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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호모 심비우스의 지혜

이선영

공존의 미학

 

이선영(미술평론가)

 


’공존:호모 심비우스의 지혜(Coexistence: Wisdom of Homo Symbious)’는 인간사회에도 큰 메시지를 던져주는 자연을 주제로 대중들과 소통해왔던 최재천 교수의 ‘호모 심비우스’라는 개념을 현대 미술의 언어, 즉 사진과 회화 뿐 아니라 미디어, 설치 등으로 풀어낸다. 전시 뿐 아니라 강연, 워크샵, 작가와의 대화 등 다양한 행사가 40여일(9.1-10.9) 내내 열렸다. 전시와 동시에 진행된 많은 행사들은 작품들과 담론이 서로를 설명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생태와 관련된 주제는 ‘오래된 미래’에 위치하면서 시대마다 갱신되고 있다. 공존은 생물학적이면서도 사회적 차원을 내포하는 생태적 개념을 넘어서 새로움이 창조되는 진화의 법칙이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에서 공생기원설(symbiogenesis)을 소개하면서, 이 이론은 항구적인 공생적 배열을 통해 새로운 생물 형태가 창조되는 것을 모든 고등동물의 주된 진화 경로라고 말한다. 






다른 종끼리의 결연동맹을 통해 좀 더 경쟁력 있는 개체로 진화하게 하는 공생은 진화적 창조성의 예다. 이 설의 창안자인 마굴리스에 의하면 생물은 생존을 위한 경쟁적인 투쟁보다는 협동과 창조성을 통해 더 많은 승리를 거둔다고 본다. 마굴리스는 생명이 전투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결망의 형성을 통해 지구를 장악했다고 말한다. [생명의 그물]은 분화의 증가라는 특징을 갖는 진화는 공생의 연속을 통해 진행된다고 본다. 이러한 생물학의 메시지는 디지털 생태계로 초연결된 현대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7명의 국내 작가와 그룹 야투로 묶여진 국내외의 70명의 작가들(총 24개국 77인 참여)은 최재천 교수의 ‘호모 심비우스’가 화두로 자신의 작품을 재맥락화했다. ‘호모 심비우스’는 ‘경쟁이 아닌 공생에 방점을 두고 인간을 정의하며, 인간은 물론 다른 동물과도 공존하는 인간의 특성’(최재천)을 전면화한다. 최재천 교수는 9월 2일 ‘호모 심비우스의 인류’라는 주제로 강연도 했다. 


공존하지 않으면 공멸할 지경까지 악화되고 있는 생태적 환경은 호모 심비우스의 개념을 더욱 필연적으로 만든다. ‘공존하면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공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둔감한 사회에 대해 던지는 생물학자의 경고는 미술의 언어로 해석될 만한 보편적인 가치로 다가온다. 미술 또한 자연처럼 다양성의 가치를 통해 공존을 표현해 왔기 때문이다. 과학적 언어만큼이나 전문화된 현대미술의 어법은 그 방면에 지속적인 관심과 실천을 보여온 매개자를 필요로 한다. 야투 국제미술전 등의 감독을 통해 생태미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온 평론가 김성호가 ‘2022년 그린 르네상스프로젝트’ 전시 감독을 맡아 공존을 표현하는 작가/팀들을 소개했다. 김성호는 9월 30일에 ‘생태 미술의 공공 기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생태학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의 패러다임은 공공성을 담지한다. 지구 생명체 그 무엇에게도 해당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다. 


단일 섹션에 가장 많은 작가들이 출품한 것은 박스형 프레임에 작품을 담는 형식으로 많은 국가의 작가들이 참여한 야투로, 자연적 소재로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들의 작품은 생태예술의 견본이자, 공생에 대한 공감을 보여주는 연대의식의 발로기도 하다. 작은 공간에 빼곡이 쟁여진 작품/박스들은 그들 역사의 횡단면이다. 1981년부터 충청권에서 시작되어 꾸준히 활동해온 야투 그룹의 아카이브도 함께 하여 단순히 보는 전시를 넘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40년이 넘은 이 그룹의 연혁은 생태적 주제가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차원을 동시에 견인한다. 야투가 시작된 시점인 1980년 초대에 운운되던 거대서사의 종말이라는 지배적 관념을 상대화한다. 팔복예술공장 A동에서 40여일 간 열린 전시 뿐 아니라, 행사 기간 동안에 계속 열린 워크숍, 강연, 작가와의 대화 등은 관객뿐 아니라 참여 작가들에게도 작품의 생태적 의미에 대해 끝없는 질문과 대답을 촉발시켰다. 




강현덕 작품 설치 전경



공생에 대한 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보다 광범위하고 장기 지속적인 관념이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지속가능한 사회란 미래 세대의 번영을 파괴시키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사회를 뜻한다’(브라운)고 인용하면서,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생태운동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평가한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물리학이 다른 모든 과학의 모델이자 은유의 근원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생명과학이라고 강조한다. 계층보다는 연결망을 중시하는 공생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반영한다. ‘자연보호’에서 ‘기후 위기’라는 표현으로의 변화를 보면,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넘어서 인간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 자연이며, 미학과 비유하자면 아름다움에서 숭고로의 변화이다. 자연 그자체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다. 인류는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찾아 우주탐사에도 도전하고 있지만, 지구 바닷속 생물도 다 모른다. 


인간의 힘이 자연과 짝패를 이룰만큼 동등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힘은 더욱 커져 ‘인류세’라는 관념도 생겼다. 커진 인간의 힘은 양날의 칼이다. 생산지상주의는 자연의 가장 큰 적대자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나. 자연은 물론 같은 인간도 대상화하는 것이 인간중심주의다. 단적으로 흑인이나 여성이 참정권 등을 통해 인간의 반열에 오른지가 몇 백 년 안 된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동물은 결국 인간(un homme 불어로 인간의 뜻과 남성의 뜻을 동시에 가짐)이 아닌 존재다. 남성/인간의 관점에서 여성은 결여(프로이트)나 공백(라캉)이다. [철학자들의 동물원]에 의하면 남성적인 담론, 즉 지배 담론은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동물적 존재에 여성을 비롯한 타자들을 배치한다. [철학자들의 동물원]에 의하면 현대성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재성을 확립하면서 과학을 등에 업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근본적 단절을 실현한다고 본다. 


공생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와 착취를 거부한다. 가령 관광 자원화된 자연 속 각종 ‘OO 축제’는 호명된 생물이 떼죽음 당하는 인간중심의 행사다. 인간 사회를 특징짓는 차별은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들이라는 이항 대립으로부터 온 것이다. 자연에는 차이가 있을 뿐 차별은 없다. 인간사회에서 차별은 그것이 축적되고 전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악성이다. 신냉전의 기류와 국내 정치의 극한적인 분열 상황을 보면 언제라도 인간사회는 퇴행할 수 있으며, 그 폐해는 가늠할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이익을 취해가는 비좁아진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항시적인 전쟁만 남았다. 인간끼리의 경쟁이 격화되어 결국 자연도 손상되며 그 결과가 피드백된다. 정치가들이 벌인 전쟁과 자본가들이 격화시키는 경쟁 지상주의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과 자연은 비슷한 운명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자연과 예술의 만남은 내재적이다. 




김유정 작품 설치전경



이 전시의 작품들은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대상화의 대표적인 방식은 재현주의이다. 앎으로서 지배한다는 합리주의의 관점과 유사하다. 예술은 자연을 위기에 빠트리는 지배적 사회에서 타자화되고 있다, 동일자는 자신들의 관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들의 다양성을 주변화하거나 억압한다. 생물학적으로도 종이 다양하지 않은 것은 건강하지 못한 생태계의 징후이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지구의 생물군은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형태로 확장되고 강화된다는 진화의 원리를 강조한다. 브루스 매즐리시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에서 ‘자연 선택은 끊임없이 작용하는 힘으로 인간의 미약한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며 자연은 이것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펼친다’는 다윈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일한 지역에 사는 생물의 분화가 가지는 장점’(다윈)을 논했다.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색다른 아름다움 뿐 아니라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를 일깨운다. 


인간 사회의 진보 또한 다양성을 늘려왔다. 불과 몇십년전만 해도 몇 개 채널이 없는 미디어 생태계를 떠올려 보면 그렇다. 초연결의 사회는 잠시의 단절도 큰 재난으로 만든다. 한편으로 그것은 시장의 확대라고 봐야 한다. 소극적인 소비자의 역할은 여전하다. 그래도 예술은 생산자에 속한다. 그래서 생산자의 위대함과 어려움을 함께 한다. 김성호 전시감독은 생태 미학에 대한 일회적 관심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실천해 왔던 작가/팀들을 여러 지역에서 초대했다. 이 전시는 국내외 자연 생태미술의 역사를 압축하는 큐브 작품들을 선보이는 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의 작품을 필두로 해서, 오래된 집이나 식물을 기억하는 이진과 강현덕, 상품화된 생명과 섭식의 진실을 드러내는 김순임과 손정은. 아름다움의 비밀을 간직한 자연의 모습과 그 존재감을 표현하는 이탈과 이명호, 자연의 적으로 돌아선 인간 이후의 세상을 은유하는 김유정의 작품들로 이루어진다, 

  


1. 이진-오래된 집의 기억

이진은 높아야 몇 개 층 안되는 야트막한 오래된 집들과 동네를 표현한다. 있는 그대로는 아니고 배경이나 장면의 부분을 지운다. 그렇게 지워진 것들이 다른 작품에서 함께 모여있기도 하다. 오래된 동네/집은 자연과 좀 더 친화적이다. 땅을 수십미터 파거나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는 구조가 아니라 지형의 굴곡 면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은 같은 차원에 놓인다. 집은 또한 자아의 연장으로, 오래된 집의 주체와 주변의 자연은 수평적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자연이 그러하듯 그러한 집/동네는 점차 사라져 간다. 공백으로 오려낸 부분은 사라지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진에게 작업은 기억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기억은 상처의 흔적을 닮았다. 현실이 사라지게 한 대상을 예술로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집 인근의 자연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예술에 남겨진 어떤 자연물을 보고 후세대는 그것이 당시의 한반도에 흔히 있었던 종이었구나 하는 날이 올 수가 있는 것이다.   


2. 강현덕—사라지는 식물의 이미지

파라핀이나 유리 파편들로 만들어진 오브제들이 있는 강현덕의 작품은 시간성을 생각하게 한다. 비록 그것들은 진열대나 아크릴 박스에 잘 안치되고 배열되어 있지만, 녹거나 깨지거나 하는 재료의 잠재적 상태는 완전함과 영원함에 대한 예술적 기대를 저버린다. 시간은 완성보다는 변질이나 죽음을 떠올린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소멸시효’를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상대적인 비중은 다르다. 현재의 환경오염은 사라져야 할 것이 빨리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벽에 걸린 평면작품은 반려 식물이나 가지, 상추. 고추 등 텃밭의 식물들을 재구성한 드로잉이다. 미풍에 살살 날리는 장지 위에 최종 이미지로 남는 것은 그린 것이 아닌 그 흔적이다. 여기서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더 빠르게 가속 시킨다. 물감을 분사시켜 칠한 여백은 화면 한가운데 자리했을 사라진 것들을 기념비화 한다. 작가는 특히 사라지는 식물에 주목한다. 사라짐을 통해 남은 것들로 공존의 메시지를 전한다. 

 

3. 김순임—상품화된 생명

김순임이 연출한 정원은 반듯반듯한 구조를 유지한다. 그 출발이 상품에 담겨진 식자재였기 때문이다. 식물들이 놓인 진열대에는 ‘home+farm’ 이라는 문구가 네온으로 적혀있다. 유명 대형마트를 떠올리는 단어가 속해 있다. 정원 자체가 자연과 문명 사이에 있지만 적절한 거리나 관계가 사라진, 즉 문명이 자연을 역전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이제 닭이 아니라 치킨으로 알고 있으며, 그조차도 닭가슴살 등 부위별로 ‘생산’되는 자연은 추상적이다. 야채로 분류되는 식물 또한 마찬가지다. 마트에 가득 진열된 식자재들은 그것이 나는 계절도 장소도 지워져 있다. 작가는 이 식자재에서 추출한 씨앗이나 줄기, 뿌리 등을 화분에 옮겨심어 정원을 연출했다. ‘대형마트에서 온 생명들의 정원을 보여주는 설치’는 식물들이 단순히 소비되는 상품이 아닌 생명, 또는 생명이었던 것을 말한다. 생산자나 유통업자가 자연을 코드화한다면, 작가가 되살려낸 생명은 코드로부터 탈주한다. 예술은 이러한 탈주의 무대를 마련한다.

 

4. 손정은—섭식의 진실

손정은의 작품에는 주방 도구를 연상시키는 스텐레스 소재의 테이블이나 밀폐 유리 용기들이 가득 놓여있다. 그것들은 인간이 치루는 매일의 의식을 낯설게 한다. SNS를 가득 채우는 주된 아이템이 늘 상 예쁜 메뉴판처럼 보이기에 실험실의 표본처럼 자연색이 빠진 ‘먹을 것’들은 입맛 떨어지게 한다. 곁들여진 푸른색도 곧 색이 바랠 조화(造花)에 불과하다. 내용물들은 원래의 형태가 연상될 수 없을 만큼 구겨져 있는 사체들로, 인간의 섭식을 위해 끝없이 희생되는 생물들이다. 실험실이나 주방처럼도 보이는 공간은 생경한 방식으로 치러지는 희생제의다. [강요]라는 제목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의 사체를 먹여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표현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에서 왔다. 상품처럼 같은 용기에 죽 나열된 것들은 먹어야 사는 사실 이상의 것을 말한다. 상품의 회로에 진입한 생명들은 더 많이 고통받고 더 많이 버려진다. 존재가 결국 그 존재가 먹은 것이라면 먹는 존재도 희생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5. 이탈—자연의 아름다움에 내재된 수(數)

금속재료로 각을 맞춰 제작된 이탈의 작품은 무엇인가 생산하는 기계같다. 기계는 입력된 규칙에 따라 일률적으로 생산한다. 그렇지 않다면 불량품일 것이다. 생명 또한 기계라는 사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이 상상이나 철학을 넘어서 본격적인 현실화 가능성이 열린 것은 20세기 이후다. 생명을 포함해서 복제가 열어 제칠 미래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발력 있다. 생명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유전자 기계’라는 정의도 있다.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법칙을 구조적으로 모방하여 창조에 버금가는 생산을 하고자 한다. 이러한 생산이 반드시 산업에 국한될 이유는 없다. 고전주의 이래 예술가들은 자연의 법칙을 구조적으로 모방하려 했다. 이탈은 이 전시에서 자연에 내재한 황금비율을 소재로 했다. ‘꽃, 솔방울, 껍질, 과일, 허리케인, 심지어 나선은하까지 자연계 전반에 걸쳐 관찰되는 비율’인 피보나치 수열이 그것이다. 그의 작품은 자연을 해치지 않고 경이로움을 깨닫게 하는 예술기계인 셈이다.


6. 이명호—자연의 존재감

이명호는 자연 속 나무 뒤에다 캔버스를 설치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는 작업을 한다. 깔끔하고 단순하게 나타나는 최종 이미지와 달리, 프로젝터와 비계 등이 동원되는 작업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 제작에 관련된 아카이브도 제시된다. 캔버스에 그리는 것보다는 짧게, 그냥 사진으로 찍는 것보다는 길게 걸렸을 작품들은 그냥 사진이 아니라 작가가 명명한 바대로 ‘사진 행위 프로젝트’다. 캔버스 천을 뒤에 대면 나무는 잔가지 하나하나가 그려진 듯이 강조된다. 자연의 존재감을 주는 방식이다. 작가는 존재만큼이나 부재도 강조한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긴 캔버스 작품인 신기루 연작은 사라짐에 대한 비유다. 야외에 설치된 캔버스를 통해 나타남과 사라짐에 대한 관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상에 우뚝 서 있는 나무는 인간과 비교된다. 사막 한가운데의 빈 캔버스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 또한 그렇게 존재와 부재 사이에 있다. 이명호는 그 사이를 사진을 통해 기념비화 한다. 

 

7. 김유정—인간 이후의 자연

김유정의 작품 [소리 없는 산]은 옛 공장지대인 전시장소의 특성을 살려 그 지역에서 수집한 쓰레기들을 쌓고, 그 위에 살아있는 식물을 입혔다. 쉽게 만들고 쉽게 버리는 현대 사회는 썩지 않고 쌓이는 폐기물들을 산처럼 쌓아간다. 쓰레기가 많이 발생하는 현대적 환경 자체가 묵시록적이다. 이 쓰레기 산을 한 꺼풀 덮는 것은 테라코타 작업으로 먼지가 많이 발생하는 작가의 작업환경을 완화하기 위해 키우기 시작했다는 반려 식물 틸란드시아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도 살아가는 이 기이한 식물은 한계를 모른 채 증식하는 괴물적 이미지를 가진다. 크고 작은 집기들을 극세사 이불로 덮어놓은 듯한 모습은 모든 것이 다 지나간 후, 그것들이 지나갔다는 것을 기억하는 존재도 다 사라질 즈음 다시 자연에 의해 잠식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비극적이면서도 시적인, 기괴하면서도 신비로운 풍경이다. 그 옆에 걸어놓은 사진 작품들은 식물을 소재로 작업해 왔던 시간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8. 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자연생태미술의 산 역사

12cm 정육면체 규격으로 통일된 국내외 작가 70명의 작품은 그 자체로 다양한 것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광경으로 다가온다. 작지만 밀도 있는 큐브 형식의 작품들에는 개념의 제시부터 자족적인 소우주 방식의 작품까지 각양각색이다. 1981년 창립 이래 ‘자연미술’을 추구해왔던 한국자연미술가협회 야투는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해왔던 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그동안 공주 금강 등지에서 열려왔던 전시 156회는 그들의 역사를 알려준다. 전시장에는 초창기의 아카이브도 포함되어 있다.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자연미술은 이제 세계화되었다. 자연은 가장 보편적인 주제로 국가의 장벽을 넘어 연대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연대뿐 아니라, 세계 곳곳을 이동하며 자연 미술을 펼치는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벽에 붙여진 큐브 형식의 작품들은 유목이 가능한 간촐한 방식으로, 개별작가의 표현이자 동시에 연대를 나타낸다. 


출전; 전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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