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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재 / 죽이지 않은 채 고정하는 회화의 방식

이선영

죽이지 않은 채 고정하는 회화의 방식

 

이선영(미술평론가)

  


임희재의 작품은 수집장 안에 든 박제 동물을 소재로 한다. 풍경화가 숲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요컨대 자연을 ‘정복’하고 그에 대한 소유 의식과 관련되어 활성화되었듯이, 표본 동물은 그 동물의 멸종에 가까운 상황을 의미한다. 굳이 자연에서 잘살고 있는 생물을 표본화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동안 자연에 저질러 온 죄 탓에, 동물이라는 소재는 대개 멜랑콜리의 기조를 깔고 간다. 하지만 작가가 몇 년 간 몰두해온 이 주제는 자연만큼이나 실재와 회화의 진지한 대화의 산물이다. 회화에 대한 자의식이 있지만, 추상화는 아니다. 대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무시한 회화적 실험은 무의미하다. 임희재에게 회화 어법의 실험은 대상과의 관련 속에 더 분명해진다. 지시 대상의 손쉬운 포기는 관념화 내지는 장식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 속 박제들은 장식의 역할도 했지만, 유행을 타는 장식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운명을 알려주는 기이한 지표가 되었다. 




Stuffed Antelopes, oil on canvas, 162.2 × 336.3cm, 2022(촬영;홍철기, 후원;서울문화재단, 이유진갤러리)



이 전시의 한 작품인 [pinned]는 새와 나비를 그린 것인데 이미지 또한 수집품과 유사한 기제를 따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원래 있던 곳에서 분리된 상태 뿐 아니라, 어떤 순간의 형태이든 고정된 것들은 우선 죽음을 말한다. 박물관 뿐 아니라, 동물원이나 수족관 속의 동물도 이미 죽어가는 것이다. 한순간을 핀으로 꽂은 듯이 고정시킨 사진의 메커니즘과 마찬가지다. 틀 안에 넣는 모든 행위는 대상을 죽이거나 죽은 대상인 것. 더 나아가 진열장에 놓인 모든 물건들, 즉 팔기 위해 내놓은 상품들 또한 누군가의 죽음의 산물이다.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만, 타자의 잉여가치가 착취된 이래, 그것은 누군가의 삶의 에너지를 소모한 결과다. 노동할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낄만큼 충만한 노동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현대사회는 노동이 아닌 소비를 통해 노동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하려 하지만, 그 또한 기만적이다. 시각적 소비자, 즉 구경꾼의 탄생은 상품생산이 일반화된 시대의 일이다. 


바네사 슈와르츠는 [구경꾼의 탄생]에서 지금의 스펙터클의 사회의 원형이 되는 근대 선정적인 대중출판물, 대중을 위한 무료 극장으로서 일상과 진부함이 충격적인 서사로 구체화되는 시체공시소, 영화의 기원을 보다 넓은 시각문화의 일부분으로 고찰하게 하는 밀랍 박물관, 그리고 1880년대와 90년대의 파노라마와 디오라마 열풍을 연구한다. 근대가 무르익은 19세기 후반의 대도시의 문화를 특징짓는 구경거리에 미술관이나 (자연사)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다. 임희재의 작품에서 그것이 소재 이상인 것은 일상의 문화 속 시각적 관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네사 슈와르츠는 이러한 구경거리의 예에서 재현의 한 방식으로서 사실주의를 보는데, 구경거리들은 사실주의가 참조하는 실제(the real)의 기준들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재현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효과에 불과하다. [구경꾼의 탄생]은 ‘문화는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침입하는 것’(미셀 드 세르토)임을 인용한다. 




Four Antelopes in the Cabinet, oil on canvas, 145.5 × 112.1cm, 2021



저자는 대도시의 일상이 된 보는 경험이 단순히 재현의 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과 사건으로 형성된다고 결론 내린다. 소외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소비자라고 생산자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다. 임희재가 선택한 자연사 박물관 속의 박제는 자연, 수집, 예술작품, 상품 등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시각적 관습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모두에 깔린 공통적인 것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다. 가상의 소유 또는 향유를 위해서 대상을 굳이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요컨대 실제를 죽일 필요가 없다. 예술은 나름대로 평화의 사도이다. 회화적 터치가 살아있는 임희재의 작품들은 하나의 대상으로도 무한히 다양한 변주 나올 수 있다. 물론 작가는 국내외 자연사 박물관 등을 수없이 방문하고 작가만의 리스트 또한 있지만, 그것들은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단서일 뿐이다. 작품 속 박제들은 최초의 출발이자 최종적인 산물과 관계된다. 


지시대상이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것은 우선 작가가 화가가 되기 전에 심미적 체험을 안겨주었던 도감이나 자연 수집물과 관계된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동물도감을 좋아했다. 살아있는 듯한 도감 속 이미지는 생명의 원형같이 다가왔다. 그것을 따라 어린 임희재는 곤충이나 식물들을 채집해 오기도 했지만, 실제보다는 이미지가 더 좋았다. 하지만 이미지는 실제와 달리 잡히지 않는다. 만질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이전 작품에서 광고 속의 자연물을 그렸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상적 이미지를 쥐고 싶었던 아이는 커서 화가가 되었지만, 회화 또한 끝없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이번 전시 작품들의 소재는 ‘허상 속에 살아있는 것’, 하지만 ‘상황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이 아닌 이미지에 집중하는 작가는 관찰자와 대상 사이에 있는 진열장의 유리를 의식하게 된다. 임희재의 작품은 박제라는 대상 보다는 진열장의 유리창에 맺힌 박제의 상들에 주목한다. 




Stuffed Antidae Family, oil on canvas, 116.8 × 80.3cm, 2022 



박제는 완전한 이미지와도 다른 사물의 속성을 띄고 있기에 회화적 게임은 훨씬 복잡해진다. 실제가 아닌 도감 속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는 점은 임희재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대목이다. 하지만 관찰자를 온통 몰입하게 하는 매혹하는 것의 실체는 모호하다. 모호한 것은 허구나 기만, 거짓으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다양한 양태를 가지기에 유희적이다. 니체가 진리보다 가상이 더 좋다고 말한 것은 그의 예술가적인 기질 때문일 것이다. 작품 속 박제들은 원래 묵직했을 것이지만, 임희재의 작품에서 연기처럼 가볍게 처리된다. 지시대상이 있지만 불분명하게 제시된 작품들은 진리와 가상의 관계를 묻는다. 원본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기획을 포기하면 가상, 즉 시뮬라크르의 유희가 시작될 수 있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이데아적인 원형을 중시했던 플라톤의 재현적 철학에 대항하여, 시뮬라크르는 퇴락한 복사물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재생산을 동시에 부정하는 긍정적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고 평가한다. 


들뢰즈는 시뮬라크르들의 효과를 환각(phantasme)이라고 본다. 들뢰즈는 ‘시뮬라크르들은 관찰자의 관점을 포함하는 구성물들이다. 그래서 관찰자가 존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환상이 생겨난다... 사실상 강조점이 두어지는 것은 비존재의 지위가 아니라 이 작은 간격, 실제 그림자의 이 작은 뒤틀림이다’(오두아르)는 분석을 인용한다. 이러한 환각을 통해서 ‘가장 깊숙이 은폐되었던 것이 가장 밝은 곳으로 올라오고, 생성의 모든 오래된 역설들이 새로운 청춘 속에서 모양새를 갖춘다.’고 말한다. 시뮬라크르는 재현주의와 대조항을 이루면서 깊이가 아닌 표면, 원본이 아닌 변이, 표상이 아닌 생성을 강조한다. 데이비드 서머스는 [현대 문학, 문화 비평 사전](조셉 칠더즈 외, 문학동네 출판사)의 ‘재현(representation)’ 항목에서, 들뢰즈를 따라 시뮬라크르의 환영(phantasia)적 속성을 강조한다. 데이비드 서머스가 해석한 바에 의하면, 시뮬라크르는 ‘의견을 형성하는 능력 이상의 것, 말하자면 부재하거나 불가능한 사물을 영혼의 빛으로 비추어 우리 자신에게 재현해 보이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능력’이다. 




Stuffed Bison, oil on canvas, 162.2 × 130.3cm, 2021



박제라는 소재는 수집가나 생물학자, 그리고 화가와 관람자 모두에게 자연을 인식하는 것의 문제와 닿아있다. 임희재는 그것을 화가의 방식으로 펼친다. 그동안 작가는 ‘회화 공간 간의 만남’을 다루는 [Cabinet] 시리즈, ‘얼굴과 시선의 만남’을 다루는 [Faces] 시리즈, 그리고 ‘전시 공간과 회화 공간의 만남’을 다루는 [Stuffed] 시리즈에 집중해왔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업인 [Stuffed]의 회화 작업들에는 [Cabinet], [Faces]. [Stuffed] 세 가지 시리즈의 초점을 모두 조금씩 녹여냈다. 작품 [Four Antelopes in the Cabinet]는 캐비닛 속의 영양들을 보여준다. 몇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수납장인데, 어느 층은 다리만 어느 층은 상반신만 보인다. 가운데 층은 온전히 보인다. 비슷한 크기와 형태라서 마치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정지된 매체인 회화가 동감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는 동물을 그리지만 애초의 모델이 박제인지라 결코 기운생동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흔적인지라 사물과도 다르다. 


글자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학명이 있는 명패를 달고 있는 이 존재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 어딘가에 자리한다. 글자가 보여도 뭔지 모를 오래된 언어로 붙여졌을 학명은 대상만큼이나 낯설테지만, 어쨌든 그것은 인간의 체계이다. 필립 블롬은 [수집,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에서 수집의 메커니즘을 사적인 것에서 공공적인 것으로 확장시키면서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공히 적용될 수 있는 체계를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미술관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하나의 체계와 교훈, 분류법을 배운다.’고 전한다. 이러한 시스템에 의하면 배치가 바로 유파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정작 자연은 체계화도 언어도 알지 못하며 의지와 목적을 가지지도 않는다. 작품 속 동물 앞에는 어떤 존재의 위치를 가리키는 명패가 있지만, 작가는 그것을 거의 지우다시피 한다. 존재와 이름은 서로에게 소원하다. 인간의 체계화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거기에 완전히 속해지지 않는다. 




Stuffed Chamois and Wild Sheep, oil on canvas, 130.3 × 193.9cm, 2021



자연사 박물관이 재현하려는 방식에서 조금씩 어긋나는 작가의 표현법은 대상들이 자신들만의 질서를 가진 듯 보이게 한다. 박제는 최대한 원래의 생물체에 가깝게 재현된 것이기에, 작가가 ‘사실주의’ 기법에 의해 박제를 그대로 재현했다면 어떤 관객은 이 그림을 보고 ‘저것은 영양이야’ 또는 ‘영양의 박제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대는 마그리트와 푸코가 문제 삼았던, 말과 사물의 간극이 무시되는 상황을 극복하려 했다. 현대의 언어는 대상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창이 아니라, 그 자체의 존재감을 가진다. 얇은 층들이 중첩되어 형태와 색채를 암시하는 임희재의 화법은 선적 묘사에 비해 불투명하다. 작가가 어릴 때 깊은 관심으로 바라보던 생물 도감의 재현양식과는 크게 다르다. 작가는 주어진 또는 선택한 대상을 자세히 묘사하는데 집중하지 않았다. 흐릿하게 처리한 방식은 오히려 박제의 정지된 느낌을 배제하고, 오히려 미묘한 생동감을 준다. 


부분적으로 푸르른 배경과 연결되어 영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작가만의 독특한 회화적 처리에 의한 부대 효과일 따름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캐비닛이라는 틀은 그것이 박제된 대상임을 잊지 않게 한다. 모든 것이 코드를 통해 환하게 까발려지는 시대, 고풍스러운 수납장은 그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미지의 영역같다. 하지만 그것은 화가의 시선을 통해서 개방되었고, 관객은 작품이 유도하는 방식에 의해 보여진 대상과 상호작용하게 된다. 투명한 언어가 구사되지 않았기에 대상은 관객 앞에 온전히 대령된 것이 아니다. 제일 아래 칸의 영양은 박제된 상이라는 맥락 때문인지 태어난 그대로(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창조된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박제를 제작한 이는 죽은 동물의 생동감을 위해 눈의 재현에 힘을 쏟는다. 살아있는 듯 까만 눈동자 이외의 부분은 대상과 배경의 경계가 모호하다. 




Stuffed Owl, oil on canvas, 72.7 × 72.7cm, 2022



경계의 불확실함은 그 생물이 죽음을 암시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배경과 구분되어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박제를 박제처럼 투명하게 재현함이 아니라, 회화적인 방식으로 죽어있는 대상을 표현한다. 두 번째 칸의 영양은 뒷다리 부분에 화살이 관통된 듯한 선이 보인다. 원래 박제상에는 없었을 사건의 순간이 연상된다. 박제든 그림이든 영양들이 살아있는 듯이 재현되었을수록 그것들의 죽음은 확실해진다.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경고는 역설적으로 더 생동감 있는 표현을 요구했다. 우리는 그것을 바로크 회화 거장들의 정물화에서 본다. 그러한 정물화의 후계자는 이후의 사실주의라기보다는 사진일 것이다. 사진 또한 이제는 부재한 것의 흔적을 담는 매체로 평가되어왔다. 수전 손택이나 롤랑 바르트가 주목했듯이 초상 사진 같은 장르에서 죽음의 기호가 내재한다. 하지만 임희재의 방식은 고전적이거나 사실적이기보다는 붓 터치가 강한 낭만주의풍이다. 


이러한 선택은 죽어있는 것을 살아있는 것처럼 꾸미는 감상주의나 기만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알레고리에 머물지 않고, 아예 죽음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 그다음의 게임을 시작한다. 작가는 부재의 확인이 아니라 부재의 흔적으로 유희한다.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고 경계를 흐리며, 대상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재현되는 여러 틀을 가시화한다. 인간의 자연 지배가 더 확실해질수록 자연과 (인간의)틀은 일체화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다른 생명체들과 우호적으로 공존할 수 없었다. 박제된 대상들 자체가 거의 멸종 위기종일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 멀어지는 만큼 인간적 질서는 더 자연을 완벽하게 체계화, 질서화하여 자기 앞에 도열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자연사 박물관의 원칙이다. 필립 블롬은 [수집,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에서 박물관의 원칙이 죽음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구가하는 것이라고 본다. 방부처리나 그림, 그리고 학문은 오래도록 살아남을 박물관 안에 현재를 재현함으로서 영원성을 획득하여 죽음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위안한다는 것이다. 




Stuffed Roseate Spoonbill , oil on canvas, 116.8 × 80.3cm, 2022



필립 블롬에 의하면 수집품은 유골과 마찬가지로 이미 한차례 죽었으나 믿는 자, 수집가, 신봉자의 마음속에 되살아난다. 수집가는 수집품을 통해 자기 생이 끝난 뒤에도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수집품은 죽음에 맞선 성채가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우리 안에서 수집욕을 키우고 불멸을 창조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수집품들은 우리를 머나먼 무언가와 이어주는 매개자로, 모든 수집물은 일종의 토템이라고 평가된다. 작가를 포함하여 우리는 그러한 재현 방식의 부당함이나 치졸함을 보지만,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천진무구한 자연이 남아있을 것인가. 캐비닛 속의 동물들은 현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예술은 문명에 의해 스스로 고갈될 때마다 자연을 찾고 거기에서 에너지를 얻고자 했지만, 예술이 자연이 아님은 분명하다. 임희재의 그림에서 캐비닛이 강조되는 이유다. 화가는 매개된 자연을 표현할 따름이다. 


캐비닛 속의 박제라는 상황의 설정은 자연환경에 근접하게 연출된 사파리나 동물원보다도 더 열악하며 전형적이다. 작품 [Stuffed Antelopes]에서 여러 종의 영양들이 한데 모여 있는 진열장은 자연에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보다 밀집되어 있다. 한눈에 보고 비교분석 하게끔 배열된 대상들은 그러한 시선에 의해 죽어서도 도구화되는 운명을 맞았다. 희생물들은 인간의 일방적 시선에 의해서만 기념비가 된다. 저편의 배경은 그 동물들이 살았다고 여겨진 터전이 그려져 있었을 것인데, 작가는 그것을 더욱 흐릿하게 처리했다. 대개 그러한 배경 그림은 조악하게 재현된 풍경들로, 그 앞의 박제보다도 더 꼴사나울 때가 많다. 만약 살아있는 영양이 그런 배경을 보기라도 한다면 전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가득 배열된 박제들이 있는 진열장의 틀은 화면의 틀과 겹쳐진다. 르네상스 이래로 액자의 틀은 바깥으로 뚫린 창과 일체화되었던 관습을 생각하면, 거의 실물대의 이 작품은 대상과 관객을 마주 보는 구도로 설정한다. 




Stuffed Scarlet Ibis, oil on canvas, 90.9 × 72.7cm, 2022



존 버거가 [보는 방법]에서 주장했듯이, 실제를 정밀하게 재현할 수 있는 그림, 특히 유화는 보이는 것을 담아두었던 ‘시각적 금고’로, 당시 상승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소유에 대한 의식을 반영했다. 재현된 것은 소유된 것이다. 또는 소유하기 위해서는 재현되어야 한다. 생산활동은 대개 재현적이다. 현대미술은 재현주의로부터 멀어지면서 소통이나 유통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재현은 앎을 통한 대상의 지배라는 이성의 기획과도 관련된다. 하지만 임희재는 가상적 소유보다는 상호작용을 원한다. 그림 속 지시대상들은 완전히 소유된 것이 아니라, 닿고 싶은 것들이다. 작가는 대상 그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보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따름이다. 작품 내용과 연관될 대상보다는 시각적 필터를 그린다. 작가는 대상 보다는 진열장의 유리면을 그린다고 말한다. 관찰자 또는 화가와 대상의 중간 지점인 것이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막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화가가 필수적인 만큼이나 대상도 필수적인 이유다. 캐비닛 안은 자연을 축소 재현한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의도적으로 원경과 근경 사이를 흐리게 표현한다. 고전주의를 거부한 인상파 화가들의 방식처럼 원근감은 배제되어 있다. 공간은 압착되어 있는 느낌이다. 작가는 이렇게 대상이 밀어붙여진 상황에서 인생도 본다. 점점 더 어떤 여지가 없어지는 세계는 겉보기만의 천국이다. 2021년의 개인전 [Inflatable Paradise](밤부 컬렉션) 부제는 압착 된 공간의 압박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나타낸다. 임희재의 주 매체인 유화는 원래 세부를 재현하는데 경쟁력 있지만, 작가는 유화를 맑게 사용한다. 물티슈로 닦아가며 덧입히는 층들은 얇은 층들이 많이 있는 화면을 낳는다. 작가가 의식하고 있는 유리면은 선이 아닌 면과 면의 관계로 공간을 펼치게 했다. 그림의 틀과 캐비닛의 틀을 일치시킨 것은 그림의 형식 자체네 내재된 관습을 건드린다. 




Stuffed Three Corvids, oil on canvas 145.5 × 97.0cm, , 2022



캐비닛 안의 대상들이 붓 터치가 남는 회화적 처리를 한 것과 비교해서 검은색 틀은 그 수직 수평이 명확해서, 그것이 유리가 끼워진 틀이라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자연에는 없는 직선은 비록 박제지만 자연적 대상이었던 것들과 확연하게 차이 짓는 장치 중의 하나이다. 주체와 객체가 서로 넘어올 수 없는, 즉 경계가 명확한 사유가 근대까지의 자연과학을 지배했고, 미술 또한 같은 패러다임을 공유했다. 살아있는 듯이 죽어있는 박제는 어떤 것이든 기괴할 수밖에 없는데, 작가는 주체와 대상을 구분 짓는다고 여겨지는 어떤 면을 강조함으로서 대상화가 자연스럽기 보다는 기괴하다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창밖 너머가 아니라 거울상이다. 대상들은 그것을 보는 주체들의 짝패인 셈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상화, 도구화 하기 전에 먼저 자연에게 그것을 행했다. 도구화된 시선은 자신 또한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식한다. 


지인들은 사슴들이 작가를 닮았다고 평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창과 거울을 넘나드는 화면 프레임의 시각 심리적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다. 작품 [Stuffed Bison]에서 단독으로 진열된 들소의 박제는 야생상태라면 그 앞의 사냥꾼을 위험에 빠트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네발이 좌대에 붙은 채 서 있다. 작가가 포착한 각도는 천정의 강한 조명 때문에 형태가 왜곡되어 보인다. 일련의 분류 체계에 의거하여 배열된 캐비닛 안의 야생동물은 모습은 인간의 자연 지배가 도구적 이성과도 밀접함을 알려준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사냥의 대상이자 제의적 희생물이기도 했고, 이제는 미트 팩토리 체계의 생산물이 된 동물은 희귀한 표본이 되어 한때의 역사를 증언한다. 표본까지는 못됐지만, 지구상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부족과 그 언어들 또한 마찬가지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회화 또한 멸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임희재의 작품은 다층적인 상징으로 울려 퍼진다. 






이유진 갤러리 전시전경



작품 [Stuffed chamois and wild sheep]에서 영양의 무리가 있는 캐비닛은 빛이 가득한 배경 이미지 덕에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연의 빛과 인공 빛이 중첩된 화면 속 영양 무리는 다양한 자세를 보여준다. 박제들의 외곽선은 분명치 않고 배경에 녹아든다. 이러한 경계의 와해는 죽음의 기호이기도 하다. 유기체는 자신의 경계를 풀어헤치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었어도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은 회화적 처리를 통해 돌려보낸다. 원시 사냥꾼의 주요 대상이었을 초식동물은 숭배와 관찰(사냥을 잘하기 위한 목적의)의 대상이 되어 그들의 어둑한 서식처인 동굴의 벽에 그려지곤 했다. 동굴의 벽면을 잘 활용하여 동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려 한 원시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도가 자연사 박물관을 비롯한 재현의 체계 속에 작동한다. 


임희재의 작품은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근대적 체계의 먼 시원을 연결한다. 뿔 달린 초식동물 그룹 외에 조류가 그려진 작품들은 원래 대상이 작은 만큼이나 작품도 작다. 작가가 주어진 소재를 등신대에 가깝게 그리기 때문이다. 작품 [Stuffed owl], [Stuffed Scarlet Ibis], [Stuffed Stilt] 밝은 배경의 부엉이를 비롯한 조류는 박제라는 느낌이 크지 않고 마치 좌대가 좌석인 양, 심지어는 둥지인 양 서 있다. 밝은 배경은 개체의 경계를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하기에 살아있음의 느낌을 더욱 강해진다. 대상의 덩치가 작아지면 살아있음과 죽음에 대한 기호는 좀 더 불확실해진다. 플라스틱이나 유리로 되었을 그것들의 눈망울은 소나 영양의 그것보다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까마귀 세 마리가 그려진 작품 [Stuffed Three Corvids]는 아직도 끝난 것은 아닌 ‘Co(r)vid’라는 단어의 유사성으로 인해 눈길을 끈다. 이 세계적인 감염병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 한켠에 엽기적인 식재료로 사용할 살아있는 동물들을 가득 몰아넣은 우리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유진 갤러리 전시전경



자연 상태에서는 결코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 없는 종들이 한데 몰려있음으로 인해 치명적인 변종 바이러스가 생긴 것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의 상상력을 배제한다면, 다양한 동물의 수집돼있는 캐비닛은 그것들이 죽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살아있는 상태라면 다양성의 향유나 과학적 탐구가 아니라, 수집된 동물에게는 지옥도 보는 이에게도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다. 전세계적인 감염병을 촉발시킨 상황이 우연적이고 극단적인 예일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압착시킨 세계화는 위험 또한 키운다. 풍요와 위험은 정확히 한 면의 다른 면이다. 연구 대상들은 이쪽으로 위험 상황이 전파되지 않을 안전한 유리막 뒤에 존재하며, 대상을 재현하는 그림의 틀 또한 그러한 기조를 유지한다. 임희재의 작품은 회화적이어서 투명한 창으로서의 회화를 부정하지만, 소재의 선택과 그리기의 방식을 통해 창이라는 패러다임이 가지는 철학적 의미를 다층적인 시각의 게임에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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