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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가는 비현실적인 길

이선영

현실로 가는 비현실적인 길

 

이선영(미술평론가)



비/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며


두남재 아트센터의 개관 두번째 전시인 [비현실적 하이퍼 리얼리즘 : Over and Above]에는 현실이라는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초대작가 박미라, 이재석, 전희수의 전시 작품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의 작품에서 현실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지는 않다는 것, 현실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여 작가들에게 예술은 현실로 가는 유력한 길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출발이 아니라, 도달점, 즉 기지(旣知)의 것이 아닌 미지(未知)의 것이다. 현실을 중시했던 사조들이 삶이 무게를 강조했다면, 삶의 중력을 거슬러 풍선처럼 붕 떠 있는 그들의 작품을 매어 놓는 유력한 현실은 그림이다. 작업량이 많은 그들에게 현실은 무엇보다도 붓을 들고 하는 일, 요컨대 그들이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을 작업에서 찾아진다. 작업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사람이 바로 작가다. 작가 또한 스펙터클 사회의 소비자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미지 생산자다. 



이재석, 사정거리 193x193cm acrlic on canvas 2021


생산자의 입장에 서면 아무리 가벼워 보이는 작품도 가벼울 수가 없다. 소비와 생산은 일 대 일 관계가 아니어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려면 어떤 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기는 쉬워도 팔기는 어려운 일상적 체험에서 쉽게 확인된다. 순식간에 이미지가 합성, 복제되는 시대에 그리기란 심신의 에너지가 무한 투자되는 과정이다. 그만큼 물질과 몸이 투자되었기에 결과물의 무게는 남다르다. 잘 된 작품은 어떤 있음직하지 않은 상황에도 개연성을 부여한다. 얼굴이 여럿이거나 손발이 국수 가락처럼 쭉쭉 늘어나는 인간(전희수)도, 해골들의 춤(이재석)도, 발밑 아래의 또 다른 우주(박미라) 조차도 있음직한 현실로 다가온다. 그림은 현실에서 가상의 몫이 증가할수록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을 포함한 여러 차원의 현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그들의 작업에서 회화는 밀도와 강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몰입의 조건이다. 일단 몰입이 되어야 소통도 유희도 가능하다.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이미지들에 보이는 간극은 감쪽같이 붙여지곤 한다. 


반면 작가들은 현실 그자체의 균열에 주목한다. 현실 자체가 이것저것으로 조합된 인공물이라면, 작가는 이러한 현실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혼성은 한술 더 뜨기 전략으로 행해진다. 이데올로기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념의 기표들은 바람에 날리는 취약한 천막(이)이며, 세계는 만화의 칸처럼 구획되어 있고(전), 우리의 단단한 토대는 갑자기 푹 꺼진다(박). 그들의 세계는 백주 대낮처럼 환해서 분열적(이, 전)이거나, 어둠 속에 숨겨진 자기만의 우주에 푹 젖어(박)있다. 작품 속 서사를 이끌어 간다고 믿어지는 주체(대체로 인간으로 설정)가 산산조각 나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러나 분열은 분열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연결을 위한 단면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이지 않다. 이들의 작품에서 유기체와 기계는 종횡무진으로 연결, 접속된다. 균열과 간극을 드러내기 위해서 먼저 현실이 호출되어야 한다. 그들이 호출한 현실은 그 묵직한 근거를 잃고 유희의 한 항목으로 (재)배치되면서 상대화된다. 



전희수, Floating_Acrylic on canvas banner_214cm x 214cm_2021


작품 속 현실은 재차 인정(재인,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변형(생성)되기 위한 전제다. 가상이나 환상 또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설득력 있다. 그들의 작품이 그만큼 환상적이라면 역설적으로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말이다. 이들에게 환상은 현실의 이면이며, 그 역도 가능하다. 환상과 현실은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면서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역동적이면서도 불안정하다. 작품들은 심층보다는 표면이 강조된다. 종이처럼 접혀지거나 펼쳐진 우주(박), 부조리한 매뉴얼로 변한 세상(이), 금방 다른 화면으로 바뀔 것 같은 이미지(전)가 그것이다. 굳이 미술사조와 비교한다면 초현실주의적이다. 이 전시의 기획자인 김기라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방식의 초현실적 회화와 영상 설치를 통해, 각자와 삶과 현실을 주관적 시각에서 조명하고 해석하여 묘사한다.’고 밝힌다. 


작업의 주체(동일자)가 타자의 힘에 주목하는 것은 예술의 기조였지만, 20세기의 사조로서 초현실주의는 영화나 사진, 도시적 현실 같은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매체 및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타자를 호출하고 대화했기에 더욱 중요하다. 초현실주의는 한번 유행하고 지나간 사조가 아니다. 이번 전시는 회화라는 고색창연한 매체가 주가 되긴 하지만,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초현실주의로 업그레이드 된 작품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시인이자 초현실주의를 이끈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은 꿈과 무의식의 존재를 부각시킨 프로이트로부터 영감 받아서, ‘꿈과 현실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상태가 향후에는 초현실이라는 절대적 현실 안에서 화합되리라’고 믿는다. 앙드레 브르통에게 현실이란 ‘생명과 죽음, 현실과 환상, 과거와 미래, 전달 가능과 전달 불가능, 높이와 깊이가 모순으로 보이기를 그치는 마음의 어떤 지점’을 말한다. 


박미라, 나무가 되는 꿈_캔버스에 아크릴_91x117cm_2019

  

초현실주의자의 비전에 의하면, 우리가 전부로 알고 있는 일상적 현실은 다른 차원이 보태져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것이다. 21세기에 현실은 미디어 기기의 발달로 더욱 복잡해졌다. 기기의 발달은 고성능뿐 아니라 그것이 편재한다는 것에 있다. 분열하는 육체 이미지 가운데 특히 눈(目)이 많은 것(전, 박)은 보고 보이는 관계의 망으로 얽힌 현실에 가상의 몫이 커진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질서이자 생산, 그리고 억압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상징적 우주에 대한 풍자(이)도 빠지지 않는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에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사고의 나약성과 또 그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황된 대지 위에 그들의 흔들거리는 집을 구축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항목이 있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우리의 관념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 같은 것’(앙리 베르그송)이다. 초현실주의는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과의 관계를 작품의 전면에 놓았던 사조인데다가 당시에 이미 사진과 영상이 가세해 있던 시대인지라 어느 사조보다도 동시대적으로 느껴진다. 


초현실주의는 시공간적 거리감 또한 잘 활용하기에 더욱 그렇다. 거리두기는 예술의 규칙이며, 때로 정치와 결합 된다. 초현실주의는 모더니티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해방과 혁명을 외쳤다. 하지만 억압적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던 예술가들이 현실의 정치세력과의 연대했을 때는 종종 배반으로 귀결되곤 했다. 현대의 작가에게는 정치와 예술 간의 불화에 대한 경험치가 있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의 세대는 인터넷이 여러 기기를 통해 편재화된 시대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기에, ‘현실’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무기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이재석의 작품은 전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죽음의 문화를 다룬다. 그림을 배우기 전에 만화나 오락을 접한 전희수 세대에게 모태 언어는 하위문화나 대중문화에 있다. 박미라는 현실로부터 수집한 단편들로 자기만의 잔혹한 동화를 쓴다. 작품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대안의 현실은 대량소비 문화로 이루어진 우리의 일상이 유일한 현실이 아님을 알려준다.   

 


이재석 ; 이성과 광기


이재석의 작품은 고요한 숲과 미사일 발사 때 분사되는 궤적이 초현실적으로 결합되어 있다.폭격이나 폭발의 현장은 아니고, 사건이 터지기 직전의 숨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작품 [사정 거리]에서는 지도나 지형지물같이 정밀타격을 위한 엄격한 좌표설정에 관련된 도상이 함께 배치된다. 작가가 궤적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초스피드로 날아가는 것을 날아가서 폭파시킬 정도의 고도의 정확함이 요구되는 첨단 무기의 세계다. 그러한 물리학적 법칙은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나왔을 것이다. 작품 속 풍경은 파괴적인 문명의 기획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그런 물건들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그대로의 자연적 배경은 이물감을 더한다. 무기와 병치된 자연은 사디즘적 폭력과 마조히즘적 환상이 함께 한다. 자연의 비밀만큼 문명적 파괴에도 비밀이 있다. 고체가 아니면서도 견고해 보이는 미사일의 궤적들은 힘과 속도 면에서 모 스포츠 브랜드처럼 전능하다. 



 이재석, 기울어진 파이프 60.6x50cm acrylic on canvas 2022



 이재석, 나의 발 45.5x53cm acrylic on canvas 2018


심지어 여럿이 모여있을 때는 하트 모양으로도 보인다. 여기에서 물질과 에너지는 호환된다. 전쟁 관련 도상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재석은 인간의 규칙으로 전용된 자연법칙에서 불안한 분위기를 포착한다. 인간은 자연의 비밀 캐내서 위험한 장난질을 하는 것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수직수평으로 배열된 붉은 단편들은 무기의 부품처럼 보인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죽이고 문명을 파괴하고 그자체가 쓰레기가 되어 예전 시대같으면 대지모신이 있던 땅에 깊이 박힌다. 첨단기술이 산물인 무기는 삶에도 죽음에도 기여한다. 요즘도 매일 뉴스로 접하고 있지만 전쟁은 이성의 이면에 광기가 있음을 알려준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문명은 일반적으로 광기의 확대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고 말한다. 지식이 추상적이거나 복잡할수록 지식으로 인한 광기의 위험은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분출하는 기념탑]은 전쟁의 결과가 낳은 희생자들이 탑으로 나타난다. 


해골과 사물들이 한데 얽혀 이룬 탑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다. 그것은 작가가 군대와 학교 등에서 체험한 ‘눈에 보이지 않는 통제와 수직적인 권력구조’를 상징한다. 구성원들에게 모범으로 강요되는 기념탑들은 얼기설기하지만, 체계적이고 합법적인 듯 솟아 있다. 그의 작품에서 기계는 시스템이 개인을 대하는 방식을 압축한다. 군인에게 몸은 기계다. 광인 수용소의 모델을 따라서 기계는 학생, 노동자, 운동선수 등으로 적용되었다. 모두가 따르는 법 대신에 작가는 수상하고 부조리한 매뉴얼을 법처럼 보여준다. 작가는 상징계로 대표되는 사회의 규칙을 상대화 한다. [조립 설명서] 시리즈는 무기류의 부품같이 생긴 단편들이 보이지 않는 수직수평의 그리드 위에 배치한다. 날카로운 단면에 붉은칠이 되어 있는 단편들과 사람 발목도 있는 매뉴얼은 죽음 및 치명상과 관련된 기능이 탑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매뉴얼은 순서대로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한 장의 그림은 순서대로 읽을 수는 없다. 



이재석, 향수 50x40cm acrylic on canvas 2017



이재석, Dancing, acrylic on canvas 42x30cm 2018


한 장면이 얼음처럼 굳어있는 회화는 무엇을 그렸든지 수수께끼일 수 밖에 없다. 초현실주의의 발견된 오브제같은 경우, 기능이나 내용 등 현실적 맥락에서 떼어낸 결과 생겨난 것인데, 이재석도 그 점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텐트는 전쟁 이미지가 많은 맥락 속에서 야전 물품 중의 하나다. 가느다란 다리에 걸친 한 장의 천은 취약하다. 그것들은 바람에 펄럭거리기도 하고 비 오는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천과 막대의 조합은 마치 깃발처럼도 보인다. 훈장을 떠올리는 천체적 도상은 진리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온 태양을 가린다. 오랫동안 군부독재의 통치 아래 있던 국민의 관점에서 보면, 텐트 뒤의 별들이 계급장이나 훈장과 겹쳐진다. 그의 작품에서 기체나 액체적 대상은 딱 굳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그것들은 [기체의 형태]라는 제목처럼 형태를 가진다. 작가는 무정형의 것에 단단함을 부여한다. 작가는 설치작업을 통해 포격의 흔적을 나무처럼 견고하게 세워 놓기도 한다. 


평화로운 풍경 안에 설치된 녹색 텐트들은 작품 [텐트를 설치하는 방법]이 순차적으로 걸려 있다. 텐트적 구조를 3차원상에서 [이동가능한 구조물]로 제작하기도 했다. 텐트는 마치 우산처럼 최소한의 장치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가장 기능적인 물건 중의 하나다. 야전 물품이지만 좀 더 느슨하게는 캠핑이나 유목의 상징이다. 가장 기능적인 물건인 텐트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표면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물의 양상을 띈다. 초현실주의가 표면에 집중하는 것은 그 표면이 내부와의 관계가 모호할 때이다. 그것은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방식이다. 평범한 물건이 시적 오브제로 변신한다. 고요한 자연을 배경으로 수직 수평으로 각을 맞춰 배열된 기하학적 물건들은 자연과 대조되는 인공물이다. 인공적인 것은 목적이 분명해야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자연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고 전경이나 화면 가운데 배치된 붉은 색 부품이나 단편들은 위협적이다. 풍경 위에 떠 있는 [나의 발]은 단편화가 유기체에 적용되었을 때 불구임을 강조한다. 



이재석, 달의 운동 116.8x91cm acrylic on canvas 2022



이재석, 중력  116.8x91cm acrylic on canvas 2021


[자화상] 시리즈는 물건과 몸이 단편으로 만난다. 사물화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은 물질이 생명력을 띄는 경향과 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형상]은 잘린 단면을 기계적 부품과 연결시킨다. [신체가 있는 부품도]는 마치 로봇처럼 단편들을 조립하면 될 듯한 매뉴얼이 제시된다. [죽음의 춤] 테마를 연상시키는 해골들은 그들이 전사했을 해안가에 서 있거나 독가스 품어나오는 공장 근처에서 춤춘다. 일하다가 죽어 화석이 된 듯한 모습도 있다. 고향 땅을 떠올리는 정겨운 풍경에 서 있는 구조물은 드 기리코의 마네킹처럼 물신적이다. 고요한 침묵과 수수께끼같은 호기심이 내포된 장면은 드 기리코의 작품처럼 무대세트같은 연극적 공간을 연출한다.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일상적 사물은 ‘생전 처음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드 기리코)을 준다.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을 넘어 형이상학적 차원까지 고양되었다. 기능을 알 수 없는 대상의 부품들을 나열하는 매뉴얼, 그것들이 어떻게 조립되어 작동할 것인가는 관객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2. 전희수 ; 칸막이 처진 제각각의 현실


전희수는 카툰과 드로잉의 접점에서 세상을 본다. 통상적인 카툰은 줄거리가 있기에 구성적 질서가 있다면 드로잉은 그로부터 자유롭다. 그의 작품에서 카툰의 주요 방식인 인물 중심은 유지된다. 자동기술은 아니지만, 작가의 욕망을 즉발적으로 따라가는 선은 기관과 기관을 어지럽게 연결한다. 연결을 위한 조건은 단절이다. 그는 몸을 포함한 이미지를 자르고 접붙인다. 화면들은 전자오락처럼 보이는 평면적인 배경에 해상도 때문에 깨져 보이게 연출된 선도 있다. 만화를 통해 이미지의 문법을 체득한 후의 예술작업에는 최초의 언어가 남아있다. 출판물로도 나온 그의 만화 스타일의 작품이 만화처럼 쉽게 소통되는 것은 아니다. 말풍선 없는 만화책은 회화적이지 않나. 회화는 본래 말이 없으니 말이다. 만화가 대중문화에, 드로잉이 순수예술에 속한다면, 팝아트는 두 영역을 화해시켰다. 팝아트라 하더라도 ‘아트’이기에 대중적이기는 힘들다. 양자는 하위문화(subculture) 영역으로 수렴된다. 벨벳언더그라운드와 함께 했던 앤디 워홀이 대표적인 예다. 



전희수, Non virtual space_214cm x 350cm_ Acrylic on canvas banner_ 2022



전희수, Satisfied audiences_91cmx 73cm_Acrylic on canvas_2022



전희수, Breakthrough_91cm x 73cm_Acrylic on canvas_2021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만화의 컷은 영화와 만화의 호환성을 가능하게 했다. 영상 중심으로 소통되는 시대, 영상은 모든 장르의 예술을 흡수하는 지배적 언어가 되었다. [너의 자화상]이라는 최근 작품은 펑크 머리에 담배를 문 비행 청소년같은 모습인데. 손과 발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상현실에서 사는 인간에게 노동이나 이동을 위한 해부학적 기능을 퇴화되어 있다. 대신에 인물은 다양한 기능을 한번에 실행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몸에 붙이고 있다. 희생자의 궤적이 있는 경기장을 환호하며 바라보는 관객들은 오락적 인터페이스 앞에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의 화면은 이 오락 저 오락 프로그램에서 끌어온 듯한 다양한 요소들이 병치된다. 인터넷 기반의 모든 화면 자체가 다양한 원천을 가진 것을 섞는 장이다. 그림이 아니더라도 프로그램 사용자는 자기만의 취향으로 최적화된 대안의 프로그램을 상상할 수 있다. 키보드만 누르면 휙휙 변하는 화면에서 연속성은 애초에 기대하기 힘들다. 


‘수술대 위에서 우산과 재봉틀이 뜻하지 않게 만나 아름다운’(로트레아몽) 초현실주의의 원리는 인터페이스를 거쳐서 그림으로 회귀한다. 전희수의 방법론이기도 한 병치는 예술과 광기에 공통된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광기를 ‘인과성이 훼손된 상태, 영혼과 육체의 통합이 해체된 상태’라고 정의 한 바 있다. 광기는 대상과 사유 간의 정합성이라는 낡은 진리 개념에서 벗어나 ‘감각과 신경섬유 간의 공명’(푸코)에 진입하는 것이다. 작품 [Breakthrough]에서 돌파구는 변신에 있다. 전희수의 작품 속 변신은 분열적이다. 분열증적인 감수성은 ‘감각의 끊임없는 전율이나 진동’(푸코)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캐릭터들은 대개 감정이 고조된 상태다. 로고스보다는 파토스가 강하다. 많은 차원이 삭감된 가상공간에서 몸의 움직임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한편에서는 분열이 다른 한편에서는 연합이 이루어진다. 작품 속 캐릭터의 손은 손가락이 없다. 종의 이익을 위해 어떤 기관을 퇴화시키기도 하는 생태적, 진화적 원리는 가상공간에서도 관철된다. 



전희수, Fragments_Acrylic on canvas_214cm x 214cm_2020



전희수, Man from earth_23cm x 30.5cm_Colored pencil on paper_2021



전희수, Noninterpretable_23cm x 30.5cm_Colored pencil on paper_2022


그것들은 순간적으로 고정된 자리에 안정적으로 서 있고, 손은 키보드만 누를 수 있으면 된다. 컴퓨터가 더 많은 것을 실행할 수 있을수록 육체는 더 수동화된다. 하지만 실제의 육체가 수동화되는 만큼 가상적 이미지는 더 자극적이다. 얼굴 두세개가 붙은 모습도 분열 또는 시간상의 전후를 암시한다. 특히 비죽비죽 뻗은 머리털은 캐릭터의 에너지를 가시화하는 최적의 기관으로, 모든 상황을 시각적 최대치로 보여주어야 하는 매체에서 표현적 기능을 한다. 거의 자연에서 변온동물같이 순식간에 태세 전환이다. 현실에서도 자연 머리 색을 유지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만화적 인물이 그리 과장된 것도 아니다. 인물들의 표정 또한 언제나 극적이다. 작품 [floating]은 두 팔이 국수 가닥처럼 뽑혀 나오는 기이한 인물로, 머리카락도 잔뜩 곤두서 있다. 초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변신 중인 그는 스스로도 놀란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기꺼이 바랬던 경이다. 배경의 구름 떼는 분열 중인 개체의 상황을 반복한다. 


질 들뢰즈에 의하면 현대 예술은 전적으로 정신분열증과 같다. [반(反) 외디푸스]에서 언급된 정신분열자의 도정은 다음과 같다; ‘그들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상태의 강도 있는 양들의 경험이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지만 생산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작동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가 몰락할 때 욕망이 등장한다. 정신 분열자에게는 인간도 자연도 없으며,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혹은 저것이 이것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연결시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외부와 내부는 여기서 이제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정신 분열자에게는 원리들이 없다. 그가 어떤 것이라면 이것은 오직 그가 다른 것임으로서 이다. 자아들이 가두어 놓고 억제하고 있는 인물 이전의 단일체들을 해방시키는 것, 자기 동일의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바로 그곳에서 분열과 절단들을 더 멀리 더 세밀하게 확립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다.’ 



전희수, The flatland_214cm x 540cm_ Acrylic on canvas banner_ 2022




 전희수, Your self-portrait_216cm x 72cm_ Acrylic on canvas_2022


얼굴이 반복되는 가운데 눈 또한 몇 명의 것인지 알 수 없이 배열되곤 한다. 가상현실에서는 화면을 보는 눈과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자동 반사만이 활성화되어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것들 기관들이다. 다른 작품에서 손이었던 것들, 다리였던 것들, 머리카락의 일부였던 것들이 홍수에 떠밀려온 부유물처럼 빼곡하게 자리한다. 거품같이 부글부글 일어나는 형태는 그렇게 몰려든 것들에 의한 화학반응이 또 다른 실재를 파생(Hyperreal)시킬 것을 말한다. 모노톤의 작품 [fragments]는 그림이라는 상자 안에 단편들을 가득 모아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 상자가 어떻게 흔들리는가에 따라서 단편들의 결합도 이루어질 것이다. 전희수의 작품에서 단편들은 늘 다른 단편들과 만나고 떨어지는 상황이 익숙한 듯, 그자체로 결핍된 모습은 아니다. 2020년에 그린 모노톤의 작품들은 좀 더 차분하다. 뭉뚝한 손과 동그란 눈의 모티브가 이합집산하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형태를 구축/해체한다.

 

 

3. 박미라 ; 경계를 넘나드는 산책


박미라는 산책을 즐겨한다.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눈에 담아온 것들을 무의식에 침전시켰다가 그림이라는 꿈으로 재생한다. 작품 [살아나는 밤]은 그러한 수집품들이 가득한 방이다. 그러한 방 또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을 만큼 어수선하다. 여기에서 시계는 거꾸로 걸려 있고 서랍장에서는 누군가의 발이 나오고 있다. 롤러 코스터같은 구조물은 낮의 경험을 압축 재현한다. 익히 알고 있는 길도 꿈에서는 낯설게 나타난다. 작가와 관객은 미로가 되어버린 길에서 즐겁게 길을 잃는다. 낮의 노동은 밤의 유희가 된다. 그러한 우주에서는 역경을 이겨내는 전능한 존재(deus ex machina)가 있다. 가령 작품 [아홉번째 목숨]에서 침몰로부터 구해주는 거대한 손이 그것이다. 꿈은 분명 현실에서 온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조합이 환상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조합은 해석되기 힘들다. 통상적인 소통에 만족하지 못하여 예술을 하지만, 그로 인해 소통은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작업은 도박이다. 



박미라, 살아나는 밤_캔버스에 아크릴,잉크,65x91cm,2021



박미라, 시끄러운유령들_캔버스에아크릴_72x116cm_2020



박미라, 아홉번째 목숨 _캔버스에아크릴,잉크_50x65cm_2021


박미라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의미, 해석, 소통이라는 방식을 벗어난 채 작가가 무한정 늘려 놓은 이미지의 폭주를 받아들여야 한다. 도시의 산책자에게 만남은 우연적인 것이 많다. 초현실주의 미학의 기조인 오브제나 병치같은 형식은 근대도시에서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세계의 수도 파리 이외의 장소에서 초현실주의의 탄생을 기대하기 힘들다. 도시는 한 장소에 모일 수 없는 것들을 모이게 한다. 게다가 사진이나 영화같은 신생 매체까지 더해져서 지금도 지속되는 최초의 프리미엄을 한껏 누리는 사조가 초현실주의다. 새로움을 만나려는 산책자의 여정에게 도시는 자유의 공기를 제공한다. 박미라의 작품에 눈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대개는 관찰로 그치는 산책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유령처럼 투명하고 작품에서 모든 것을 풀어내는 스타일이다. 종이나 캔버스에 펜이나 잉크,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는 모노톤의 작품들은 현실을 이루는 주요한 한 차원을 삭감했다. 그것은 색이다. 


작가는 2020년에 있었던 [검은 산책 Walk In The Dark] 전에서, ‘색을 뺀다는 것은 비워 놓는 것임과 동시에 공간을 채우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박미라의 흑백 톤은 원색 못지않게 풍부하다. 원래 블랙은 모든 색의 혼합 아닌가. 작가는 형태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중시한다. 꿈처럼 나열되거나 조합된 사물들은 기승전결이 명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화면은 관객이 상상할 여지를 주는 은유적 대상들로 가득하다. 현실원리가 아닌 쾌락원리가 지배하는 우주다. 현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싱크홀같은 갑작스러운 단절이 있다. 작품 [안이자 밖]에서 사슴과 고양이가 있는 바닥은 뻥 뚫려 다른 우주가 보인다. 작품 [검은 산책]에서도 산책 중 갑자기 뚫린 길바닥은 견고한 현실이 어디에 토대를 두는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낸다. 작가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지반 침식 현상인 싱크홀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래빗홀(토끼굴)을 연결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든다’ 하지만 [연결된 시작]처럼 난데없는 구멍은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처럼 다른 우주로 통하는 길이라는 암시가 있다. 



박미라, 쌓여가는 위로들_패널에 아크릴_249x276cm_2019



박미라, 연결된 시작 _종이에 혼합재료_30x42cm_2018



박미라, 안 이자 밖_종이에 펜_59x42cm_2018


세계를 세계들로 상대화시키면 구멍 주변의 나무는 가지들이 아니라, 뿌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은 단순한 현실의 모사가 아닌 대안적 현실(Alternate reality)로서의 평행우주(Parallel World)로서, 한갓된 상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시간 또한 불연속적인데, 작품 [꿰어진 시간]처럼 공간은 하나의 평면들로 인과관계 없이 나열되고 상상의 실로 꿰어진다. 병렬은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해서 [쌓여가는 위로들]에서는 여러 손들이 잘려진 채 쌓여 있다. 박미라에게도 단편은 연결을 위한 전제다. 이러한 분열적 이미지들은 ‘기관 없는 몸’이나 ‘다양체(manifold)’ 같이 정신분석을 넘어서는 현대철학의 흐름과 닿아있다. 연결은 종횡무진 계속되어야 하므로, 화면 자체는 연속성을 요구한다. 2020년의 전시 장면을 보면 모서리도 연결되는 벽화 스케일의 화면에 어디로 튈지 모를 은유적 단편들을 자유롭게 배치한다. 제목은 [어긋난 조화]인데, 조화가 대개 전체와 부분 간에 설정된 이상이라고 한다면, 부분들이 전체와 무관하게 자율적인 작품은 조화와 거리가 있는 것이다. 


조화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를 재현하는 상징적 우주의 이상일 따름이다. 박미라의 작품들은 자기만의 대안적 우주로 지배 질서에 대항한다. 물론 투쟁한다기 보다는 자기만의 우주도 충분히 리얼리티가 있다고 말한다. 자유로워 보이는 현대 사회는 이 조그만 여지를 무화시키려 하기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자가 된다. 작품 [펼쳐지고 접힌 마음]처럼 이 우주는 종잇장같이 취약하지만, 현실보다 훨씬 융통성 있는 접히고 펼쳐지는 세계다. 이 풍부한 주름의 우주는 [겹치고 뚫린] 상태다. 하지만 자기만의 질서는 광기의 특징이다. 작품 [표류기]의 탑승자들은 광인의 배를 떠올리는 총체적 난국이 있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제롬 보슈의 [광인들의 배]의 예를 들면서, 배에 탄 미치광이 승객들의 묘사가 있는 문학적 형식(시. 속담)들과의 연관을 지적한다. 하지만 광인들은 더 이상 세상 저편으로 떠나보내지 않고 사회가 끌어안게 되었는데, 그것이 병원, 공장, 학교, 군대 등 근현대의 각종 억압적 제도의 원형이 되는 수용소다. 



박미라, 표류기_캔버스에아크릴_80x116cm_2020


푸코는 정상인을 광인과 구별하기 위해 광인을 죽음과 연결시킨 역사를 말한다; ‘머리는 이미 비어있고 곧장 두개골이 될 것이다. 광기는 이미 와 있는 죽음이다. 미치광이는 음산한 죽음의 전조를 내보임으로서 죽음의 기세를 누그러뜨린다.’ 죽음의 주제가 광기의 주제로 대체되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변함없이 삶의 허무지만, 이 허무는 이제 위협과 동시에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적이고 최종적인 종말로 인정되지 않고 내부로부터 실존의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형태로 체험된다’(푸코)는 것이다. 박미라의 작품에서 사형집행의 대상이 되는 고깔을 쓴 등장인물들은 살아있는 채 엄습한 죽음과 밀접하다. 작품은 이질적인 것의 병치가 주는 복잡함에 더해 사건적 요소가 첨가된다. 화산처럼 폭발하고 홍수가 나고 매몰 처분되며 치고받고 싸우는 등 아우성친다. 거기에는 [시끄러운 유령들]이 가득하다. [나무가 되는 꿈]처럼 이 우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과정 중의 존재들이 주인공이다. 그것들은 나무나 구름처럼 자란다. 종으로 횡으로 증식한다. 그것들은 ‘되기’를 통해 협소한 현실원칙을 벗어나고자 한다.


출전; 두남재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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