는 노란 벼 이삭이 가득한 들판의 일부임을 추측하게 한다. 대작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과 대면하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게 한다. 관객은 풍경을 이루는 촘촘한 선의 무리를 응시하게 되며, 그것은 그자체가 수많은 겹으로 이루어진 두툼한 자연을 나타낸다. 그렇게 자연의 외관이 아닌 과정을 따라가는 화법을 통해 자연에 못지않은 실재감을 확보하고자 한다. 화면의 여러 위치에 녹색 덩어리들이 출몰하는 [piece of field] 시리즈는 화면 크기가 같아서 유연한 설치방식이 가능하다. 





(참고작품)



작가는 이러한 형태들의 출전을 ‘경지 정리 안 된 땅’이나 ‘모심기 전의 모판’ 등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농업에 종사했던 가계와 관련된다. 서울에 와서 미대를 다니고 작업 초창기에 나뭇가지 등이 설치물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시골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의 감성은 지속되고 있다. 작가는 부지런한 농부처럼 화면에 수확할 무엇을 심는다. 화면 우측 하단부가 침식된 듯 한 녹색의 덩어리가 있는 작품 [piece of field](2021)는 대지에 깊이 뿌리내리는 식물의 생태를 생각하면 불안정해 보이는 구도다. 이 시리즈에 나뭇가지나 기둥이 보이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불균형은 균형을 위한 움직임을 낳는다. 빈 여백과 함께 관객의 상상력은 활성화된다. 작품 [piece of field](2022)는 자연에서 많이 보이는 색이 지배적일 뿐 무엇을 재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관객의 심리상태에 따라 무엇으로도 연상될 수 있는 불규칙적 얼룩이지만 작가는 거기에 음영을 넣어서 식물과 연관 고리를 제시했다. 


작품 [piece of field](2022)는 왼쪽 아래가 텅 비워진 녹색조의 덩어리다. 아랫부분에 적용된 음영법은 보다 큰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 한 모습이다.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진 시리즈는 따로 또 같이 작동하면서 이러한 부분이 비롯된 전체에 대한 퍼즐을 맞춰보게 한다. 작품 속 여백은 이러한 맞춰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여지다. 화면이 재현적 대상으로 빽빽하다면 이러한 여지는 없을 것이다. 작품 [piece of field](2022)에서 녹색 덩어리 사이로 복잡한 실루엣을 가지는 여백은 마치 지도 같은 모습이다. 대상을 그럼직하게 묘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선은 그저 수없이 반복된 세로 선들의 집적으로 대치되었다. 식물은 땅과 하늘을 수직으로 이으면서 광합성을 비롯한 생태적 역할을 수행한다. 작가가 그은 세로 선들은 자연의 한 순간이나 자연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자연의 성장 과정 그 자체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일 수 있다. 작품 [Field](2022)는 굳이 부분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line_acrylic on canvas_33.4×19.0cm_2021



line_acrylic on canvas_40.9×31.8cm_2021 



line_acrylic on canvas_40.9×31.8cm_2021



멀리서 보면 꽃밭으로 보이는 작품 [Field]는 가까이서 보면 꽃밭을 이루는 색선들의 무수한 겹침이 망을 이루는 추상화다. 보는 거리에 따라서 대상은 장으로 흩어진다. 또는 확장된다. 꽃봉오리나 잎의 형태를 확실하게 묘사해야 할 선은 그저 꽃이나 잎의 위치에 던져졌을 따름이다. 최근 작품에 적용된 여백은 사라졌다. 선의 밀도는 달라서 화면은 중력의 방향을 명확히 알려준다. 뿌려진 선들이 내려앉으며 구체적인 형태를 만드는 듯한 모습이다. 한옥 지붕, 정확히는 궁의 지붕을 표현한 작품들은 자연과 쌍을 이룬다. 건축은 전형적인 문명의 산물이다. 작품 [line](2021)은 제목에 고건축의 지붕과 처마의 아름다운 선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같은 크기의 [line] 시리즈를 여럿 제작했다. 작품 내부에 여백이 있기 때문에 작품 하나를 단위로 삼아서 설치하면 화이트 큐브의 벽과도 대화적 관계를 이루게 된다. 작가는 작은 스케일로도 지붕의 부분들을 표현했다. 


내려 긋는 선으로 칠해진 지붕은 마치 비가 오는 듯한 기상현상도 연상시킨다. 여백이 잔설이 아니라 햇빛을 가득 받은 부분이라면 세로 선들은 지붕 위의 잡초처럼도 보일 수 있다. 우리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전통은 일부분이 선택됨으로서 낯설어지는데, 작가는 그조차도 여백 및 형태와 무관한 선들로 모호하게 만든다. 인쇄물이라면 핀트가 맞지 않는 불량품인 흐릿해진 화면은 지시대상 대신에 조형 언어를 강조한다. 하지만 구성안은 완전한 추상으로 기울지도 않는다. 작업 초창기에 작가는 서정적 추상회화(Informel)도 시도했지만, 곧 창조성에 대한 신화를 벗어나 노동하는 삶과 직관적으로 더 가까운 반복과 차이의 어법을 선택하게 된다. 건축전문가가 아니라면 다른 시리즈와의 맥락 속에서만 이 형상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맥락상 잔설이 남은 고건축의 지붕 일부지만, 부분의 선택은 작품을 그것이 속한 현실의 퍼즐을 맞추기 위한 추리를 촉발시킨다. 




line_acrylic on canvas_40.9×31.8cm_2021 



line_acrylic on canvas_40.9×31.8cm_2021



다른 작품에서는 어두운 부분의 비중이 더 크다. 2021년 말에 갤러리 한옥에서 열린 [The stare of zooming]에도 지붕을 소재로 한 작품이 나왔다. 그때 전시됐던 작품 [오후 햇빛](2021)은 올해 전시 작품의 특징을 상당 부분 먼저 보여주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화면 가득히 잡힌 기와지붕과 하얗게 남은 여백은 ‘오후의 햇빛’에 녹는 중인 하얀 눈일까. 만약 눈이라면 눈이라는 물리적 대상에 걸 맞는 명암법이 적용되어야 하지만 그곳은 텅 비워져 있다. 작가가 전시 부제로 썼던 광학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통상적인 시야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지붕이라는 소재 그 자체는 ‘줌 인’ 된 것이다. 작가는 ‘줌 인’을 통해 지붕의 텅 빈 부분을 강조한다. 하얀 눈으로 착각할 부분은 이 작품이 새삼 그려진 그림임을 자각하게 한다. 이미 작가는 기와처럼 눈보다 더 단단한 대상 또한 가는 선으로 와해시켰다. 물론 그것은 화면을 더 자세히 볼 때 그렇다. 


가까이 보면 이 작품은 잔설이 남은 붉은 기와지붕이기보다는 수많은 가는 선들이 하얀 면 위에 얹혀 있는 섬세한 그물망이다. 선들은 대상을 단단히 고정하기보다는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는 실 같은 형태가 켜켜이 얹혀진 상태다. 그것은 ‘줌 아웃’ 된 위치에서만 시각적 환영에 충실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흩어지고 멀리서 보면 뭉친다. 구성안의 작품은 관객의 시야에 의해 추상과 구상은 자리를 바꾸곤 한다.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인 서양화지만 채색화처럼도 보이는 작품에 적용된 동양화의 여백의 개념은 일상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단단한 지반에 어깃장을 놓는다. 이번 전시의 지붕 시리즈에서도 ‘응시’라는 키워드는 함께 가지고 간다. 작품 [stare](2022)는 궁궐의 지붕이 화면 가득 잡혀있다. 그 위에 선이 흩뿌려진 듯 덮여 있다. 나무/숲을 표현할 때 가지런한 세로줄이었던 것과 차이가 있다. 기와지붕은 자연과 좀 더 가까웠던 전통의 상징이다. 




stare_acrylic on canvas_91.0× 91.0cm_2022



stare_acrylic on canvas_130.3× 130.3cm_2022



자연이 아닌 자연적 요소는 인공의 산물인 건축의 층을 만든다. 그것은 시간의 두께를 늘려가고 있는 오래된 것들과 함께 간다. 운동감 있는 다채로운 선의 배열은 무채 색조의 기와지붕에 활기를 부여한다. 인상파 회화처럼 팔렛트가 아닌 눈에서 직접 색이 섞인다. 식물과 지붕이 함께 있는 풍경은 서로를 품고 있다. 건축이라는 문명의 산물 역시 자연처럼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오래된 풍경이다. 하지만 구성안의 작품은 자연이든 고건축이든 무겁지는 않다. 겹은 물리적 두툼함보다는 오래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분위기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지만 실재와 비례에서 짙어진다. 하지만 벤야민이 예견했듯이 분위기는 사진을 필두로 하는 본격적인 기계 복제의 시대가 열린 후에 사라져간다. 오늘날 화가는 변화된 조건 속에서 다시금 예술이 실재같은 위상 또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려 한다. ‘시간을 쌓고, 겹겹이 쌓여진 시간이 보이기를’(2018)바라는 구성안의 작품들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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