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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강 / 색에 잠긴 형태들

이선영

색에 잠긴 형태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콩을 소재로 한 ‘사진’ 작품에 서성강은 단색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번 전시에는 콩을 소재로 사용하였다. 콩은 열량의 공급원으로 인간의 식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물질이고, 단색화는 예술 중에서도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정신의 총아다. 작가는 사진을 통해서 먼 거리에 있는 두 항목을 연결했다. ‘모노크롬’이 아닌, 한국어 그대로 ‘단색화’라고 호명될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정체성을 확보한 단색화의 열풍에 편승하려는 것일까.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와서 다양한 소재에 대한 작품 목록을 축적해온 작가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근 몇 년간의 전시에서 다양한 소재로 색채를 실험하는 와중에 회화적 효과에 근접해 가는 중이지만, 최종 작품이 사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림에 고유한 물감의 흔적은 대상의 변조에 의한 것이다. 단색화에 대한 시뮬라크르이며, 이는 재현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반복과 차이의 위상이 달라진 이래 다르게 평가되고 있다. 




강남콩1



강남콩3



강남콩과 작두콩



동부



그림과 사진의 경계, 이 모호한 영역은 새로움 또는 색다름의 근거지가 되고 있다. 인간과 사회에서 자연으로 눈을 돌린 이래, ‘그림 같은 풍경’에 근접해 왔던 작가에게 다가온 콩 알갱이들의 형태를 색으로 덮으면서 단색화 같은 외관을 가지게 되었고, 작가는 굳이 그 유사함을 피해가지 않았다. 단색화라는 제목은 오히려 그것이 단색화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도 내포한다. 마찬가지로, 콩의 이름과 일련번호를 결합해서 붙인 작품 제목 역시 자명함을 가장한 불확실성을 가진다. 작품 [콩]이 반드시 콩일 수는 없다. 그의 작품에서 말과 사물이 일치되지 않는 변주의 폭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단색화적 외관은 말 그대로 화면이 대부분 단색이라는 점에 있다. 작품마다 여러 색이 여러 비중을 차지하지만, 전체적으로 모노 톤이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작품마다 주도적인 색상이 있다. 대부분의 단색 화가들이 자기만의 색이 있다면, 서성강의 전시 현장은 단색 작품들로 이루어진 다색의 향연이다. 


단색은 현대미술, 특히 추상화로 방향을 튼 현대회화의 평면성을 확보해주었다. 형태가 사라진 회화에서 남은 조형적 요소는 색인데, 색만으로는 차이가 나기 힘들었기에 질감이 중요했다. 그림에서 질감은 대개 화가의 붓터치의 결과다. 붓이 아니라 손이나 기타의 도구가 사용되었어도 마찬가지다. 모더니즘 회화를 미학적 이데올로기까지 올려놓은 이론가와 여기에 해당되는 몇몇 주요한 추상화가들은 특히 이 부분을 공략했다. 세계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한 창조자로서의 화가는 비록 사회로부터는 소외되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영웅적인 주체로 고양되었고, 이러한 주체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붓질이었기 때문이다. 물감의 흔적이기도 한, 눈으로 만져지는 촉각은 형태가 사라진 화면에서 대역을 맡은 셈이다. 붓질은 손가락이 아닌 손의 산물이다. 손가락은 질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코드를 실행하는 주범이라고 하면서, (회화의)‘손적인 것’과 대조한 바 있다. 




렌틸콩



호랑이콩



서성강이 콩이라는 최초의 지시 대상에 가한 ‘손가락적인’ 작업은 사진으로 붓터치에 해당하는 효과를 낸다. 형태는 대개 이야기적 요소와 관련된다. 관객은 그림에서 어떤 형태를 확인하는 것으로 내용을 파악했다고 간주한다. 철학자와 화가는 사과를 그린 그림을 보고 ‘저건 사과야’ 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대중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자체를 주목하라고 했다. 예술 또한 대상이 아닌 담론에 방점이 찍힌다. 추상과 구상, 사진과 회화를 모두 아우르는 미학적 담론은 재현주의다. 재현주의가 구성되고 해체되는 일련의 질서를 전제하는 이상, 그것은 역사를 가진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유사성(resemblance)의 역사를 살펴본다. 그것은 한 문화의 질서, 즉 사물들 상호 간에 마주 대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은폐된 조직망을 탐색하는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오랫동안 회화를 지배해온 원칙은 유사함과 재현 사이의 등가성이다. 


하나의 형상이 어떤 것과 닮으면 그것으로 ‘당신이 보는 것을 바로 이것이다’라는 분명한 언표가 끼어든다. 푸코에 의하면 눈속임 기법(trompe-l'œil)은 유사성을 통해 가장 무거운 확언의 짐을 지운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한 것(상사, similitudes)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나가는 계열의 선을 따라 전개된다. 푸코의 분류에 의한 ‘비슷한 것’은 그 어떤 참조 틀로도 고정시킬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진으로 ‘만든’ 단색화는 단색화와 비슷한 것일 따름이다. 확언을 통해 닫혀있는 재현과 달리, 비슷함의 계열은 열려있다. 이전에 이미 식물계를 소재로 비슷한 작업을 해왔고, 이번 전시는 콩이지만 서성강의 소재는 열려있다. 사진의 경쟁력은 광범위하게 널려있는 소재의 수집 아닌가. 




서리태 배경에 종콩



서리태



서리태2



서리태3



서리태4



서성강의 단색화 또한 재현에 관한 현대적 담론을 따라 그 안에 담은 여러 지시 대상의 확실성을 대폭 삭감한다. 콩을 찍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대개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조형 언어의 힘을 더 키워서 원래의 지시 대상을 덮어버린다. 서성강의 단색화는 작품의 내용과 연관되는 형태보다는 감수성 그 자체인 색채를 중시한 경향을 현대 회화와 공유한다. 중요한 것은 질감과 연동된 색감이다. 가령 콩을 찍은 작품인가 보리를 찍은 작품인가에 따라 같은 색도 다른 색감으로 나타날 것이다. 같은 콩도 배치나 밀도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조형의 단위소라고 할만한 것이 큰 경우에는 명암과 그 반전 등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질감이 나타나고, 그와 연동되는 색감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수많은 변형을 거쳐 곡물 특유의 알갱이의 느낌이 해체된다. 어떤 것은 거의 빻은 수준이다. 여러 곡물 중에서 콩을 선택한 이유는 입자가 커서 명암이 살아 있기에 다양한 변화가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색을 입히는 방식에 따라 자갈처럼, 현미경 아래의 미시 생물처럼, 임의적인 패턴처럼, 표면에 난 균열처럼, 촘촘한 그물망처럼 보인다, 색감에 따라 전혀 다른 대상의 껍질처럼(주황색의 경우 귤껍질 같은), 초록색의 경우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콩은 콩이라는 지시대상으로서의 확실성을 잃고, 가벼운 기포부터 단단한 물질의 표면같은 양상으로 거듭난다, [콩-3-2-1]의 경우 검은콩의 모임같은 재현적 특성이 확실하다. [콩8]의 경우 콩알 하나하나가 보일 만큼 성글게 배치되어 있고, [콩-9]의 경우 전경과 후경 사이에 입자의 크기가 확연해서 원근감이 느껴진다. [콩 38-6]은 색을 여러 층으로 입혀서 미지의 우주같다. [콩-10]의 경우 붉은색 계열로 처리해서 마치 꽃잎이 흩어진 것 같은. 그래서 콩 입자의 느낌이 전혀 안 날 정도로 형태가 사라진다. 보색으로 처리한 콩의 경우 꽃밭 같다. 작품 속 콩은 명확한 대상의 광학적 효과를 반전시켜 최초의 출발을 불확실하게 한 결과다. 




종콩1



종콩2



쥐눈이콩 배경에 종콩1



쥐눈이콩 배경에 종콩2



일정한 크기의 사각 공간에 자유롭게 움직이는 형태들을 담은 작품들은 각각 다른 밀도로 인해 물질의 입자부터 천의 문양 같은 느낌까지 천차만별이다. 과정이 복잡하여 작가로서도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작품으로 태어나는 순간에 반복은 차이를 각인한다. 그 정도의 변형이면 사진이 (그림에 비해) 객관적이고 투명한 매체라는 상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곡물들은 대상의 재현이면서도, 단색화에서 색의 특이성을 부여하는 절묘한 질감의 소재로 특화된다, 하지만 서성강의 작품은 사진이기에 보이는 이미지와 상관없이 물리적 표면은 매끄럽다. 곡식의 종(種)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입자는 평평한 화면에 가득히 담기면서, 화가의 촘촘한 붓질 같은 질감으로 그림 같은 효과를 낸다. 사진 작품도 그런 효과가 가능하다는 것은 화가에게는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만큼이나 자극을 줄 수 있다. 물론 서성강의 작품이 단색화의 자동생산이라는 것은 아니다. 


작가조차도 똑같이 반복할 수 없는 장치를 해놓았다는 점에서, 회화에 버금가는 매체적 속성을 부여했다. 작가는 ‘수도 없는 반복과 되돌림을 통한 데이터는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같은 원본 데이터로 완성된 작품과 동일하게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뿐 아니라 식물을 소재로 한 이전의 작품에서 시도한 색채의 변화는 ‘디지털 사진의 최소 단위인 픽셀과 픽셀의 이산적인 수치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많은 영감을 받았고’, 여기에서 ‘단색화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고 밝힌다. 기존의 작품에서는 ‘형태를 이루는 사진이 갖는 고유의 특성을 온전히 유지하려 했다면, 이번 단색화는 형태가 다소 변형된 조형성을 채택했다’고 하면서, 대상의 반영만큼이나 조형적 변형을 강조한다. 사진이 발명된 당시에도 미술은 초상화에 관련된 재현적 작업에만 타격을 받았지만, 이후 사진의 영향력은 시각적 무의식에 깊이 스며들었다. 




쥐눈이콩1



쥐눈이콩2



쥐눈이콩배경에강남콩과 작두콩1



한편 서성강의 작품을 단색화와 무관하게 사진으로만 본다면, 콩 알갱이 형태가 살아있는 음식, 가령 콩 통조림 등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래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진보했고, 곡식에 대한 인상은 늘 알맹이가 가득 쌓여있는 모습으로 각인된다. 논이나 밭 등 농사를 짓는 장 자체가 추상적이다. 그것은 숲이나 정원과도 다른 본격적인 생산의 장이다. 대량생산에 대한 최초의 모델을 제공한 것이 바로 곡식이었을 것이다. 원래 곡물 자체가 열매이자 씨앗이다. 씨앗은 앞으로 자신이 성장해 나가야 할 환경을 품은 채 있다가 습기와 온도 등 생태적 조건이 되면 싹을 틔운다. 조건이 안 맞으면 씨앗인 채로 수 천 년을 그냥 존재하기도 한다. 고대의 유적지 등에서 발견되는 씨앗들이 그 예다.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현실화를 기다리는 잠재성을 말한다. 작업은 씨앗의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씨앗은 소우주다. 


감 씨 같은 것을 잘라보면 씨앗 안에 작은 나무 형태가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때가 되면 접힌 것 들은 펼쳐지고, 다시 때가 되면 접혀진다. 들뢰즈가 [주름]에서 개진한 바 있듯이, 씨앗뿐 아니라 만물의 생태가 그렇다. 곡물은 씨앗의 위상을 가짐으로서, 앞으로 펼쳐질 대우주를 품은 소우주가 된다. 작가는 이를 의식한 듯 성운성단의 모습으로 콩을 배치하기도 했다. 단색화를 포함한 추상회화의 역사는 현대 물리학이 시작한 세계관의 혁명을 반영한다. 추상회화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칸딘스키는 자신의 책 [점 선 면]에서 ‘핵의 붕괴는 완전히 물질주의자적인 세계상의 붕괴와 같은 것이다’고 말한 바 있는데, 장 뤽 다발이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지적하듯이, ‘진실은 시각의 피안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전자(電子)와 같은 미세한 규모이거나 무한한 우주적 규모이기도 했다.’ 서성강의 작품에서 중심에 밀도가 있는 배치는 핵폭발이나 세포 분열 같은 모습이 연상된다. 특히 입자가 큰 콩의 경우 형태와 바탕, 중심과 주변의 구별은 선명하다. 여기에 형태의 변주를 통해서 지직거리는 듯한 파동을 보여준다. 




쥐눈이콩배경에강남콩과 작두콩2



큰작두콩과 흰강남콩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진 우주에 대한 상이자 물질과 에너지가 수시로 호환되면서 생성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본래의 단색화가 색과 붓 터치라는 형식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서성강의 ‘단색화’는 주체까지도 포괄하는 씨앗을 소재로 해서 소우주와 대우주가 연관된다는 거대 서사를 설득력 있게 펼친다. 정보혁명이 야기한 시각적 생태계에 함께 몸을 담그고 있는 화가와 사진가는 방점이 틀릴 뿐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적인 그림이냐 그림 같은 사진이냐를 떠나서, 공기처럼 편재하는 현대적 시각 환경이 무의식적 차원에 가하는 공통의 영향이다. 그렇다고 회화와 사진이 동등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영향은 훨씬 더 크다. 도시적 환경의 크고 작은 스펙터클을 채우는 것은 거의 사진들이다. 하지만 사진도 차이를 만들어내야 하는 예술적 국면에서 그보다 더 오래된 시각 전통이었던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근대성에 대한 대응과 도전도 먼저 겪었던 그림의 문법은 현대의 시각 환경만큼이나 중요하다. 소비가 아닌 생산의 국면에 있는 누구라도 사진 이상의 무엇을 이미지에 묻게 되며, 미술의 역사에는 그러한 질문과 대답이 담겨있다. 서성강의 작품이 단색화의 시각적 효과만을 사진적으로 재현한 것이라면 재미있는 아이디어나 기술에 머물렀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회화는 3차원적인 사물을 2차원으로 보여주지만, 추상미술이 등장하면서 차원 간의 상호관계나 긴장은 사라졌다. 그렇게 해서 회화는 순수성이나 자율성이 확보되었지만, 장식을 비롯한 ‘순수하지 못한’ 분야와의 차이를 확보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개념적 장치가 필요해졌다. 그러한 개념이 곧 제도적인 울타리 안에서의 관례가 되어왔다는 점에서, 예술적 순수는 오염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염을 더욱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서 관념적 환원에 의해 빈약해진 순수를 풍부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진도 추상화에 참여할 수 있는 대목이며, 서성강의 작품이 또다른 단색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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