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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연 / 모더니즘에서 모더니티로의 추이

이선영

모더니즘에서 모더니티로의 추이


이선영(미술평론가)


  

풍경은 이것저것을 한데 담을 수 있는 여유 있는 자루와도 같다. 단절을 통한 연결이 특징인 도시의 면면은 풍경을 통해 자연, 인간, 문명, 텍스트 등등을 자연스럽게 한데 버무릴 수 있다. ‘일상의 편린들’을 포착한 최규연의 [Roadside] 전은 다소간 느슨한 풍경의 형식을 따른다. 길은 서사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방식이다. [오즈의 마법사]부터 [길 La Strada], 최근에는 [매드 맥스] 시리즈까지 로드 무비라는 장르도 있지 않나. 일과 생활을 분리시키는 현대적 삶의 패턴에서, 반복적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동은 대개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을 말한다. 현대인은 돈으로 등치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늘 최 단거리를 찾고, 이동 중에도 자신의 이해 관심과 관련되는 정보가 있는 스마트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작가는 작업실과 집 사이를 오가는 매일의 여정을 점과 점 사이가 아닌, 선으로 전환한다.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은 출발과 종착만 중요하지만, 선적 과정은 다르다. 



Public Service, 53x33.4cm, oil on canvas, 2022



6 Birds, 5 Trees, 4 cars, 72.7x60.6cm, oil on canvas, 2022


전시장에는 단편적인 듯하면서도 서로 이어지는 풍경 20여 점이 걸려있다. 평면에서 꺼낸 듯한 작은 오브제들도 간이 선반 위에 놓여있다. 평소에 많이 하는 드로잉을 회화로 다시 그리기도 하고, 오브제를 통해 3차원상에 ‘그리기’도 한다. 이전에는 스컬피로 이번에는 클래이로 제작했다. 일종의 조각작품이지만 그림처럼 색칠된다. 작품 속 ‘길’은 서울의 집과 북수원 시장통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는 길과 주변이 주 무대다. 매일 오가서 익숙한 길은 사유와 상상의 무대로 적절하다. 초행길에서는 온통 목적지로 가는 길만 생각하게 되지 않나. 목적지는 있지만 가는 방식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자유로운’ 길의 특성이 작품에도 반영돼 있다. 10여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처음 구한 작업실이 수원에 있었던 인연으로 시작된 곳은 대개 인적 구성이 특화되기 마련인 다른 도시와 달리,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작가의 흥미를 끌었다. 


미국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정작 회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서였다. 작가가 가져야 할 소양인 이방인적 시점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유지되었다, 통상적으로 풍경은 가로 방향이 길지만, 최규연의 일부 작품에는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매우 길쭉한 화면들이 종종 발견된다. 동양화의 관념산수에서 긴 화면은 산책자이자 화가의 여정이 표시되기도 하지만, 최규연의 작품은 ‘서양화’다. 세로로 긴 화면 안에 아파트로 대변되는 고층 빌딩, 시늉으로만 심어 놓은 가로수들이 자리하곤 한다. 하늘을 잘 볼 수 없는 도시를 특징짓는 비좁은 입지들, 땅과의 단절, 인간사회의 규칙으로 좌표화 된 추상적 공간을 담고 있다. 더구나 정확한 원근법이나 고유색을 쓰지 않기 때문에 현실과 거리가 있다. 어떤 작품들은 아이같은 화법을 구사하면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더욱 흐트린다. 세로로 긴 풍경의 경우, 안정적으로 펼쳐지는 장관이 아니라, 문틈으로 잠깐 본 것 같은 일과성(一過性)이 특징이다. 



4 Trees, 65x50cm, oil on canvas, 2022



Crosswalk, 53x33.4cm, oil on canvas, 2022



산책자2, 53x45.5cm, oil on canvas, 2022



움직이는 관찰자, 72.7x60.6cm, oil on canvas, 2022


정착이나 관조가 아니라, 휙 지나가고 나면 사라지는, 관찰자와 무관한 일시적 광경들이다. 특히 이번 전시 작품에서는 자동차 안팎의 시점이 많다. 자동차 창문을 통해 보는 시점은 수동적이다. 관찰자가 적극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우연히 훅 다가왔다 사라지는 장면들이다. 무료하고 궁금해서 습관적으로 펼쳐보지만, 이내 휙휙 지나치는 인터페이스의 항목들처럼 무관심하게, 또는 무책임하게 지나치는 광경들이다. 그것은 풍경에 적극적으로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도시는 서로를 유령처럼 생각해야 무난히 돌아간다. 그것이 서로에게 최선의 태도로 간주된다. 작업실 창가에서 바라본 인접 건물처럼 서로의 시선을 피해줘야 하는 것은 넓은 사유지의 소유자가 아니면 누구나 지켜줘야할 예의가 되었다. 그것은 원래부터 거리두기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작동하는 현대예술과 맞아 떨어진다. 현대예술은 아무리 비대중적으로 보여도 결국 현대성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것이다. 


‘모던‘의 사전적 의미는 ‘가운데서 들려오는 소리’(vox media)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그것은 ‘방금(modo) 생겨난 무엇’을 의미하며, 그로서 현재성을 획득한다. 어린아이의 화법을 포함하여 약간 어눌하게 그려진 듯한 최규연의 작품에는 현대성, 즉 동시대성이 발견된다. 작가가 청년기에 미국에서 연구했던 형식주의적 관례는 모더니즘의 맥락에 있다. 모더니즘은 ‘현대적인 도시의 초라한 모습 속에 담겨있는 시적인 가능성을 살린’ 보들레르에서 시작된다고 지적된다. 그것은 또한 ‘남루한 현실주의적인 것을 환상적인 것과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엘리어트)이다. 화려하고 그럴듯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에 눈길을 주는 최규연의 경우 리얼리즘보다는 낭만주의적이다. 노클린은 [리얼리즘]에서 리얼리즘과 동시대성에 대한 요구는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낭만주의자들이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의 요구와 함께 나타난 예술의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요구는 지금까지 그림으로 표현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주제에 새롭게 눈을 뜨게 했다. 



Our Friendly Neighbor, 9.7x4.5x13.6cm, acrylic on clay, 2022



Blue Car& Pink Marks, 8.5x4.3x2.5cm, acrylic on clay, 2022



Street Lights, 7.5x3.5x8cm, acrylic on clay, 2022


평범하다 못해 하찮아 보이는 대상도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성의 결과다. 물론 린다 노클린은 동시대성을 중시하던 흐름이 기법과 매체를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도 인식했음을 강조한다. 길이라는 전시 컨셉은 지나가는 사람, 특히 도시의 산책자의 관점을 전제한다. 다양한 것들이 밀집된 도시는 빠른 시각의 전환을 특징으로 한다. 만약 멈춰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개발 대상이다. 가령 대도시의 빌딩 벽면은 거대한 동영상 플랫폼이 되고 있는데, 그 규모와 화질이 날로 발전하여 이렇게 거리에서 이미지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점에서 그림은 이제 작은 시냇물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예술은 자본과 기술의 집약체인 스펙터클처럼 광폭의 거친 나아감이 아니라, 지배적 대세 가운데 놓쳐 버린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작가는 대로에서의 이미지의 사냥꾼이 아니라 길가에서 예쁜 조약돌을 줏는 마음으로 자신이 수집한 것들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최규연의 작품도 무관계성, 소원함. 상품으로 대표되는 사물이 주역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작품들은 현대성을 작은 규모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압축 재생한다. 사람은 드물게만 등장한다. 인간은 장면을 포획하는 시점을 통해 암시된다. 반면 동물들은 심심치 않게 나온다. 개, 유해조수로 규정되어 있는 비둘기나 까마귀류가 그것들이다. 스케치에서는 고양이들도 보인다. 사람과 같이 등장하는 개 이외에는 그것들은 인간으로 치면 노숙자에 해당되는 떠돌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이러한 소소한 소재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유학 중의 작업은 좀 더 야심찼다. 회화가 가능한 형식적 조건에 대한 근본적 탐구는 현대미술가라면 해결하고 넘어가야할 난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식주의의 가정과 달리, 언어는 언어만을 통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해외에 오랫동안 체류하다가 몇 년 전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러한 형식실험 대신에 그리기가 주가 되었다. 



Passing Landscape, 45.5x37.9cm, oil on canvas, 2022



Pavement at Night, 45.5x37.9cm, oil on canvas, 2022



도약, 65x45.5cm, oil on canvas, 2022



View with Crow, 53x45.5cm, oil on canvas, 2022


오랫동안 모더니즘의 문제에 천착해왔다면 이제는 모더니티의 문제다. 문예사조사에서 모더니즘은 리얼리즘과 대조되곤 했다. 하지만 자기 일상에 충실하다고 해서 리얼리즘은 아니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에 모더니티가 있다. 최규연의 그림에는 재현적 요소가 있지만 화면은 물성이 느껴진다. 현실의 반영이지만 이제 투명한 창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쓰고 남은 물감으로 캔버스에 발라 놓았다가 그것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언제 어디다 쓸 것인지는 미지로 남겨둔다. 거리에서처럼 화면에서도 우연한 조우를 기다린다. 화면을 가다듬기 위해 칠하는 것이 아닌 만큼 최종 작품에도 울퉁불퉁한 물감 자국이 남아있곤 한다. 겹겹이 다른 색으로 칠해지고 덮이지만 밑색과 계속 대화적 관계를 통해서 진행된다. 밑색 위에 쌓아가며 칠하고 긁기도 하면서 순간순간 드러나는 색들 간의 상호관계를 반영한다. 제로 베이스는 없다. 밑 색 없이 한번에 그린 작품은 드물다. 


화면에 깔린 색들은 작품 속 일부에 불현듯 나타나기도 하고, 가장자리에 미약하게나마 그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소재와 형태가 단순하기에 색의 운용은 중요하다. 형태의 외곽을 두른 선조차도 똑같은 색은 아니다. 드로잉도 색을 먹여 놓고 시작하고 색연필로 작업한다. 왁스 많이 사용하여 거친 텍스쳐가 남는 화면은 투명도를 조정하면서 밑색과 상호작용한다. 언뜻 비효율적인 듯한 이러한 방식은 평면적이면서도 깊이가 있고, 단순한 형태에도 다채로운 효과를 남긴다. 언제 칠해놓은 지 모를 밑색이 깔린 캔버스는 쓸모없는 것은 없음을 알려준다. 보기 싫어서 다 덮으려고 했던 색이 딱 맞는 자리에서 빛날 때 쾌재를 부른다. 일상이 단조로울수록 예술을 바깥으로 더 트여 있어야 한다. 작업이라는 맥락 속에서 닫힘과 트임의 역학 관계는 새로움과 이질성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광역버스의 시점에서 작가가 건져 올린 풍경은 현대성을 특징짓는다. 



Sign, 53x45.5cm, oil on canvas, 2022



Water Bottles, 45.5x37.9cm, oil on canvas, 2022



아파트아파트아파트교회, 72.6x50cm, oil on canvas, 2022



나무 그림자, 45.5x37.9cm, oil on canvas, 2022


어두운 찻길에서도 밝게 빛나는 차선들은 다수가 몰려 사는 현대도시에서 규칙의 중요성을 말한다. 풍경에는 사람보다는 법과 규율을 알리는 구조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헤드라이트에 비친 광경이 많은데, 그것은 빛의 현대적 조건 즉 인공 광원의 비중을 알려준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또 다른 빛을 타고 오는 정보들을 소비한다. 도보자의 시점은 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작업실 주변의 공원 등에서 포착된 풍경에서 발견된다. 작가는 작은 종이에 그린 많은 드로잉이 있지만, 현장 사생을 하지는 않는다. 작업의 단서가 될 사진을 많이 찍는 와중에, 마치 인상파의 파격적 시점을 가능하게 한 사진적 시각과 실제로 몸을 움직임으로서 가능한 육안의 지각과 기억이 종합된다. 사당역의 밤 풍경을 표현한 작품에서 인공조명의 감도는 매우 쎄다. 많은 작품에서 차선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것도 복합적인 시점의 결과다. 


도보자와 자동차 사이에 놀란 듯이 멈춘 비둘기 같은 장면들은 수수께끼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미디어를 매개로 한 경험의 경우 전후 맥락이 금새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편 도시의 산책자에게 비바람 같은 기후적 조건은 혼돈의 느낌을 강조한 화면에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은 그저 넓은 창문을 통해 바라본 광경은 아니고 매순간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떤 시공간을 통과한 체험이다. 최규연의 작품에서 사람을 대신해서 삶을 이야기하는 집이나 빌딩은 별로 개방적이지 않다. 단순하게 대상을 묘사한 와중에도 유리창은 반사면이 강조되어 있다. 자신은 보이지 않은 채 밖을 보고 있을 법한 전능한 시점은 유리창 뿐 아니라, 여러 미디어 기기를 통해 편재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은 디지털 기계처럼 켜짐과 꺼짐 등으로 구별될 뿐이다. 작업실 창 밖 풍경을 그린 한 작품은 창 안쪽의 가림막이 시야를 제한한다. 그것은 보고/보이는 것을 의식해야 하는 도시의 공간을 반영한다. 



우회, 60.6x50cm, oil on canvas, 2022



기다리는 풍경, 53x45.5cm, oil on canvas, 2022



무제, 53x33.4cm, oil on canvas, 2022


사람이 안 보이는(또는 자동차로 등치된) 도시에 동물들은 나름의 활기를 부여한다. 인간의 보호 아래 호강하는 개들도 있지만, 대개는 인간중심의 생태계에 극단으로 밀어 부쳐진 타자들이다.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유해동물’들은 로드킬이나 공격적인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피해 높은 가로등 위에 앉아있곤 한다. 인간은 그것들이 인공생태계의 장식같은 역할만 해주기를 바란다. 원근법의 무시는 사물에 대한 단순한 형태화와 같이 간다. 가로수들이 푸른색 그림자를 내려뜨리는 한 풍경은 화면 가운데 차도가 양편에 인도가 배치된다. 후경의 비닐하우스촌과 전경의 까마귀가 길을 사이에 두고 대조되는 한 풍경은 기이한 구도다. 보통은 새가 위에 하우스가 아래 배치되지만, 시점에 따라서 완전히 뒤집어질 수도 있다. 까마귀의 경우 명암법이 미약해 화면에 검은 구멍이 난 것 같다. 현실은 매우 촘촘하게 짜여진 듯하지만, 빈구석들은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이 틈을 더욱 벌려 나가 어느 작품에서는 온통 검은 우주가 된다. 앞으로 쏟아질 듯 급격한 원근법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들 옆의 자동차 백미러에는 이국적인 풍경이 비친다. 코드화를 통해 추상적인 공간이 점차 늘여 나가는 현대는 구체적인 맥락을 지운다. 사람들처럼 사물들은 공중에 붕 떠 있다. 가령 코로나 확산 방지를 알리는 기물들은 사람 대신에 물건들이 규칙을 실행한다. 규칙은 합법적이지만 극히 취약하게 실행되는 모습이다. 땅과 토지 광고에 관련된 간판이 있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푸른 바탕에 떠 있는 광고판의 받침대는 극히 빈약하다. 한국어에서 하늘색과 녹색은 모두 푸르다고 표현된다. 그 풍경은 땅이라는 자연적 실재가 인간의 규칙에 포획되어 실제와의 연결이 단절된 상태를 말한다. 칠흙같은 배경 속에서 두툼한 패딩을 입고 걸어가는 사람은 우주적 어둠이라 할 만한 공간 속에서 홀로 걷는다. 



무제2, 53x33.4cm, oil on canvas, 2022



무제3, 53x33.4cm, oil on canvas, 2022



무제4, 53x33.4cm, oil on canvas, 2022


그는 자신이 위치한 좌표가 어디인지 파악하려는 듯 눈의 위치가 제각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근대의 중심을 이루었던 주체는 여전히 화면의 중심에 자리하지만, 그가 내딛는 발치는 붕 떠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신만만한 언명으로 근대를 철학적으로 대변한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우리가 불과 물과 별과 하늘의 힘과 영향을 알고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천체를 모두 안다면, 우리는 자연의 주인과 지배자로 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근대를 환하게 비춘 계몽의 빛은 짙은 그림자 또한 남겼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의 명과 암을 함께 논한 바 있다. 작가가 포착한 풍경에는 아파트나 자동차, 자연의 법칙을 대신하는 규칙의 경계만이 확실하다. 그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동물들에게서 인간이 느껴지는 것은 계몽의 어두운 측면이다. 타자는 소수였지만, 곧 다수가 된다. 


알렝 투렌은 [현대성 비판]에서 세속적 문화가 생겨나는 결과를 가져왔던 계몽, 즉 탈마법화 과정을, 맨 처음 ‘합리적’이라고 서술한 이는 막스 베버라고 평가한다. [현대성 비판]에 의하면 합리화란 기능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세계의 분화라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 체계의 모습은 핵심 조직인 자본주의적 경영과 관료제적 국가 장치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하지만 계몽은 도구적 합리성으로 귀결된다. 수단과 목적의 전도는 도처에서 일어난다. 도구적 합리성의 총아인 과학 기술 문명은 삶의 추상화를 낳는다. 현대사회의 일상성을 역사적으로 특수한 국면이라고 파악하고 분석했던 역사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추상은 오로지 현대적 세계에서만 발견될 뿐’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상기시킨다. 앙리 르페브르에 의하면 개인의 사적인 생활, 국가라는 추상물, 그리고 사회적 관행을 지배하는 형식주의와 일반화된 추상 사이에 관계가 있다. 



보행자, 45.5x37.9cm, oil on canvas, 2022


예술의 경우는 어떤가. 세상의 추상화(抽象化)는 추상화(抽象畫)를 낳았다. 이 거대한 동어반복이 예술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근대성의 국면인 합리화와 도구화 중에서 도구화는 확실하지 않다. 현대 미술은 과거처럼 신화, 역사, 정치 등등을 전달하는 도구의 역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현주의의 거부라는 맥락과 함께 한다. 돈을 버는 도구로서의 역할도 있겠지만 이는 극히 제한적이다. 합리화란 미술 또한 현대사회의 분업 구조에 순응하면서 전문가적인 영역이 된 것을 말한다. 미술계를 이루는 제도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미술은 미술전문가들의 영역이 되어, 언어 그자체에 대한 탐구가 우선시된다. 개념미술이 그 예다. 이러한 사조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영미의 철학인 논리실증주의를 비롯한 형식주의의 흐름들은 어떤 성과를 낳긴 했지만, 형식이란 결국 어떤 내용에 대한 형식이라는 점은 변치 않는다. 그림보다는 그림이 가능하기 위한 형식적 조건의 탐구에 몰두했던 어떤 시기를 뒤로 한 최규연이 형식주의가 괄호치려 했던 현실을 새삼스럽게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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