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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화 / 나를 향한 여정

이선영

나를 향한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서국화는 자타가 인정하는 산 좋고 물 좋은 환경에서 작업할 기회를 얻었지만, 이 좋은 소재들을 굳이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대상을 살아있는 듯 묘사하는 기술 또한 갖추고 있기에 더욱 의미 있다. 고개만 들면 보이는 수려한 광경들을 무의식에 깊이 쟁여둘 따름이다. 하기야 거기는 작가의 고향이기에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무시간적이기에 무엇이 얼마큼 쟁여 있는지 모를 무의식은 예술적 영감의 주요 출처다. 하지만 무의식 그자체가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작업은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물론 그것이 물에 잠긴 섬의 모형으로 알려진 정신분석학적 도식을 따라 꼭대기를 향한 승화일 필요는 없다. 서국화의 최근 행보는 좀 더 아래로 내려가길 서슴치 않는다. 퇴행이라는 말은 명확한 방향을 전제하는만큼, 역행이라고 해두자. 미술을 배우기 위해 청소년기에 홀로 서울행을 감행했고 이후에도 작업을 쉰 적이 없는 이에게 기법이란 따로 의식해야 할 차원은 아니다, 



10:34:15.91, (시간드로잉)(이하 모든 사진출전은 예울마루)


그동안의 작품이 서양화 부문으로 종종 분류되곤 했다는 작가는 자신의 모태 언어에 더 집중하면서 오해를 걷어 내고자 한다. 먹에서 색을 길어내는 작업도 그 중 하나다. 작가에 의하면 먹에는 갈색부터 푸른색까지 여러 빛깔이 내재해 있다. 작업은 여러 색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먹 자체에 잠재된 수많은 색을 현실화하려는 것이다. 먹에 섞는 아교는 색감을 다양하게 할 뿐 아니라, 종이에 스며들고 남은 흔적이 쌓여 또 다른 형상이 된다. 드로잉에 기반한 작업에는 먹과 유사한 매체인 목탄이나 연필 등도 자주 사용된다. 먹의 파트너인 종이도 미디어로서의 느낌을 살린다. 갑옷을 만들 정도로 튼튼한 두꺼운 구김지를 여러 장 붙여서 활용한 작품의 경우, 먹이 더욱 깊이 있게 전달된다. 먹을 계속 올려도 두툼한 종이가 받아줄 뿐 아니라, 종이의 요철에 스미는 먹의 느낌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특별히 액자나 표구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평평하게 걸려 있는 작품들도 보인다. 


작가는 종이나 먹 등의 재료를 중성적으로 사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매체에 대한 투명한 접근과 불투명한 접근이 있으며, 양자의 소통 양상은 다르다. 전자가 작가의 의도를 투명하게 전달하는데 방점이 있다면, 후자는 작가가 작업에 스며들었듯 관객도 스며들기를 바란다. 후자는 자신과의 소통을 더 중시하며 보여주기식의 작업을 지양한다. 후자는 생애 처음 참여하는 레지던시에서 완전히 자신을 바꿔보겠다는 결심과 관련된다. 그렇다고 관객과의 소통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기존에 해왔던 민화 스타일의 작업과 오브제 설치 작업에서 작가는 관객과 보다 직접적으로 소통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신을 0의 상태로 리셋하고 싶다고 한다.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Le Degré zéro de ľécriture)를 떠올리는 태세 전환이다. 최근 작업은 예술의 기본으로 되돌아가려는 듯 선 긋기, 점찍기 등이 수없이 행해지는 몰입의 장이다. 



시간드로잉(전체), 57x76cm 10ea, 종이에 연필



moon, 55x55cm, 2ea, 한지에 먹



moon (부분) 


작가는 작업실에서 ‘하루를 온전히 있을 때 선물받는 듯하다’고 하면서, ‘여기서 오직 나에 나의 행위에 만족함’을 통해 ‘본연의 예술 깨달은 듯’하다고 말한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자신이 지금 하는 스타일의 작업을 하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늘 해왔던 예술이 또 다른 차원에 진입하면서 예술과 작업에 대해 새삼스럽게 의식한다. 반복적인 행위는 의식을 비워내 이성의 활동을 잠재우고 무의식을 활성화시킨다. 이 최면적 효과는 숙면이 주는 장점과 유사할 것 같다. 정신분석학은 반복에서 똑같은 상처를 다시 받지 않겠다는 방어적 기제부터 무기물로부터 출발한 유기체가 다시 무기물로 회귀하려는 죽음 충동을 보기도 한다. 확실한 진전이 없는 반복은 낭비이며, 기계적 반복은 소외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해 하면서도 일상이 깨지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유기체의 삶에 있어서 재생산의 비중을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매일 밤 서국화를 심연으로 데리고 갔던 선들로 이루어진 검은 원, 또는 구멍은 충동이라는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깔려있다. 정신분석은 인간 삶의 슬픔과 즐거움을 설명하기 위해 쾌락원리와 열반원리 등 다양한 가설로 세운다. 로렌초 키에자는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에서 라캉의 이론에서 주체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라는 세 질서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호균형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현실에서 온전히 개체화 될 수 있다고 본다. 주체는 그 존재 자체가 큰 도전이다. 누구에게나 주체는 자명한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죽음은 ‘스스로를 개체화할 수 없는 주체의 무능력의 결과’로 해석된다. 정신분석학에서 죽음에 대한 비중은 매우 크다. 죽음은 삶의 끝자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걸쳐, 심지어는 쾌락 한가운데서도 맹위를 떨치는 죽음의 힘을 강조한다. 



무제,150x215cm, 7ea, 한지에 먹



무제 (부분)



무제140x70cm, 3ea, 한지에 먹


‘삶이 불확실하고 덧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다는 사실’(라깡)이 죽음충동이라면, 그 충동은 삶 전반에 걸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렌초 키에자는 ‘모든 충동은 궁극적으로 죽음충동’(라캉)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로렌초 키에자는 충동들이 사물에 도달함 없이 사물을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런 긴장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형태와 의미를 향해서 움직여야 할 선들이 ‘상실된 대상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에서의 죽음 충동은 서국화의 작품의 일단을 설명해준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 도달한다는 확신도 없이 둘레를 무한히 선회하는 행위는 소진을 야기한다.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채워질 여력을 마련하는 행위는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내포한다. 부정적인 면은 소진의 끝이 죽음일 수도 있고, 말그대로 소진이기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죽음 본능을 마조히즘적 반복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 이유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죽음의 비중이 큰 만큼 삶과 분리될 수 없다. 로렌초 키에자는 [모나드론]을 인용한다; ‘완전한 생성도 전적인 죽음도 결코 없다. 우리가 생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펼침과 성장이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접힘과 축소인 것처럼 말이다’(라이프니츠) 이번 전시의 부제인 [적묵(寂墨), 안도와 불안의 공존]은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에 대해 안도하면서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불안이 공존하는 작가의 상황을 드러낸다. ‘어제는 죽겠고, 오늘은 살겠고, 내일은...’이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를 조건 짓는다. 반복적인 선 긋기, 점찍기 등이 두드러지는 서국화의 작업은 안도와 불안 모두에 걸쳐있다. 반복은 안도감을 주지만, 차이에 대한 자아의 요구나 주체의 욕망은 불안을 야기한다. 대체로 반복은 안도감을 준다. 기도나 주문, 찬송 같은 종교적 관행은 반복의 효과를 십분 활용하곤 한다. 예술에서 반복은 몰입과 관련된다. 



길(waterway)70x140cm, 4ea, 한지에 먹



드로잉70x145cm, 4ea, 한지에 먹



드로잉 (부분)


몰입해야 작품이 나오는 것이지, 작업을 통해 몰입이 가능한 것인지 선후의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익을 내기 위해 재미라는 요소로 무장한 컨텐츠들이 폭주하는 현대적 환경에서 무엇인가 하나에 몰입하기는 힘들다. 작품에서 작가의 우선권을 배제하자는 현대미학의 한 경향도 있지만, 작품과 작가의 관계는 각별하다. 작가가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할하는 것은 아니어도, 적어도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지만 일단 시작하는 자, 또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지 모를 것을 마무리하는 이가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요즘의 작업이 ‘나를 향한 여정’이라고 말하는 서국화에게 ‘나’는 작품의 확실한 출발점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곳에 존재한다. 돼지 꼬리를 닮은 꼬불꼬불한 선들이 명확한 궤도 없이 빙글빙글 도는 작업들은 수행적 과정의 궤적이며, 만다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의식적 실행의 와중에도 여백에 대한 작가의 감각은 비슷한 크기의 형상을 종이 위에 남겼다. 


짧게는 6시간 30분에서 길게는 12시간까지 0.3mm 가장 가는 샤프로 끝없이 선을 그었다. 시계를 보고 작업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 끝나면 비로소 시계를 본다. 끝없이 이어지는 선을 타고 돌아다니며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다. 점을 찍는 작업처럼 이 작업도 에너지가 이어지는 과정이며, 이게 끊어져 다시 시작하려면 힘들다. 이렇게 이어진 시간이 쟁여진 공간이 바로 작품이다. 서국화에게는 둥글둥글한 형상에 대한 애호가 있다. 마치 콤파스로 그은 것같이 둥근 형태지만, 외곽선은 분명치 않다. 둥근 형태는 자아의 상징이라는 융 심리학의 해석이 있다. 이 시리즈로 10여 개가 걸린 작품에는 그림에 적힌 시간만큼 충만하게 살아낸 자아의 흔적이 있다. 큰 원을 여러 개 겹쳐서 검게 칠한 작품은 작업 중인 자신의 뒷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한밤이나 새벽이 포함되곤 하는 시간대는 작업을 하는 중이라면 가장 촉이 살아나는 시공간이 아닐까 추측된다. 



장도낭만,180x135cm, 2ea, 한지에 먹



장도낭만 (부분) 



장도낭만2, 장도몽1, 70x145cm, 3ea, 한지에 먹


가장 피로하면서도 피로를 잊게 되는 순간, 작업이 끝나야 비로소 몰려드는 피로...그것은 몰입적인 작업을 하는 이는 늘 겪는 순간이다. 재현주의에 기초한 조형적 언어는 시점과 종점이 확실하지만, 무수한 반복과 그 반복에서 비롯되는 차이들의 집적 또는 펼침에 기초한 작업에서 작품 또한 불확정적이다. 불확정성은 무지나 맹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실재에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낳은 결과다. 코드의 제국주의가 범람하는 현재, 실재는 예술의 지향점이 될 수 있다. 실재는 확실하지 않고 심지어 ‘불가능해 보이기에’(자끄 라깡) 더욱 그렇다. 현대예술은 그자체가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의 역사다. 물론 이러한 열림은 무의미, 생명과 비교하자면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단계일 수 있다. 안전한 자기동일성의 확보, 그것이 생명의 기본 아닌가. 하지만 그러한 생명도 어느 순간은 타자를 향해 열려 있어야, 즉 자기동일성을 상실하는 순간이 있어야 종을 이어갈 수 있다. 


생명의 원리는 예술적 작업의 지속성과 생산성과도 비교될 수 있다. 자신의 경계를 여는 위험하지만, 이러한 모험적인 과정 없이 아름다운 생명으로 가득한 자연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연은 다양성을 통해 예술에게 아름다움의 모델을 제시해왔다. 누군가는 자연이 한결같고, 그래서 지루하고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다양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문화가 차이가 아닌 차별에 의해 작동하는 한 다양함이란 허구적이다. 누구에게는 사이비 다양성을 구가하는 문화보다는 차라리 자연의 다양함이 흥미롭고 가치 있다. 한국화를 전공한 서국화는 자연친화적인 면에 있어서 일단 유리한 위치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화에서도 걷어 내야 할 가식들이 많다. 자기 보호를 위한 수많은 문턱이 한국화의 상시적 위기를 불러오지 않았나 하는 반성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예술을 하기로 처음 마음먹었을 때의 초심을 계속 유지하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장도낭만 (부분)



장도몽, 70x145cm, 한지에 먹,금박



장도몽 (부분), 70x145cm, 한지에 먹 금박


초심 유지야말로 자연적이 아닌 의지의 문제이다. 서국화는 짧다면 짧은 레지던시 기간 동안 그 초심을 찾기로 했다. 미술 또한 조형적 언어라면 아예 말을 배우기 이전의 단계로 자신을 되감기 한다. 흡사 만져질 듯 털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호피 무늬를 이루던 능숙한 선들을 정처 없는 궤도를 그으며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채운다. 그 결과물이 충만일지 공허일지는 객관화될 수 있는 지표는 없다. 지난 7월 프리뷰 전시 때의 작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처럼 방향성은 없다. 유리 부이와 나침반으로 작업한 그 작품은 히치콕의 영화제목에서 차용한 것으로, 작가에 의하면 ‘북북서라는 방위는 나침반에도 없는 방위이며, 일종의 환상을 의미’한다. 기하학적 의미의 점이기 보다는 꽃잎을 닮아 반투명한 둥근 형상들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때로 풍경을 연상시키는 배치로 정렬된다. 산이나 길을 연상시키는 ‘선’은 점들 사이의 여백으로 이루어졌다. 


수많은 농담으로 이루어진 먹 점은 그만큼의 교차점을 만든다. 반복적 행위는 차이의 계열을 이룬다. 원근법이나 명암법 같이 대상을 재현하는 기법에 충실하지 않은 조형적 요소들은 자연의 외관이 아닌 과정을 모방한다. 그것이 산으로 보인다면 화면을 덮는 얼룩점들은 마치 나이테처럼 그동안의 사계절이나 그 사이에 있었을 크고 작은 사건들을 기입해 왔을 것이다. 작가는 작업을 자연적 순환의 주기와 동렬에 놓는다. 작업과 자연의 등치는 소박하면서도 큰 야먕이다. 형태는 물론, 형태가 안정감 있게 서 있을 바닥 부분을 여백으로 처리함으로서 기존의 가치를 전도시킨다. 여백은 형태의 수동적인 배경이 아니라, 여백이 형태를 만들고 형태를 서 있게 하는 것이다. 서국화의 작품은 고대 원자론자들의 가설처럼, 입자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특히 생성과 소멸의 자리인 공백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이러한 공백은 동양화의 여백과 비슷한 위상을 가진다. 



unknown, 가변설치, 종이에 채색



unknown, 가변설치



타향살이, 가변설치, 현무암 소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가변설치, 유리부이 나침반 전선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부분)


공백 또는 여백과 상호작용하여 형태를 제시, 또는 재현하는 것은 먹이다. 서국화는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먹을 다채로운 색처럼 운용한다. 반투명한 ‘점’들은 겹침을 통해 먹이 만들 수 있는 최대한의 다양성을 펼친다. 퍼즐 모양의 조형적 단위를 설치한 작품은 관객이 자주 참여한다. 먹은 아니지만 먹과 비슷한 계열의 안료들은 ‘블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차이의 감각을 드러낸다. 작업은 다양한 먹색의 변주임을 퍼즐 놀이의 형식으로 비유한다. 한편으로 여백은 퍼즐의 자유로운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임을 알려준다. 번진 빗방울이나 떨어진 꽃잎들이 연상되는 점점이 찍힌 얼룩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과정을 반복한다. 무엇인가 생성될 때 작은 원들은 세포처럼 맹렬히 분열되리라, 시간이 지난 후 그것들은 심연으로 사라질 것이다. 작가는 붓질이 운동하는 과정과 자연적 과정을 수렴시키려 한다. 이러한 작품은 추상적 작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시장 한 켠에 전시된 책가도 형식의 작품들은 서국화의 이전 작업을 추측해볼 수 있는 형식이다. 


화면에 나비들이 가득한 호접몽 이미지는 장도에서의 시간에 대한 비유이다. 나비들 사이로 보이는 금빛 얼룩들은 여기에서 보낸 금쪽같은 시간에 대한 작가의 헌사다. 장도의 물때가 적힌 표 등이 담긴 책가도는 레지던시의 시간 동안 책처럼 켜켜이 쌓인 것들을 표현한다. ‘작업의 시간들이 쌓인 흔적들’은 추상적 작품뿐 아니라, 민화처럼 알려진 유형의 작품들에도 녹아있다. 안개, 물 사이로 길이 열리는 느낌, 바람맞는 대나무 등 장도의 풍경은 재현적이면서도 추상적으로 표현된다. 프리뷰 전시 때도 보였던 민화나 호피도 같은 작품들은 오랜 시간 걸리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만족도가 높음을 알려준다. 긴 시간 동안의 집중이 요구되는 것은 작품에 이미지가 등장하든 아니든 연속적이다. 작업이란 대해에서의 낚시 같은 것이 아닐까. 어부는 매일 고기를 낚으러 오지만 빈손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행운은 그물을 치고 기다리는 자의 몫이다. 작업하지 않는 자는 축복처럼 다가온 행운을 포획하지도, 심지어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반짝반짝 빛나는(부분),가변설치, 몽돌 크리스탈



반짝반짝 빛나는(부분)


제주의 돌을 ‘닮은’ 돌들이 설치된 작품은 장소의 이동에도 나름 새롭게 적응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는 주변적 존재인 돌멩이들을 반 빛나게 한 작품에서도 선명하다. 작가는 이에 대해 ‘우리들의 인생이 귀하게 반짝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크리스털을 붙여 작업했다’고 말한다. 전시장 바깥 공간에 설치된 크고 작은 몽돌들은 물살에 닳고 닳아 둥글게 된 돌을 수집해온 작가의 취향이 드러난다. 자연이 만든, 특히 오랜 시간을 겪어 모서리가 사라진 몽돌의 표면을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채웠다. 이러한 인위적 조치는 예술이 결국 자연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함과 동시에, 둥글려진 형태에 대한 가치 부여의 행위이다. 바닷가의 돌은 작가가 그 시간을 멈춰주기 전까지 파도를 비롯한 자연의 힘을 받아만 왔다. 이제 작가는 수많은 반사각을 가지는 반짝이를 전면에 하나하나 붙여서 그동안 받은 힘을 바깥으로 돌려주고자 한다. 


출전; GS칼텍스 예울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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