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다양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소우주

이선영

다양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소우주  

 

피프티 사운즈 전 (4.21—5.25, 갤러리 기체)

올리버 비어 전 (5.4—6.11, 타데우스 로팍 서울)

  


이선영(미술평론가)



영국 작가 올리버 비어(Oliver Beer)와 피프티 사운즈 전에 출품한 남아공 작가 3인의 전시는 순수와 동일시된 현대미술에 잡다(雜多)함을 접목함으로서, 순수에 지친 시각예술을 갱신하고자 한다. 순수주의를 채워왔던 것은 진보와 새로움이다. 진보와 새로움 자체에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지만,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미술을 형식으로 환원시킴으로서 철벽을 쳤다. 네 작가는 소리라는 이질적 요소를 시각 예술에 들여왔다. 여기에서 소리는 음악 뿐 아니라 다양한 음, 말 등이 포함된다. 고정될 수 있는 시점과 달리 소리는 여러 방향에서 들려온다. 주체의 시각에 대해 소리는 타자의 존재를 일깨운다. 다른 분야와의 만남도 활성화된다. 음악과 미술, 영화를 전공한 올리버 비어는 음악과 영화의 시간적 요소를 공간예술인 미술과 절묘하게 섞는다. 전시장에 설치된 도자기는 공명음을 내는 일종의 악기가 되었고, 음악은 진동하는 안료 입자로 고착되어 추상화가 되었다. 50가지 소리를 의미하는 피프티 사운즈 전의 제목은 일본 문학 번역가인 바튼의 에세이에서 온 것이다. 어떻게 배운지 기억도 안 나는 모국어와 달리, 외국어는 문자든 말이든 물성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모르는 언어를 접할 때와 배울 때 원어민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형태나 소리 그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때로 의미를 벗어나며, 이방인의 상상력이 보태진다. 이방인은 특정 의미를 가진 단어를 수십가지의 소리로 듣는 것이다. 타자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 즉 타자와의 대화는 다성성(polyphony)이 특징이다. 미하일 바흐친이 시장통과 선술집에서의 시끌벅적한 소리로부터 이론화한 다성성, 언어(Langue)와 발화(Parole)를 구별했던 소쉬르의 언어학 모두 엄격한 문법을 따르는 (변치않아 보이는) 구조가 새로운 맥락에 의해 개인화되며, 결국은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을 말한다. 시각 예술의 형식적 동일성은 타자에 의해 다변화되는 것이다.         

 

타자의 소리들




[Thaddaeus Ropac Seou] Oliver Beer_Resonance Paintings - Two Notes 



Oliver Beer_Resonance Painting (Love Come Down)



Oliver Beer_Recomposition (Wedding Song)



올리버 비어의 ‘공명–두 개의 음’ 전에서 작품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공명’은 그림으로 그려지거나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공명 회화(Resonance Paintings)’라고 부르는 작품은 공명을 바로 이미지로 만드는 비법의 결과다. 전시장 벽에는 공명 회화들이 걸려있고 가운데는 사운드 설치로 공명을 시연한다. 천정에서 내려오는 줄에 매달린 도자기들은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내부의 공명음을 마이크로 증폭시킨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소라나 고동에서 바다의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청화백자인데, 작가는 백자의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관심을 가진다. 하얀 바탕에 청색 안료로 그려진 백자는 선율과 화음으로 번역되어 그림이 되었다. 관객은 벽에 걸린 그림들이 가까이 다가간 도자기에서의 미세한 울림소리가 가시화된 것임을 직관적으로 느낀다. 도자기의 형태가 품은 공기와 공명하는 회화인 것이다. 흐름을 표현한 작품은 하얀 캔버스에 푸른 이미지가 있는 그림이지만, 붓과 물감이 아닌 음과 안료의 공명으로 이루어진다. 미세한 안료 입자의 진동을 캔버스에 고착시키는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흐름은 고체적 형태가 아닌 액체나 기체적 형상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분자적 차원의 흐름이 있다. 두 번째 전시실에 어두운 배경 속 사물들이 고체의 느낌이라는 점과 대조된다. 음악이나 말을 포함한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여주려는 현대예술가의 야심과 잘 맞아떨어진다. 칸딘스키를 비롯한 초창기 추상화가들이 모두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대미술을 전공하기 전에 음악을, 그 이후에는 프랑스로 가서 영화도 전공한 작가는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즉 자신이 던져진 환경의 소리들을 적극 끌어 안는다. 오랫동안 연구해왔던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가 보다 구체화 된 계기는 코로나 펜데믹 기간 동안 자의반 타의반의 유폐였다. 작가가 아니어도 모두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었던 시점이다.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시각과 달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타자의 존재를 일깨운다. 신실한 종교의 시대에 그 소리는 절대적 타자의 소리이기도 해서 종교적 회심(回心)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나 성당의 종소리가 교통 체증 속 자동차 소리에 묻히는, 많은 이들이 몰려 사는 현대 도시에서 대부분 소리는 소음으로 간주 된다. 소음은 ‘타인은 나의 지옥’(사르트르)라는 실존적 표현을 낳았다. 하지만 예술가는 세상의 부정적인 것에도 관심을 둔다. 부정과 긍정은 반대가 아니라 한 몸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분자적 차원에서의 진동하는 듯한 올리버 비어의 작품은 한 작품에서의 흐름뿐 아니라 화이트 큐브에 시리즈로 통일감을 준 형식 때문에 작품 간의 흐름도 느껴진다. 타자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푸른색의 밀도가 높은 작품은 푸른 멜랑콜리에 푹 젖어있다. 작품 [첫 눈에 반한 사랑]은 말 그대로 미세한 촉수가 빼곡이 솟아난 화면 가운데 바람처럼 무엇인가 빠른 속도로 파고든 형상에서 관객은 운명적인 사랑의 감정을 전달받는다. 화면 전체가 미세한 떨림으로 가득한 작품 [사랑이 내리다]도 마찬가지다. 미세한 주름으로 가득한 작품 [나는 너를 생각해]는 사유 또한 물질이나 육체처럼 접고 펼치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두 번째 방은 [Recomposition]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어두운 바탕에 레진으로 고정된 단편들은 마치 상자에 담아놓은 잡다한 물건들처럼 묵직해 보인다. 뒤러의 드로잉 이미지부터 깨진 도자기 파편과 탁구공, 바이올린과 회중시계까지 다양하다. 검은 바탕만이 여러가지를 한데 묶어준다. 첫째 방이 잘 조율된 공명의 세계라면 두 번째 방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이다. 도자기들의 공명음을 들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율된 앞 전시장과 달리 뭔가 파괴적이고 거칠다. 화음은 언제나 불협화음으로, 음은 언제나 소음이 될 수 있다. 양자는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 단지 맥락, 즉 구성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hibition view of Fifty Sounds at KICHE, Seoul (Courtesy of KICHE and Gabrielle Kruger)



Exhibition view of Fifty Sounds at KICHE, Seoul (Courtesy of KICHE and Mongezi Ncaphayi)



Exhibition view of Fifty Sounds at KICHE, Seoul (Courtesy of KICHE and Georgina Gratrix)



피프티 사운즈 전에서는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세 작가의 다양한 소리가 층층마다 다르게 울려 퍼진다. 전시 제목의 숫자는 한 언어권의 화자가 다른 언어권의 말을 정확한 의미보다는 형태나 소리로 듣는 경험을 포함한다. 그러한 소리들은 아직 선율이나 화성, 또는 의미가 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혼돈에서 질서가 나오듯이 무의미에서 의미가 나올 수 있다. 질서와 의미에만 방점을 찍힌 합리주의는 변화와 생성의 가능성을 도외시한다. 이 전시의 기획자는 의태어나 의성어를 뜻하는 오노마토피아(onomatopoeia)라는 개념을 접목시킨다. 오노마토피아는 ‘문자와 소리, 이미지와 움직임, 실제와 재현 등 복합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하나의 개념’이며, 참여 작가의 작품들이 ‘오노마토피아적’이라고 말한다. 색소폰 연주자이기도 한 몽게지 은카파이(Mongezi Ncaphayi)의 작품에서 소리의 원천은 다양하다. 종이에 잉크와 수채물감으로 그린 추상화는 칠해졌다기 보다는 얼룩진다. 얼룩의 형상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조밀한 패턴들이 추가되어 다층의 화면을 이룬다. 깨알같이 또는 점점이 뿌려진 작은 요소들은 좀 더 조밀한 리듬감을 준다. 형태-색채-소리는 각각 울려 퍼지며 어느 순간 만나서 감흥을 일으킨다. 얼룩진 형태이자 색채로 이루어진 바탕을 떠다니는 직선이나 기하적 형태는 바탕만큼이나 목적과 의도가 불확실하다. 작가는 어디선가로부터 풀려나온 것들을 한데 모야 축제적 활기로 모아 놓는다. 조지나 그라트릭스(Georgina Gratrix)의 작품들은 대부분 크지 않은 화면에 밑그림 없이 바로 칠한 듯한 즉발성이 특징이다. 몇 개의 빠른 선만으로도 표현할 바를 표현하는 색이자 형태는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서사와 연결될 수 있는 인간의 행위도 보인다. 그리드로 배열한 무채색조의 작은 작품들은 보는 순서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엮일 수 있는 가변적 내용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물감의 두께가 표정을 만들어내며, 몇 개의 선만으로 여러 자세를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서 소리는 시각적으로도 리듬감을 주는 두 단어의 반복부터 부리를 한껏 벌리고 우는 새, 깡총거리는 개나 입을 벌린 사람에게서도 들려온다. 작품 [자화상]에서는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앵무새 하나를 그려 놓았다. 따라쟁이인 앵무새는 중첩시킨 것은 풍자적인 의도가 있다. 수영복 차림의 남녀가 다정하게 붙어있는 모습이 담긴 [active people]에서 둘 사이의 육체적 정서적 유대는 끈적끈적한 유화의 질감 그자체로 나타난다. [notes from fashion] 시리즈에서 분홍바탕에 비슷한 무늬의 옷과 포즈를 취한 세 인물, 또는 한 인물의 다양한 모습은 패션에 있어서의 반복성을 잡아낸다. 베르그송이 주목한 바 있는 웃음을 자아내는 풍자적 반복이다. 그의 작품 속 반복적 요소는 팝송으로부터 온 것이다.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대중음악은 현대적 삶에 리듬을 부여한다. 가브리엘 크루거(Gabrielle Kruger)는 고체화된 아크릴 물감을 활용한다. 물감은 무엇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불투명하게 존재한다. 작품 [coral carnation]은 마치 섬유미술 작품이나 부조처럼 보이지만, 보드 위에 아크릴로 ‘그려진’ 것이다. 파이처럼 수많은 결로 이루어진 다층적인 화면은 풍부한 질감이 특징이다. 작품 [sea meadow] 시리즈는 초록 향기 가득한 식물군집의 모습이다. 유기체 특유의 전체와 부분 간의 관계가 해체되고 집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록 떠밀려온 쓰레기에서 영감 받은 것이지만, 다양한 질감과 형태를 가진 빽빽한 모습이 자연의 풍부함을 암시한다. [scrawlings] 시리즈는 붉은 땅이나 벽에 낙서처럼 휘갈겨 쓴 흔적들. 문자인지 이미지인지 알 수 없는 선들이 자리한다. [looping around] 시리즈는 하얀 보드 위에 자유롭게 그려진 ‘낙서’로. 색 선들은 화면 밖까지 나온다. 여러 색으로 이루어진 입체적 선들은 화면 안팎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며 여러 소리를 실어 나른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2년 6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