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박윤 / 다가오는 역사의 뒤안길

이선영

다가오는 역사의 뒤안길

  

이선영(미술평론가)

  


수백 년 된 건물도 시간의 향기가 오롯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 대개는 문화재급이며, 근대 이후 성냥곽같은 ‘국제양식’이 전 세계를 휩쓸자 지방 고유의 양식을 유지한 장소의 몸값은 더욱 올라가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관광지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건물에는 대부분 사람이 살지는 않는다. 단지 손님들이 방문하고, 이러한 방문객을 위해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 잘 관리되고 있을 따름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 또한 그곳이 아무리 오래된 곳이라 할지라도 고쳐가며 가꿔가며 산다면 오래된 집의 매력까지 더해진다. 하지만 이해관계에 얽혀 강제로 지체된 경우, 시간의 향기는 변질되고 만다. 특히 박윤이 이번 전시에서 집중적으로 발표하는 한 아파트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흉가같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렇다. 박윤의 최근 작품을 보면 일부 가구의 경우 사람이 사는 내부가 예상 밖의 반전을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 사진들은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에 속하지 않는다. 



도요타 아파트 #102 Archival Pigment Print 100x130, 2019


앞으로 작업이 더 진행되면서 보이는 모습 뿐 아니라, 계보학적 탐구가 더 필요해 보인다. 가령 그곳의 가장 오랜 거주민이나 거주민이었던 사람이 찍었던 일상의 사진들이나 인터뷰같은 자료는 한 장소에서 출발한 작품들을 좀 더 입체감 있게 다가오게 할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아카이브보다는 결정적인 삶의 단면인 사진이 가장 강력하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작품이 있어야 아카이브도 있다. 정보가 넘치는 현재 예술적인 정보만이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다. 어쨌든 외관을 허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재건축 등급판정에 관련된 전략적 차원도 고려된 것이다. 도심 한가운데의 방치는 부조리해 보이지만 나름 합리적 발상에 의한 것이다. 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점차적 보수로는 안되고 구성원들의 전체 합의가 필요한 리모델링, 또는 최하위 등급을 받아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 대부분의 공식적 해결책이다. 지은 지 30년 만 되도 재건축 이야기가 솔솔 나오는 소비재로서의 한국 아파트(누군가에게는 투자처)를 생각할 때 그곳은 예외적이다. 


시간이 더욱 가속도를 붙이고 흐르는 현대에 백 년을 향해가는 공간은 반드시 개인적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모순과 갈등이 오래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총체적 재건축 및 도시계획을 비롯한 큰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건물이 시스템들 사이의 간극에서 표류한 채 살아있는 화석으로 서 있을 때가 있다. 욕망과 제도, 인간과 구조가 착종된 풍경에 대해 작가는 중성적으로 대응한다. 문화비평적인 언급은 없지만, 작가의 선택 하나하나에서 한국 사회의 축약도에 대한 서사가 내재한다. 주인공 없는 드라마라는 점이 관객의 상상을 자극한다. 작가는 지금 불리는 명칭이 아닌 [도요타 아파트]라는 낯선 이름으로 호명하면서 일제 강점기 때부터의 오랜 역사를 암시한다. 서울 시청과의 거리가 차로 5분도 안 되는 도심 요충지에 있지만, 재개발 이익과 관련된 재산권 관계 때문에 이도저도 못한 채 올해로 90여년 남짓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도요타 아파트 #103 Archival Pigment Print 50x40, 2019



도요타 아파트 #109 Archival Pigment Print 50x40, 2019


근처의 아현동 산동네도 몇 년전부터 고층 아파트촌으로 바뀐 시점이라 외딴 섬같은 느낌은 더욱 강하다. 하지만 그 아파트는 52채 중 40세대 정도는 사람이 살고 있다. 교통의 중심지라서 젊은 세대도 있고, 30-40년째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거주민들 간의 이해관계도 첨예하게 엇갈려있으며, 외부인의 시선에 대해서도 냉담하거나 폐쇄적이다. 침투하기 힘든 저항선을 의식해서 작가는 내부자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 그곳을 렌트 해서 한동안 작업실로 사용한 것이다. 박윤의 경우 특정 목적을 위해 단기 체류한 ‘뜨내기’에 해당된다. 렌트 비용을 생각하면 그곳에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단기 거주할 당시 거주민의 반 정도가 소유주였다고 전한다. 이번 전시작품에는 주로 사물이 찍힌 것은 그만큼 사람과 소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통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의 주민들은 대부분 무늬만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을 찍고 싶은 사진가는 점점 극한의 직업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한 특수한 곳이 아니라도, 사진가는 초상권과 무관한 사물을 찍기가 더 편할 것이다. 사물을 집중적으로 찍는 가운데 공간이, 삶의 흔적이 묻어나온다. 사물들은 사람만큼이나 삶을 이야기 한다. 박윤의 작품에는 페인트가 벗겨져 가는 벽이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공법으로 마무리된 실내 등, 독특한 지점들도 자연스럽게 딸려온다. 그곳은 아직은 살아있는 유기체다. 미디어 혁명으로 사진이 흔해진 시대, 한국 최초의 아파트로 그곳에 서서 곧 100년을 앞두고 있는 장소를 내부자적 시점으로 찍은 사진은 흔치 않다.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그럴듯한 장소에서 행복한 모습만 찍어 올리는 관행은 사진이 아무리 흔한 시대라도 볼만한 사진이 별로 없는 상황을 설명해준다. 자신이 속한 너무나 현실적인 광경은 회피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환상적으로 연출된 사진 속에서 현실을 본다. 



도요타 아파트 #105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0



도요타 아파트 #210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0



도요타 아파트 #211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0



도요타 아파트 #212 Archival Pigment Print 50x70, 2020



도요타 아파트 #214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0


예술만이 행복을 연출하는 시대의 코드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감춰진 현실을 들출 수 있다. 작가가 머물던 1년 반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런대로 보이지 않는 문턱은 넘을 수 있었다. 그에게 아파트는 저 멀리에 있는 소재가 아니다. 아파트는 1990년대 중반 어린 시절 그에게 신(新)문물의 충격을 준 특별한 곳이다. 하지만 다시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던 상실의 아픔이 있는 트라우마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소위 말하는 ‘영끌’을 해서 신축 아파트에 살지만, 작가는 IMF 환란 때 아파트를 다시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쓸쓸함을 이해하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영끌’ 족은 잘못하면 ‘하우스푸어’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항시적 불확실성이 있다. 개인의 책임이 아닌 심지어는 한 국가의 책임도 아닌, 저 멀리서부터 몰아닥치는 원인이 나의 삶을 규정짓는 세계화의 시대는 위험하다. 9살 소년이 잠시나마 살아봤던 신축 아파트가 준 황홀한 기억이 생생한데,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이 칙칙한 시멘트 덩어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현실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좋은 기억은 특히 모든 것을 잘 모르는 어릴 때의 그것은 오해에 기반한 것이 많다. 작가는 그곳에서 꿈의 현실적 단면을 본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에서 시대의 환상은 시대가 낳은 건물들 속에 축적되어 있고, 이들은 현대에 남아있는 폐허를 파헤치는 현재의 고고학자들에게 꿈의 흔적을 알려주는 지표라고 말한다. 그가 맞딱뜨린 현실은 어릴 때 소풍 전날의 설렘이 성인이 돼서는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평가절하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성인이 되어 다시 마주한 아파트란 곳의 적나라한 현실은 미학에 필요한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를 저절로 만들어주었다. 추억, 호기심, 사랑 등등이 시간의 시험을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그 점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특별하다. 단순한 기록 사진도 시간은 그것을 예술의 반열에 올리곤 한다. 박윤은 그동안 아파트를 찍어왔다. 이번 전시 [도요타 아파트] 시리즈는 1930년대 지어진 가장 오래된 아파트를 시작으로 그 범위를 좁혀보자는 선택에서 왔다. 



도요타 아파트 #215 Archival Pigment Print 90x60, 2020



도요타 아파트 #326 Archival Pigment Print 70x50, 2020


[도요타 아파트]라는 낯선 명칭은 오랜 역사를 가진 아파트의 수많은 다른 이름 중의 초기에 해당된다. 지금 불리우는 충정아파트는 불과 1980년대에 바뀐 이름이라고 한다. 그곳에 선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붙은 이름이다. 한국의 아파트 이름을 보면, 특별한 자원이 없는 나라의 제1 물신적 대상으로서의 기대치가 한껏 묻어난다. ‘--팰리스’, ‘--로얄’, ‘--가든’, ‘--파크’...등을 기본으로 해서, 여기에 동네 이름, 역이름, 시공사 이름까지 합쳐지면 엄청나게 길어진다. 그때그때의 지표에 따라 이름 자체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충정아파트 또한 역사의 부침과 함께 여러 이름을 거쳐왔다. 충정아파트는 일제 강점기였던 건립 초기부터 상당 기간 동안 한국 최초의 아파트답게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작가가 아파트라는 신문물을 처음 접한 90년대 중반까지도 끄떡없었을 것이다. 이 아파트는 최초의 대법관이 여기에 살았을 정도의 고급 주택이었으며, 미술인의 경우 김환기 화백이 여기를 주소지로 외국에 작품을 보냈다고 한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이전 시대의 장식을 지우고 세워진 근대 건축은 그 시작부터 유토피아적인 사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적 모델이 기계였던 점은 빠르게 쓸모없어지는 근대 건축의 상황을 알려준다. ‘근대적 삶을 위한 기계’(르꼬르뷔제)로서의 집과 도시는 빠르게 고갈되는 이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샬 버만은 [현대성의 경험]에서 현대문화의 영웅으로 파우스트를 호명한다. 파우스트는 발전의 욕망이라고 부들 수 있는 충동의 화신이다. 하지만 발전에 합당한 인간적인 커다란 손실 또한 야기한다. 마샬 버만은 이것이 파우스트와 악마와의 관계에 대한 의미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끔찍스러운 세력을 야기할 수도 있는 음침하고 두려운 에너지에 의해서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성의 경험]에 인용된 바에 의하면 그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사건의 급류 속에 뛰어드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한다. ‘인간을 증명하는 것은 쉬지 않는 행동이다’(파우스트) 



도요타 아파트 #403 Archival Pigment Print 90x60, 2020



도요타 아파트 #432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0


파우스트는 창조와 파괴를 결합한 현대성의 화신으로 나타나는데, 그에 가장 근접한 이는 개발자다. 마샬 버만은 파우스트/개발자의 모델을 통해 현대화의 폭발적인 분위기, 즉 공동체의 와해와 개인의 심리적인 고립, 격리된 대중과 계층 간의 대립, 윤리적이고 정신적으로 절망적인 무정부 상태에서부터 발생한 문화적 창조성을 본다. ‘창조적 파괴’(니이체)는 어디에서나 근대성의 필수조건이 됐다. 낮은 기와집이 대부분이었을 시대에 우뚝 세워진 ‘빌딩’인 도요타 아파트는 이후 ‘아파트공화국’이 될 한국 도시 환경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박윤의 작품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최초에 해당하는 대상의 위대함이나 아우라는 부재하다. 여기에서 근대는 가차 없이 자신의 초라한 몸을 드러낸다. 마샬 버만이 지적하듯, 괴테의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보람찬 신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종교적 신화와 전통적 가치, 통상적인 생활방식을 파괴해버리지만, 결국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도요타 아파트에서 욕망을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근대의 이상을 빠르게 실현하고 고갈시킨 기념비로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곳은 삶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축적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 근대사에서의 몇 번의 요동침을 거친 욕망의 장소다. 여기에서는 직선적 진보라는 근대의 이상도 무색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근대적이라는 것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지금 한국에는 빈집이 많아도 정작 살집이 부족하다는 역설은 이익 추구와 인간적 삶 간에 놓인 괴리를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100년을 향해가는 기념비적 건물에서 위대한 기억보다는 욕망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근대성의 이론에 대입하자면 충정 아파트는 개발에 대한 이익이 기대치에 못 미쳐 시간이 강제로 멈춰진 곳으로 다가온다. 그 또한 근대의 모습이다. 만약 그곳이 문화시설로 탈바꿈하여 또 다른 시간을 살게 된다면, 그것은 근대의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요타 아파트 #221 Archival Pigment Print 50x70, 2020



도요타 아파트 #222 Archival Pigment Print 50x70, 2020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에 사유재산권이라는 금기사항은 그 상태가 상당 기간 더 유지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한다. 어쨌든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는 작가가 아직도 삐걱삐걱 작동 중인 ‘삶을 위한 기계’를 기록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서울의 대도심 길가에 자리한 충정아파트는 그 색깔부터가 튄다. 금이 많이 가 있는 오래된 시멘트 덩어리의 칙칙한 외관을 감추기 위해서 자연의 신선함을 떠올리는 녹색 분위기의 색을 칠했는데, 그것이 또 자충수가 됐다. 아파트 공화국인 한국에서 아파트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외관에 페인트를 칠하는 관행을 따르고 있지만, 색칠은 건물의 낡음을 오히려 강조할 뿐이다. 작가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 초록빛 섬으로 서 있는 건물을 강조한다. 충정 아파트라는 간판이 세 개나 붙은 입구 또한 한 장소를 알리는 간판이 지나치게 많은 한국의 관행을 따른다. 작가는 이 장소를 괴이한 곳이기 보다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풍경이 압축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좀 더 현대식으로 지어진 주변의 고층빌딩이 깔아뭉개고 있는 듯한 안쪽 모습은 유난히 빠르게 근대를 관통해 온 탓에, 한 장소에 여러 시간대가 공존하는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이 작품에 의하면 충정아파트는 과거이고 바로 그 옆에 자신이 빨리 도달해야 할 미래가 이미 와 있다. 거리로 나 있는 상가를 제외하고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아파트 안쪽의 중정은 요즘의 다른 아파트에 비해 특이하다. 이후 대세가 된 일자 형식의 아파트는 아니다. 건축 평론가 조한(홍익대 건축과 교수)은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돌베개 출판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의 독특한 구조에 대해 ‘1965년에 지어진 동대문 ‘연예인’ 아파트나, 1967년에 지어진 세운상가 아파트에서도 중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충정아파트가 그 원형이 아닐까’ 추측한다. 또한 그 독특한 구조에 대해 ‘1930년대 주택난이 극심할 때 지어진 충정아파트는 세 개 동이 모여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의 독특한 중정뿐 아니라, 거의 최초로 중앙난방 시설을 갖추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지적한다. 



도요타 아파트 #325 Archival Pigment Print 30x40, 2020



도요타 아파트 #327 Archival Pigment Print 30x40, 2020


충정아파트는 이후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옥상에서 파티도 열리던 호텔로도 쓰일만큼 첨단 건물이었다. 조한은 우리 근대사의 부침에 따라 바뀐 ‘도요타 아파트’ 이름의 계보를 들추면서, ‘충정아파트의 안과 밖을 보고 있으면, 우리 근현대 역사의 부글거리는 욕망과, 그 욕망으로 인해 생긴 수많은 상처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 같다’고 평한다. 충정아파트가 거주지로 전성기를 구가했을 때 서로 마주할 수 있는 중정은 사람 사는 분위기를 흠씬 풍겨주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또한 원래 건축가의 의도를 배반한 불균형한 모습이 포착됐다. 건물 앞의 대로를 확장하면서 충정아파트 일부는 통째로 썰려 나갔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중정으로 살림 공간이 파고들었다. 전선과 배관이 칠이 벗겨진 벽에 그대로 드러난 모습은 슬럼화된 공간의 대표적 특징이다. 건물을 유기체와 비교한다면 혈관계가 다 노출된 괴물같은 모습이다. 


벽과 같은 배색으로 칠해져서 결코 열릴 것 같지 않은 문들, 계단은 있되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구석들, 인공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자연화되고 있는 얼룩덜룩한 표면들...박윤의 작품은 사진이 아니고서는 결코 세세하게 담기 어려운 삶의 질감이 살아있다. 사진의 압도적인 리얼리즘은 현실 뿐 아니라 현실의 환상적 측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곳은 유적지가 아니다. 여전히 그곳도 낡은 창틀 사이로 빛이 들고 복도의 창에 이불이나 신발을 너는 사람이 산다. 고딕 디자인의 시트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 창가에 죽 자리한 화분은 살아있는 사물로 풍경에 온기를 부여한다. 작가는 아파트 공용 공간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또는 버려진 사물들을 찍는다.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이 애매한 지대는 원래 예술가의 영역이며, 이 전시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다. 충정아파트 후반기 작업에는 거주민들 사진이 포함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사물들이 인간을 대신한다. 



도요타 아파트 #429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0



도요타 아파트 #433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0


공용 공간에 있는 의자는 쓰레기이자 사용되는 기물이기도 하며, 인간을 대신해서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요즘 아파트에서는 공용 공간에 개인적 물건을 방치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곳만의 특이점이다. 복도에 버려져 나뒹구는 지구본은 그것의 주인이었을 아이의 꿈이 연상된다. 작가는 잠시 거주하는 기간 내내 복도에서 보았던 그 지구본에서 ‘꿈이 굴러다니는’ 모습을 본다. 아이는 이 어둡고 칙칙한 곳에서 더 넓고 환한 우주로 떠났을까. 복도에 붙은 재개발 갈등 관련 대자보는 인간의 흔적만 있는 고요한 사물의 세계 와중에도 전쟁 같은 일상을 암시한다. 그것은 어떤 세력이 다른 세력을 향해서 사람 대신 주장한다. 충정아파트의 오랜 역사 속에 끼어든 사기꾼이나 불법 증축 같은 법적 문제는 갈등을 장기화하는 요소다. 화려함과 누추함을 떠나 가장 편안해야 하는 곳이 집인데, 시장이나 주택 정책 방향에 따라 공중누각처럼 떠 있는 불확실한 상태가 이 장소의 물리적인 낡음보다 더욱 심란하다. 


[도요타 아파트]는 생산력의 발전(대부분 식민지 착취와 관련된)과 더불어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가던 서구적 모델 보다는 아시아 특유의 근대화와 더 밀접하다. 마치 홍콩의 구룡채성(九龍寨城, Kowloon Walled City)같이 권력의 공백 지대에서 슬럼화된 것이라는 점이 그렇다. 구룡채성의 역사는 송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 1810년경 해상 군사기지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구룡채성--‘영국령 홍콩 내에 존재했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실제로는 홍콩과 중화인민공화국 양쪽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 특수지역. 복잡다단한 거대한 무허가 건축물로 이루어진 3헥타르 면적의 슬럼 도시로, 마굴, 무법지대 등으로 불림.’(위키백과 요약)--의 기괴한 모습은 영화에도 등장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와 [공각기동대](1995)이며, [배트맨 비긴즈](2005)에서도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으스스한 느낌의 막장 도시 고담시 외형의 모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징한 구룡채성 조차도 1993년에는 철거가 되어 공원으로 바뀌었고 자료로만 남은 상태다. 



도요타 아파트 #536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2



도요타 아파트 #417 Archival Pigment Print 60x90, 2020


박윤의 작품은 건물 내부의 세부를 찍은 광경에서 특히 그런데, 미로같은 슬럼의 모습이 디스토피아 영화의 배경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계속되는 용도변경과 증축으로 인해 최초 설계의 투명한 합리성이 사라지고 생활의 분비물이 축적되어 생겨난 질감이 사진에 세세하게 담겼다. 지금은 예술사진이지만 나중에는 기록사진의 가치도 획득할 것이다. 최고 밀도의 인구로 기네스북까지 오른 구룡채성의 규모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해서 방치된 점은 유사하다. 빈민가란 대부분 산동네, 또는 산동네가 아니더라도 평지라는 수평적 축을 따라 펼쳐지는데,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는 근대에 빈곤은 수직의 축으로도 펼쳐졌다. 사실은 악재가 더 많이 있을 미래에 고층 주거지들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사회적 의식을 겸비한 SF 영화감독들이 살아있는 시체, 즉 좀비같은 고층 슬럼가를 주목한 이유일 것이다. 요컨대 박윤이 사진으로 포착한 장면들은 시간의 시험대에 올랐던 과거가 아니라, 다가오는 역사의 뒤안길일 수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