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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렬 / 매끄러운 표면을 활주하는 선들

이선영

매끄러운 표면을 활주하는 선들

  

이선영(미술평론가)


  

2019년 데이트 갤러리에서 전시된 윤상렬의 작품들은 [Invisible…]이라는 전시부제처럼 가늘게 그어진 선들로 가득했다. 보이지 않은 것을 위한 시각예술의 방식은 무엇일까. 관념으로의 해소, 즉 개념미술일까. 윤상렬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대개 수직선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단순한 형식이지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신기한 것들은 특정 개념으로의 환원보다는 예술품은 정교하게 제작된 특별한 대상이다에 가깝다. 그의 작품에서 수직, 또는 수평의 선들은 속도감이 있으면서도 절제된 화면을 만든다. 어두운 바탕을 주행하는 듯한 당겨진 선은 긴장감을 준다. 정사각형 화면의 경우 가로로 배치되기도 하는데, 그때도 긴장감은 여전하다. 긴 화면에 그은 수직선의 경우 더 속도감 있어 보인다. 그의 작품은 수직/수평의 극적 차이마저도 무화 시킨다. 종이뿐 아니라 아크릴판이나 라이트 패널같이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면을 활주하는 선들은 일상의 묵직함이나 끈적끈적함을 뒤로 한 채 질주한다, 



Work1            2016 M(A-1)  122X122cm



Work2            2020 M(A-16)  122X122cm



수직선이라는 비슷한 방식 때문에 작품들을 한데 놓고 보면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아크릴과 혼합재료가 사용되지만, 다양한 굵기의 미세한 선은 주로 샤프펜슬로 그어진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고 싶어 한다. 번뜩이는 섬광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최대한 가늘게 그으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샤프펜슬이다. 필기구로서가 아닌 조형적 도구로서의 샤프펜슬은 도드라진 형태/배경을 만들기 위해서 수공이 많이 드는 섬세한 매체다. 얇은 선으로 화면을 채우려면 얼마나 그어야 하겠는가. 그어진 선들은 바코드처럼 무한대로 생성 가능하다. 물론 그것은 기계적 과정이 아니다. 얇은 줄이 계속 추가되는 매번의 과정에 선택과 조율이 요구된다. 제작 방식은 비슷하지만, 어느 작품도 같을 수 없는 그때그때의 직관과 조율, 밀도와 색조, 굵기와 간격으로 배치된 선들로 이루어진 조형적 스펙트럼이다. 액정판 위에 작업하여 격자무늬 선들의 명암에 따른 효과를 준 [Optical Evidence] 시리즈, 아나로그 방식에 디지털 방식도 가세한 [침묵 Silence] 시리즈 외에, 최근 작업에서는 긁혀진 아크릴 패널에 채색한 작품까지 다양한 형식을 실험해 왔다. 


2000년대 이후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분류한 것을 참고하면, ‘자연스레 긁적거린 흔적 또는 잔상을 표현’한 [먼지] 시리즈, ‘집중적으로 붙여 형상화된’ [다중징표 Optical evidence] 시리즈, 그리고 ‘반복적 긋기로 쌓여진 겹’인 [침묵] 시리즈로 이어진다. 그의 작품은 디지털과 아나로그 등 여러 방식이 복합되어 만들어진 환영이다. 밝은 선은 앞에 어두운 선은 뒤에 있어 보이는 추상적 원근감이 있다. 활주하는 선들 때문에 밑바탕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 그의 작품은 어두운 화면 깊숙이에도 선들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암시다. 시각 예술가들은 보이는 것에 대해 보다 엄격한 기준을 가진다. 궁극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가령 그의 ‘다중징표’는 요즘 같은 전염병 시기에 진단 테스트기에 뜨는 직선을 떠올리기도 한다. 과학적 실험처럼, 그 또한 여러 겹의 매개를 거쳐야만 비로소 드러나는 과정이다. 



Work3         2018 M(A-11) 122X122cm



Work4            2018 M(A-9)  122X122cm



2020년 갤러리 소소에서 열린 전시의 부제가 ‘조금 낮게 조금 높게’였다. 이 전시에서는 입체 구조물이나 사선의 등장 등, 좀 더 다양한 형식이었으나 미세한 선의 관계망이 핵심인 기하 추상 작품이라는 연속성은 유지된다. 밝은색 선들이 가까이 모여있으며 형태감이 있고, 펴져 있으면 화면의 평면성은 강화된다. 색이 들어간 수직선들은 깊이 감이 있다. 많이 사용한 색에 따라 전체 색감이 결정된다. 어두운 기조에 밝은 선은 한줄기 빛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빛줄기는 밤하늘의 별의 궤적처럼 여러 굵기와 간격으로 배치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뒤쪽에서도 출발하는 빛도 관객의 망막에 닿는 것이다. 우주에 비한다면 한없이 작은 화면에 압축된 상징이지만 시간 차가 공간 차를 암시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잠재적인 깊이감 때문에 선들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각자의 길을 갈 뿐, 엉키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제각각 자기만의 속도로 주행하는 선들은 밀도가 높아도 서로를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작업은 그렇게 내부의 밀도를 더해 가는 과정이다. 하나의 선은 또 다른 선을 부르고 선들은 그렇게 숲을 이루어간다. 손으로 당겨진 선들을 헤치고 나가도 그 안에도 계속될 것 같은. 표면 위에 그은 선들만으로 깊이감이 표현되는 윤상렬의 작품은 얇고 날렵하면서도 묵직하다. 마치 능숙한 서예가가 그어 내린 필획처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실행된 듯한 질서감 있는 작품들이 불안의 산물이라는 것이 역설적이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두려움(fear)란 오래된 공생자이자 내 자신이 극복해야만 할 대상이다’ 작업하는 삶에 내재된 사회적 갈등은 여러 증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그것들을 부인하기보다 동고동락 즉 공생의 관계로 인정하기로 한 시점에서 나의 작업들은 시작이 된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추상의 기원에 있는 심리적 가설을 생각하게 된다. 20세기 초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추상미술에 영향을 준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에 의하면, 추상은 우호적이지 않은 세계로부터의 물러남이다. 




Work5          2018 M(C-15) 121.5X91.5cm



Work6           2018 M(C-6)   121.5X91.5cm 



Work7          2020 M(C-22) 121.5X91.5cm



Work8          2019 M(C-21) 121.5X91.5cm



Work9          2016 C(C-2)   121.5X91.5cm



반면 감정이입은 외부 세계와의 행복한 범신론적 조화의 산물이다. 감정이입과 달리 추상은 자신을 투사할 만한 외부 세계를 찾지 못한 것이다. 감정이입은 사실적인 형식을 추상은 기하학적 형식을 자신에게 적당한 짝으로 삼는다. 외부에 대한 내적 불안이 추상의 충동으로 나타난다는 요지다. 미술사적으로 보자면 추상미술의 발생기가 묵시록을 연상시키는 세계 대전 전야였다는 점, 추상미술을 추동한 전위예술가들이 대부분 젊은 남자였다는 점이 시대 의식을 첨예하게 반영했을 것이다. 보링거의 유형론은 후에 비판을 받았지만, 보이는 세계로부터 물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현대예술의 근본적 충동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공해왔다. 미술사적으로 보링거의 이론은 조형적인 조화로 귀결된 추상미술보다는 독일 표현주의의 불안한 고딕적 선들을 해석하는데 적절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윤상렬의 선은 적어도 감정이입이 아니라 감정 배제, 또는 말소다. [Work 일련번호]로 건조하게 매겨진 작품 제목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다. 


빛을 제외하곤 자연에는 없는 직선이라는 가장 인공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진 화면은 식물적이거나 동물적이거나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광물(鑛物)적이다. 광물적 시간은 인간의 시간에 비한다면 거의 무한으로 다가온다. 개념 뿐 아니라 수행적 태도까지 요구되는 그의 작품은 암흑 속에서 켜지거나 꺼지는 빛줄기다. 시리즈처럼 제작된 여러 작품을 통해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의식의 흐름을 표현한다. 현처럼 당겨진 선들은 닿는 시선에 따라 다른 울림을 줄 것이다. 작품 속 반복되는 요소는 또 다른 심리학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의 작품에서 선의 밀도는 각기 다르지만 반복적 행위의 결과다. 심리학에서 불안과 반복은 연관된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에서 불안을 애매모호하고 대상이 없다고 보면서, 대상을 찾은 경우 공포라고 구별한다. 윤상렬의 작품에 특정 대상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프로이트적 분류로 보자면 불안의 징후다. 




Work10        2018 C(C-4)   121.5X91.5cm



Work11        2018 C(C-6) 121.5X91.5cm



Work12        2020 C(C-9) 121.5X91.5cm



그의 작품 속 촘촘한 선들은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흔적도 없이 삭제하려는 의지의 발로다. 또는 줄 긋듯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것도 방법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불안은 완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외상의 반복이다. 프로이트는 반복을 죽음과도 비유했지만, 후기에는 쾌락적 측면을 강조했다. 종교적 의식은 반복적 행위에 내재된 쾌락을 활용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을 반복적으로 실행함으로서 낯설어진 세상에 대응하는 것이다. 일종의 도피지만, 일관되고 확장적인 실행은 수세적 상황에서 역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현실로부터 승화된다기보다는 현실과 평행한 또 다른 세계의 구성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보통 선은 형태를 향하지만, 윤상렬의 작품에서 모든 형태는 말소된다. 형태는 의미와 연관된다. 의미는 삭제되거나 무수한 반복으로 분열한다. 색도 선으로 해소된다. 작가는 선들을 그으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 화면은 우주적 심연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다. 무수한 선들 간의 관계만이 있는 그의 작품은 간극과 균열 자체가 본질이다. 예술에도 자연처럼 실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겹과 결이라는 방법론이 쓰이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다층적이면서도 날렵하다. 


출전; 퍼블릭 아트 202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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