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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아 / 견고한 세상에 흠집 내기

이선영

견고한 세상에 흠집 내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오늘도 자신의 가장 행복한 모습을 담아 자랑하려는 사진들로 넘쳐나는 SNS 문화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동시대 젊은이인 김도아는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피 흘리는 모습을 작품화한다. 예술은 지배적 문화에서 감춰진 부분들이 또 다른 문화로 드러나는 장이다. 작품들은 찢기고 흘러내리고 불태워지고 줄에 매달리며 밀봉된다. 물감이 아니라 체액으로 그려진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다. 거기에는 세상과 부딪혀 닦달당한 만큼 스스로를 닦달한 흔적이 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이기도 할 민감함은 일상적 경험과 감정의 진폭을 더욱 크게 한다. 김도아의 작품은 저 멀리의 현실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시작한다. 다행히 예술은 자신의 이야기이면서도 자신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무엇이다. 태어난 성별은 여자이지만 현재 스스로 정의 내린 성별은 젠더퀴어이다. 성적 소수자에 젊은 작가라면 그자체로 타자적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겹쳐진다.

 


대체적 순간, 17.9×25.8cm 18 조각, 캔버스에 유화, 2022 



대체적 순간, 17.9×25.8cm 18 조각, 캔버스에 유화, 2022



대체적순간, 17.9×25.8cm 18 조각, 캔버스에 유화, 2022


타자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도 오지랖이 넓은 한국 사회에서 다름은 견뎌내고 돌파해야 할 문턱으로 다가온다. 다름은 정상과 규범에 동화되어야 할 이질성이나 퇴행으로 간주되곤 한다. 정상/이상의 가늠자에서 성은 중요한 지표다.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내기 전에 딸로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시되었던 현실부터 상처받은 삶을 시작했다, 페미니즘과 성 소수자와의 관계는 이론이나 사회문화 운동의 차원에서는 연결고리가 있지만, 김도아에게 그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탈피하고자 하던 질곡에는 여성 또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성화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비록 페미니즘의 일파가 ‘남성적’ 이성과 공격성을 자기화하여 모종의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말이다. ‘남성적’ 페미니즘은 니이체가 [선악을 넘어서]에서 말했듯이,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김도아에게는 독일에서 만난 운동권이나 잠깐 몸담았던 퀴어 운동 등의 경험에서 나온, 정치가 전면에 나서는 운동에 대한 회의감이 있다. 그래서 철저히 자신이라는 일신(一身)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작가는 성의 구분 자체를 거부하고 싶지만, 현실은 매 순간 타인의 성을 확인한다. 억압되거나 해방되는 성은 권력의 중요한 통로이자 장이기 때문이다. 김도아는 작품이라는 담론을 통해서 억압도 해방도 아닌 제 3의 길을 찾으려 한다. 소수자 철학자였던 미셀 푸코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출산율 저하로 아기 자체가 귀해진 시대에 그럴 때가 있었나 하겠지만, 아들 낳겠다고 줄줄이 딸을 낳았을 때가 있었다. 오죽하면 아들이 아니라고 성의 없이 지어준 원래 이름을 개명까지 했을까 싶다. 작가노트에 어린 시절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조부모와 부모가 모두 이름으로 호명된 점이 충격적이다. 김도아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기본적 관계부터 문제 삼고 있다. 



관계 유실01, 25.8×17.9cm, 트레싱지, 2022 



관계 유실02, 10×10cm, 트레싱지, 2022 



검은양 모험01, 190×40cm, 트레싱지에 매직, 2022 



프롤로그01, 29.7×42cm 10장, 트레이싱지에 매직, 2022



면역반응, 가변크기, 레진에 잉크, 2022 


김도아라는 이름은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자의식을 가진 이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의지를 가지고 개명한 것이며, 작가는 이를 제2의 탄생이라고 생각한다. 김OO가 아닌 김도아의 탄생은 자연과 우연이 아니라, 문화와 필연의 차원에 속한다. 최초의 탄생에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간’을 만들어줄 상징적 우주다. 사회화에 순응하는 누군가에게는 그 또한 자연스럽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김도아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그 시기이기에 제 2의 탄생은 과장이 아니다. 작품이 만들어지면서 정체성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주체가 있고 그다음에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동시적이거나 심지어 예술이 앞설 수 있다. 인간이나 주체 중심의 사유로부터 벗어나려 한 문화적 흐름은 주체와 객체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불확정적인 과정이나 되기를 중시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꾸며내는 분야가 아니라, 아픔이 동반되는 새로운 탄생에 대한 기념비다. 


기념비라고 해서 돌이나 청동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김도아의 작품들은 취약한 재료들이 많이 사용된다. 미술 재료비가 비싼 것도 한몫 하지만, 중요한 것은 표현하고 싶은 내용에 걸맞는 형식이어서다. 타고 남은 성냥개피도 활용하는 김도아의 작업은 재료에 부여된 의미 면에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 취약한 현실은 취약한 재료와 만나는 것이다. 현실의 취약성은 이중적이다. 젊은 작가로서 가난하다는 1차적 현실이 그렇지만, 작가가 생각하기에 현실은 그다지 합리적인 것도 합법적인 것도 아니다. 현실은 취약하면서도 단단한 현상으로 강요된다. 시인 랭보가 말했듯이 예술가에게 현실은 가혹하거나 권태롭다. 평범한 현실도 누구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멘토링 프로그램 와중에 작가가 들려준 학창 시절 몇 가지 에피소드는 충격적이다. 드로잉 수업을 받았을 때 남자 강사가 ‘여자는 성기에 털이 있으면 안돼’라고 말했다는 대목은 제3자가 들어도 황당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01, 가변크기, 알루미늄판, 2022



그럼에도불구하고02, 가변크기, 알루미늄판과 젤레진, 아크릴, 2022 



불이 꺼져도 재는 남는다01, 가변크기, 아크릴과 성냥, 2020



불이 꺼져도 재는 남는다02, 05분15초, 단채널 영상, 2020


21세기의 학생에게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성 관념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한 단체전에서 어떤 관객은 김도아의 드로잉에 대해 ‘여자 신체나? 남자 신체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이에 대해 ‘난 성별을 생각안한다’고 대답해서 부딪혔던 경험 등을 말한다. 이후 작가는 ‘견고한 세상에 흠집내기’가 목표가 되었다고 한다. 학교를 오래 다녔으며 거의 정규직장처럼 다녔던 생계 활동도 있었던 것에 비해, 30대 중반의 작가의 작업량이 상당하다는 것은 그 목표가 상당히 진지했음을 알려준다. 반감만으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공적 교육과정에서 기본 좌표는 설정된 것이다. ‘파괴’가 아닌 ‘흠집’은 다소간 소박하다. 하지만 흠집이 모이면 파괴가 된다. 그래서인지 김도아의 작품에서 구멍은 많이 발견된다. 지금도 진행 중인 최근 작업에서 화면은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그 구멍마저도 불규칙적이다. 경계를 흘러내리는 물감은 희열보다는 고통에 더 가깝다. 


하지만 고통도 완벽히 표현된다면 희열로 전화될 수 있다. 전공 선택에도 방황의 흔적이 있다. 처음에는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다가 회화과로 바꾸고 학교도 여러 군데 옮겨 다녔다. 물론 애니메이션 또한 훌륭한 예술로서의 가능성이 있지만, 산업적 생산의 일환으로만 간주된다면, 작가로서는 거부와 극복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은 김도아에게 모태 언어로서의 위상을 가지며, 요즘 작업에도 그 흔적을 남긴다. 추상적인 표현 와중에도 행동의 주체라 할만한 인물이 암시되며, 서사와 연결되는 행동의 연속이 있다. 물론 그 사이의 공간도 있다. 이곳은 단지 만화적 관습이 아니라 텍스트가 다시 짜여지는 빈 공간이다. 작품은 대개 시리즈 형식으로 제작된다. 다행히 예술은 누군가에겐 낭비된 세월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모든 시간들을 담아내면서 풍부해질 수 있다. 물론 그가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예술은 그러한 고난들을 이겨내게 할까. 



700년 동안 내가 해온 것01, 146×112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20-2021



700년 동안 내가 해온 것03, 146×112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20-2021



기억밟기01, 130×162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20,2022



스스로 장례 치르기01, 195×230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20


세상에 대한 모든 확신처럼 그 믿음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도 다른 분야보다는 예술이 치명적인 상처들을 찬란한 무늬로 만들어줄 가능성은 있다. 적어도 김도아의 작품은 그렇다. 18개의 작은 작품들로 이루어진 [대체적 순간](2022)은 한 칸씩 띄워서 설치되어 있다. 손과 어떤 찐득거리는 물질과의 관계가 표현되어 있다. 손은 그 무형의 것을 쥐려하기도 하고 그것으로부터 공격받는다. 서로 치덕대는 이 관계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욕망을 암시한다. 같은 형식으로 조금씩 다른 표현은 움직이는 느낌이다. 작가가 애니메이션의 어법에 친숙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유화와 파스텔로 표현된 분홍빛 얼룩진 손은 많은 상처로 가득하다. 일반 노동이든 예술 노동이든 노동과 무관한 고운 손이 아니다. 얼룩의 색상을 볼 때, 커피 바리스타로서의 오랜 노동 경험도 반영하는 듯하다. 인간에게 손의 위상을 생각할 때, 그것은 인간을 대변해서 인간과 구별되는 어떤 것과의 관계를 말한다. 


인간의 손은 직립을 통해 대지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자연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쟁취했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김도아의 작품에서 끈끈한 것들과 씨름 중인 손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관계 유실](2022) 시리즈는 [대체적 순간]의 캔버스 천을 트레이싱지로 바꾸면서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진다. 손과 손 아닌 것의 싸움에서 대립각을 이루던 주요 당사자는 빠지고 그 결과만 남았다. 찢어진 평면은 그 싸움이 매우 격렬했다는 것을 말한다. 작은 나무 왁구에 캔버스 천을 덮듯이 트레이싱지를 씌운 후 찢어낸 작품은 그림이라는 토대 또한 견고하지 않음을 말한다. 나무 액자 모양의 틀에다 찢은 트레이싱지가 덮인 작품 [관계 유실02](2022)는 액자라는 그림의 고색창연한 틀 또한 취약하게 표현된다. 뒤에 거울을 댄 작품 [불완전 증명01](2022)에서 대상을 반영 및 확장하는 기구인 거울, 그리고 거울의 역할을 수행해 왔던 그림의 투명성은 균열로 인해 불완전성이 강조된다. 



선 위의 염탐자01, 77×130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20-2021



블라인드, 125×82cm, 브래지어 와이어, 2019


트레이싱지는 다른 종이에 비해 찢어지는 느낌을 잘 살려주어 선택되었다. 트레이싱지에 그림을 그린 후 찢은 작품은 보다 구체적이다. 작품 [검은양 모험01](2022)에서 얼굴 표정은 잘 안보이지만 격렬한 행동이 찢어진 형태로 전달된다. 이미지가 얹혀졌을 때 감정의 진폭은 더욱 구체적이다. [프롤로그01](2022)은 10컷으로 이루어진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행위가 묘사된 종이는 뒤로 갈수록 많이 찢어지고 사람은 검은 얼룩으로 사라져 버린다. 김도아의 작품은 강렬한 분위기가 있지만,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메시지를 꽁꽁 싸매기도 한다. 미셀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소수의 성을 포함해서 성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기가 독려된 시대가 곧 성이 해방된 시대는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어느 시대보다 성이 범람하는 현대에 성이 해방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작가 또한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성을 말하기를 강요받는다. 


솔직함이나 그에 대한 과장은 상품화되어 소비되기 가장 좋은 항목이 아닌가. 마르크스나 푸코의 맥락에서 보자면, 성은 해방되었으되 상품으로만 해방되었을 따름이다. 김도아의 비밀스러운 작품들은 억압/해방의 이항 대립으로 성을 다루는 것을 피하려 한다.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02])(2022)는 세월호 희생자 추모에서 일반화되었고, 지금은 노동 현장에서의 메시지 전달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집단의 소원을 쓴 띠를 지지대에 묶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인터뷰나 기타의 방식으로 모은 일상적 메시지를 알루미늄 띠에 새겨서 줄에 널어놓는다. 바람결을 타고 세상에 말씀을 퍼트리는 티벳의 민속적 전통도 떠올리는 이 작품은 현대에 그 역할을 하는 인터넷도 활용하여 떠도는 말들을 수집했다. 연결되는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01](2022)는 메시지가 적힌 알루미늄 띠를 접어서 젤레진으로 봉인한다. 소수자들끼리 통하는 메시지를 포함해서, 대부분 익명의 공간을 순환하다 사라지는 침묵 당한 메시지다. 



+1 혹은 -1, 162.2×112.1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18



오른쪽, 왼쪽, 양쪽으로 모두, 162.2×112.1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18



임시방편01, 116×89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20


레진에 잉크로 만들어진 작품 [면역반응](2022)은 20년 넘게 살아온 특정 공간인 집, 어린 시절 작가를 괴롭혀왔던 습기 차서 곰팡이 얼룩진 형상으로부터 영감받은 것으로, 실제처럼 공간의 귀퉁이에 설치한다. 인류학이나 심리학에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경계 위의 존재는 오염, 즉 더러운 것(abject)으로 여겨진다. 특히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믿은 것이 다시 나타날 때 그 역겨움이나 공포는 극에 달한다. 함께 한 흔적을 상징하는 얼룩들은 탈출하고 싶었던 청년기의 한 공간을 넘어 영원히 따라다닐지 모른다. 최근의 트레이싱지 작업을 이러한 얼룩진 삶을 찢는 행위로 보이지만, 찢은 형태 또한 얼룩이다. 회화 작업은 색이 가미되어 더욱 격렬하고 표현적이다. 거기에도 만화처럼 주인공이 있다. 인물의 성은 모호하다. 하지만 자전적 성격이 강한 김도아의 작품에서 유추는 가능하다. 신체 기관 중 허벅지가 두드러진 것은 물질과 엉킨 실체가 몸이라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성을 불확실하게 하는 전략이다. 


가령 가슴이나 엉덩이, 종아리 등이 선택되었다면 성적 기표는 더욱 선명해졌을 것이다. 어두침침한 화면에서 생생하게 나타나는 탄탄한 허벅지는 그것이 암중모색 중인 젊은이라는 것만 알려준다. 작품 [700년 동안 내가 해온 것01](2020-2021)에서 상체를 휘감은 어떤 막은 주체의 의지에 의한 어떤 행동을 막아선다. 밝은 배경에 뚜렷한 선은 넘을 수 없는 경계로 나타난다. 좀 더 이전의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선이나 막의 형태는 개인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도 보인다. 김도아의 작품은 시리즈 형식이 아니더라도 이어지는 이야기를 상정한다. 작품 [기억 밟기01](2020,2022)는 비닐막같은 것을 뒤집어 쓴 사람이 보인다. 어두운 바닥은 이동의 좌표를 알 수 없게 하는 맹목적 상황이다. 몸에 줄줄 흘러내리는 액체는 많은 작품에서 공통적이다. 작품 [임시방편01](2020)도 행위의 추이를 암시하기는 마찬가지다. 투명막으로 싸인 머리 뒷모습과 앞모습이며, 흘러내리는 무엇인가를 밀봉하기는 역부족이다. 



가을과 겨울 사이 03, 145.5×112.1cm, 캔버스에유화, 2018



가을과 겨울 사이01, 145.5×112.1cm, 캔버스에유화, 2018



가을과 겨울 사이02, 145.5×112.1cm, 캔버스에유화, 2018


캔버스 두 개를 하나는 방향을 달리해서 붙인 작품 [스스로 장례 치르기01](2020)는 몸에 가득 들러붙은 장애물에는 넘지 못한 선이 포함된다. 작품 [선 위의 염탐자01](2020-2021)에서 다른 작품에서 막에 감싸인 채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경계선에 빨래처럼 걸려있어 있다. 이미 교수형 당한 것 같은 모습이다. 탄생은 죽음을 전제한다. 김도아는 개명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태운 성냥개비를 모아 놓은 작은 상자 위에 ‘김도아’라고 새겨진 작품은 이전의 나의 죽음을 통한 갱신은 가능했는가를 묻는다. 이전 이름은 딱 들어도 여성이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김OO가 같은 반에 3명이나 있었던 점도 상처였다. 그 이름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지칭하고 자신이 그 공간에 배제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전의 이름은 여전히 김도아의 잔여물로 남아 있다. 브래지어 와이어를 빼서 만든 [블라인드](2019)는 여성의 성적 매력을 돋보이기 위한 금속 보형물을 빼서 연결한 설치작품이다. 


성기가 감추어진 후 성기를 대신해서 여성의 성을 전시하는 부위가 유방이며, 이에 대한 물신적 환상은 아이 얼굴에 글래머 유방을 가진 대중적인 만화 캐릭터에서 흔히 발견된다. 김도아가 계속 그 분야에 종사했다면, 그러한 원형을 무한 재생산하는 산업에 복무해야 했을 것이다. 작품 속 여성의 가슴은 뒤의 그림자만큼 또는 거품 형태처럼 실체가 없으며 풍자적이다. 여성성을 과장하고 전시하는 이성애 중심의 문화에 대한 소수자의 관심이 나타난다. 작가는 2019년에 가슴 축소 수술을 했다. 유방 조직의 1300g을 제거하는 수술은 고통이자 쾌감이었고, 이 작업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고등학교 때 동성애자, 20대 초반에 양성애자를 거쳐서 20대 후반 이후 범성애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증오가 문제지 사랑은 문제가 아니다. 같은 성을 사랑하든 다른 성을 사랑하든 말이다. 2018년에 그려진 회화에도 구조와 인간의 관계가 드러나 있다. 




코너, 162.2×112.1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18



탈출하기, 162.2×112.1cm, 캔버스에 유화와 파스텔, 2018


어두운 배경 속 건축적 구조를 떠올리는 선들은 인간의 자리를 표시하지만 때로 감옥처럼 보인다. 뭉개진 인체와 선의 대조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구도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 [코너](2018)는 탈주를 위한 변신이 필요한 시점을 말한다. 관을 닮은 사각 프레임 속에 갇힌 사람이 있는 [탈출하기](2018)에서 사라진 머리통은 탈주를 위한 변신을 더 용이하게 할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해서 좌표를 설정할 수 없는 심연의 공간에서도 무성(無性)의 탱탱한 다리는 돋보인다. 방향 설정에 대한 고민은 [오른쪽, 왼쪽, 양쪽으로 모두], [+1 혹은 –1](2018)이라는 제목에 암시된다. [가을과 겨울 사이](2018) 연작에서 계절은 옷을 갈아입지만, 인간은 그만큼의 변신도 하지 못한다. 이후의 작품에 비해 비교적 분명하게 여성이 드러나 있지만, 자연에 묶여 있는 여성은 줄줄 녹아내린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색상은 표정 없이도 주체의 상황을 말해준다. 예술이라는 내밀한 언어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이의 총체적 난국을 표현하는데 적합해 보인다.


출전; 의정부미술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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