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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마 / 거짓의 진실

이선영

거짓의 진실 

 

이선영(미술평론가)

 


거짓말을 했을 때 코가 쭉 늘어나는 캐릭터가 나오는 동화 피노키오는 지금도 다시 제작될 정도의 고전이 되었다. 김도마의 개인전 [거짓말] 전의 작품 속 인물들은 피노키오 1점을 포함하여 모두 코가 길게 튀어나와 있다. ‘거짓말!’이라고 단호하게 일갈하는 듯한 어투와 많은 작품 중 피노키오를 내세운 전시엽서 이미지는 명쾌하고도 가벼운 느낌이지만, 작가의 주제는 모호하면서도 진지하다. 참/거짓의 문제는 진리의 영역이며, 예술은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 진/선/미를 분리시키고 아름다움만 맡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이 형식 저 형식이 이음매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결합 된 이미지는 프랑켄슈타인처럼 기괴하고 우울하다. 진실은 하나이지만 거짓은 여럿이기에 혼종 이미지는 그자체가 거짓의 느낌을 준다. 거짓말은 계속된 거짓말을 낳지 않는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비롯한 특정 사조는 거짓의 이러한 다양성에 더 열광하기도 한다. 




갤러리 오뉴월 설치 전경









우리가 겪은 가장 최근의 사조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문화현상에 사회학적 근거를 제공해준 시뮬레이션에 관련된 이론도 그렇다. 그의 작품을 굳이 피노키와 연결짓자면 동화의 어두운 면을 계승한다. 이 전시는 인간과 현실을 보는 작가의 입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전시 출품작 14점에서 피노키오만 코의 형태가 원본에 충실한 ‘진짜’이며, 나머지는 피노키오라는 텍스트를 참조한 창조물이다. 몇 십 년 전에 만화영화로 본 기억에 의하면, ‘생일 없는 외로운’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피노키오는 코 문제 말고도 그 자체가 ‘진짜’ 사람이 아닌, ‘거짓’ 조립물, 요컨대 인조 인간이었던 것이다. 거짓말에 의해 코가 끝없이 늘어난다는 발상은 동화가 아닌 현실 인간의 이미지에 적용되었을 때, 거짓은 거짓을 더 보탠다. 한편 늘어난 코의 길이처럼 거짓이 거짓이라는 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기호는 나름 대로 정의롭다. 


디즈니 사나 헐리웃 영화의 서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해피엔딩은 거짓이 판치는 잘못된 세상에 대한 위로다. 잘못은 결국은 고쳐진다는 동양의 권선징악(勸善懲惡)도 대중을 안심시켜주는 치유적 메시지다. 하지만 현실은 그만큼 아니라는 반증이다. ‘거짓말’ 전은 ‘거짓을 해선 안된다’는 기준이 통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현실 인식에 기반한다. 피노키오라는 맥락이 아니면, 김도마의 [lie] 시리즈는 얼굴 가운데에 대못이 박힌 듯한 섬뜩한 모습으로도 비춰진다. 벽에 걸린 부조라서 더욱 그렇다. 같이 전시된 작품 중에는 몸 내부로 파여 있는 듯한 형태도 보인다. 몸을 상징하는 어떤 대상도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몸을 침범하는 상징이 될 수 있다. 변형된 옷은 그만큼 본질(몸, 진리)을 꾸미거나 감추거나 훼손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 인간들의 일그러진 모습은 거짓말을 할 때 동화 속 인형(人形)처럼 귀엽거나 재미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패션 잡지 등에서 튀어나온 듯한 세련된 차림의 도시남녀들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것은 아니다. 김도마의 작품은 특정 개인의 표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익명적인 대중, 요컨대 보다 일반성을 띈 사람들이다. 그 누구여도 상관은 없지만, 결국은 사진에 찍힌 인간이다 보니 대부분 볼만한 상태, 가령 잘 차려입고 거리에 나선 선남선녀다. 거의 속옷과 다를 바 없는 패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또한 개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갑옷이기 때문이다. 거리 같은 공적 공간에서의 행색은 타자들에게 자신을 연기하는 무대다. 남들보다 더 멋져 보이고 싶은 인정의 욕망은 시선의 교환 속에 내재된 사회적인 차원을 말한다. 거울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SNS 속의 사람들은 모두 그럴싸하다. 김도마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자기 연출 속에 내재된 거짓의 요소를 보여준다. ‘거짓말’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이 전시의 작품들은 형식적으로도 불투명하다. 


출력한 사진을 적당히 자른 나무에 붙인 채 조각한 후 채색을 거듭한 그의 작품은 원래 재료를 상당 부분 감춘다. 만져보면 매끈한 것이 플라스틱 같기도 하고 잘 연마된 돌 같기도 하다. 회화도 사진도 조각도 아닌 애매한 형식이다. 대개 조각은 원재료를 잘 감추지 않고 물성에 충실하며, 색도 부차적이다. 김도마는 회화 작업과 조각을 같이 해오긴 했지만, 이번 전시작품을 기준으로 볼 때, 정통 조각의 흔적은 아직도 인간이라는 중심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전시된 작품에는 옷같은 소재도 있지만, 그 또한 몸이 빠져나간 흔적이 선명하며, 인간처럼 세워져 설치되어 있다. 김도마의 방식은 이것저것을 합성하는 방식뿐 아니라, 키치처럼 원재료를 감추는 가짜적 양상이 있다. 더 그럴듯하게 감추려면 얼마든지 방법은 더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개 키치가 원재료를 감추는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묵직한 돌덩이처럼 보이지만 얇은 돌판을 붙여 놓는다거나 대리석 무늬의 플라스틱 등은 단가를 낮춰 줄 수 있는 것이다.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국면에서 각광받았던 키치 열풍은 미술 안에서도 주요한 어법으로 자리 잡았다. 구조 면에서 내부와 외부 사이의 투명한 관계가 해체되어 있는 김도마의 ‘조각’은 모더니즘의 어법으로부터 벗어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현대조각의 추이를 살피는 이론에서, 현대조각의 불투명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근대조각은 자연의 외형이 아닌 구조를 모방하는 추상 어법에도 불구하고, 중심과 주변 사이의 투명한 관계가 보존되어 있었지만, 현대조각은 조각의 핵심을 간파할 수 있는 시점이 모호하다는 논리는 연극성에 기반한 현대조각의 논리를 제시해 주었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논리에 의하면 초현실주의는 현대조각의 어법과 더 가까이에 있다.특히 이번 전시에서 옷을 소재로 한 작품은 그 자체가 알맹이 없는 표면으로 드러난다. 옷의 기능과 무관한 기호가 무늬로 새겨져 있거나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한 모양새 는 진실, 즉 순수와 본질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드러나 있다. 


물론 그것은 불가지론이라기 보다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김도마는 작업 초창기에 철조를 중심으로 했지만, 점차 여러 형식이 복합된 작품으로 이어졌다. 아일랜드의 해안과 63빌딩, 그리고 남대문 등이 한 화면에 있는 불연속적인 풍경을 보여주기도 했던 이전의 회화 작품의 복합적 양식의 지속이다. 한쪽 팔이 몸을 관통하여 다른 팔 쪽으로 나와 있는 흉상 [self penetration]은 스스로를 찌르는 듯한 모습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작가는 이 작품을 ‘스스로를 뚫고 있는 구조’라고 설명한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self penetration 의 연작을 통해서,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상태의 것들을 보여주어 관찰자의 의식의 이동을 노렸다. 스스로를 뚫고 있는 셔츠, 옷가지들, 신발, 병원복, 자전거, 안경 따위의 것들을 통해 무용지물인 상태의 허무함과 생경함 그리고 장애적인(disabillity) 면모를 동시에 보이고자 했다.’고 밝힌다. 












옷 이외에 그가 소재로 삼은 것들은 대부분 가장 일상적인 것이며, 그래서 변형이 쉽게 인지되는 대상들이다. 마치 얼굴 한가운데에 박힌 코처럼 말이다. 피노키오적 현상이 바깥으로 자라는 형태를 전제한다면, 의상 형태의 흉상은 안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한 외력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파괴는 내재적이다. 내재적인 파괴만이 진정 치명적이다. 심리학에서는 공포를 위협적인 외력의 실체가 분명한 것, 불안을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구별하는데, 이 기준에 의하면 그의 작품은 불안에 속한다. 스스로를 관통하는 어떤 힘에 대한 이미지는 김도마의 이전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동일자를 위태롭게 하는 타자적 힘에 대한 이미지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만을 고수하는 이가 아니다. 작업이라는 것이 적당한 수준에서 자기표현을 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때로 자신을 상실할 지경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과정이다. 


자신이라는 경계를 끝없는 도전에 내맡겨진다. 작가란 개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매번 개성을 갱신하는 변화무쌍한 존재다. 한편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이 전시의 부제와 연결해서, 거짓이 누군가에게는 관통상을 입힐 수 있다는 메시지로도 다가온다. 그것이 외재적 원인이 아니더라도 거짓을 일삼는, 보다 정확히는 거짓이 자신의 존재 조건일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인간이다. 그는 자기모순에 의해 내파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의상 소재 작품 [병원]은 언뜻 버버리 코트처럼 보이지만 병원 무늬가 안팎에 새겨진 옷이다. 안감은 더욱 진하게 겉감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병원 마크는 정상과 이상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묻고 있다. 지배적 질서는 그 기준이 늘 확실한 듯이 자신하지만, 대부분 기준을 정하고 판결하는 권력에 만족한다. 실상은 고무줄 잣대 같은 기준이며, 정확히는 누군가의 이익에 보다 관련되는 기준일 따름이다. 











조르주 캉길렘은 [정상과 병리]에서 살아 있는 인간은 그자체가 병리적인 것으로서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타인과 비교해서 환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서도 환자이다. 캉길렘은 정상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정상이라는 개념은 그것 자체가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며, 병리적인 것은 일종의 정상적인 것으로서 이해된다고 보면서, 이상이라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정상적인 것이라고 본다. [정상과 병리]는 ‘정상적인 것이란 현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판단이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력의 최대치를 정의하는 경계 개념이다. 정상이라는 것에 상한은 없다’는 말을 인용한다. 욕망하는 존재인 인간은 애초에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더 나아가 조르주 캉길렘은 병리적인 것의 창조성까지 말한다. 병리적인 것이란 생물학적 규범의 결여가 아니라 다른 규범이라면, 다른 조건을 가진 것을 다른 규범을 가진 것을 낳게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외나 위반도 새로운 규칙이 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작가는 병원복 무늬를 안팎으로 공존시킴으로서 질병의 편재를 은유한다. 이전 작업에서도 패딩 자켓이나 터틀넥, 나시티 등을 활용하여 사회적 인간에 내재된 잠재적 질병을 표현했디. 그가 보는 인간은 잠재적, 명시적 환자이다. 가장 심한 환자는 자신이 환자인지 모르는 환자다. 옷이라는 형식과 관련해서 덧붙이자면, 패션쇼의 현장이야말로 비정상이 난무하지 않는가. 패션쇼의 의상들은 대부분 입을 수 없는 옷들이다. 명품일수록 최초의 발표의 현장은 소비자에게 각인될 충격 요법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에 빠진 현대미술 또한 비정상의 정상화가 만연해 충격 요법이 통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예술 자체가 있음직한 현실이다. 재현주의가 득세할 때는 환영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기법이 아카데미의 주요 내용이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의 진정한 계승자는 현대미술이 아니라 대중문화다. 












아직 못 봤지만 첨단기술이 적용될, 21세기에 만들어지는 디즈니 영화 피노키오는 얼마나 실감 나겠는가. 물론 원작 자체가 픽션이지만, 픽션으로부터 출발하는 또 다른 사실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시뮬레이션의 시대에는 이러한 n차적 현실도 중요하다. 픽션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한 것은 거짓의 보다 근본적인 차원을 지시한다. 전시부제 ‘거짓말’에서 ‘거짓’ 만큼이나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말’이다. 언어 자체가 거짓, 즉 분열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동어반복적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인간, 즉 사회적 인간이 되지만, 언어는 지시대상과 기호를 나누고, 기호는 기표와 기의를 나눈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셀 푸코는 이성이 지배하는 듯한 문명이 광기를 부추킨다고 말한 바 있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그의 또 다른 주제인 [말과 사물]에서 말/사물의 분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리 아래 현실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예술의 영역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김도마는 작업 초창기부터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그 말이 지닌 정보 자체 보다는 말이라는 언어 형식의 단어와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집중하고 그것들의 호흡과 정보와의 유착성 혹은 완전한 배반성을 읽었다.’고 말한다. 사회적 인간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적 소통,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의 무대, 정보혁명과 더불어 더욱 늘어가는 ‘--현실’들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키워드를 내장한다. 고대 시절부터 알려진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크레타 사람이 크레타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고 했다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 그것이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호명한 인조인간 피노키오도 고전적인 예가 될 것이다. 앞으로의 작업은 진실이 분열되는 강도가 더 강해지리라 본다. 김도마는 만약 이 작업을 계속 한다면 스케일을 더 크게 해서 환조같은 효과를 더 줄 것이며, 내부에 많은 평면을 품고 있는 조각은 온 사방에 코가 삐쭉거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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