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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썩은 것

이선영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썩은 것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생명연습]의 제목을 그대로 붙인 박훈의 전시에는 생명의 기원이라고 할만한 소재에서 시작한다. 기원이라고 해서 추상적인 것은 아니고, 계란이나 쌀같은 일상 속에서 확인될 수 있는 물질로 구체화 된다. 알은 동물성을, 쌀은 식물성을 대변하지만, 경계가 위반되고 오염되어 있는 박훈의 작품에서 양자는 연결된다. 그는 털들 사이로 난 허연 가르마에서 갈대밭이나 보리밭의 풍경을 본다. 그는 ‘씨를 퍼뜨리기 위해 살을 찢는게 꽃잎’이라고 하면서 핏줄을 잘랐을 때 상처는 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 속 꽃은 생식행위를 연상시키고, 터진 알은 꽃 같은 형상이 된다. 그것은 원래 꽃이 식물의 생식기라는 점, 씨앗처럼 유기체의 맹아가 접혀 있다가 펼쳐지는 알의 성질과도 연결된다. 그가 활용하는 타원형의 알, 즉 계란은 쌀을 확대하면 그 모습이 될 정도로 시각적 유사성이 있다. 그는 쌀과 알을 그리기보다는 그것들로 그린다. 



박훈_1일의 명상법(좌)1년의 명상법(우)(부제-생명연습)_장지에 채색_210×150cmx2_2022


쌀 위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쌀의 흔적만 남기거나 알에 물감을 묻혀 굴려 형상을 만든다. 쌀이든 알이든 인간에게 삶의 온기와 생기를 유지 시켜 주는 필수 물질이다. 이전의 구상적 이미지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추상은 아닌 박훈의 작품에서 쌀이나 알은 근원적인 물질이지 정신은 아니다. 물론 쌀은 이 전시의 가장 큰 작품에 나타나 있듯, 촛불혁명이라는 민중적 서사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민중에게 정신이란 평등한 쌀에 기반하는 물질적인 것이다. 명목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실체적이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다. 그는 어릴 적 어느 저녁에  “이녁(‘자기자신’의 전라도 방언) 목구녕에 밥 들어가는 일이 질(제일)무섭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박훈의 작품에서 동물성과 식물성 사이만큼이나 경계를 오염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는 털이다. 털은 피부의 일부지만, 몸의 안과 밖을 연결한다. 그 어떤 소재이든 주제이든 바닥까지 쳐봐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박훈의 작품은 머리털처럼 다소간 공식적인 부위보다는 가려져야 할 부분에 있는 털을 더 많이 연상시킨다.


인간만의 특징인 머리털이 아니라, 인간이 오래전에 벗어났다고 믿어지는 동물성을 연상시키는 털이다. 사회생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로 규정하지 않았나.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을 집요하게 지적함으로서 차이도 암시하는데, 인간은 여전히 ‘원숭이’지만, 인간에게 털이 없어진 현상에 대한 해석의 중심에는 사회성이 있다. 사회성은 높은 심급에 속해 있다. 박훈에게 사회성은 생물학적인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고 예술은 상부구조가 아니라, 근본적 바탕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는 탈각된 삶의 흔적인 털들을 통해 ‘기록되지 않았던 몸의 역사’를 드러내고자 한다. 작은 방에 전시되는 소품이지만 [백치들] 시리즈를 보면 작가에겐 백치같은 부분, 요컨대 코드화되지 않은 영역에 대한 선호가 있다. 그 시리즈는 방바닥에 종이를 깔고 묽게 푼 붉은 색을 계속 올린 후 뒤집으면 나오는 물들지 않은 백치 같은 우연한 얼룩을 작품의 중심에 놓고 작업한 것이다. 



박훈_1년의명상법(부제-생명연습)_장지에 채색_210×150cm_2022



박훈_1일의명상법(부제-생명연습)_장지에 채색_210×150cm_2022


털은 사라지지 않았다, 털로 대변되는 인간의 원초적 몸은 숨겨지고 억압되며 그럼으로서 부당하게 이용될 따름이다. 다니엘라 마이어와 클라우스 마이어는 [털]에서 어원상으로  ‘Barbarian’ 이란 수염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털은 현대에 와서 적어도 공식부문에서는 억제된다. 저자들에 의하면 권력과 지혜의 상징으로 수염을 기르던 정치가들은 미디어가 주도하는 현대사회에 이르자 수염은 말끔히 제거된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로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숭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다니엘라 마이어, 클라우스 마이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겨드랑이털 조차 한 올 한 올 묘사한 에곤 실레가 시민사회에 일으킨 스캔들의 예를 든다. 체모, 특히 음모의 묘사는 형사처벌 감이다. 저자들은 털이 없는 여성의 성기를 보여주는 포르노물은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들어 털 이미지에 관련된 이중성을 암시한다. 


몸에 대한 검열이 타자화된 성에 미치는 악영향을 의식하는 페미니스트는 몸을 매끈하게 보이는 체모 제거를 거부하기도 했다, 원래 이름으로 돌아오기 전 그의 예명은 박압정이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의 예명으로 어울리지만, 털이 가지는 감각적 차원과 연관해서 유의미한 지점이 있다. 압정은 압력을 뾰족한 지점으로 집중시킨 물건이다. 압력은 여러 가지 감각의 바탕을 이룬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간지러움은 압력과 통증의 신호를 합친 것이라고 하며. 축축함은 온도와 압력의 혼합이라고 말한다. 박훈의 작품에서 털은 단순한 시각성을 넘어 촉각 수용기로 나타난다. 다이앤 애커먼에 의하면 털이 난 피부는 더 얇고 매끈한 피부에 비해 예민하다. 박훈이 깨끗한 종이 위에 털과 피와 살로 얼룩진 형상을 그리거나 만들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정신의 표현이나 대상의 재현이라는 행위를 넘어선다. 



박훈_직립법(부제-들꽃)_장지에 채색_210×150cm_2020



박훈_나의 어머님이시여_종이에 채색_65×48cm_2022



박훈_백치들_종이에 채색_79×54cm_2020


그에게 작업은 치열한 삶의 흔적이다. 삶은 구매만 하면 되는 깔끔하게 포장된 상품 같은 것이 아니다. 유기체로 분화되기 전의 원시적 몸체는 근원적인 물질의 비유인 쌀이나 알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의 작품 속 쌀은 쏟아져 있고, 알을 썩혀서 사용된다. 6개월이나 1년 정도 썩힌 알은 내부가 텅 비워져 가볍고 물감을 묻혀 굴릴 때 많이 못 가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아 싱싱한 알과 그 궤적이 다르다. 그의 실험에 의하면 썩은 알의 궤적은 더 차분하다. 조형적으로는 더 질서감이 있지만, 썩은 것은 다소간 죽음을 떠올리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에게 알은 ‘깨지기 쉬운 삶’을 비유한다. 내부가 다 썩어서 가벼워진 달걀은 어릴 적 자신을 돌봐줬던 멋쟁이 이모 할머니가 양로원에서 맞이한 임종 직전의 모습과 중첩된다. 죽기 전의 미라같은 상태는 어린 작가에게 죽음에 대한 첫 이미지로 다가왔다. 박훈은 그동안 인체의 부분이 드러나는 스타일에서 화면 가득한 털로, 다시 알에 이르는 여정을 거쳤다. 


다소간 선정적으로도 보였던 신체의 구구절절한 묘사를 탈피하여 알집처럼 압축했다. 파일을 열면 그동안의 여정이 다시 재연될 것이다. 몸이 펼쳐진 상태라면 알은 접혀진 상태다. 질 들뢰즈의 [주름]의 관점에 의하면 현실에서 잠재태로의 이동이다. 무엇으로 발생, 분화될지 모를 돌기들이 가득한 잠재태다. 이 상태에서 젖꼭지, 콧구멍, 항문 등은 근접해 있으며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질 들뢰즈가 [앙티 외디푸스]에서 개진한 기관 없는 신체의 상태다. 들뢰즈는 이 잠재적 상태에서 카오스 보다는 유기체로 조직화 되기 이전의 활력을 보았다. 유기체적인 조직화는 늘 억압과 지배로 변한다는 사상이다. 박훈의 작품에는 유기체가 되기 이전, 또는 그 이후의 단편들이 출몰하는 장이다. 그것은 죽음과도 가깝지만, 죽음 같은 질서가 아니라 죽음까지 뻗치는 자유일 것이다. 박훈의 이전 작품 [짐승의 시간]은 ‘교육되기 이전의 무정부상태의 몸’으로,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무엇을 그리고자 했다. 



박훈_갑자기 핀 꽃1_장지에 채색_150×105cm_2019



박훈_갑자기 핀 꽃2_장지에 채색_150×105cm_2019



박훈_열꽃1_장지에 채색_150×105cm_2019


작가는 알을 ‘살의 액화 상태며 잠재태로서의 살덩어리’로 간주한다. 미지의 상태로 펼쳐질 에너지가 잠재된 강력하면서도 징글징글한 형상에서 작가는 생명의 본질을 본다. 관객의 상상과 달리 완전히 썩은 알은 오히려 그 안이 텅 빈, 어찌 보면 부패의 과정을 모두 마친 백골처럼 깨끗한 상태다. 죽음 그자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박훈의 작품 속에 썩은 것은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에 있는 중간적 과정이다. 그는 ‘내 그림은 죽음 직전의 경련같은 것’이라고 비유한다. 쌀이나 계란이라는 식품으로 차원을 돌려보자면, 삭힌 것, 발효된 것과 관련될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이되 싱싱한 것은 아닌 그것은 최소한 색다른 맛이며 누군가에게는 깊은 맛이다. 쌀에는 붉은색 스프레이가 뿌려지고, 알은 이물질(물감)이 묻혀지거나 물감이 담긴 채 박살이 난다. 경계를 위반하는 행위는 불온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현대미술에서도 충격 및 충격을 위한 충격이 많이 벌어졌지만, 경악할만한 사건들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는 현실의 충격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그는 털들 사이로 난 길같은 가르마를 강조하지만, 한 작품에도 수없이 난 ‘길’은 대개 한 개로 한정되어 있는 머리털의 가르마 같지는 않다. 대개 검은 선(털) 사이로 난 밝은 그 부분은 그의 말대로 빛으로 다가온다. 전시 부제의 결정에서도 보이듯,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박훈에게 가르마는 소설가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에 대한 연민과 연결된다. 박훈의 원래 꿈은 감독이었지만, 작가의 개인주의와 맞지 않아 포기했으며, 대부분의 작품들 또한 개인의 내밀한 영역을 다룬다. 하지만 바닥을 친 상태의 인간은 뫼비우스 띠처럼 공동체와 연결된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작품도 공동체와 관련된 것이다. 특히 알과 같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쌀이 그 매개가 된다. 



박훈_열꽃2_장지에 채색_150×105cm_2019



박훈_태몽1_종이에 채색_65×48cm_2019


그의 작품에서 쌀과 알은 깨지고 뿌려지고 굴려진다. 감춰져야 할 털은 목적과 방향이 불분명한 채 증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 신성함, 생존, 타자에 대한 연민, 사회 등의 긍정적 가치와도 연결된다. 가령 [태몽] 시리즈가 그러한데, 그는 이 작품에서 가르마가 나 있는 털의 무리들과 금줄처럼 드리워진 붉은 선들을 보여준다. 최근 작품에는 우리의 민간전승에 대한 관심도 나타난다. 털 숲 위에 드리워진 핏줄의 그물망, 몸의 구성 요소들이 모여 있지만 유기체로서 조직화 되지 않은 혼돈의 상태다. 작가는 주변 사람이 대신 꾸어주기도 하는 태몽에서 ‘꿈 속 피의 연대’를 본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미 관계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모체에서처럼 자연의 순리에 맞게 이루어진다면, 역사적 비극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차이를 차별로 만들고,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소유관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자연적 양육강식과 다른 점이다. 


작가의 충격요법은 바닥을 치는 듯하지만 그것은 바닥 그자체의 조명이 아니라 반등을 위한 역행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예술은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을 재촉하는 자학 행위에 불과하다. 예술은 바타유나 보드리야르 같은 사상가들이 주장하듯이, 거대한 사치이고 낭비이며 한술 더 뜨기를 통해 죽음과 가까워 지지만, 말 그대로 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확장을 위한 극한의 시도다. 누군가에게는 예술이 그런 역할을 맡는다.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예술은 당대의 지배적 상징계의 질서에 따라 삶을 잘 유지하는 실용주의는 아니다. 보이는 것만 인정하는 실증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잉태와 생존, 그리고 죽음, 이어짐에 관한 근본 법칙이다. 명상법. 파지법. 호흡법. 직립법 등 그의 작품에 ‘--법’이라는 제목이 많이 붙어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비오는 날 중국 산 갈대발 앞에서’라는 긴 부제를 가진 [호흡법]은 발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스프레이로 뿌려 만든 형상이다. 



박훈_태몽2_종이에 채색_65×48cm_2019



박훈_태몽3_종이에 채색_79×54cm_2022


발의 틈새로 눅눅한 공기가 오가는 듯한 이 작품은 열린 경계인 발의 특성과 몸을 비유한다.  화면 전체에 고루 심어있는 털은 육체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이자 공기와 같은 존재다. 작가는 ‘털을 크게 그리면 지저분한 공기 느낌’이 난다고 말한다. 붉은 털은 ‘생의 의지로 충혈돼 피처럼 붉어진 무수한 털과 살’로 여러 작품에 출몰한다. 좌우로 나란히 걸리는 작품 [1일의 명상법]과 [1년의 명상법]에서 붉은 털은 부처의 후광 자리에 위치한다. 성스러운 존재의 아우라와 생명 에너지를 중첩시킨다. [명상법] 시리즈는 목탄으로 간략한 스케치만 한 후에 검정 물감을 묻힌 알을 굴려서 형상을 만든 것이다. 제목 속 1일과 1년은 알이 묵은 시간이다. 1년을 상온에 방치되어 ‘허깨비처럼 가벼워진’ 알이 낳은 형상은 좀 더 잔잔해서 명상이라는 주제를 더 적절하게 표현한다. 작가는 싱싱한 알과 썩은 알의 차이를 어떤 메시지와 연결된 형식으로 보여준다. 


조형적 행위를 통해 차이를 더 극적으로 벌리는 싱싱한 알과 썩은 알은 삶의 두 양태를 은유한다. 그는 ‘신은 왜 생명의 희열과 충동을 주시고 한편으로는 금지 규범과 죄의식을 주시는가’ 묻는다. [명상법] 시리즈는 그렸다기보다는 알을 붓 대신 사용한 행위의 흔적이다. 회화는 몸의 행위를 담는 장이 된다. 박훈의 작품에 의하면 더 깊은 명상은 죽음과 더 가까이에 있다. 부처의 명상적 수행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조건을 통해 금욕과 절제를 실행한다. 후광이 붉은 털로 칠해져 있어 부처 실루엣의 형상은 불타고 있는 듯이 보인다. 번뇌가 몸을 태운다. 붉은색이나 털, 썩은 계란 등으로 그려진 도상은 그것이 종교적 이미지이기에 불경스럽기조차 하다. 하지만 그 털들 사이로 난 길은 가르마이자 길이다. 그의 작품 속 도(道)는 번뇌의 근원인 살을 서서히 또는 급격하게 태워 난 길이다. ‘들꽃’이라는 부제가 붙은 [직립법]은 싱싱한 알로 그린 듯 멀리 나간 선들이 많다. 하지만 여기에는 6개월이나 1년 된 알도 사용됐다. 



박훈_파란만장1_장지에 채색_150×66cm_2019



박훈_파란만장2_장지에 채색_150×60cm_2019


불꽃놀이의 일부를 포착한 듯 아래서 위로 솟구치는 선들이 힘차다. 털이 부숭부숭한 붉은 색 배경을 가로지르는 에너지는 성적이다. 남성 작가다 보니 남성적인 섹슈얼리티라고 해야겠다. [들꽃]이라는 무명의 존재는 민중적 서사와도 관련된다. 다른 대작에서 들꽃은 불꽃이 된다. [파란만장] 시리즈는 알을 깨서 만든 형상으로, 무엇인가 산산조각 난 듯한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탄생 자체에 알을 깨는 아픔이 있다. 정신분석학은 탄생의 사건에서 원초적인 트라우마를 본다. 털들 사이의 검은 점들은 탄생 자체에 새겨져 있는 죽음의 기호들이다. [갑자기 핀 꽃] 시리즈는 털들 사이의 가르마들과 흑점들 외에 베인듯한 상처를 연상시키는 붉은 직선이 보인다. 유기체적 요소는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데. 직선이라는 비유기적인 요소는 이물감을 주며, 유기체에게 벌어진 부자연스러운 사건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받는 상처는 대부분 구조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작가는 구조적 압박에 대해 백치적 전략으로 대응한다.


박훈의 작품에서 털은 편재하지만, 작품마다 다른 분위기가 있다. 작가는 ‘화폭의 선제적 조건에 따라, 기분이나 접근법에 따라, 가르마와 털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게 연출된다. 푸석한 털, 허허로운 털, 질기고 뻑뻑한 털, 유연하고 뻑뻑한 털, 꼬질꼬질한 털, 우아한 털, 관능적이고 탐욕스런 배신자의 털, 치졸한 털, 광기에 사로잡힌 털, 깐깐한 느낌의 털...등등’ 털과 분리될 수 없는 가리마는 ‘살의 길’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몸의 비무장지대’로, ‘산짐승만이 걸어다니는 길 같은 느낌’ 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더럽혀지지 않은’ 길이며 ‘편안’하다. 작품 [열꽃] 시리즈는 어지러운 털들과 가르마들 사이로 정체불명의 검은 점들, 붉은 점들이 산재한다. 화면과 몸을 중첩시켜 왔던 그의 관례에 비추어 본다면 해체의 징후가 역력하다. 목탄으로 굵게 그은 털과 손가락 끝으로 찍은 붉은 점은 열꽃이 핀 피부 같다. 작가는 검버섯을 닮은 이 얼룩들에 대해 ‘순간순간 출몰하는 허무감’ 이나 ‘죽음’이라고 말한다, 



박훈_파지법1_종이에 채색_110×79cm_2022



박훈_파지법2_종이에 채색_110×79cm_2022


작품 [열꽃 2]에서 군데군데 보이는 직선들은 구불구불하며 실루엣이 명확하지 않은 유기적 요소들 사이에서 이질적이다. 베인듯한 상처지만 직선들 또한 얼룩으로 변해간다. ‘검은 입구들’이라는 부제를 단 [붉은 꽃] 시리즈는 ‘꽃이면서 성기’, ‘상처이면서 잉태인 어떤 것들’이다. 검은 털 밭을 바탕으로 그 위에 그려진 붉은 추상 형상들. 피톨, 혈망, 혈맥, 그리고 붉은 꽃들이다. 사실 꽃은 생물학적으로는 양성이지만, 성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에 의하면 여성이다.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비판가들은 프로이트가 여성을 거세된 존재로 본 관점을 문제 삼는다. 남성이 정상이고 여성은 정상의 부재이다. 상처처럼 벌어진 여성은 분류 불가능한 괴물같은 모습으로 남성적 상상에 등장하곤 한다. 검은 구멍, 즉 작가가 ‘어떤 미지의 입구’, ‘검은 입구들’이라고 상상하는 곳은 존재가 나온 곳이며 무덤처럼 다시 들어갈 곳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탄생과 죽음은 탯줄처럼 얽혀 있는 것은 보편적 진리다. 


백주대낮에 훤히 드러나 있는 듯하지만, 결코 자유로워졌다고 볼 수 없는 몸은 앎에의 의지의 기저에 놓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프로이트주의다. 하지만 프로이트주의는 점잖은 주류 시민사회뿐 아니라 진보와 해방을 외치던 부류에게도 의구심의 대상이었다. 몸과 진보의 관계는 몸에 대한 탐구가 민중 서사로 튀는 박훈의 작품 여정에서 자세히 탐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바흐친과 볼로쉬노프는 [프로이트주의]에서 ‘성적’이라는 프로이트의 개념은 생물학주의(biologism)의 정점을 이루는 것이고, 현대의 반(反)역사주의의 압축이라고 단정한다. 그들은 프로이트주의를 염두에 두며, 이 모티브는 오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위기와 퇴폐의 주요 모티브라는 것이다. 어떤 사회 계급이 붕괴의 단계에 이르러 역사의 무대로부터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 그 이데올로기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동물이다’라는 하나의 테마를 집요하게 반복하기 시작한다.(‘인간은 비천하고 기상천외한 하나의 동물류에 지나지 않는다’-니이체) 



박훈_하얀 고요_종이에 채색_65×48cm_2022



박훈_호흡법(부제-비오는 날 중국산 갈대발 앞에서)_장지에 채색_210×150cm_2022


그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정식에서의 ‘사회적’이라는 부분은 완전히 무시된다. 이러한 시기의 이데올로기는 그 무게 중심을 고립된 생물학적 유기체로 옮겨 놓는다. 그리하여 모든 동물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세 가지 기본적인 사건들, 즉 탄생, 성교, 죽음은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 역사적인 사건들과 경쟁한다. 말하자면 그 세 가지 기본적인 사건들이 역사의 대용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러한 시기의 사람들이 너무 차가워진 역사의 환경으로부터 도피하여 생활의 동물적인 측면이 갖는 유기적 온기 속에 은둔하려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주의]의 저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망했을 때도 일어났고, 로마제국의 퇴폐기, 프랑스 혁명 전야에 걸친 봉건 귀족제도의 붕괴기에도 일어났다. 유기체의 심연 속에서 사회와 역사를 초월하는 세계에 자리 잡으려는 지향들이 현대철학의 모든 체계에 침투해 있으며 부르주아 세계의 붕괴와 퇴폐의 징후가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주의]에 의하면, 19세기 말 무렵 철학은 생물학과 심리학을 배합하여 수동적이고 무력한 ‘생의 철학’으로 대체된다. 바흐친과 볼로쉬노프가 요약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생(生) 철학은 ; 첫째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삶이 철학적 체계의 중심에 놓이며, 고립된 유기적 통일체가 철학의 기준이자 최고의 가치가 된다. 둘째 의식에 대한 불신이 때문에 문화창조에 있어서 의식의 역할의 최소화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객관적 사회경제적 범주들을 주관적/심리학적 혹은 주관적/생물학적 범주들로 대체하려 한다. 이것은 단적으로 경제학을 무시하고 역사와 문화를 직접 자연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다. 이상 [프로이트주의]의 논의를 길게 인용한 것은 그것이 정신분석학 뿐 아니라, 몸과 성을 중심에 놓는 사상에 대한 좌파적 단죄의 대표적인 논거이기 때문이다. 몸과 성에 대한 이성과 계몽의 단죄는 다시금 비합리/합리주의의 이항대립으로 지속된다. 



박훈_,붉은 꽃(부제 -검은입구들)_종이에 채색_65×48cm×3_2019



박훈_둥근 잠_종이에 채색_65×48cm×3_2019~2021


피터 웰렌은 [순수주의의 종언]에서 페리 앤더슨은 인용하면서 과도한 자본주의적 합리화가 비합리주의를 낳듯이, 진보주의 또한 데카당스를 낳는다. 칼리니스쿠는 이런 역설에 대하여, 진보와 데카당스는 긴밀하게 서로를 함축하기 때문에, 진보는 데카당스이며, 역으로 데카당스는 진보라고 하였다. 이러한 대립에 대한 근본적인 해체는 철학보다는 예술에서 찾아져야 한다. [프로이트주의]의 기준에 의하면 ‘퇴폐적’인 박훈의 작업은 몸과 해방에 대한, 즉 미시서사와 거대서사의 연결에 대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업에서 털로 대변되는 몸으로부터의 반전을 꾀한 소재는 쌀이다. 이번 전시에서 또 다른 중심축인 쌀 작업은 보다 긍정적이다. 그는 ‘색 입자가 종이 위 오브제에 미세하게 뿌려지고 잠시 후 오브제를 제거하면 남겨지는 빈 종이의 흰색 느낌이 참 고요하고 환한 것’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나의 어머님이시여] 작가노트에 ‘씨앗의 고난과 세월, 풍요를 보편적, 민중적 언어인 쌀로 변형해 본다’고 쓴다. 


쌀과 털은 밥에 붙은 머리카락처럼 이물적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여러 매개고리를 거쳐 연결된다. 그는 ‘햇빛 쪽으로’라는 부제를 붙인 [흰 꽃들]의 작업 노트에서 ‘갓 지은 흰밥에 돌이나 머리카락이 엉켜있더라도, 그리하여 바라봄에 순간 어쩐지 삶이 초라하고 질기고 구차하고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더라도 대부분의 섭식은 계속된다. 어떤 경우라도 생존만이 진실의 꽃이므로...’라고 말한다. 황지우의 시 [신림동 바닥에서]의 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인 [나의 어머님이시여] 시리즈는 종이에 쌀을 배열하여 스프레이를 뿌려 만든 형상이다. 그림 속 허연 액체의 얼룩들도 그렇고, 뿌린다는 행위에는 생식의 의미가 있으며, 이는 논이나 밭에 농사를 짓는 행위에도 개입되어 있는 원초적 상징이다. 나선형 형상으로 드러나는 살의 실루엣과 바깥으로 퍼지는 털은 추석 보름달같이 풍요롭다. 나선형은 원형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되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구조다.



박훈_흰꽃들(부제-햇빛쪽으로)_종이에 채색_150×320cm_2022



박훈_흰꽃들(부제-햇빛쪽으로)_종이에 채색_150×320cm(부분)_2022


쌀은 그가 다루어왔던 몸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파지법] 시리즈는 작가가 흘리지 않고 쥘 수 있는 한 줌의 쌀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가 일일이 세어 본 바로는 2433알 정도다. 그것은 빈손으로 태어난 존재가 ‘어미젖을 뺏기지 않으려는 신생아처럼 생명을 꽉 붙들며’ 살아온 한 인간의 신체적 조건을 말한다. 작업실 곳곳에 켜켜이 쟁여있는 그의 많은 작품 목록들은 ‘악착같이 생명을 꽉 붙들며 계속될 삶’에서 예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알려준다. 길게 배열한 쌀. 바깥으로 퍼지는 털들은 여성 성기를, 그리고 불이 붙고 검은 연기, 또는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에서 생식과 관련된 행위를 떠올릴 수 있다. ‘햇빛 쪽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흰 꽃들]은 촛불 형상으로 배열된 쌀 이미지다. 붉거나 검은 색조와 흰색은 대조군을 이룬다. 털 숲의 길인 가르마도 흰색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흰색은 빛의 위상을 가진다. 타오르는 쌀과 가득 찬 연기는 궁극적으로 밥의 평등을 외치는 민중의 항쟁을 떠올린다. 


박훈은 [하얀 고요]의 작업 노트에서 ‘촛불은 이곳과 저곳, 현세와 내세, 생명과 죽음을 잇는 희미한 연대의 매개물’이라고 말한다. 촛불은 거의 종교적 단계로 승화된다. 종교란 떨어진 것을 잇는 근본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삶의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매운 연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다짐한다. 전남 완도의 작은 섬 태생인 그에게 쌀은 어릴 적부터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그는 어릴 때 하교 후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가을에 수확한 볍씨를 말리는 작업을 했던 일을 기억한다. 멍석에 가득 깔린 볍씨들과 함께한 유년의 햇빛은 그의 몸과 무의식에 수십년간 고여있다가 빛나는 쌀 알갱이들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쌀(볍씨)을 젓는 행위를 담은 영상 [햇빛 쪽으로]도 함께 보여준다. 쌀이 생산되는 과정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는 섭식을 통해 또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고 이는 개인을 넘어 집단적 차원으로 발산된다. 박압정에서 박훈으로 다시 태어난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수렴되는 지점으로 한 발 짝 더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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