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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식 전 / 추상적 공간에 자리 잡은 형태들

이선영

추상적 공간에 자리 잡은 형태들

배삼식 전 (4.28—5.22, 갤러리 서화)

  

이선영(미술평론가)



부드러운 파스텔톤 배경에 다양한 크기의 기하학적 형태가 떠 있는 배삼식의 작품은 지평선 없어도 사각형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사각형은 완벽하게 사각 모서리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조금씩 축이 나기도 하는 등, 각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다. 배경이 없는 추상적 공간 위에 자리 잡은 형태들은 색감과 크기, 겹침에 따라서 원근감이 형성된다. 이러한 원근감은 벽에 걸린 작품을 회화적 관례로 보기 때문에 생겨난다. 목전의 회화에서 인물이나 풍경을 보는 시각적 관습에 따르면, 그의 작품에서는 멀리 또는 가까이에 있는 건물, 또는 그 문이나 창문이 보이는 것이다. 현대의 창이 가상으로 확장된 것을 염두에 두면, 그것들은 윈도 화면에 가득 깔아놓은 프로그램이나 폴더와도 유사하다. 크고 작은 형태들은 공간을 넘어 시간으로, 즉 지각을 넘어선 기억으로 이어진다. 화면 가장자리에 걸쳐있는 사각형은 시공간적으로 확장된다. 화면의 프레임과 평행하게 놓인 사각형들은 틀의 변주로,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형태들은 바탕보다 약간 도드라져 있다.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갤러리 서화에 있음)









조명에 따라 입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그의 작품은 언뜻 사각형을 오려 화면에 붙인 꼴라주같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두꺼운 종이 두께 정도의 돋을새김이다. 돌가루와 아교를 섞은 판으로 만들어진 부조와도 같은 얇은 도드라짐은 관객의 시선에 따라서 그림자의 두께를 달리 드리우는 미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깍아서 형태를 도드라지게 한 작품은 그림이나 꼴라주가 아니라 조각이다. 원래 조각 작업을 했던 작가의 변신이다. 미술사에서 꼴라주는 2차원적 환영에서 3차원적 사물로 가는 중간 다리 역할을 했지만, 꼴라주처럼 보이는 이 ‘조각’ 작품은 환영과 사물의 중간에서 안정감 있게 자기 자리를 마련한다. [SINCERITY No_]로 붙여진 작품 제목들은 제작된 시기를 포함한다. 제목들로 추정해 보면 거의 몇 년씩 걸렸다. ‘성실, 진실, 순수’ 등의 내용이 담긴 제목의 키워드는 추상미술이 자신의 자율성을 향한 자유의 여정에서 중시했던 가치들과 연관된다. 그림만의 순수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화면의 평면성이었다. 배삼식의 작품에서 정확한 수직 수평의 그림자를 배경에 떨구는 돋을새김은 붓자국이 아니라 거의 칼자국에 가까우며, 단순한 평면성을 넘어 울트라 평면성을 예시한다. 


평면성에 대한 극단적 담론은 캔버스와 물감이 하나가 되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그린버그는 추상으로 귀결된 순수예술론을 펼친 대표적 평론가이다. 그는 비평적 에세이 [예술과 문화]에서 화면은 깊이 감을 가지는 가상의 면들이 실제 캔버스의 물질적인 평면 위에서 하나가 될 때까지 평평해지면서 점점 얇아진다고 보았다. 묘사된 대상의 양감을 유지하는 사실적 공간은 부서져서 표면과 평행한 평평한 면들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함을 위해 대상과 서사를 제거하려 한 추상회화에는 화면의 재질감만 남겼다. 작업은 그러한 촉각적 표면성을 가다듬는 과정이 대신했다. 순수미술에서 배제됐던 장식은 뒷문으로 들어왔다. 세 개의 문자로 이루어진 작가의 사인이 삼각형으로 배열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배삼식의 작품은 공간을 품고 있다. 전형적인 모더니즘처럼 벽이나 벽지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는 초기 구성주의자들의 우주적 공간감과 더 가깝다. 




배삼식, SINCERITY No.15-17, mixed media, 130x97cm, 2021

배삼식, SINCERITY No.170-19, mixed media, 91x73cm, 2021



배삼식, SINCERITY No.168-19, mixed media, 72x91cm, 2021



배삼식, SINCERITY No.239-21, mixed media, 16x22cm, 2021



배삼식, TERRA COTTA_2, 34x40cm, 2004



표면과 가장자리가 시간의 흐름을 타는 듯이 연출된 형태의 배색은 묵은 공기를 품고 있다. 작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이 있으며, 한국적 현대미술을 해야 한다는 자의식도 분명하다. 미술평론가 안현정은 배삼식 평문에서, 거창 출생 작가의 가야문화에 대한 관심을 지적하면서, ‘가야토기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사각의 투각 형상들’을 조각에 접목해온 작품들을 언급한다. 작가 또한 ‘가야토기를 보는 듯한 반듯한 스퀘어, 한옥의 경사면에 박힌 ‘ㅁ자의 집’, 지평선과 맞닿은 잘 구획된 도시 같은 편안함이 배어 있는’ 작품을 원했다. 그밖에 한국의 조각보나 사각의 문창살 등이 언급된다. 배경은 한색 계열과 난색 계열 두 가지 평면이며, 밝기는 작품마다 다르다. 푸르름으로 대표되는 한색 계열은 하늘을, 붉그스름함으로 대표되는 난색 계열은 대지를 떠올린다. 그의 화면은 자신이 내딛는 땅과 바라보는 하늘에 대한 축소모형이며, 여기에 직선으로 이루어진 문명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2000년대 초반 작업인 테라코타는 조각과의 관련성을 말해준다. 이 시리즈는 화면 위의 창과 구멍 난 창이 점토 표면을 긁어 그린 선들로 연결된다. 


두툼한 흙판을 파낸 사각형이 만들어내는 내부 그림자는 ‘화면의 깊이’를 낳는다. 구멍을 내거나 긁거나 그려지는 바탕인 흙판은 그의 작품의 원형이 자연과 관련됨을 알려준다. 사각형(四角形)의 변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인류의 상징적 상상력에서 땅과 관련되어 있다. 한자의 밭(田)을 보라. 추상이 주류가 된 현대미술사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온갖 묘수를 썼던 것과 비교된다. 자연으로 대변되는 지시 대상을 괄호치고 형식을 가다듬으로서 순수함을 확보하려는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모더니즘을 지배했다. 하지만 자율을 향한 여정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 되었다. 동일한 프레임 안에 넣어진 같은 크기들로, 내부 형태의 배치에 따라 잠재적인 운동감을 보여주는 배삼식의 작품은 경직화된 모더니즘과 거리를 둔다. 화면의 프레임은 내부에 자리한 형태들의 배열에 영향을 준다. 화면 프레임에 걸쳐있는 형태들은 화면 안으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중이다. 한 작품에서 작았던 특정 색의 면이 다른 작품에서 커진 듯한 환영이다. 배삼식의 작품은 그려진 것이 아닌 만들어진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회화에서의 환영을 공유한다. 

 

출전; 월간미술 202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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