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아쿠아 천국(Aqua Paradiso) 전 / 미디어로서의 물

이선영

미디어로서의 물



이선영(미술평론가)

물에 대한 서사



국내외 작가 총 11인/팀이 참여한 아쿠아 천국(Aqua Paradiso) 전은 삶에 필수적인 물을 주제로 한다. 벽화부터 증강현실까지 동원된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은 신화적 무의식부터 생태적 감수성까지 광대한 지평에 걸쳐있다. 물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는 거대서사에 속하며, 곧장 신화나 종교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개진한 물의 몇 가지 근본적 특징은 이 전시를 해석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은 원천이자 기원이며 존재의 모든 가능성의 모태이다’ 그에 의하면 물은 모든 형태가 발생 되는 원초적 물질을 상징하지만, 여행이나 대홍수에 의해서 본래대로 되돌아간다. 물은 원초적이긴 하지만,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엘리아데)는 특성은 물이 가진 매개성, 즉 미디어의 속성과 연결된다. 많은 소재와 형식이 동원되는 이 전시는 다른 무엇과 결합하여 끝없이 변모하는 물의 특성을 살린다.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획자는 물의 특징인 ‘경계 없음’을 미학적 숭고(sublime)와 연결시킨다. 그자체로는 형태화 되지 않는 물은 고대부터 있었던 철학적 범주인 형상/질료의 대조항에서 질료에 해당한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서 시작했던 전통을 이어받아, 형상/ 질료의 대조에 성적 특성을 부여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머니는 형태 없고 수동적이며 무정형적인 질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통해 형상, 모양, 윤곽, 특수한 형태 등을 부여받는다고 믿었다. ‘자신을 감추고 상대방을 드러내는 물은 타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소극적인 물질이다’(헤겔, 자연의 철학) 그러나 그로츠 같은 페미니즘 저자의 입장에서 질료적 속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경계가 억압적일 때 질료적 속성은 긍정적이다. 물은 연결, 특히 인간과 자연의 연결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쟁취했다고 믿어진 근대는 이러한 연결을 무시하거나 형이하학적으로 봤다.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의 소멸은 숭고함이 아니라 비천함(abject)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비천함도 숭고한 면이 있고, 그 반대도 진실이다. 가령 숭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역사는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뿌렸는가. 물은 경계를 가로질러 흐른다. 우리에게 물은 저기에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 몸의 70%는 물이다. 물은 내재적이다. 인간이 모태에서 열 달을 자라는 동안 일종의 수중환경에 놓인다. 뱃속에서 어류부터의 진화를 다시 수행한다. 물에서 탄생했지만 뭍으로 나온 인간에게 물은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극명한 예다. 존 리겟은 [얼굴 문화, 그 예술적 위장]에서 인간의 대표적인 기관인 얼굴에서도 물의 흔적을 찾아낸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태아는 다섯 번째 주를 지내는 동안 어류의 아가미처럼 보이는 형체를 가지는 단계를 거친다. 인간의 먼 조상은 바다에서 온 것이다. 존 리겟에 의하면 활처럼 생긴 아가미의 뼈가 서서히 턱뼈로 바뀌었다. 그에 의하면, 원래 물을 펌프질하는데 쓰였던 아가미 근육은 두개골 전면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근육막으로 천천히 변형되었고, 이 근육막이 마침내 인간의 얼굴이 되었다고 말한다.




<리경,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2018, 4K 단채널 비디오, 멀티채널 사운드, 거울, 5분 56초



또한 물은 미디어다. 물은 다른 물질과 섞어 밀도와 강도를 조절하고 변화하며 이어준다. 물질적 상상력을 중시하는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물을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운명을 가진다고 본다. 이러한 변모는 예술의 언어와도 관련된다. ‘유동성이란 언어의 욕망 그자체이다. 언어는 흘러가기를 바란다.’(바슐라르) 예술적 영혼은 죽음과도 같은 한계를 거부한다. 물 자체가 경계를 가로지르고 섞이기 때문에 순수한 물은 드물다. 이 전시의 소재인 물은 크게 액체로 봐야 할 것이다. 전시작품 상당수가 미디어 작품으로 채워진 것은 물 자체의 미디어적 속성을 주목한 것이다.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언명에 따르면 내용과 형식은 연결된다. 전시 리플렛은 두 개의 표지로 되어 있어 반투명한 겉표지가 안 표지의 사막 이미지를 덮으면서 물에 잠기는 듯한 풍경을 만든다. 한낮의 햇빛으로 음영이 화려한 육지의 지형은 부드러운 얼룩으로 녹아든다. 사막 같은 현실에 낙원이 있다면 그곳은 물이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리라.


또 다른 버전은 정유 공장같이 수많은 관으로 이루어진 현대의 공장을 반투명 표지가 덮는다. 물 또한 석유와도 같은 중요한 자원이고 자연 못지않은 인공적 순환을 필요로 한다. 리플렛 표지들부터의 메시지는 사막(자연)이든 공장(문명)이든 필요한 것은 물임을 암시한다. 사막처럼 바짝 마른 것들은 물을 매개로 생명을 꽃피울 것이다. 관들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듯한 인간사회도 유기적 촉촉함을 요구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지만 끝의 원인이기도 하다. 특히 그것은 물이 지닌 여성적 속성과 연관되어 해석되어왔다. 철학자부터 종교학자까지, 그리고 페미니스트까지 그 점을 지적해왔다. 알레브 라이트 크루티어는 [물의 역사]에서 거의 모든 문명에서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상정하고 있기에 많은 언어에서 바다라는 단어는 여성의 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크루티어는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수메르어에서 마르(mar)라는 단어는 바다라는 뜻도 있지만, 자궁이라는 뜻도 있다고 전한다. 그에 의하면 고전 시대의 신화에서 물은 창조와 파괴, 탄생과 죽음, 미와 성적 욕망, 정열과 권력 등 다양한 의미체계와 연관지어 생각되었다.


[물의 역사]에 의하면 물은 고대의 자연 철학자들이 ‘불안정한 혼돈’이라고 언급한 유기체 형성과정의 근원으로 인식됐다. 자연철학에서 물은 그것이 지닌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속성으로 인해 단순한 물질 이상의 형이상학적인 요소로까지 그 위치가 격상된다. 역사주의를 비롯한 직선적 사고에서 끝은 종말이지만, 순환적 사고에서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이 전시에서 삶과 죽음이 연결되며 돌고 도는 순환적 사고는 시계추의 진동을 실행하는 작품부터 만다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동시에 많은 작품이 물을 매개로 불안한 미래를 진단한다. 공해에 의한 지구의 과열로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높아지며, 홍수와 가뭄 등이 빈발하는 기상이변의 속출은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흐르는 물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시간적 추이는 물에 대한 서사를 이끈다. 물은 기원이자 매개이며, 변화를 추동하는 근본 물질로 신화나 종교, 역사에 못지않게 예술에도 스며있다. 이 전시는 근본적 물질로서의 물의 잠재적 가능성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실화 한다.



1. 원초적 물질 ; 리경, 빠끼


리경—하늘과 땅의 성스러운 연결


전시장 초입에 배치된 리경의 작품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는 관객을 ‘정화하는’(기획자) 역할을 한다. 크루티어의 [물의 역사]는 ‘청결함이 신성함 다음이다’라고 히브리의 성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청결함을 하나의 도덕적 명령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이때 물은 정화의 역할을 수행한다. 전시장 내벽 전체를 덮은 반사면은 그자체가 ‘거울의 방’이다. 그 면들을 가득 채우는 낙수 이미지는 세차게 내리는 비같기도 하고 폭포같기도 하다. 단채널 비디오 작품으로 시간적으로 무한히 반복되고 설치를 통해 끝없이 반사되는 공간은 그 안에 들어온 관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장관을 이룬다. 하지만 멀티 채널 사운드는 물소리가 아니라 불소리, 뭔가 타닥타닥 타는 소리다. 왜 작가는 불소리를 물소리처럼 듣게 했을까. 그것은 폭포를 재현하는 식의 단순함을 벗어나서 작가가 겨냥하는 메시지 전달을 위해서다. 리경의 메시지는 종교적이다. 아래로 향하는 물과 위를 향하는 불만큼이나 물과 불은 반대 항을 이룬다. 제주 천지연 폭포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형태만큼이나 소리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달라짐을 알려준다. 씻어내리든 태워버리든 정화의 과제는 동일하게 수행된다. 미디어로 재현된 물줄기들은 빛의 쏟아짐이기도 하다. 리경은 빛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가져왔는데 높은 천정에서 폭포수처럼 쏟아 내리는 빛을 표현한 작품도 발표한 바 있다. 빛이든 물이든 하늘과 땅은 연결된다. 종교라는 단어에는 ‘잇다’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의 천지연 폭포 어둑한 거울의 방에서 반대되는 것들이 하나 되는 숭고한 체험을 한다.



빠키—원형적 무의식에서 기계적 무의식으로



빠끼, [무의식의 원형], 2022, 혼합재료, 가변크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빠끼(Vakki)의 작품 [무의식의 원형]에서 원과 구를 기본적 조형 요소로 삼아 구성된 공간은 뭔가 딱딱 맞아 떨어지며 돌아가는 우주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심층의 진실로 모델화한 이래, 그리고 융이 이러한 공간화를 시간화시켜 먼 태고의 이미지(primordial images)라는 상징을 만들었기에,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현대적 놀이공원처럼 보이는 분위기는 다소간 이질적이다. 제목 [무의식의 원형]에 나타나 있듯, 무의식은 말 그대로 동그라미 모양으로 가시화된다. 작가는 융이 말하는 근원적인 무의식의 구조를 원으로 상징한다. 여기에서 원은 형태이자 끝없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해석된 무의식은 심연이 아니라, 여러 표면들이 횡단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기계처럼 맞물리며 돌아간다. 최초에 누가 태엽을 감아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이후 정해진 궤도를 따라 시계처럼 정확하게 작동하는 우주다. 이때 작가와 창조주와의 비유는 그럴듯해진다. 빠끼의 작품에서 빛에 반사되며 순환하는 물은 흐름을 가시화한다. 전기, 전자 동력장치를 탑재한 작품에서 물은 미러 재질의 여러 반사 면들과 연동된다. 작품은 재미있는 형태의 조합을 넘어서 물질과 비물질이 난반사되는 장이다. 그들의 작품은 엄격한 규칙과 경쾌함이 공존하는 놀이적 요소가 강하다. 작가가 참조하는 융의 원형적 무의식만큼이나, 현대 시대와 걸맞는 무의식 이론을 정립하고자 한 펠릭스 가타리의 [기계적 무의식]과도 연결된다. 무의식은 그것이 원형적이든 시원적이든 고정된 상징으로 환원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새로운 무의식 이론이 필요했다,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삐그덕 거리면서도 계속 이어지며 작동하는 작품에서 구성 요소들과 배치들 사이에는 필연적 서열 관계는 없다. [기계적 무의식]에 의하면 (창조성은) 기호나 코드화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 폐쇄되고 추상적인 구조로서의 무의식이 아니라, ‘스스로 고유한 활동에 맞게 삶을 기초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으로서의 무의식이 중요하다.




2. 과학기술과 물 ; 닥드정, 김태은, 아드리앵 M & 클레어 B


닥드정—과학과 예술에서의 실험



닥드정, [원천미술] 2016~2022, 자성유체, 전자석, 전자석 컨트롤러, PC, 가변설치



원천기술을 확보하여 우위를 선점하려는 경쟁을 패로디한 [원천미술]은 작가가 수년간 연구해오고 있는 유체역학의 한 분야다. 과학기술은 직선적 진보의 상징으로 앞서 나감은 결정적이다. 예술은 직선적으로 진보하지 않지만, 근대 이후부터는 그 질서에 편입됐으며 첨단의 역할을 자임했다. 현대미술가 누구도 새로움과 진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새로움과 진보가 직선적 이미지를 가진다면 닥드정이 몰두하는 유체역학은 혼돈의 이미지를 가진다.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혼돈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에 의하면 사물들의 형성처럼 인류의 역사도 물렁물렁한 것에서 견고한 것으로, 끈적끈적한 것에서 단단한 것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경향이 실증주의만 중시한 결과를 낳았다. 세르는 견실함을 추구하는 실증과학을 고체역학과 비교하면서, 유체역학은 유동성 때문에 더 고차원적이라고 본다. 원천미술 프로젝트는 ‘기존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신소재, 신재료를 연구 개발’하는 목표를 가진다. 그는 새로운 재료를 직접 개발하려 한다. 그가 목표로 하는 움직이는 물감이 가능하다면 엄청날 것이다. 검은 물감처럼 보이는 자성유체(Ferrofluid)는 자기입자가 혼합된 유체로, 자성에 반응하여 밀폐된 용기에 속에서 리듬을 타며 춤춘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지만, 무중력 공간에서 우주복의 이음새를 막기 위해 개발된 신소재다. 인터넷을 비롯해서 수많은 기술들이 군수 산업의 낙진이다. 힘의 우위로 상대를 제압하고 지배하려는 정치경제학을 평화적인 예술에 사용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도 사회에 속한지라 새로움과 진보라는 근대의 모토는 ‘원천미술’에 해당하는 무엇인가를 요구해왔다. 하지만 새로움의 낯섦과 고통만 있고 과학기술의 결과물에 상응하는 혜택은 없다는 점이 예술이 처한 어려움이다. 예술은 대중과 멀어진 이후 영향력도 줄었다. 현미경, CRT 모니터, 노트북, 전자석 매트릭스 장치, 자성유체 내구성 테스트 장치와 유리 초자, 연구 샘플들 등, 미술 전시에서는 보기 힘든 각종 과학기술 장비가 빼곡이 나열된 전시장은 과학자의 실험실처럼 연출된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정보통신을 전공했고 테크놀로지 아트 관련 전시에 많이 참여해 왔던 작가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과제를 위한 실제적인 세팅이기도 하다.



김태은--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기술



김태은, [Rectangular System], 2005(2022년 재제작), 빔프로젝터, 컴퓨터, 지향성마이크, 오디오 인터페이스, 가변설치


김태은의 [Rectangular System]은 초대한 다른 나라 대통령과의 과도한 거리두기로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긴 테이블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떨어진 의자와 의자 사이의 테이블은 마주한 두 사람의 대화를 표현한다. 소리를 이미지로 전환하는 기술이 적용된 작품은 테이블 위에서 물결같은 흐름으로 나타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을 더 많이 한 사람은 더 많은 사각형들을 상대에게 보내게 된다. 두 인간이 대화하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동등할 수 없는 인간 간의 대화 속 역학관계를 추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소통에 대해 민주주의적 기대치가 있지만, 평등은 자유만큼이나 도달하기 힘든 가치다. 발화는 메시지의 전달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도 암묵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다. 그가 누구인가 어떤 상황인가 어떤 말투 인가 등에 따라 어떠한 힘이 관철되며, 그것은 공통된 문법(랑그)를 넘어서는 오묘한 기상도로 나타난다. 발화(빠롤)는 고정된 문법을 변화시키는 요소다. 왜곡도 새로움도 여기서 나온다. 메시지가 권력(힘)이 되는, 또는 구조가 생성이 되는 과정에 액체 이미지가 동원된다. 작가는 이러한 힘의 관계를 흐름으로 영상화한다. 또 다른 작품 [구원_증발]에서 작가는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우울증으로 죽어 물에 떠내려가는 영화 속 주인공 사진을 종이에 출력해서 용해시킨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우울증과 물의 관계를 언급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흠뻑 젖어있고 거의 대홍수가 난 세계,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단 하나의 세부 사항만이 지나치게 커진 세계가 바로 우울증이다, 그 반대는 조광증인데 그것은 물의 부족, 즉 뜨겁고 사막 같은 세계, 모든 것이 지리멸렬, 무질서, 순간적 흔적인 공황의 세계이다. 멜랑콜리의 어원이 된 ‘흑담즙’(melankholia) 기질을 화학 용액을 통해 증발시킴으로서 주인공을 자살로 이끈 영혼의 병에 대한 치유를 도모한다. 그 모두가 액체를 매개로 한다.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물은 항상 흐르며 떨어지며 그리고 수평적인 죽음으로 끝난다’고 보면서, 물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물은 ‘가장 여성적인 죽음의 물질’인데, 물속에 빠져 죽은 오필리아는 여성적인 자살의 상징이다. 물은 ‘젊고 아름다운 죽음, 꽃다운 죽음의 원소’(바슐라르) 로 비춰진다. 우울증 회복을 위해 관련 영화 주인공 이미지의 색을 빼는 화학적 과정은 유모어가 있으면서도 엽기적이다. 기질론이나 치유법이나 블랙 코미디 같은 모습이다.



아드리앵 M & 클레어 B (프랑스)--미디어의 연장으로서의 몸



아드리앵 M & 클레어 B, [아쿠아 알타 – 거울을 건너서], 2019, 팝업북, 증강현실, 팝업북: 28×23cm





아드리앵 M & 클레어 B의 [아쿠아 알타–거울을 건너서]는 페이지별로 펼쳐진 팝업북에 디지털 기기를 갖다 대면 영상이 겹쳐지는 증강현실(AR) 기술이 적용된 작품이다.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보는 책에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서사가 깔려 있는데, 증강현실로 또한 시간을 축으로 전개된다. 흐르는 물이 시간의 흐름과도 비교되었듯이 말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하염없이 내리는 비로 갑작스럽게 침수된 집에서 벌어지는 두 남녀의 생사고락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침수된 집에서 머리카락만 남아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는 기괴하다. 사건 이후 여자가 구조되었는지는 미궁이다. 산업화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 인간들이 촉발한 원인들이 쌓여 생겨난 기후 위기로 기상이변이 자주 일어나는 가운데,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사건처럼 다가온다. 그들에게 닥친 고난과 무관하게 증강현실 속 이미지는 마치 춤동작처럼도 보이는데, 그것은 작가들의 몸동작을 활용한 것이다. 그들에게 미디어는 몸의 연장이다. 퍼포먼스와 디지털 아트가 만나고,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와 미디어가 만남인 동시에 몸과도 만나는 장이다. 손으로 넘겨 가며 보는 종이책은 디지털 미디어와 만나 또 다른 시공간의 축으로 확장된다. ‘아쿠아 알타’는 해수면이 높아지는 비정상 상태를 말한다. 인류의 진보, 즉 생산력 증가가 낳은 과도한 탄소 배출량 때문에 빙하가 녹아, 앞으로 사라질 섬이나 대륙, 동식물에 대한 종말론적 예측이 있다. 아쿠아 알타라는 기상이변과 함께 호출된 키워드는 ‘거울’이다. 증강현실과 결합한 책은 막힌 평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이미지의 배경을 이룬다. 이러한 유동성은 거울 뒤로의 여행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무한 복제를 상징하는 거울은 생산력에 대한 상징이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근대적 생산주의를 거울과 연결시키면서, 이제 그러한 ‘생산의 거울’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울처럼 재현하는 것이 생산이다. 중세의 유비의 패러다임을 넘어 자연을 비춰온 거울은 이제 긍정적 패러다임이 아니다. 탈근대의 패러다임에서 거울은 건너야 하는 질곡이 된다. 거울, 즉 생산지상주의는 생산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재난이 밀물처럼 들이닥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신화와 전설 ; 이 이란, 리우 위, 마리안토


이 이란 (말레이시아)--텍스트로서의 역사



이 이란, [술루 이야기 – 칼라윗의 기린] 2005, 디지털 C 프린트, 61×61cm


말레이시아 출신의 작가 이 이란은 동남아시아 군도를 배경으로 한 역사를 다룬다. 그의 작품은 역사가 물을 둘러싼 이해관계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기에 인류의 모든 문명이 물을 끼고 번성했다. 문명의 시작은 물론 경쟁과 퇴락 또한 포함한다. 소중한 것에 대한 지배권을 향한 각축전은 역사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작품 [술루 이야기]의 무대인 술루해는 휴가지의 해안가 같지만, 현재에도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간의 영토분쟁이 일어나는 긴장감 가득한 곳이다. 그의 작품은 술루해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이 깔려 있는데, 거기에는 영역에 대한 본능적 경쟁에 더하여, 식민주의는 또 다른 모순을 덧씌워져 있음을 암시한다. 소수에게 집중되는 권력의 역사에서 그 사연은 대개 슬프다. 가령 이번 전시의 한 작품 [칼라윗의 기린 The Ch’i-lin of Calauit]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필리핀 독재자의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초상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는 기린을 비롯한 사바나의 멸종 위기 동물을 칼라윗섬에 이주시키느라 정작 토착민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 했던 기구한 사연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이주한 야생동물 역시 지배 계층의 사냥감이 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작가는 자연에 더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자료를 샅샅이 뒤져서 일종의 포토 몽타주를 만든다.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찾아낸 공식적 사료뿐 아니라 일상에서 취한 자료들도 섞여 있다. 필리핀의 소규모 공동체 바랑가이(Barangay)부터 15세기의 술탄, 청자고둥과 민속의상 사롱(Sarung)까지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작가는 각기 다른 맥락에 있던 소재들을 상상력으로 이어 붙인다. 여러 기원을 가진 수집 자료들로 또 다른 텍스트를 짜는 것이다. 지시 대상과 결합 된 인덱스로서의 사진에 대한 시각적 관습을 활용하여 가상적 장면을 실제처럼 연출한다. 그의 작품은 마치 여러 지류들이 모여 바다를 향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종합이 있다. 이음매 없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디지털 프린트 작품은 시리즈 전체가 일정한 크기와 톤, 그리고 분위기를 가진다. 그것은 작가가 그 자료를 마음속에 넣었다가 꺼냈다는 방증이다. 자료만 가지고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렸거나 직접 찍은 것같은 사진 이미지는 물과 관련된 역사를 말한다. 피 흘리는 역사와 관련되어 있지만 구체적 사건은 휘발되고 아련한 신화적 분위기가 남는다. 멀리서 찍힌 한 장의 풍경 사진처럼 거리감을 두고 있지만, 알레고리가 새겨진 각각의 장면들은 다소간 풍자적이다.



리우 위 (대만)--대홍수의 신화



리우 위, [이야기가 넘쳐 홍수가 될 때], 2020, 2채널 스크리닝, 비디오 설치, 컬러, 스테레오, 토우 모델, 12분 38초



리우 위의 [이야기가 넘쳐 홍수가 될 때]는 편안한 의자 앞에서 펼쳐지는 대형스크린이 마치 영화관에 온 것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토우 같은 오브제와 영상이 조합된 조형적 영화로, 여러 채널로 상연된다. 작가는 54개 이상의 민족들 사이에서 84개의 언어로 전해진 대홍수 신화를 수집해 작품 소재로 사용했다. 대홍수의 신화는 왜 그토록 보편적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종교학에서 찾아질 수 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인류가 물속으로 소멸된다는 홍수에 대한 전설을 새로운 인류와 더불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생각과 관련된다고 해석한다. 물에서 탄생한 인류는 물로 사라질 수 있으며, 그것은 영원한 종말이 아닌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진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가정한다. 물에서 나오는 것은 형상의 발현이라는 우주 발생적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고, 물에 잠기는 것은 형태의 해체를 말한다, 형태의 해체에는 새로운 탄생이 수반된다. 물과의 접촉은 항상 재생을 함축한다.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도 세계 물의 신화의 공통적 의미를 다룬다. 그에 의하면 모든 질서가 우주적인 혼돈으로 빠지는 대홍수의 신화는 ‘새롭게 다시 태어날 인간의 도래를 예비하기 위하여 인류 전체를 절멸시키는’ 사건을 말한다. 우주 창조의 반복을 통한 삶과 세계의 갱신이라는 주제는 보편적이다. [물의 역사]의 저자 크루티어는 영국의 시인 오든을 인용한다. ‘거대한 물, 바다는 태초의 분화되지 않은 흐름의 상징이다...바다는 일정한 형태가 없는 무질서의 상태’다. 여기에서 물은 죽음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당신은 대홍수의 물을 세례의 전조로 보여주셨다. 그것은 죄의 끝이요 선의 새로운 시작이다’(오든) 대홍수의 신화는 선과 악, 시작과 종말, 삶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주제이다. 역사의 폐기는 갱신과 연결된다. 그가 보여주는 신화들은 보편적이다. 각 국가나 민족에 신화가 있다는 것 뿐 아니라, 그 구조가 비슷하다. 언어학, 인류학, 종교학 등은 수많은 종족의 민속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신화적 서사의 유사함을 발견했고, 이는 구조주의라는 철학적 흐름을 낳기도 했다. 신화는 보편적 구조의 살아있는 예다. 특정한 사건들로 비롯한 보편적 교훈을 낳는 신화들은 그 자체가 영화적이다. 영상이라는 강력한 대중적 매체와 신화는 잘 어울린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이 2차적 구술성의 문화라고 말한 현대문화는 신화를 다시 불러들인다. 문자가 없던 시절 구술로 전해오던 신화는 기억하기 쉬워야 했다. 정보혁명의 시대는 정보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경쟁하는 시대다. 이때 구술성은 문자성보다 유리하다. 다만 지금은 원초적 구술성이 아니라 문자와 미디어를 모두 포함하는 (2차적)구술성이다. 리우 위의 작품 시청각의 모든 자료를 활용한다. 신화가 당시에 대중문화였듯이 대중문화는 신화적이다. 신화는 지금의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주는 모델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전개되는 과정이 주를 이루는 대서사이기 때문이다. 일상과 역사에 괴로워하는 대중들은 신화에 열광한다. 물로부터 시작해서 물로 끝나는, 가령 멸망, 수몰 같은 어두운 결말이라도 그것이 의미와 재미가 함께 하는 과정을 향유한다. 물의 신화뿐 아니라 신화 자체가 갱신이라는 목적을 가진다.



마리안토 (인도네시아)--토속신화



마리안토, [띠르따 페르위타사리], 2022, 벽에 목탄, 카본 안료, 300×1826.9cm,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마리안토는 이 전시에서 굳이 벽화를 고수했다. 300×1826.9cm 규모의 대형 작품 [띠르따 페르위타사리(Tirta Perwitasari)]는 며칠 동안 현장에서 직접 그린 그는 자료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 운명을 달게 받는다. 현대사회의 문제도 사라질 것이 사라지지 않아서 아닌가. 썩지 않는 쓰레기나 부당한 기득권 등등. 하지만 정작 귀중한 것들은 사라지고 있다. 이 풍경은 인도네시아 출신 작가의 거주지 인근 자바섬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 제목은 ‘생명의 물, 맑고 신성한 물의 정수’를 의미한다. 활화산과 성스러운 물은 사실적 지형으로부터 온 것이고 전래의 신화가 깃들어 있다. 그곳은 단순히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영적인 장소이다. 삶의 근본인 물에 관련된 전통적 제의도 벌어지는 곳이다. 그의 풍경 곳곳에는 전통적 상징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협에 처한 것들이다. 지역 공동체에게 생명수같은 신성한 물줄기는 생수 회사의 탐욕으로 고갈되는 중이다. 생수병에 든 물을 사먹게 된 시기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크루티어의 [물의 역사]에 의하면 사업가들이 생수로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라고 지적한다. 만물을 상품화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물이 생산의 회로에 진입하면 정작 토착민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들은 지역이 아닌 세계를 무대로 하는 다국적 회사의 노동자가 되어 물처럼 착취될 것이다. 자연은 선물이다. (자연적인) 선물이었던 것이 (사회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면, 소수가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더 많은 이들은 더 적게 가져가게 된다. 모든 이가 수혜를 받을 것이라 기대되는 생산은 대개 불평등을 낳는다. 그것은 생산력에 내재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 때문이다. 미술사는 그림이 캔버스에 그려져 전시되고 거래되던 시기를 상업 자본주의의 발흥과 같이 본다. 그 전에는 동굴이든 벽이든 특정 장소에 속해있었다. 나무나 샘이 특정한 한 장소에 있었듯이 그림도 각 장소에 속해 있었다. 목탄과 카본 안료로 그려진 어둑한 이미지는 자연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코드화되어 유통되는 화려한 시대와 대조된다.



4. 생태주의 ; 부지현, 권혜원, 에코 오롯


부지현—역사를 무화시키는 주기적 순환



부지현, [Where is it going], 2022, 모터, 센서, 폐집어등, LED, 수조, 워터 펌프, 가변설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두 개의 창구멍으로 보게 되어 있는 부지현의 작품 [Where is it going]은 펌프로 순환하는 물이 높은 수위로 설치되어 있다. 제주 출신으로, 집어등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작가는 시계추처럼 진동하는 집어등으로 순환하는 시간을 표현했다. 작가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에 그 반대 방향도 부여한다. 영원한 회귀이다.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 아득한 때로의 끊임없는 회귀는 지나간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 즉 역사를 폐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추의 운동은 ‘아득한 때에 일어난 사건들을 차례차례 재현하고 있는 것’(엘리아데)이다. 그것은 ‘세속의 시간 바깥으로 투사되어 원초적 시간의 충만한 속에 편입될 것’(엘리아데)을 바란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그것은 ‘범례적인 행위들의 반복과 원형의 모방에 의한 시간의 폐기’, ‘세속적인 시간의 폐기’이다, 견디기 어려운 역사의 압박을 주기적으로 역사를 폐기하려는 의식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주기적인 갱신의 필요성이 시간의 폐기를 추동한다. 작가는 무한히 주어지는 것이라 믿어지던 물이 이제는 부족하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면서, ‘물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절수형 사회 구조의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1992년 유엔은 세계 물의 날을 지정하기도 했다. 순환하는 작품의 구조는 한 방울의 물도 허실 됨 없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사막지대에서 실험되고 있는 절수(節水) 농법은 미래의 물 사용에 대한 모델이 되어준다. 칠흙같이 어두운 공간 속 환한 빛에 유혹되어 날파리처럼 몰려들던 물고기는 누군가의 영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죽음은 삶으로 이어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순환하는 물로도 나타난다. 집어등에서 뿌려지는 물이 수면에 파장을 일으키고 관객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원초적 물질의 주름을 본다. 어두운 공간에서 하얀 가벽에 비춰지는 허상의 역할도 상당하다. 한 방울의 물이 주는 파장은 공간 전체에 미치며, 작품이 펼쳐지는 장은 시각적 메아리로 가득하다.



권혜원—지역의 역사와 생태



권혜원, [액체 비전 – 프롤로그], 2022, 16채널 비디오, 8채널 사운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권혜원은 지역의 역사 속 자연에 관심을 가진다. [액체 비전–프롤로그]는 16채널 비디오와 8채널 사운드로 이루어진 총체적 환경으로서의 작품으로, 여러 개의 화면이 물흐르듯 이어져 2022년 현재의 생생한 자연생태의 모습이 담긴다. 인공 호수였던 '경양방죽'과 광주를 관통해 흐르고 있는 영산강이 상상과 자료, 리서치를 통해 소재화됐다. 작품에 활용된 자료는 국립 낙동강 생물자원관의 하천 연구을 비롯해서 작가가 직접 다니며 탐사한 결과물로 이루어졌다. 영산강과 달리, 경양방죽은 수 십 년 전에 매립되어 기억과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무등산의 화기를 내리기 위한 풍수적 목적과 인근 농민들의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이중적 목적을 지닌 장소’는 작품을 통해 환생한다. 계곡과 습지, 저수지를 포함하여 강이 시작되고 펼쳐지는 광대한 무대가 배경이니만큼, 작가는 현미경적 시점부터 주민 인터뷰, 그리고 역사적 자료까지 방대한 원천이 작품에 녹아 있다. 자연 그자체에 대한 관심은 자연과학자의 일일 것이다. 자연사에 비해 얼마 차지하지 않는 인간의 역사, 하지만 역사는 자연을 급속하게 고갈시켰고 이는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권혜원은 전시장이 소재한 광주의 수원을 자세히 조사할 때 인간 아닌 양서류의 시점을 체택했다. 동일성(중심)이 아니라 타자(주변)의 시점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시점에 의하면 양서류에게 물은 더 절대적임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물은 거의 공기같은 총체적인 환경이기 때문이다. 인간 주체가 더 협소하게 이해되는 현대에 이질적인 타자들의 시점은 대안적 세계를 위한 방향 전환이다. 작가의 양서류 되기는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역까지 포괄하고자 한다. 맑은 물에 사는 양서류도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때문에 멸종의 위험에 놓인다. 동일자가 아닌 타자의 입장으로 다시 본 자연은 그곳이 훼손돼서는 안된다는 공감대를 자아낸다. 여러 개의 화면을 물흐르듯 연결시키고, 흐르는 곡선으로 오려진 사진 이미지는 벽에 붙여져 관객의 동선을 이끈다. 영상은 보다 분석적이고 사진은 심미적이다.



에코 오롯—오래된 미래로서의 생태주의



에코 오롯, [제주산호뜨개] 2018~2022, 털실, 솜, 가변설치



한 코씩 늘려가며 짜기를 통해 가장자리가 부드럽게 물결치는 손뜨개질과 산호 이미지의 만남은 절묘하다. 뒤에 제주 연산호의 산호초가 있는 영상이 나오고 앞에 뜨개 구조물이 배열되어 있다. 수년째 진행되어 오고 있는 작품 [제주 산호뜨개]는 손뜨개 된 오브제의 화려한 색상이 산호군락의 건강함을 상징한다. 수질오염 및 수온 상승에 의해 산호초가 죽어서 허옇게 된 상황은 하얀 실로 떠진 산호 형태가 표현한다. 해양오염으로 수중 생계계가 교란된 모습은 산호 군락에도 반영되는 것이다. 자연은 거울이다. 혼자도 뜨고 함께도 뜨는 커뮤니티 아트인 산호 뜨개질은 환경 생태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의 특이점은 한사람이 시작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이어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체와 부분의 연결에 유연성이 있다. 한오라기의 실이 계속 이어지는 편물 작업은 생명의 그물망을 떠올린다. 근대적 분업화를 넘어서, 개체가 전체와 하나가 되어 물결칠 때의 신비적, 심미적 체험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이 작업은 월드와이드웹을 전제로 한다. 사이버네틱스라는 단어에 포함된 조타수라는 개념은 정보의 바다를 전제로 한다. 링크는 계속 이어진다. 생태 문제는 어느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상호 연결된 총체적인 문제다. 에코 오롯의 작업은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기보다 자연의 방식을 따르려 한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제주도와 서울에서 총 547 명의 참여자들이 100여 회의 관련 모임 및 작업을 가졌다. 여성들의 공예 및 예술이었던 손뜨개질은 생태주의라는 대안적 사회운동과 어우러진다. 해변에서 수거한 플라스틱 조각들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만다라]는 이 이물질로 인해 죽어갔을 해양 동물에 대한 애도이다. 작가는 모래사장을 기어서 쓰레기를 수집한다. 그 쓰레기들로 인해 고통받았을 해양생물에 대한 공감이다. 모래판 위에 색색의 쓰레기를 배열해 만든 만다라는 고래의 눈을 형상화한다. 쓰레기들은 고래의 눈에 박힌다. 그것은 원래의 만다라가 그러하듯이 다시 해체되는 일시적 기념비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들도 일시적 공동체이다. 이들에게 기념비나 공동체는 전통처럼 견고하지 않지만 새로이 닥친 고난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만다라처럼 다시 해체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쓰레기들은 작은 용기에 담겨 투명 실에 연결되어 내려오는 작품은 빗물인가 눈물인가...분명한 것은 그 해악이 원인 제공자에게도 돌아온다는 점이다. 한 코씩 떠나가는 뜨개질과 수많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배치하는 만다라 제작 과정은 그자체로 간절한 염원을 새긴다. 오늘날 물로 대변되는 유동성의 가치는 다시 중요해진다. 생태주의는 원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시대착오적 운동이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근대의 속성을 액체로 보기도 했다. 작품의 주요 형식인 손뜨개질이나 만다라, 그리고 거기에 담긴 물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로 되살아난다.


출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2 ACC FOCUS 아쿠아 천국(Aqua Paradiso) 전시읽기 강연록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