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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 공전하는 일상

이선영

공전하는 일상

 

이선영(미술평론가)

 


영천 스튜디오에서 열리는 정진경의 [평평하고 평범한 면] 전에는 전시 부제에 비슷한 의미의 개념어를 병렬적으로 사용하면서 미학적 의도를 재차 강조한다. 평평, 평범, 그리고 면이 그것이다. 평평은 현대사회를 보는 키워드 중 하나다. [세계는 평평하다](토머스 프리드먼)라는 책도 있을 정도다. 평평함은 좋게는 민주주의나 일상을, 나쁘게는 개성 없음, 지루함 등을 떠올리는 양가성을 가진다. 하지만 양비론이 성립되기에 세상은 너무 요동치고 있어, 좋은 해석 쪽으로 더 쏠리고는 있다. 평평함은 세계화와 정보화의 결과다. 그것은 풍요로움도 가져왔지만, 극한적 경쟁 또한 가져왔다. 경쟁이 종종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 평평함은 치명적이다. 한편 예술가란 평평함 속에서도 차이를 길어내야 하는 존재다. 진정한 차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인 평평함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정진경이 주목하는 평평함은 단순히 시시콜콜한 일상의 부스러기라기 보다는 평평한 세상에 대한 시각적 단상이다. 






작가는 그렇게 다져진 바탕 위에서 모종의 사건을 도모한다. ‘면’ 또한 3차원을 2차원으로 번역하는 환영으로서의 화면과 동시에, 중성적인 의미의 면을 포함한다. 추상화가 칸딘스키가 조형의 기본언어를 분석한 책 제목 [점, 선, 면]에서의 그 면 말이다. 형식적인 차원에서 면의 강조는 정진경이 판화를 전공했다는 점과 연관될 듯하다. 그동안 판화 이외의 다른 방식도 실험해 왔지만, 모태 언어라고 할 수 있는 판화는 여기저기에 출몰한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실크스크린처럼 평면적인 것이 특징이다. 환영으로서의 화면은 중요한 것을 많이 담을 수 있었다. 모더니즘이 그림을 텅 빈 캔버스로 환원하기 이전에, 화면은 신화, 종교, 역사 등등을 담아왔고, 최소한 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또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인간, 사회의 모습을 담아왔다. 근대에 이르러 순수예술이 확립되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하나 사라졌을 때조차도 화면은 자율과 자유라는 것을 함축하는 중요한 대상이었다. 


냉전 시대에 이데올로기의 각축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추상미술과 자유세계의 연결고리는 확고해졌다. 이러한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구상은 정치적 선전선동이거나 상업적 대중문화에 복속되는 키치에 불과했다. 이러한 큰 맥락에서 보자면 정진경의 도상은 특이하다. 구체적 대상의 일부인 양 입체감까지 가세된 색을 입힌 형태는 명확한 외곽선과 뚜렷한 색감에도 불구하고 무엇인지 모호하다. 배경을 하얗게 남겨둔 것은 추상의 징후이다. 작가는 작품 속 소재가 무엇이든 그것이 원래 놓여진 맥락에서 떼어내고 분절하여 재조합한다. 올 한해에도 많은 전시에 참여했던 정진경의 다른 전시에서 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 평범한 소재들이다. 연필, 노트, 드로잉북, 드라이기, 콘센트, 쇼핑백, 바구니 등등 대부분 주변에 널린 물건들이다. 그것들은 구체적인 기능을 가진 물건들이지만, 미학적 대상으로는 눈에 띄지 않는 흔한 것들이다. 관객은 하얀 바탕 위에 그려진 것이 뭔지 한참 보게 된다. 작가가 가한 미학적 조치에 의해 비로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한편 일상의 물건들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억울한 면이 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인데 대량생산 되었다는 이유로 폄하되는 것은 그것이 물신숭배에 바탕 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은 대부분 크기도 작아서 단편 속에 단편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정진경의 주된 작업들은 환경의 차원을 아우른다. 작은 그림 속 추상적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단순한 모양새지만 시트지를 활용하여 전시 공간 전체를 캔버스 삼아서 작업한다. 공간을 드로잉 하는 셈이다. 올해 여름 신촌 문화 발전소에서의 개인전에서는 신촌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카페 유리창 전체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실에 걸린 작은 이미지들은 벽이나 유리창에서 확대되고 뒤의 실제 풍경과 어우러진다. 간판용 시트지는 창으로 가득 들어온 한여름 대낮의 빛을 투과하여 색색의 그림자를 낳으며,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그릇 모양의 이미지는 높은 곳에서 바라본 동네 전경을 담아낸 것 같다. 


절묘한 각도는 작지만 큰 힘을 발휘하는 시각적 지렛대 같다. 작가는 그저 일상의 소품들의 나열이 아닌, 평범한 사물이 맥락에 따라 변신할 수 있는 형식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처럼 그림은 영상이나 설치 등으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 [면의 평면화]는 어디선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배치되어있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칠해진 작품들은 4-5가지 색으로 제한된 색과 간단한 형태가 특징이다. 무엇을 재현했는지 모를 형태들만큼이나 색깔 또한 아무런 힌트가 없다. 다만 그것들은 현실로부터 온 단편인 듯 입체감 있게 처리된다. 73x91cm 크기의 캔버스를 여러 개를 붙여서 설치하는 [면의 평면화]에 등장하는 수수께끼의 사물은 시장 한켠에 진열된 플라스틱 바구니들에서 왔다. 작가는 겹겹이 쌓인 바구니들에서 코로나 국면 속 거리두기 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쌓인 소쿠리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든 것은 코로나 시국의 사람들처럼 ‘거리두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학의 주요 방식도 거리두기다. 예술은 일상과 거리두기를 통해 자동반사적인 소통을 문제시한다. 정진경의 미학적 거리두기는 대상의 의미나 기능을 해체한다. 해체는 배경의 처리에서도 나타난다. 배경인 하얀 여백은 수수께끼같은 단편들이 운동할 수 있는 잠재적인 장이 된다. 이러한 잠재성을 현실화 한 것이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하지만 평면 작품 또한 동감이 내재한다. 집합적으로 설치된 여러 개의 작품은 다양해 보이지만 같은 구성 요소들이 다르게 포착된 것일 수 있다. 가령 한 피스에서 분홍색 조각은 다른 피스에서 다른 위치와 각도로 배치된다.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단편은 미지의 것이 되어 붙박힌 듯한 기능과 형태로부터 탈주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토성의 띠처럼 보이지 않는 중력에 의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떠 있다. 머리카락이나 각질처럼 유기적 전체(사물의 경우에는 의미나 기능에 해당)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들은 배경마저 지워져 추상화된다. 


몬드리안의 추상화에서 나무가 했던 역할처럼, 초기 추상화가들이 자연과 같은 중요한 대상을 상징적인 방식으로 추상한 것과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가령 나무는 보들레르의 시에 나타나듯, 자연이라는 신전을 받쳐주는 살아있는 기둥같은 건축적 방식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어떤 기능을 가졌던 플라스틱 제품이 재활용되기 위해 조각으로 분쇄되어 다른 물건으로 재탄생할 때, 애초에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출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얀 바탕은 지워진 일상의 맥락이다. 색 조각들은 다양한 각도로 재배치되는 유희를 통해 많은 계열이 생성되며 예술로 재맥락화된다. 한데 모인 여러 화면들은 공간적 간격으로 시간성을 암시한다. 동영상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수많은 원화들을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어내듯이, 여러 방식으로 이어질 많은 컷들을 깔고 간다. 개별적으로 걸리는 화면들 또한 그자체의 자족성 보다는 단편들의 배치를 보여준다. 




(참고) 신촌문화발전소 전시전경, 2022년 8월.









어디선가에서 온 ‘부스러기들’은 화면에 의해 다시 한번 잘린다. 화면 안쪽에 몰려 있는 구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듯한 구성에도 형태와 형태 사이에 노출된 빈 공간은 이 집적의 불안정성을 암시한다. 정진경의 작품은 배치만큼이나 간격이 중요하다. 환경의 차원으로 구현되곤 했던 이전의 시트지 작업과 비교해 본다면, 벽에 그림처럼 걸린 하얀 사각형은 그자체가 단편으로 나타난다. 단편을 담은 단편인 셈이다. 연두색, 파란색, 붉은색 파편들은 단면을 노출한 단편으로 어떻게 놓여져도 작가가 만들어 놓은 맥락에 자리할 수 있는 평면 작품들은 우연성으로 귀결된다. 전체가 무엇일지 상상하기 힘든 단편들은 관계적 구성이 해체된 상태다. 관계적 구성의 총아는 유기체, 또는 그 방식을 본 딴 체계다. 세계는 평평화되면서 유기체라는 비유 자체를 벗어난다. 이러한 시대의 예술작품 또한 전체에 대한 비전을 결여한다. 예술작품을 통해 해체된 세계는 무의미와 열린 의미 사이에 자리한다. 

  

출전;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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