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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연 /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는 환상의 힘

이선영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는 환상의 힘

 

이선영(미술평론가)


쓰나미가 밀려들어오는 현실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사람을 삼켜버린다. 코로나시기를 거치면서 작가 경지연도 그러한 진흙탕 현실과 마주하곤 했다. 엄살이라고 하기에는 20년을 넘게 겸직하는 작가이자 생활인으로서의 무게는 크다. 경지연의 환상은 자신이 직면한 삶의 무게로부터 출발한다. 지글거리고 꿈틀거리는 듯한 형상들은 현실을 초월하고픈 욕망이 발현된 것이다. 현실의 중력이 클수록 반발력도 크다. 경지연은 씨름 선수처럼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다. 자신을 압박하는 만큼 밀어낸다. 현대사회의 위기가 상시화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엄혹한 현실에 직면하며, 한줄기 환상을 필요로 한다. 대중문화는 그러한 욕망에 부응하는 상품개발에 골몰한다. 소비의 욕망이 좀처럼 만족될 수 없음은 작업의 과정과도 유사하다. 환상 그 자체, 현실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양자 간의 관계, 즉 부스러지기 쉬운 환상에 응집력을 부여하는 것, 강고한 현실을 누수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shapeshifter2101-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130x162cm,2021,



환상은 작가가 받고 있는 현실적 압박을 전제하지만, 한갓된 현상의 동어반복은 아니다. 작가는 현상 자체를 떠 있게 하는 근본적인 실재에 접근하고자 한다. ‘실재는 불가능에 가깝다’(라깡)고 생각되지만, 작가는 그러한 실재를 가시화하는 것이 목표다. 작가는 압도하는 현실의 급류 속에서 겨우 붙잡은 작품이라는 작은 쪽배를 타고 표류한다. 때로 미지의 지도에 있는 별천지도 가보고 때로 괴물도 만난다. 2014년 [제자리에서 떠나는 상상의 유목] 전에서의 ‘여행’은 이번 전시에서 추상화되었다. 전시장에 걸린 28점의 작품들은 대부분 비정형적 형상들로 가득한 추상회화다. 가고 싶었던 특정 장소는 이제 세포부터 우주까지. 몸에서 마음까지 다차원적으로 확장된다. 지금 여기를 벗어나는 진정한 수단은 실제의 여행은 아니다. 경지연은 자신이 맞닥뜨린 일상의 시시콜콜함을 재현하지 않는 대신, 작업하는 삶을 배반하는 일상에 대응하는 자세를 표출한다. 재현이란 가다가 굳어버린 것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작가는 생성의 과정 그 자체를 표현하고자 하며, 그 과정은 모든 고정된 것을 파괴한다. 파괴를 위한 파괴는 아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파괴, 즉 변신의 운동이다. 경지연의 작품은 어떤 형태와 색채로 자라나거나 사라질지 모를 원초적 형상들로 부글거린다. 회화라는 형식을 취하기에 정지되어 있지만, 여러 과정이 한 화면에 담겼기에 거기에는 잠재적 움직임이 존재한다. 정지된 매체의 한계를 벗어나 무엇인가 들어오고 소화되고 나가는 장의 연동 운동처럼 꿈틀댄다. 나비나 도롱뇽부터 나무숲과 용암, 더 나아가 우주의 풍경까지를 관통하는 나선형 운동이다.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면서 조금씩 확장되는 나선형은 성장과 진보를 상징해왔다. 이러한 나선형 구조를 이용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타틀린의 [제 3 인터네셔널 기념비]를 위한 모형일 것이다. 본래 자연에는 움직임이 있다. 경지연의 작품은 자연을 운동으로 보는 사고가 깔려 있다. 그것은 순환론과 더불어 고대적인 뿌리를 가진 사상이다. 




shapeshifter2103-asrylic on canvas, mixed medium on canvas,45.5x53cm, 2021



shapeshifter2104-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130x162cm,2021



콜링우드는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그리스의 자연학은 ‘자연세계에는 정신(mind)이 충만하다’는 원리에 기초한다고 하면서, 그리스 사상가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정신이 자연세계의 규칙이나 질서의 바탕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콜링우드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에게 운동은 생명력 또는 영혼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자연 세계는 스스로 운동하는 사물들의 세계였다. 자연 그자체가 과정이고 성장이며 변화이다. 거기에는 ‘만물은 끝없이 흐른다’(루크레티우스)는 오래된 지혜가 있다. 경지연은 이러한 변화를 나선형 및 그 변형 구조로 표현한다. 휘몰아치는 선들은 모든 구조를 파괴하기에 구조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이지만, 반복되는 표현방식에 의한 시각적 유사성은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선의 시점과 종점은 불명확하다. 이미 변모는 시작되었고 어떤 것은 서서히, 어떤 것은 가속도를 낸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든 운동은 주름진 형태로부터 발생한다. 


모든 생명의 탄생이 배(胚) 발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없이 주름지듯 말이다. 탄생 이후의 삶 또한 수많은 펼침과 접힘의 연속인 그 주름은 경지연의 작품 모든 곳에 접혀있다. 주름은 깊이보다는 중층적인 표면과 조응한다. 질 들뢰즈는 [주름-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점에서 점으로가 아니라,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강조한다. ‘변형은 소용돌이처럼 되어간다. 소용돌이는 단독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으며, 새로운 소용돌이들이 항상 앞선 소용돌이들 사이로 끼어든다.’(들뢰즈) 이번 전시 [모습을 바꾸는 존재들]에서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은 변신에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시연되고 때로 충족되는 장이다. 작가는 굳이 무엇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살아있음 자체가 욕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작업은 살아있음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번 전시의 작업 기간이 코로나 시기와 겹친다는 점은 작가이자 생활인으로서 압박이 가중되었음을 말한다. 




axolotl-acrylic on canvas, mixed medium on canvas,90.9x72.7cm, 2022



그러한 현실과 대응하는 작가의 의지는 강고해서, 2020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불발된 전시를 대신해 전시장 옆에 텐트를 치고 전시를 한 적이 있었고, 2021년에는 작업실 겸 교습소에서 [숨은 괴물 찾기]라는 부제로 전시를 강행하기도 했다. 작업실이라는 존재는 작가의 일부라는 점에서 자기 안에 숨은 괴물이 있다는 것, 그리고 찾아낸 괴물이 바로 작품이라는 것도 말한다. 수없이 변이를 낳고 있는 바이러스라는 괴물이 멈춘 일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속시킨 것이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전적으로 작업에만 몰입할 수 없는 환경이 초월에의 의지를 더욱 부추겼다. 하지만 경지연의 작품이 침울하지는 않다. 자극적이거나 엽기적이지도 않다. 괴물 적 현실에 대응하는 괴물 적 방식이라는 최초의 동인과 별개로, 튀는 색감이나 변화무쌍한 동감이라는 형식적 장치는 생기 가득한 작품을 낳았다. 무엇으로 변모할지 모를 기이하게 휘몰아치는 선은 2002년 첫 개인전 작품 이래 지속적이다. 


자신에게 솔직한 작품을 해왔던 작가의 예술적 유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작가는 ‘나의 무의식에는 꿈틀대는 선이 있다’고 자평한다. 이번 전시에서 뿌리를 드러낸 나무로부터 출발한 작품군은 작가의 반영, 즉 자화상과 다름없다. 특히 작가가 여성의 심리를 다룬 책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클라리사 에스테스)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여성의 에너지로 특화시키는 부분은 흥미롭다. 작업에 몰입할 때 분출되는 자신의 야성적 에너지에 어떤 성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이때 여성은 남성에 대응하는 반쪽이 아니라, 양자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라는 점에서 괴물 적이다. 신화에서 괴물의 목을 치는 기사는 늘 남성이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날것/요리된 것의 대조를 응용하자면, 칼로 잘려진다는 것은 야성을 문명으로 길들인다는 말이다. 하지만 경지연의 작품 속 출렁이는 선들은 끊기는 법이 없다. 캔버스 틀만이 출렁이는 선들을 한정짓지만, 시리즈로 제작되어 죽 연결되는 작품도 있다. 




vanessa2201-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130x162cm,2022



vanessa2202--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97x130.3cm,2022



vanessa2203-acrylic on canvas, mixed medium on vanvas,60.6x72.7cm, 2022



괴물과 싸우는 남성적 상상력에는 상대 성(性)인 여성이 겹쳐진다. 남성이 제어하고 굴복시켜야 하는 괴물은 다름 아닌 여성이다. 물론 그것은 특정 남성/여성의 대결이 아니라 가부장적 지배 질서가 예술적인 것과 충돌하는 부분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괴물은? 그것은 자기 안의 타자이다. 타자는 작가가 유념하고 있는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Wild Woman(와일드 우먼)’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2002년 첫 개인전 이후 이번이 13회의 개인전을 달려오면서, 자신이 반복적으로 회귀해야 할 ‘마음의 고향’(클라리사 에스테스)은 바로 작업임을 자각한다. 예술은 여분의 장식이 아니라, 자신에 똬리를 튼 그 에너지를 끄집어내야만 하는 근원적 현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이나 욕망이라고 달리 부를 수 있는 그 에너지는 깊이의 모델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유동적인 표면의 모델에서 발생한다. 2000년대 초반의 작품에서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조가 출렁이는 선과 함께 등장한 바 있다. 


라깡이나 여성주의 철학자들이 주목하듯, ‘여성의 몸과 마음이 뫼비우스 띠의 모델’(엘리자베스 그로츠)을 가지고 있으며, 순환하는 세계라는 동양적 사고 또한 여성과 친숙하다. 자신의 현실로부터 시작된 작업에서 괴물은 동고동락해야 하는 자기 안의 타자이다. 이 타자는 ‘과정 중의 주체’(줄리아 크리스테바)이기도 하다. 과정 중의 주체는 언어로 분절화 되기 이전 모태에서의 율동을 기억하는 어법을 가진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모태에 존재했던 경험이 있던 만큼, 이 원초적 언어를 여성만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여성이 늘 문명보다는 자연과 가까웠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는 있다. 자기 안의 타자와 대화하는 경지연의 작품에는 자화상적인 면이 있다. 강원도 산길에서 우연히 본 강원도 산길에서 토사가 흘러내려 뿌리가 드러난 나무는 [shapeshifter] 시리즈의 출발이 되었다. 존재의 뿌리는 다 드러나 있지만 나무는 여전히 지상에 버티고 있었다. 




마술적생각2201-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 97x130.3cm,2022



블루스2201-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130x162cm,2022



드러난 뿌리들은 식물임에도 동물적 에너지가 가득해서 계속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그것은 엉키고 꼬인 현실이나 그 현실의 한 줌에 뿌리내리려는 자신의 모습과 닮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경쾌하게 달리고 있는 듯도 하다. 누군가는 탈주, 또는 유목이라고 할 만한 정처 없는 움직임이다. 착종(錯綜)된 현실은 오히려 위태로운 존재를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하는 역설적 기능도 한다. 오비드의 [변신 Metamorphoses] 이래, 나무는 고전적인 변신의 소재가 되었지만 경지연에게 변신은 저 멀리에 있는 신화 보다는 일상과 밀착된 길항 관계 속에 존재한다. 참고한 이미지는 존재하지만 거듭된 변형의 과정을 거쳐 추상화된다. 최초에 이 전시를 가능하게 했던 뿌리를 드러낸 나무숲과 관련된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정형적이다. 작품 제목에 출발이 되었을 곤충이나 동물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지만, 변모는 작업 중에도 수시로 발생한다. 최종 기착지는 작가도 모른다. 


가령 ‘큰 멋쟁이 나비’의 경우, 관객은 작품 속에서 나비를 발견할 수는 없다. 다만 나비 그자체가 변태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나비의 변태에서 초월을 본다. 나비는 지상적 삶의 중력에서 탈피하는 존재로 비춰진다. 그러나 경지연의 작품은 재현이 아니듯, 추상화도 아니다. 추상을 향한 여정, 반대로 잠재성에서 현실성을 향한 과정일 수는 있다. 작품은 명확한 지도가 아니라 대략의 구상으로 출발한다. 불확실 이라기보다는 불확정적이다. [모습을 바꾸는 존재들]이라는 전시 부제는 괴물을 연상시키지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어떤 괴물도 경지연의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상상 동물 이야기]에서 키메라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일리아스]에서 찾아낸다. ‘이것은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앞부분을 사자를 닮았고, 중간 부분은 암 산양을 닮았으며, 마지막 부분은 뱀을 닮았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차이들의 뒤섞임이다.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2101--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 53x45.5cm,2021



불꽃2201-acrylic on canvas, mixed medium on canvas,53x45.5cm, 2021



그것은 인간, 동물, 물질, 우주의 다양한 범주에서 빌려온 단편들과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르헤스적인 의미의 괴물은 이질성이라는 특징만 공유한다. 하지만 기이함의 살아있는 사전, 또는 어휘집이라고 할 만한 자연이나 우주의 모습은 지속적인 탐구 대상이다. [shapeshifter] 시리즈는 나무뿌리가 얼기설기 꼬여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표면은 여러 동식물에서 온 것이다.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를 줄기들은 변색 동물처럼 수시로 존재를 변화시킨다. 작품 [shapeshifter 2102]는 비늘 또는 꽃잎 같은, 동물인지 식물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괴물은 변모하는 모습이며, 어두운 배경 속에서 더욱 빛난다. 작품 [shapeshifter2103]에서 작가는 나무보다는 그 아래의 뿌리에 더 관심을 가짐을 보여준다. 얽히고설킨 뿌리는 종적인 축보다는 횡적인 축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뿌리줄기와 가깝다. [shapeshifter2101]에서 뿌리줄기로 추정되는 관의 흐름은 경쾌하다.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인 식물은 공간적 확장을 통해 잠재적 움직임을 실행한다. [shapeshifter2104]는 화면 상/하단의 색상의 대조로 숲이라는 느낌을 남겨놓는다. 나무들은 질기거나 유연한 섬유질 조직으로 빛을 향한 움직임과 대지를 향한 움직임을 동시에 보여준다. 큰멋쟁이나비(vanessa)라는 제목은 변태하는 나비로부터 받은 영감을 반영한다.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색의 물결과 눈에 확 띄는 색상에 대한 선호가 잘 나타난 시리즈다. 작품 [Axolotl]은 멕시코산 도롱뇽의 일종을 소재로 했지만, 특정 동물의 외관이 아니라 동물의 외부, 또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표현이다. [픽토어의 변신] 시리즈는 복잡하게 얽힌 줄기들은 보는 이의 상상에 따라 다양한 움직임을 연상하게 한다. 서로 얽힌 줄기들 위의 점점이 찍힌 얼룩들이나 형태 바깥으로 튕겨져 나온 듯한 선들은 움직임, 즉 변신에 속도감을 준다. 




픽토어의 변신2201-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 90.9x72.7cm,2022



픽토어의변신2202-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 90.9x72.7cm,2022



추상적인 가운데 암시된 전/후경의 원근감은 변신이 여러 층에 걸쳐 중층적으로 발생함을 알려준다. [픽토어의 변신 2205]에서 구별되는 색감을 빼곡히 채우는 가는 선들은 변화의 과정을 더 정교하게 표현한다. 작품 [Pond]에서 가운데에 액체 적 형상이 자리한 연못은 부글거리는 생명의 열기로 가득하다. 무엇인가 발생하고 또 되돌아가는 원초적인 장소 같은 모습이다. 작품 [불꽃] 시리즈는 여러 개의 패널로 이어서 설치할 수 있으며, 화산폭발 후 흘러내린 용암의 굳는 표면에서 영감을 얻었다. 폭발 이후의 물질은 분배된 에너지 패턴을 표면에 그대로 각인하면서 불, 꽃, 또는 불꽃으로 변신한다. 유기체가 사는 과정 자체가 연소의 일종으로, 입력과 출력 사이의 수많은 변형의 단계를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 투입되는 에너지나 발산되는 에너지 또한 복잡한 형상들에 포함된다. 물질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상상은 우주로까지 뻗어난다. 


경지연이 어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휘몰아치는 선은 우주적 소용돌이를 표현하는데도 적합하다. 작품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받은 영감에서 비롯되며, 붉은 행성인 화성은 욕망을 표현한다. 욕망은 전쟁을 부르기에 화성은 전쟁의 신으로 비유된다. 기체로 이루어진 목성의 대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은 대기의 소용돌이의 표현에서 인간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음을 말한다. 경지연의 작품은 영원의 상징이었던 별도 탄생하고 성장하고 죽었다가 그 잔해들은 다시 또 다른 탄생을 준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실증주의로 대변되는 고정된 세계관을 거부하는 혼돈의 과학을 지지한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세계의 형성은 끊임이 없으며, 따라서 연속적인 형성이다. 그는 최초의 불타는 성운에서 생겨난 세계의 체계가 냉각되고 굳어진 것이 우주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행성은 견실한 핵 위에 바다의 옷과 기체성의 외투를 걸치고 있다면서 행성의 역사를 요약한다. 




픽토어의변신2203-acrylic on canvas,mixed medium on canvas, 90.9x72.7cm,2022



미셀 세르는 여기에서 일반 물체의 형성법칙을 추출한다. 그것은 사물들의 형성처럼 인류의 역사도 물렁물렁한 것에서 견고한 것으로, 끈적끈적한 것에서 단단한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경지연에게 변신은 연속적인 발생을 말한다. 여기에서 소용돌이 구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셀 세르는 소용돌이 구조가 율동적이면서 지향성을 띤다고 본다. 소용돌이는 원형으로 돌면서 달아난다. 미셀 세르는 ‘이 근본적인 소용돌이가 없다면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형성되지 않는다’ 고 말하면서, ‘어떻게 우연에서 필연이 나타나는가. 어떻게 카오스에서, 다수들의 안개에서 어떤 역사와 시간이 도래 하는가’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혼돈의 이론’으로 보자면 경지연의 작품 역시 굳어지기 이전 발생기의 신선함에 주목한다. 혼돈과 발생은 뫼비우스 띠와도 같은 구조에서 서로의 이면이 된다. 경지연의 작품에서 변신은 무엇으로의 변신이 아니라, 무엇으로나의 변신을 말한다. 


[블루스] 시리즈에서 얇거나 깊게 패인 주름은 영속하는 것은 형태가 아닌 변화 그 자체라는 것을 암시한다. [모습을 바꾸는 존재들]은 끝없는 변화에 붙여진 제목이다. 변화는 좋은 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면, 가령 부패, 노화, 쇠퇴, 소멸, 죽음 등도 있기에 우울함을 줄 수 있다. 한 작품에도 잠재적 변화가 있고 시리즈 작품들은 인접해서 걸어놓을 때 변화는 횡적으로도 이어진다. 작품 [마술적 생각] 시리즈는 작업 초창기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마술적 리얼리즘(앞서 인용된 보르헤스가 여기에 속한다)을 떠올리는 제목으로. 변신이 곧 마술임을 말한다. 또한 생명과 물질의 과정과 사고의 과정의 유사성을 지목한다. 생각의 거처인 뇌 자체가 복잡한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성과 소멸에 대한 유기적 무기적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유 또한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서로 다른 차원이 유연하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접힘과 펼침의 메카니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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