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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철 / 흔들리는 삶의 축

이선영

흔들리는 삶의 축


이선영(미술평론가)

  


이번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당신이 서 있는 땅 위에] 시리즈는 푸른 빙하를 떠올리는 불규칙한 덩어리와 붉은 대지가 공존한다. 배경이 없기에 붉은 땅도 붕 떠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같은 크기의 종이에 시리즈로 제작되어 색상으로 대조되는 두 덩어리의 형태가 맥락을 이루고, 이를 통해 잠재적 동감이 생겨난다. 요컨대 관객은 푸르거나 붉은 대지를 다른 화면에서는 다른 크기로도 보게 된다. 그것은 커지든지 작아지든지 하는 것이다. 배경 없는 대상은 미세한 변화를 느끼게 한다. 북극에서 사는 동물에게 얼음은 대지일 것이다. 정작 그곳에 살고있는 존재들이 일으킨 것은 아닌 변화다. 얼음판을 뛰어다녀야 할 동물들이 얼음 조각 위에서 떠다니는 등, 생존자들의 입지는 불안정하다. 그렇다면 붉은색으로 그려진 흙으로 된 땅은 온전할까. 온난화를 비롯한 기상이변은 지금은 육지인 곳들 또한 해수면 아래로 사라질 것을 경고한다. 작가는 구겨진 종이 같은 대지에 색연필로 미세한 눈금을 그려 넣었다. 




전시전경_ 당신이 서 있는 땅 위에 _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22



그것들은 과학적 지표는 아니지만 움직이지 않는 육중한 덩어리라는 대지의 존재감을 상대화한다. 땅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자연을 자원화하는 전반적 경향은 원래는 없는 수많은 경계로 가시화된다. 인간은 무형의 자산에 숫자를 메기기 시작하면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왔다. 하지만 인간이 중심이 되어 코드화한 것들은 필요 이상의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어 과당경쟁을 낳고, 그렇게 세계는 더욱 비좁아진다. 최은철이 두 종류의 땅에 눈금을 매긴 이유는 그것들의 가변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의 작품에서 대지는 거시적으로도 움직이고 미시적으로도 움직인다. 그는 ‘단단한 대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과거에도 존재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대지는 자력이던, 인간에 의해서건 쉼 없이 뒤틀리고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산업혁명을 비롯한 물질과 에너지의 급격한 재배치는 근대 이후에 유동성에 가속도를 붙였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고체와 달리 그 형태를 쉽게 유지할 수 없는 액체는 어쩌다 차지하게 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액체 근대]는 ‘모든 견고한 것들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린다’는 마르크스의 언명을 인용하면서, 근대는 그 시작부터 어떤 액화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대지조차도 유동적인 상황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존재는 대지 표면에 슬쩍 걸쳐 있을 따름이다. 그의 또 다른 영상 작품에서 쓰나미를 떠올리는 이미지는 현재 우리의 모든 것을 유물로 만들 수 있음을 예시한다. 어느 작품에서도 인간은 부재하고 그 흔적만 있는 상황은 묵시록적이다. 하지만 최은철의 묵시록은 어둡지 않다. 매대 위에 진열된 화려한 도자기나 달콤한 조각 케이크가 생각나는 그의 작품은 시간에 따라 내려앉는 모습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아름답다. 그의 작품에서 지상적 삶의 무대는 정박지 없는 표류이다. 얼음-대지가 녹아서 작은 얼음덩어리 위에 표류하는 듯한 북극곰을 떠올려 보라. 인간에게 일어날 일을 자연은 늘 먼저 겪고 경고했다. 최은철은 미국의 생태학자인 알도 레오폴드의 [모래 마을 연감 A Sand County Almanac]에서 유래된 ‘대지 윤리’를 말한다. 



당신이 서 있는 땅 위에 I_종이 위에 색연필_ 230x120cm_ 2022




당신이 서 있는 땅 위에 II,III_종이 위에 색연필_200x120cm_ 2022



당신이 서 있는 땅 위에 VI_종이 위에 색연필_230x120cm_ 2022



그에 의하면 대지 윤리는 ‘생명을 가진 개체로 도덕의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모든 것들을 포함하며 상호 의존함으로써 존재하는 공동체인 대지를 도덕의 대상으로 삼는 윤리’를 말한다. 최은철의 작품이 생태적 위기에 대한 계몽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도표처럼 중성적이지만, 적지 않은 정보를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서 있는 땅 위에] 시리즈 아래에 가변적으로 설치된 덩어리들도 붕 떠 있는 대지를 상징한다. 시리즈로 제작된 [foliated rocks]는 높이와 크기, 층의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층으로 이루어진 입체는 층을 가로지르며 줄줄 흘러내리는 또 다른 층과 만난다. 여러 높이의 덩어리들은 추상화를 입체화한 듯 절묘하다. 현대 건물은 대부분 고층이다 보니 대개는 시멘트 구조물인데 작가는 그러한 시멘트 숲에서 또 다른 자연을 본다. 개발의 열기는 순식간에 우후죽순(雨後竹筍) 같은 시멘트 숲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하지만 인공생태계도 그 중심은 서서히 바뀌고 폐허가 되기도 한다. 


[foliated rocks]는 바위이지만 높이와 두께, 크기가 변하는 느낌이다. 구조물의 위아래가 평평해서 화이트 큐브인 전시장 바닥은 잠재적 수평선 또는 지평선으로 작동된다. 작가는 층마다 다르게 조색(調色)한 시멘트 구조물의 맨 위층을 설탕으로 제작했다. 색색의 단층들을 가로지르면서 무시간적인 광물성 물질에 시간성을 각인한다. 작가는 대지나 바위들이 그것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유기체들만큼이나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말한다. 늘 그 자리에 굳건히 있어야 하는 것들이 이리저리 잘리고 자신의 구성 성분들을 낱낱이 드러낸 채 단편화된 모습은 우리 삶의 축이 뒤죽박죽되는 듯 불안하다. 조각나서 상품화되고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된 땅은 공유 재산이어야 할 지구에 태어난 모든 유기체들을 상시적인 불안정성에 노출시켰다. 띄엄띄엄 놓은 그의 작품은 힘겹게 도약해야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를 닮았다. 다리가 되려면 다음 내디딜 발걸음이 예측 가능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Foliated Rocks_ 시멘트 위에 설탕_가변크기_2022




전시전경_Foliated Rocks_ 시멘트 위에 설탕_가변크기_2022




Foliated Rocks_ 시멘트 위에 설탕_가변크기_2022



그것들은 차라리 섬에 가깝다. 최은철의 작품은 평면이든 입체든 그 제작술에 있어서 뛰어난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루의 많은 시간을 여러 스마트 기기와 접속된 가상현실을 살고있는 현대인이 대지와 유리되어 있는 상황을 은유한다. 도시는 사람들을 끌어 들이지만 여기에서 땅 밟을 일은 별로 없다 보니 대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 작품 [historical Artifacts]는 바닥에 흙을 깔고 그 사이사이에 그곳에서 출토됐을 법한 유물이나 유물의 이미지를 배치했다. 그것은 마치 화석처럼 지층 사이에서 보존된 문화재 이미지를 통해 층의 의미를 반복한다. 붓으로 흙을 살살 털어가며 작업하는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땅은 미세한 단위로 구별되어, 몇 센티미터 차이로 명명되는 시대가 달라지기도 한다. 층과 층 사이에서 발굴된 문화재는 시간대를 추측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여기서도 덩어리라는 실재는 층이라는 관계로 방점이 옮겨간다. 


층으로 구별된 대지는 소여(所與) 된 자연을 넘어서 인간적 의미의 세계에 포함된다. 지질학적 시간대는 인간의 일생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길다. 그래서 그것은 거의 변화하지 않는 듯이 느껴진다. 하지만 자연의 리듬과 크게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던 전통을 벗어난 현대는 다르다. 기호화는 변화를 촉진시켰다. 현대 사회에서 기호의 회전 시간은 거의 즉시적이라고 할 만큼 빨라진다. 현대 사회에서 시공간이 압축되고 있음을 주장하는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즉각적인 금융거래가 이루어지는 초공간(hyper-space)을 말한다. 컴퓨터에서 처리되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은 인간적인 체험의 시간 영역을 넘어선다. 제러미 리프킨는 ‘새로운 컴퓨터 시는 시간의 최종적 추상화를 뜻하며 인간 체험과 자연 리듬으로부터의 인간의 완전한 분리를 뜻한다.’고 말한다. 사회학자 존 어리는 이를 ‘빙하적 시간’을 대조한다. 빙하적 시간 의식은 컴퓨터의 즉시적 시간과 달리 ‘역사의 무게, 그 장소에 대한 그 모든 기억들의 무게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historical _Artifacts_나무 판넬 위에 페인트_ 색연필_ 흙_가변설치




historical Artifacts_나무 판넬 위에 페인트_ 색연필_ 흙_가변설치




historical Artifacts_나무 판넬 위에 페인트_ 색연필_ 흙_가변설치



그와 관련된 대표적 사물이 유물이다. 최은철의 작품에서 유물은 실제의 유물이 그러하듯이 온전한 형태가 아니다. 대지조차도 단편이기에 손상된 유물은 존재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단편들은 존재의 단서인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유물은 그것을 만들거나 사용한 사람처럼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유물을 흉내 낸 입체물은 물론, 평면에 옮겨진 유물 이미지는 그림이 무엇인가를 담는 것이기도 함을 알려준다. 이때 화면의 틀은 상자의 틀과 중첩된다. 유물과 유물 사이, 즉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이 시공간의 간격이 바로 발굴된 것의 의미다. 영상 설치작품 [unhistorical Artifacts]는 갈색 설탕을 흙처럼 깔고 설탕으로 만든 깨진 도자기들을 발굴된 유물처럼 배열했다. 그것이 ‘비(非)역사적인...’이라고 형용된 것은 발굴된 유물이 문화재가 되어 박물관 등에 고이 안치되고 시간의 흐름에서 면제된 대상이 되는 것을 풍자한다. 


최은철의 작품에는 늘 변화가 암시된다. 대지마저도 고정이 아닌 과정이다. 그는 역설적으로 변치 않아 보이는 대지나 유물 등을 소재로 사용한다. 변치 않음의 기표인 유물 이미지에 변화를 주기 위해 설탕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사용하고, 다양한 유물 가운데서도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이미지를 선택했다. 여기에 유동적인 영상을 병치하여 더 요동치게 한다. 그의 작품은 수장되어 있던 유물이 발굴되는 순간을 떠올린다. 유물은 인류의 무의식을 포함한 많은 단서가 되어 준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동시대 현대예술이었던 초현실주의 보다 고대 유물에서 무의식의 흔적을 보았다. 최은철의 작품에서 유물은 움직이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다. 출렁이는 물결은 어느 순간 가뭄으로 인해 쩍쩍 갈라진 틈의 선과 겹쳐지기도 하면서 극과 극을 만나게 한다. 폭우와 가뭄이 교차 되는 지구촌의 기상이변은 이상과 정상의 관계를 뒤집었다. 이른바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unhistorical Artifacts_2022



디테일_unhistorical Artifacts_2022



unhistorical Artifacts_2022




디테일_흘러내리는  유물들_2022




디테일_흘러내리는 유물들 




흘러내리는 유물들 I, 120x85cm, 한지 위에 Inkjetprint, 2022




흘러내리는 유물들 II, III, 120x85cm, 한지 위에 Inkjetprint, 2022



하지만 시각적으로 볼 때 과잉으로 인한 것이나 결핍으로 인한 것이나 에너지 배분의 방식은 유사하다. 관객이 알아채기 힘들만큼 잔잔하게 변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형태와 배경의 구분이 없는 상태가 된다. 모든 개체의 죽음은 그것이 놓여진 환경과 동일화되는 방향을 취한다. 흙으로부터 나온 것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그 누구도 무엇도 그 운명에서 제외되는 이는 없다는 비장한 메시지다. 설탕으로 만든 도자기가 시간에 의해 붕괴되는 모습은 생물의 죽음을 연상시킬 만큼 드라마틱하다. 통상적인 도자기가 진흙을 빚어 고온에 구워진 후 단단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액체와 고체 사이의 변환은 새삼스럽지는 않다. 변환을 강조하는 작가는 전시장에서 조명을 강하게 쏘아서 녹아내리는 과정을 보게 하거나, 시간을 가속시키는 타임랩스 영상이 활용한다. 특이한 광경은 [흘러내리는 유물들 I, II, III(melted artifact)]처럼 프린트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최은철의 작품은 ‘하나의 원천으로 다양한 쓰임새를...’이라는 융복합 시대의 패러다임이 관철된다. 특히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그의 작품은 요즘 각광 받는 NFT에도 적합한 방식이다. 그가 사용하는 설탕은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 도자기만큼이나 중요한 항목이었다. 세계화가 본격화된 근대에 설탕은 비유럽권 민족의 노동력과 시장, 원자재 등을 두루 착취한 자본 증식의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이제 설탕의 소비는 귀족이나 부르주아에 한정되지 않고 보편화되었으나 그만큼 건강을 위협한다. 이 달콤한 물질은 설탕세가 있는 국가가 있을 정도로 공공 보건의 부담이 되고있다. 최은철이 각설탕 등으로 만든 현대의 도시 또한 풍요와 빈곤을 결합시킨다. 고대와 현대의 만남도 이루어진다. 도시의 개발은 유물들을 발견하게 한 것이다. 달콤함 뒤에 가려져 있는 어두움은 극과 극을 연결하는 작품 기조에 깔려있다. 그가 만든 다양한 설탕 오브제들은 견고함과 취약함, 달콤함과 씁쓸함이 함께 한다. 




(참고도판) Crack I & II_2016_종이 위 색연필_150 x 150cm_ 2set



(참고도판) 설탕도시_ 공간설치_ 각설탕 & 설탕_450x650x15cm



(참고도판) Wave_2020_비디오 & 각설탕_공간설치_265x320cm



또 다른 전시장에서는 아름다운 색깔의 도자기들이 테이블 위에 도열해 있다. 작품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에서 바로 위에서 떨어지는 할로겐 조명은 아래의 대상들을 변화시킨다. 설탕 캐스팅으로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동화 속 마귀할멈이 녹아 사라지듯이 이리저리 비틀리다가 주저앉는다. 조명에서 발산되는 열에너지가 변화의 동인이지만, 거리를 둔 두 대상의 관계는 마법처럼 느껴진다. 망가질 때의 무정형적인 실루엣과 어울리는 첨가물(식용색소) 무정형적인 무늬는 죽음과도 비교될 수 있는 액화 과정을 심미화한다. 살아있는 것은 수직으로 서 있지만 죽을 때는 수평화된다. 최은철이 무대와도 같은 테이블 위에 배치한 주인공들의 무대 조명에 의해 극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은 평범한 중력의 작용도 마법처럼 다가오게 한다. 영상은 파괴의 시간에 더 가속도를 준다.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도자기는 깨지기 쉬운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우리 일상어에서는 사람을 그릇과도 비교한다. 작가는 인간은 물론, 영원하다고 간주되어 온 예술 또한 그러함을 시사한다. 


출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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