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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산책자

이선영

꿈꾸는 산책자

 

이선영(미술평론가)

  


부스러기로 만들어진 대안적 세계


미술계의 허리 세대에 속하는 40대(60년대 후반부터 70대 중반 태생) 작가 9명(김기라, 권오상, 정재호, 유승호, 이동욱, 이정배 ,이진주, 최수앙, 홍경택)이 참여한 ‘기적과 잠꾸러기(The Miracle and the Sleeper)' 전은 단편성을 내용과 형식으로 취한다. 기획자는 이들의 작품에서 ‘유행의 미묘하고 점진적인 변화들, 쉽게 사라지고 변화하는 것들, 우연적이고 우발적이며 부조화한 것들, 부서지기 쉽고, 덧없는 찰나의 순간들, 일상의 눈을 벗어난 것들과 시간들을 발견하는 기적의 순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우연성과 영원성으로 근대시대를 바라본 보들레르적 사고의 한 축을 빌리지만, 21세기에 맞게 해석된다. 우연성의 몫은 더욱 커졌다. 근대든 현대든 작품은 우연적 단편을 담은 영원이다. 단편에 집중하기에 오히려 작품형식은 견고하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 견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각 작가에게 선택된 단편들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어지며 색다른 형식과 서사를 향한다. 



권오상, Relief 2, 2016, Print on wood, 101x227x6cm



정재호, 불을 쥔 아이 Boy holding fire in his hand, 한지에 아크릴, 80x120cm, 2018


꿈과 무의식, 환상이 담긴 단편들은 개인적 이야기부터 현대 문명에 대한 비평에 이른다. 단편으로서의 예술작품은 현실을 비현실화하거나 비현실을 현실화한다. 단편을 현실 사이를 평행 이동하는 동어반복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위한 작은, 그렇지만 결정적 도약대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 지배적인 문화인 대중문화 또한 단편적이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가령 좋은 것을 조금씩 다 갖추려는 키치적 사물은 독특한 단편이 아니라, 세트화된 단편들로 결국 획일적 양상을 보인다. 마치 여러 지역의 과일이 두루 담겨있는 통조림처럼 말이다. 특히 이 전시에서 꿈과 산책의 공통점을 짚은 것은 현실과 환상의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산책과 잠은 시간의 축을 따라 전개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그 시간은 세계 공통의 시간으로서의 24시가 아니다. 근대의 한가운데에 있던 시인 보들레르의 비전처럼, 찰라의 순간도 영원이 될 수 있고, 영원은 순간적으로만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 우리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꿈의 재료는 현실이다. 


꿈과 현실은 단지 배치의 형식이 현실과 다를 뿐이다. 꿈과 현실은 상보적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잠을 자는 것은 우리에게 낮을 보장해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자지 않는 사람은 깨어있을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의식이 깨어있음은 항상 깨어있을 수 없다는 사실로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잠은 행동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행동하기를 그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과 행동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 반대편에 있는 잠과 꿈의 세계라는 점에서 예술은 실용적인 것만을 원하는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꿈 속의 사물같은 변화무쌍함을 원한다. 알베르 베갱은 [낭만적 영혼과 꿈]에서 꿈과 예술적 창조의 비교는 낭만주의의 변함없는 주제 중 하나라고 평가하면서, 꿈꾸는 자를 예술가와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꿈은 사람들이 은신처로 삼으려 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알베르 베겡은 삶은 붙잡을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며 가장 쾌적한 순간들은 깨어있는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꿈의 연속인 순간들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드림 시어터(Dream Theater)의 음악에서 취한 것으로, ‘기적’이나 ‘잠꾸러기’는 부유하는 비/현실의 우연성을 전제한다. 현실은 중력의 무게를 가지는 만큼이나 그로부터 벗어난다. 이때 현실은 날개를 장착한다. 현실 또한 환상에 기댄다. 만들기보다 팔기가 더 어려워진 소비사회에서 상품에 존재하는 환상의 몫이 클수록 부가가치는 높아지기 때문이다.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닐며 자본주의의 요술환등(Phantasmagoria)을 본 벤야민의 도시산책자와 꿈을 꾸는 자는 공통점이 있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에서 19세기의 수도 파리는 발터 벤야민에게 과거와 현재의 꿈이 교차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상점이 길게 늘어선 파사주(아케이드)와 세계 박람회(1867)가 대표적이다. 벤야민은 거기에서 ‘자본주의적 문화의 판타스고마리아’를 본다. 그램 질로크는 최신 상품으로 가득 찬 근대도시 파리가 ‘시민들을 자연의 불쾌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거대란 유리로 에워쌀지도 모를 유리의 도시’라고 묘사한다. 



김기라, 20세기 #02 영웅들_괴물 83.5 x 63.5cm(each)2017 Total 33pieces



이정배, 진초록, 레진 우레탄 페인트,68.5x49.3x(h)3.2,2020


19세기 도시에 대한 비전이지만 21세기에도 해당되지 않는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 의하면 벤야민에게 파사주는 도시이자 꿈꾸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벤야민의 관찰에 의하면 ‘건물과 보도로 이루어진 파사주에는 외부가 없다. 마치 꿈처럼’. ‘파사주는 상품 자본주의의 신전이다’(벤야민) 오늘날에도 도시는 상품숭배가 일어나는 신성한 장소다. 물론 벤야민의 도시연구는 현대 대도시가 신화에 의해 지배받는 장소라는 것을 비판적으로 폭로한다. 또한 벤야민의 연구는 도시가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적 중심이자 자본주의가 배태하는 착취, 불공평, 소외, 인간 경험의 축소와 같은 필연적 악의 표상이라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근대도시의 명과 암을 분석하는 벤야민의 방식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거대 도시를 접근하는데 있어 단편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의 파사주 프로젝트가 ‘단편들을 통합하려 하지 않고 보다 정교하게 만들 것’이라고 본다. 


그램 질로크는 ‘파사젠베르크는 현대성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어휘집이며, 도시 경험의 구체적 이미지 모음’(벅 모스)이라는 평가를 인용한다. 벤야민은 ‘명확한 목표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기적을 끊임없이 기대하면서 단편을 쉬지 않고 쌓아 올리는 바로크 문학의 관습’을 활용한다. 벤야민은 ‘나는 거대한 단편 중 단지 작은 부분만을, 전체에 대한 열쇠를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탐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구경꾼처럼 무심히 스쳐가는 도시 현실이 근현대예술의 광맥이 된다. 일반인에게 40대는 저무는 느낌이 강한--한 통계는 가장 오래 있었던 직장을 그만두는 평균 연령이 49세라고 한다--‘중년’이지만, 미술계에서는 젊은 작가에 속한다. 20-30대에 다양한 학습과 모색을 거쳐 자기 스타일로 속도를 내는 시기다. 기획자는 참여작가들이 ‘생산성 높은 개도국의 부모 세대에게 태어난 시대상을 지니고 있다’고 밝힌다. 외국인들도 한강의 기적이나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높이 평가하곤 한다.

 

우리에게 근대성은 좀 더 압축적이었고, 그렇기에 기적이자 폭력이었다. 일신우일신하는 현실은 도시의 산책자, 요즘 말로는 유목민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들에게 예술은 예술 그자체보다는 현실에서 끌어내진다. 작가로도 참여한 기획자 김기라와 동년배들은 젊은 시절의 결기를 끝까지 밀어붙여 다른 어떤 직책과 관련된 정체성이 아닌 현대미술 작가로서 인정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화단에 이미 이름을 알린 이들에게서 왜 아직도 단편성이 중요한가. 사회가 작가, 특히 작가적인 작가에게는 아직도 큰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작은 기회를 크게 활용해야 하는 예술가다. 1970-80년대 만 해도 대학이나 그 이상의 학벌을 갖춘 이들이 ‘지식인적’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반면, 이들이 청년기를 보냈을 90년대나 그 이후에 사회의 시스템은 예술 또한 지배적 시스템에 점차 더 귀속시켜 나갔다. 이들 또한 예술에 우호적이지 않은 사회의 시스템에 냉소적이거나 저항적이다.



이진주, 들을 수 없는_210x121cm_광목에 채색_2019

유승호, 무지개 Rainbow, 226x143cm, gold leaf, ink on paper, 2017


하지만 이전 세대의 전위적 의식을 가지기에는 사회가 더 분화되고, 총체나 전체에 대한 비전 또한 예술가가 아닌 정치가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작가에게는 틈새 전략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지배적 문화 속에서 현대미술이 처한 주변적 위치와도 맞는다. 지배적 시스템이 식민화하지 못한 작은 균열과 틈새를 벌려 만든 해방구에서 그 시스템의 변화를 시도한다. 물론 이 해방구는 물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작은 기회는 꿈과 우연마저도 ‘필연적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예술은 꿈과 현실 양자에 걸쳐있으며, 이 둘의 상호관계는 예술작품의 몸통을 이룬다. 예술은 지배적 시스템이 비현실로 간주하는 부분의 몫을 키운다. 하지만 사소함, 파편성 등으로 비판받는 이 경향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현대사회 자체가 파편적인데, 그 대안이 되어야 할 예술도 지엽말단에 함몰되면 되겠나 하는 질책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이 단편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어도 결과물이 단편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단편은 미리 세워진 질서에 퍼즐처럼 맞춰지는 부분이 아니다. 


모리스 블랑쇼는 [끝없는 대화]에서 파편의 위상에 대해 말한다 ; ‘파편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는 실재의 파편화나, 또 지금의 파편들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룰 미래의 순간에 대해서만 말하면 안된다....파편이 행사하는 폭력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관계를 가지게 된다...근원적인(그러나 잊혀진) 전체성, 혹은 앞으로 귀결된 전체성에 의존하지 않는 파편들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사유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현대미술가에게 미리 세워진 질서는 없다. 원형이나 전형을 재현하는 것은 이들의 몫이 아니다. 이들에게 단편은 그저 전체의 일부인 파편이 아니라, 전체가 반복 압축되어 있으며, 축소된 차원 덕분에 전복에 대한 시뮬레이션은 수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이 단편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예술작품이다. 파편성은 문예사조사에서도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파편성의 반대편에 총체성이 있다. 총체성은 고전주의나 리얼리즘의 모토였으며, 모더니즘을 비롯한 현대예술이 파편적이라고 비판한다. 


총체적이라 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정합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또한 단선적이다. 미학에 적용된다면 재현주의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정합적 연결은 나타난 것(presentation)을 다시(re) 정립하는 주체의 활동의 소산인 표상(re-presentation)들 이라고 비판한다. 이때 표상이란 모든 것을 현재화하는 활동이며,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활동이다. 표상이란 단어에서 접두어 re는 차이들을 자기 아래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표상적 시간관에 반대하여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과거’, 즉 환원 불가능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과거가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시간은 연속적인 하나의 선, 혹은 주체의 활동의 소산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통해 온갖 형태의 전체화를 거부하고 다양한 층위의 차이성을 보이려 한다. 들뢰즈는 기본적으로 과거와 현재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요소라고 본다. 



이동욱, 무제,9x10x34cm,혼합재료,2021



최수앙, Under the skin, 23.5 x 32 x 85cm,  Oil on resin mixed with pigment, 2019 



홍경택, 모놀로그 (Monologue), 25.7x18cm, oil on canvas, 2009-2012 


들뢰즈에 의하면 여기에서 시간들 간의 관계는 개별적인 경험과 기억의 영역을 넘어 인류의 생의 지속적인 측면까지 확장되며, 이전과 이후 혹은 과거와 미래의 끊임없는 흐름과 완벽한 혼합으로 존재한다. 예술가들은 이와 같은 역동적인 융화를 통해서 자연의 시간과 연대기적인 시간 질서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 예술가들은 여러 층위의 시공간을 혼합함으로서 다원론을 가지게 된다. 들뢰즈는 ‘존재는 하나요, 불변하는 것’(파르메니데스)과 대립되는 생성을 지지한다. 생성은 다수요, 변화하는 것이다. 다원론의 이면에는 무질서와 파편화의 문제가 남아있다. 다양성은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현실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자족적인 전체, 즉 ‘파편’들로 존재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예술--그는 예술/기계라고 한다. 여기서 ‘기계’는 ‘부분적인 대상들의 생산’으로 정의된다--은 더 이상 부분으로 분할되지도 않고, 하나의 전체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그 자체 고유한 궁극적인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부분적인 대상은 전체성이 없는 파편들, 분할된 부분들, 소통되지 않도록 막힌 관들, 칸막이로 격리된 무대이다. 부분들 간의 ‘소통 불가능함’, ‘공통성 없음’은 간격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시간’은 이웃한 사물들 사이에 간격을 삽입하고, 반대로 ‘되찾은 시간’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물들을 이웃하게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바로 이 시점에서 근대 예술은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는 모험을 시도하며, 이를 위한 독특한 방법론들을 발명하게 된다. 근대적 삶의 파편 더미에서 솟아난 근대 예술은 오히려 그 파편들을 가지고 자족적인 전체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비록 일상적 삶 속에서 잠깐 비추어지는 계시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각 작가별로 선택한 단편과 그 연결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필자는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권오상, 이정배, 김기라의 작품에는 자본주의의 물신이 들어있다. 


물신은 환상적인 단편을 말하며,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에서 허위의식, 즉 이데올로기의 힘은 크다. 이들의 작품 속 대상은 대개 상품들이다. 상품은 소비자의 만족을 위한 가상을 위해 온갖 것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예술과도 만나며, 예술은 그렇게 만들어진 현실과 다시 만난다. 정재호, 이진주, 유승호의 작품에서 파편은 개인의 욕망과 기억을 담고 있다. 강렬하지만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 모호한 욕망, 흐릿해져서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불확실한 ‘기억’은 재현될 수 없으며, 제시될 뿐이다. 욕망과 기억은 어디로 튈지 모를 단편이며 단편들은 꿈과 무의식, 그리고 그 거처인 몸을 따라 횡적으로 연결되는 끝없는 이야기를 만든다. 이동욱, 최수앙, 홍경택의 작품에서는 인간 자체가 파편이다. 가장 민감한 몸의 경계는 위협된다. 아니면 완전히 축소된다. 인간은 캔 속에 들어가거나 돌멩이와 같은 반열에 놓인다. 인간은 온전한 신체 기관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상처받고 변형되어 불완전하기에 더욱 현실감 있게 제작되며, 신체 일부는 인간을 대신해서 이야기한다. 조각난 인간은 상상을 통해서만 봉합되며 그것은 더 이상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와 부합되지 않는다.

  


1. 자본주의의 물신; 권오상, 이정배, 김기라




권오상, Relief 9, 2016, Print on wood, Varnish,240x143x6cm


권오상의 릴리프(Relief) 시리즈는 양괴감을 가진 지상의 기념비로서의 조각이라는 전통적 기대치를 배반한다. 나무에 이런저런 사진을 붙인 릴리프 시리즈는 각 작품마다 그런 단편들이 함께 붙여지는 이유는 있지만, 견고한 물체로서의 조각이라는 통상적 기준에 비한다면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사진 자체가 조각과 달리 뒷면이 없지 않은가. 물론 이전 작품에서 그는 사진들을 이어 붙여 입체를 만들기도 했지만, 속이 스티로폼으로 채워진 그의 ‘사진 조각’에서 선택된 소재의 틈과 균열은 선명했다. 릴리프 시리즈는 어디서 떼어온 것인지 알 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지만, 그것들은 대개 기성의 것이며, 사진으로 수집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과 조응하는 사물을 찾으러 다녔던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말이다. 어떤 시공간의 단면인 사진 자체가 파편이며, 그것이 다시 한번 전체로나 부분적으로 선택될 때 파편화의 정도는 더욱 커진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더욱 많이 쏟아지는 기표들의 홍수 속에서 조각 또한 그 내부를 비워내고 더 많은 것들이 덧붙여지거나 뺄 수 있는 융통성 있는 표면이 되는 것이다. 권오상의 작품은 때로 정물이 되고 때로 풍경이 되면서 궁극적으로는 현대적인 조각이 되고자 한다. 그는 조각의 문법과 계속 대화하고 있으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스펙타클의 가상성과 달리, 바닥에 놓여지거나 벽에 걸리는 식의 실재감을 가진다. 



이정배, 파랑봉우리114x88.5x0.8 알루미늄 우레탄페인트, 아크릴릭, 2020


이정배는 자연 대 문명의 대립항을 넘어서 순수한 자연 그자체가 있는지 묻는다. 이전 작품에서 소재가 되었던 산은 이리저리 잘려지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인공물이 박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의 기(氣)를 끊기 위해 박았다는 쇠말뚝도 있지만, 여전히 자연은 인간의 일방적 횡포에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보기 좋자고 원래 있지도 않았던 인공폭포를 남발한다든가, 유행에 따라 멀쩡한 가로수를 싹 바꾸는 공공 정책에서 자연 또한 소비 품목임을 알 수 있다. 개발 자체가 연결된 것을 자르고, 떨어져 있던 것을 붙이는 인위적 과정이다. 그것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성적 물신부터 문화적 물신까지 유기체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사회적 요구와 주체의 욕망으로 변형시킴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이정배는 [정원 시리즈-국립공원에서 사유지로, 자본의 정원으로], [부분이 된 전체-건물들 사이에서 유령처럼 출몰하는 부분으로의 자연]로 요약된 작품들에서 사진 작업에 바탕 한 자연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자연은 배경조차도 되지 않는다. 자연은 보다 큰 ‘말뚝’인 건물들에 의해 유령처럼 자신의 몸을 잠깐 드러낸다. 높은 건물 숲 사이로 잠시 보이는 부분으로서의 자연은 어디서 떨어진 지 모를 플라스틱 조각 같은 수수께끼의 사물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제어력을 넘어 회귀되는 자연은 종종 재앙으로 다가온다. 



김기라, 멈춤_비비디바비디부, 내일은 검정, hand made carpet 2021-2022 , 200cm X 400cm


김기라는 회화와 조각, 설치와 영상, 사진 등 전방위적인 형식을 활용한다. 최근 작품에는 카펫까지 등장한다. 한동안 원시적인 목조각도 열심히 했던 터라 크게 이상하지 않다. 작동 정지된 기계의 화면 이미지가 새겨진 카펫은 코로나라는 재앙이 낳은 상황이 깔려있다. 카펫에 새겨진 ‘no signal’은 시스템의 전능함에 목매고 살던 우리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든다.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다시 세팅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비평적 시각이 끼어든다. 김기라는 작품을 통해 발언하는 작가다. 작업을 할수록 할 말이 더 많아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나의 형식을 갈고 닦으면서 고상해진다든가 경쟁력을 갈고닦기보다는 발언에 맞게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엉뚱하고 거친 면이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수많은 머리를 가진 괴물이기에 그에 대응하는 또는 대항하는 작가 또한 많은 도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가 전문 배우들과 함께 탄탄한 시나리오에 기반하는 촌극같은 작업을 종종 발표하는 것은 극이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연극성에 기반하지만, 재현주의는 아니다. 그는 고전적, 또는 리얼리즘적 총체성의 가상에 기대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소비자본주의의 기저를 이루는 욕망을 다룬다. 숭고해 보이는 이념 또한 욕망의 한 자락에 불과하다. 20세기의 영웅을 표현한 작품은 영웅들의 모든 장점이 모였지만, 더 멋져지기는 커녕 괴물적 집합일 따름이다.

 


2. 파편과 기억 ; 정재호, 이진주, 유승호



정재호, 청춘 Youth, 78x121cm, 한지에 아크릴, 2012

 

추억의 아카이브라 할 만큼 얼마 전 과거의 풍속을 쌓아온 정재호의 작품은 우리의 근대가 유난히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그가 참고하는 자료들은 길어야 불과 반세기 남짓한 것인데도 무척 낯설다. 그의 작품은 앞으로의 몇 십 년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것임을 예시한다. 기억하기보다 망각을 더 발전지향적(또는 ‘건설적’)이라고 간주하는 한국 사회에서 기억은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자리에 있는 역사가나 예술가의 몫이다. 대중의 욕망이 빠져나간 빈자리에서 예술가는 늦게 날아오르지만 멀리 본다. 작품 속 역사는 유유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로부터 가격된 힘에 의해 불연속적 단층을 이룬다. 그의 작품은 과거에 꿈꿔진 미래상이 담겨있다. 지나간 미래인 셈이다. 작품 [청춘]은 60-70년대에 유행했던 패션의 남자들이 등장하지만, 헬멧을 쓴 머리만큼은 저 멀리 달나라에 가 있다. 빨리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달 탐사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이다. 같은 해에 그려진 작품 [조난]은 머릿속으로 미리 가 있던 미래의 모습이다. 2차 대전 이후 식민모국으로부터 해방된 많은 국가들이 가지는 역사의식은 분열적이다. 모더니즘과 모더니티는 동시대성이기 보다는 미래였고 지역적으로는 서구였다. 한국화를 전공했고 여전히 한지라는 한국화 매체를 주로 쓰고 있는 정재호는 담백함과 깊이를 통해서 분열적 상황을 그럴듯하게 봉합한다.



이진주, 움직이는 것, 46.3x33cm, 광목에 채색, 2022


이진주의 작품은 사람 손의 주름 하나하나가 만져질 정도로 정교한 재현이 특징적이지만, 배경이 없다. 무엇인가 재현하지만 맥락을 지워버린다. 하얗게 남겨두든 검게 칠해버리든 결과는 같다. 꿈이나 기억, 무의식 또한 강렬하게 나타나곤 하지만 현실적 인과관계의 축이 무너져 무의미 속에 묻혀 버리곤 한다. 재현적 요소는 꿈과 기억, 무의식 등의 거처가 다름 아닌 육체임을 말한다. 맥락이 불확실한, 요컨대 뜬금없이 자꾸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의지나 의도보다 더 필연적이다. 의지나 의도는 현실 문제에서의 합리적 해법을 말한다. 하지만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는 의지나 의도 자체가 뿌리 내리는 더 큰 덩어리를 조명한다. 그것은 검은 손이 흰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담긴 작품 [뒤따라오는 것]처럼 정합적인 전체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구별되는 서로 다른 힘 간의 상호관계를 암시한다. 인체 일부가 아닌 인간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추리를 요구한다. 광목에 채색한 작품 [3막]에서 작가는 처음과 마지막이 아닌 중간 어느 토막을 제시한다. 재현주의에서 작가는 극을 총연출하는 전능한 자로, 재현되는 것은 그가 쓴 대본에 해당된다. 하지만 잔혹극 이론가이자 예술가인 앙토냉 아르토의 주장처럼, 극에서 전능한 주체는 사라졌다. 현대의 작가는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이야기를 촉발하는 자로서 만족한다.



유승호, 슈- shooo-, 119x84.2cm, ink on paper, 2021


유승호의 작품에서 동양의 시서화의 전통은 색다르게 배치된다. 그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산수화지만 산수의 몸통은 깨알같은 글자들이다. 일필휘지로 그려지는 산수화는 글자라는 분절화된 형태의 이합집산에 의해 만들어진다. 글자 또한 쓰는 사람 특유의 필적이 담기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분자적인 입자의 역할이다. 그림을 이루는 화소같은 입자가 의미를 담은 글자다. 그러나 온전한 문장을 이루지는 못한다. 주어를 가진 문장이 전제하는 주체의 위상을 생각할 때, 유승호의 작품은 그러한 주체를 해체하는 셈이다. 주체에 상응하는 객체 또한 같은 운명을 따른다. 글자는 메아리처럼 반복되어 산수를 만든다. 글씨 그림은 무심코 쓴 글자들이 만든 형상이다. 출발은 허공의 먼지처럼 정처 없지만, 이내 자기만의 길을 만들며 나아간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책 가장자리에 끄적거리는 낙서같은 방식으로 출발하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산수 드로잉이 된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무의식적 유희가 펼쳐지는 장이다. 예술작품이라는 장은 작가의 작은 부스러기 하나하나도 모아서 집대성할 수 있다.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갈 것같은 모래알 같은 입자는 암산이 되고 무지개도 된다. 작가가 정한 형태소로서의 글자는 어떻게 펼쳐지고 접히는가에 따라 다른 세상을 연다. 글자를 보면 그림은 사라지고 그림을 보면 글자가 사라진다. 무엇을 전경화할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다. 


 

3. 작고 상처받은 인간들 ; 이동욱, 최수앙, 홍경택




이동욱, 거의 완성된 결합, almost finished combination, 2022, 가변크기


통조림 안에 빼곡하게 들어있는 정어리같은 극소 인간 이미지로 충격을 주었던 이동욱은 최근 작품에서 깡통이라는 폐소공포증적 공간은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 속 인간의 위상은 초라하다. 인간의 실루엣을 한 트로피를 형태의 작품에서 인간은 온갖 잡동사니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인형의 일부같은 인간의 구성 요소들은 느슨한 집합체의 일부를 이룬다. 깡통 안에서 쩔어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인간은 여전히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작가가 수집한 돌들이 탑을 비롯해서 죽 이어지는 구조를 이루는 작품은 자연의 기기묘묘한 형태와 색에 탐닉하게 한다. 마치 수석 수집가들처럼 말이다. 물신적 수집가에게 단편적 자연은 전체로 간주된다. 돌이 등장하는 작품군에서 그가 인간을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 또한 슬쩍 끼어든다. 돌과 돌 아닌 것들은 한데 모여 모종의 기념비를 만든다. 지상에 우뚝 서 있는 기념비는 인간을 전제한다. 캔에 들어있던 인간들이 상품화되어 소비되는 모든 존재들을 상징한다면, 트로피나 돌탑처럼 생긴, 좀 더 근사한 인간상들 역시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연이 가세한 조합은 인공물만의 조합보다는 거시적 비전을 가진다. 그가 수집한 희귀한 돌들은 내부에 수많은 주름을 각인한다. 그것들은 분재처럼 산이나 절벽에 대한 축소모델이 되기도 한다. 극소화된 인간은 그에 걸맞는 자연의 모델과 함께 한다.   



최수앙, Untitled,2018,plaster,gtpsum,pigment,steel,18x21x49


인간에 대한 조각적 묘사의 달인이라고 할만한 최수앙은 창조자가 파괴자의 역할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완전한 형태만이 파괴의 결과를 더욱 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분홍빛 피부색 입상은 눌려서 납작해지는 중이고, 붉은색의 좌상은 머리로부터 망가지는 중이며, 연두색 두상도 마찬가지다. 조각은 그 태생부터 인간에 대한 기념비였지만, 인간은 더 이상 기념비적 존재가 될 수 없다. 협소한 의미의 인간중심주의는 세상에 선과 동시에 악을 퍼뜨렸으며, 장점만큼이나 거대해진 단점은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 되기 위해 행했던 세계에 대한 월권은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는 중이다. 머리는 인간을 인간이게 한 신체의 중요한 부위다. 파괴와 변형이 머리나 상체 부분에 집중되는 것은 형식 그자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셈이다. 유기체가 파괴될 때 그것이 비롯된 물질로 돌아간다. 생산 또는 창조하기 위해 투입된 에너지는 밖으로 풀려나온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파괴나 해체지만, 동시에 거기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쾌감을 준다. 긴장과 이완의 교차는 쾌락의 요소다. 극도의 이완이나 쾌락은 개체를 주변과 일치시켜 나간다. 최수앙의 작품에서 인간은 한쪽 귀퉁이서부터 물질로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인체를 열심히 만들어온 조각가가 현 단계의 문명을 바라보는 시점이기도 하다. 



홍경택, 파수꾼들, 45.8x38cm, acrylic & oil on linen, 2019


20여년 전 거대한 화면 가득히 쏟아지는 홍경택의 필기구 그림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사이에 경쾌한 펑크 음악을 소재로 한 만다라 스타일의 작품을 거쳐, 최근에는 또 다른 변신을 꾀하고 있다. 상품 물신주의를 떠오르게 하는 화려한 색감과 매끈한 형태미는 판토마임을 하는 듯한 손의 움직임을 화면 가득히 포착한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변화했다. 어두운 배경에 피부색이 전부이므로, 최소한 색감 면에서는 극적 변화가 있다. 공간공포증적인 빽빽한 화면과 달리, 공기 감이 있는 여백도 두드러진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부분이 전체를 대신한다는 점은 연속적이다. 작품 [모노로그]에서 손가락에 올려진 작은 해골은 다른 손에 의해 튕겨져 나갈 기세다. 빛을 한껏 받는 살아있는 생명은 관객을 응시하는 죽음을 사소화하고 물리치려 한다. 그의 작품에서 화면 가득한 손은 신체 일부지만, 인간 전체를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대지에서 해방된 손이 인간을 인간이게 한 언어와 노동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손만 등장하는 작품 또한 양손이 대칭적으로 배열되면서 부분일지언정 그 한계 내에서 최대한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작품 [파수꾼들]은 홍경택을 화단에 처음 알린 연필들이 화려한 색을 빼고 기하학적 형태로 배열되어 작은 새들의 집이 되어준다. 부분은 다시금 전체로 조직될 것이며, 생명을 품는 환경으로 거듭날 것이다.   


출전; 두남재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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