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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아 / 몸을 바꿔 되돌아오는 존재

이선영

몸을 바꿔 되돌아오는 존재

 

이선영(미술평론가)


코란의 경구에서 온 김설아의 전시제목 《숱한 산들이 흩어질 때》는 산이라는 단단한 실체의 대명사가 실제로는 미시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우리 속담도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상상력은 오래된 것이고 그만큼 보편적인 것이다. 김설아의 경우 ‘흩어짐’이라는 개념에 현대의 발전주의가 야기한 강제적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 변화가 작가가 나고 자란 고향 땅에서 이루어졌기에, 현대를 포함한 거대서사와 개인사가 맞물리는 지점 또한 생겨났다. 물론 작품 속 다양한 형상들은 개인보다 더 미소한 차원에 있는 것들이다. 작품 속 미지의 형상들은 유기적 생명체의 특징인 주름과 털로 가득하다. 이 은유적 생명체는 유기체가 자기 정체성과 항상성을 위해 필요한 피부처럼 주름과 털을 통해 기능을 확장한다. 존재를 가득 덮다 못해 존재 그 자체처럼 보이는 주름과 털들은 개체와 환경을 나누는 경계 막인 피부의 일종이다. 



아홉 개의 검은 구멍, 무너진 음성(Nine Dark Openings, Broken Sound), Ink on paper, (h)150cm x (w)150cm, 

2020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Commissioned by Asia Culture Center


막은 유기체로 하여금 주변의 크고 작은 충격을 받아내고, 동시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외계로부터 정보와 물질을 받아들이게 한다. 피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외계와의 원활한 소통을 담당한다. 그 경계가 완전히 막혀 있다면 생명이 아닌 물질일 것이다. 생명은 바깥과의 관계를 통해 생멸한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대표적 예는 질병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 국면은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 대재앙이다. 헨리 지거리스트는 『질병은 문명을 만든다』에서 인류 역사에서 있은 두 번의 페스트 대유행 사이에 중세 시대가 위치할 정도로 문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페스트의 발생으로 도시인구의 상당수가 죽어 나가고 도시의 생활 전체가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김설아의 작품 규모는 크지만 소재는 미시적이다. 거시적인 존재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명확하지만, 미시적 존재는 부분이 전체일 수 있다. 


부분이 전체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은유의 또 다른 범주인 제유법에서도 발견된다. 가령 2관에서 전시된 작품 <우리는 먼지 속을 기어갔다>(2022)를 보면, 눈을 닮은 둥근 형상은 가장 대표적인 감각기관인 눈알로 상황을 응시하는 모습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그 자체가 얼굴을 대변하며, 자극에 대해 반응하며 소리치거나 무엇인가를 분비하는 구멍도 된다. 분화되지 않은 미시적 존재는 온몸으로 반응하면서 표현의 강도를 높인다. 미시적 존재에게 피부에 해당되는 것은 세포막이다, 3관에서 전시된 <기억의 막> 시리즈에는 막(Membrane)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막에는 구멍이 있어야 바깥과 상호 소통한다. 구멍 또한 중요한 요소다. 구멍은 자극과 반응의 주요 통로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작가는 인간의 몸은 ‘아홉 개의 문이 있는 도시(바가바드기타)’이며 ‘아홉 개의 구멍이 난 거대한 상처(밀린다팡하)’라는 오래된 말을 유념한다. 



아홉 개의 검은 구멍, 소문(Nine Dark Openings, Rumor), Ink on paper, (h)150cm x (w)150cm, 

2020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Commissioned by Asia Culture Center



아홉 개의 검은 구멍, 징후(Nine Dark Openings, Symptom), Ink on paper, (h)150cm x (w)150cm, 

2020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Commissioned by Asia Culture Center



아홉 개의 검은 구멍, 숨소리(Nine Dark Openings, The Sound of Breathing), Ink on paper, (h)230cm x (w)600cm, 

2021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커미션 Commissioned by Asia Culture Center


작품은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듯이 오랫동안 정성껏 가다듬은 결과물이다. 작품은 그것이 아니었다면 시공간으로 흩어졌을 편린들을 빼곡히 모으고 순차적으로 쌓는 과정이다. 그렇게 해서 달성된 밀도와 강도는 상상의 산물에 실재성을 부여한다. 없는 것이기에 더욱 있음직한 형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작품은 모든 작가들의 꿈 아닌가. 김설아는 재현이 아닌 방식으로 그것을 수행할 따름이다. 작품 속 이미지는 특정 대상을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추상도 아닌 그것들은 지상의 존재들 어느 부분에서 따온 것이다. 그 점에서 김설아의 작품은 괴물적이다. 괴물은 ‘자연적인 것’을 해체하고 난 뒤, 그것의 파편적 재구성에서 나온다. 보르헤스는 『상상 동물 이야기』에서 키메라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일리아스』에서 찾아낸다; ‘이것은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앞부분은 사자를 닮았고, 중간 부분은 암산양을 닮았으며, 마지막 부분은 뱀을 닮았다’ 


동서양에 모두 존재하는 용은 대표적인 괴물이다.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지에 의하면 용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용의 뿔은 사슴의 뿔을 닮았으며, 머리는 낙타를, 눈은 악마의 눈을, 목덜미는 뱀을, 배는 연체동물을, 비늘은 물고기를, 발은 독수리를, 발목은 호랑이를, 그리고 귀는 소를 닮았다. 한마디로 괴물은 지나치게 이질적인 것이다. 이처럼 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차이들의 뒤섞임이다. 세상의 다양한 범주에서 빌려온 단편들과 조각들로 이루어진 하이브리드 방식은 문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오래된 것에 대한 작가의 취향은 순수주의를 고집했던 근대를 지나치고 타임머신처럼 현대에 불시착한다. 동일자의 기준에서 볼 때 분류할 수 없는 존재, 즉 타자에 대한 관심은 오래되고도 새롭다. 줄리언 페파니스는 『이질성의 철학』에서 현대의 타자성(Otherness)에 대한 성찰은 전(前) 현대적이면서 탈(脫)현대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먼지 속을 기어갔다 We crwaled through the dust, Ink on silk,  (h)130cm x (w)115cm, 2022



곰팡이 드로잉_Drawing of Molds



물의 희롱 The Tease of Water, Ink on silk, (h)300cm x (w)75cm, 2017


페파니스는 이 책에서 인간은 철학이 정당성의 메타 서사를 건축할 때, 그 중심이 된 주체로 이해되었다고 지적한다. 인문학은 서구 팽창의 보편화 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가차 없이 차이(타자)를 동일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김설아의 미시적이고도 미지의 존재들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관습에 반대’(페파니스)한다. 김설아의 작품은 직접적인 참조 사항보다는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것들이 불현듯 수면으로 떠오른 경우가 많다. 어떤 냄새든 소리든 형태든 색깔이든 자극이 될만한 요소는 온 우주에 깔려있다. 자극과 결과물은 차이가 있다. 변형은 강력하다. 작품 속 변형에 대한 상상력은 동서고금의 신화부터 카프카 같은 현대적 작가까지 이른다. 변형의 방향도 여러 가지다. 경이로운 존재로 고양되기도 하고 비루한 존재로 퇴락하기도 한다. 김설아의 작품은 상반되는 개념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동된다. 


양방향으로 전개되는 논리인 역설은 작품 제목으로 자주 나타나지만, 몸 자체도 그렇다. 역설적 몸은 뫼비우스 띠 같은 양상이다. 가령 4관에서 전시된 <잊혀진 집들>(2015)이 대표적이다. 뱀 껍질은 무한대를 나타내는 기호처럼 배열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서 단단한 실체로서의 몸 대신 강도의 흐름, 평면성, 생성, 연결, 절단 등으로 만들어지는 몸을 강조한다. 그것은 조직화, 유기체화, 계층화에 저항한다. 그것은 그로츠가 참조한 ‘기관 없는 몸’(들뢰즈와 가타리)의 양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기관 없는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더더욱 살아있으며 다수성으로 가득 찬 몸이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계층화되고 통일되고 조직화되고 위계 질서화에 앞서는 것으로서의 몸을 속도와 강도의 표면으로 거론한 바 있다. 그로츠는 기관 없는 몸이라는 개념을 인간의 몸을 탈자연화시키고 그것을 타자의 몸과 다른 사물들의 흐름이나 분자와 직접적인 관계 속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라고 해석한다. 



사자의 은유 Metaphor ,The Messenger of Death, Ink on silk, (h)120cm x (w)114cm, 2019



사자의 은유 Metaphor ,The Messenger of Death, Ink on silk, (h)200cm x (w)440cm, 2019


작가가 미시세계를 중시하면서 가시적이지 않은 대상들까지 소재로 삼다 보니 존재에 대한 수수께끼는 더해진다. 신이 아닌 인간에게 창조란 금기시된 단어지만, 김설아의 작품 속 새로운 종들은 예술작품을 통한 창조라는 오래된 미학을 실천한다. 의식과 무의식, 정신과 몸, 지각과 기억 등이 총동원되어 수집된 부분들이 모여 있음직한 전체가 되는 것은 바로 작품을 통해서이다. 무엇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은 중요하다. 생명 형태적(biomorphic) 소재는 그에 걸맞는 섬세한 표현을 입고 꿈틀거린다. 김설아의 작품은 해부학이 아니라 생리학이다. 그것들은 유기체가 던져진 환경의 독성에 온몸으로 반응하며, 상처받고 말하거나 소리친다. 김설아는 추상보다는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작가이며, 굳이 없는 것을 꾸며낼 이유는 없다. 삶과 예술에 대한 단상이 제시된 5관의 한 텍스트에 작가는 ‘현재의 진실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 너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외피를 벗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고립된 작업실에서 네가 만들어 놓은 안전한 추상의 세계로 숨지 않아야 할 것이다’라는 인도에서의 은사의 말을 적는다.


조합의 수가 다양하다 보면 이질적 형상이 가능하다. 그림은 그러한 조합이 일어나는 실험실과도 같다. 자연이 행하는 거대한 실험을 작가도 화폭 위에서 실행한다. 추상미술은 아니지만, 추상적 요소는 있다는 것이다. 김설아의 작품들이 원형적 무의식이라고 할 만큼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퍼 올리기 때문이다. 모체에서의 촉감, 반복이나 리듬 같은 요소가 그것이다. 미시적 존재의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밀도를 부여하는 방식도 추상적이다. 동서고금의 오래된 텍스트도 영감의 근원이 된다. 역설적인 제목을 가지는 작품처럼, 추상이냐 구상이냐, 평면이냐 입체냐가 아니라 대조군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 작품은 대조항 사이에서 ‘흔들리는 상들’로 이루어진다. 소재는 미시적이지만, 그것을 담은 작품의 규모는 크다. 건축적인 구조물이나 스크린 크기 대로 늘어나는 영상이 아니라, 털을 심듯이 하나하나 그려내야 하는 형식치고는 크다. 



진동하는 고요  Vibratile Silence, Acrylic on paper, (h)141cm x (w)233cm, 2016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존재는 그 규모에 의해 현실감을 가진다. 밀도와 강도를 유지한 채 큰 규모를 달성하기 위한 작업량은 엄청나다. 도처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모양새는 그것들이 주어진 환경에 밀접하게 반응하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사방팔방으로 뚫린 구멍들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받아들이고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은 예술가의 존재 양태와 비슷하다. 고향을 떠난 이래 수많은 도시들을 전전하며 배우고 작업했던 작가에게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는 것은 민감함을 넘어서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고, 이는 유목적 삶이 특징인 현대사회에 보편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유목은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지만, 그 질은 여러 차원에 걸쳐있다. 현대인은 자의반 타의반 유목한다. 깊이 뿌리내릴 틈도 없고 애써 자리 잡아도 뿌리 뽑히기도 한다. 살아움직이는 듯한 김설아의 작품은 대개 동물성을 떠올리지만, 몸통 가득히 덮여 있는 털들은 식물의 포자나 뿌리줄기같이 생존을 위한 움직임의 흔적을 내재한다. 


모세혈관 같은 선들은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제자리에서의 이동을 감행한다. 뿌리내림에 대한 위기는 물리적인 이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이동 없이도 유목할 수 있다. 유목은 자유이자 강제다. 김설아의 경우 몇십 년에 걸쳐 대규모 산업적 개발이 이루어진 고향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이 작품의 기저에 깔려있다. 많은 관객이 김설아의 작품에서 생명체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변화로 인해 병적인 징후를 가지는 악성 돌연변이를 감지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의 변화가 대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경우가 많았던 학습효과 때문이다. 헨리 지거리스트는 『질병은 문명을 만든다』에서 질병은 비정상인 자극에 대한 신체 장기들의 비정상인 반응들의 총합이라고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과학을 통해 자연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질병에 대한 정복은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인간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언제나 물질적, 사회적 환경에 둘러싸인다. 



기억의 막  Membrane of Memory, Acrylic on paper, (h)85cm x (w)63cm, 2017



독백 Soliloquy, Acrylic on paper, (h)85cm x (w)63cm, 2017


밀접한 상호관계 과정에서 손상이나 감염 등이 발생하면 영아는 선천성 질병에 걸린다. 태어난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아이를 둘러싼 환경은 확대된다. 헨리 지거리스트는 사람이 아픈 것의 원인으로, 그의 경계가 어디선가 허물어졌으며 그 틈으로 침입한 강한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환경이나 개인에 대한 법적 권리가 미비했던 시절에 있었을 발전에 대한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치달아왔던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증언 기회가 예술가에게도 온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김설아의 작품에서 흩어짐에 대한 관념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땅과 공기와 물, 그리고 몸에 새겨진 기억으로부터 발원한다. 고향은 실제 뿐 아니라 상상적 차원에서 오염된 것이다. 고향을 떠난 후, 작가는 사막 근처부터 바닷가 마을까지 여러 도시에 살고 작업해 왔지만 박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를 이끄는 발전주의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파괴된 나의 고향은 여러 시공간 속에서 여전히 그 모습을 바꿔가며 찾아오는 기시감’(작가노트)이 되었다. 작가는 그러한 부정적인 요인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부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환경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어떤 섬세한 미지의 존재로서 해석되길 바란다. 김설아의 작품은 예술 이상의 것, 즉 신화와 역사 같은 보다 오래된 서사와 관련된다. 근대의 순수미술의 관념에 의해 줄어든 입지를 확장한다. 순수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또한 오염이다. 김설아의 작품에서 경계의 위반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닌 이유다. 작가는 미술의 자율성을 넘어서 신화나 전설 같은 오래된 전통에 촉수를 갖다 대고 다양한 방식으로 엮는다. 단지 흥미로운 자극이나 현실 고발을 넘어서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 가닿고자 한다. 코란에서 온 전시 부제가 알려주듯, 2008년 25세의 나이에 인도로 건너간 작가에게는 오래되다 못해 원형적인 것에 대한 관심사가 작품에 드러난다. 



잊혀진 집들,  Erased Homes, Acrylic on paper, (h)63cm x (w)85cm,   2015



잊혀진 집들,  Erased Homes, Acrylic on paper, (h)63cm x (w)85cm,   2015


광주비엔날레 등 국내외의 주요 전시에 참여해온 김설아의 이번 전시는 하정웅 미술관의 1관부터 5관까지를 모두 채운다. 최근작 뿐 아니라 그동안의 주요 작품과 자료는 한데 보여준다. ‘아홉 개의 검은 구멍’으로 붙여진 1관은 ‘징후, 소문, 흉흉, 무너진 음성, 숨소리, 분열’로 이루어진 연작들이 전시된다. 아홉 개의 검은 구멍’은 ‘이름 없는 병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이 요구되었던 작가의 고향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것을 추적하고, 고통의 순간에 드러난 형태를 관찰하며,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어 불완전한 것들이 내밀하게 오가는 구멍(두 눈, 두 콧구멍, 두 귀와, 입과 두 배설기관)에 집중’하였다. 신체의 구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포르노그래피부터 정신분석학에 이르는 많은 예들이 있었다. 신화 및 종교적 사유와 밀접한 김설아의 작품맥락에서 보자면 인류학의 예가 적절할 것이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순수와 위험』에서 오염과 금기에 관한 인류학적 분석에 신체의 구멍들의 예를 든다. 신체는 나 자신과 그 밖의 모든 것과의 경계가 됨으로서, 오염 여부의 기준이 된다. 육체는 어떠한 유한의 체제도 표현할 수 있는 도형으로, 모든 상징체계에 기본적인 도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메리 더글라스에 의하면 육체의 경계는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모든 경계를 상징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육체와 관련을 맺지 않은 오염은 거의 없다. 육체에 새겨지는 것은 사회의 이미지다. 인류학은 사회계층 제도라는 질서도 이러한 신체 이미지에 기초하여 상징되는 예를 밝힌다. 메리 더글라스에 의하면 카스트 체계 전체가 하나의 육체를 표상하는데, 머리는 생각이나 기도하는 일을 담당하고, 가장 경멸하는 부분들은 쓸모없는 물질들을 내보낸다. 세탁인, 이발사, 청소부 등의 육체노동자는 육체의 배설기능에 대응하는 것이다. 



눈물, 그 건조한 풍경 Tear Drops, the Arid Landscape, Acrylic on paper, (h)280cm x (w)260cm, 2017



눈물, 그 건조한 풍경 Tear Drops, the Arid Landscape, Acrylic on paper, (h)280cm x (w)260cm, 2017


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예술작품의 해석에 키워드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기괴한 것The Uncanny』(1919)이란 프로이트의 에세이다. 금기로서의 기괴함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을 정교화시킨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앱젝션abjection에 관한 에세이’ 라는 부제를 가진 『공포의 힘』(1980)은 인류학과 종교학, 그리고 예술에 편재하는 앱젝트에 대한 연구다. 그에 의하면 앱젝트란 ‘정체성, 체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경계, 위치,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경계와의 관계 속에 있는 앱젝션은 부정과 긍정이 함께 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대항하는 존재의 격렬하고도 어렴풋한 반항이 있다. 그것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동화될 수 없는 곳에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욕망과 불안과 유혹에 빠지게 한다. 아무도 그것을 모르고 욕망하지 않지만 그곳에서 유희한다. 크리스테바는 앱젝트의 한 면이 육체적인 증상에 다른 한 면은 승화 과정과 나란히 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육체적인 증상은 기권을 선언하는 언어, 동화될 수 없는 이상한 육체 속의 구조, 괴물, 종기나 악성 종양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승화 과정은 명명화되기 전의 것이나, 대상이 되기 전의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분류에 의하면, 증상 속에서의 앱젝트는 나를 침입하고 나는 앱젝트가 된다. 그러나 승화 과정을 통하면 내가 앱젝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앱젝트는 예술과 연결 지점이 있다. 크리스테바는 앱젝트가 ‘죽음의 충동을 삶과 새로운 의미작용으로의 도약으로 변형시키는 연금술’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앱젝트란 결국 예술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예술가’(크리스테바)인 것이다. 1관의 작품들은 구멍 뚫린 연약한 존재들에 빛을 부여한다. 작품 <아홉 개의 검은 구멍, 무너진 음성>(2020)은 달팽이처럼 몸을 만 미지의 생명체 몸통은 빛을 발하는 듯 밝다. 몸통의 털들은 마치 발광하는 빛처럼 보인다. 



숨에서 숨으로  Breath to Breath,   Acrylic on paper,   (h)155cm x (w)75cm, 2015



침묵의 목소리 Silent Voice, 2015, 종이에 아크릴, (h)210cm x (w)77cm, 2015



들었다 Heard, Acryilc on paper, (h)215cm x (w)75cm, 2015


제목 안의 ‘무너진 음성’은 나이가 들어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장애와 관련된 것이다. 건강의 이상은 몸의 정상성에 대해 각성하게 하는 자극이며, 몸은 이 경고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한다. 빛을 발하는 몸체는 민감도를 높인 개체의 상태를 표현한다. 김설아의 작품은 개체에게 필요한 감각기관을 그 모습 자체로 강조한다. <아홉 개의 검은 구멍, 소문>(2020)은 외계와 개체 사이에 뚫린 구멍과 그 바깥으로 확장된 미세한 관들은 어둠 속에서 촉각을 곤두세운다. 어둠 속에서 양 날개를 활짝 펼치고 중심부에서 촉수를 쏟아내는 <아홉 개의 검은 구멍, 징후>(2020)는 어떤 징후를 급박하게 보여준다. 주름진 관들로 이루어진 군체인 <아홉 개의 검은 구멍, 숨소리>(2021)는 수많은 말단의 구멍들로 숨 쉰다. ‘사자의 은유’로 붙여진 2관의 작품은 2017년 가을 요코하마에서 있었던 국제 레지던시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들이 다수 차지한다. 


바다와 바로 인접한 도시의 냄새나 높은 습도로 인한 곰팡이 이미지, 그리고 2013년 쓰나미를 비롯해서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의 세계관이 반영됐다. 작가는 이때의 경험에 대해 ‘순환함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물은 멈추는 자리에서 음습하게 부패하고 죽음으로 변환된다. 곰팡이는 유기체의 생명이 다했음을 알려주는 저승사자처럼 생을 죽음으로 이끌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공포를 드러내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꽃처럼 핀 곰팡이들, 균사의 선들은 인도의 건조한 사막에서의 경험과도 다르다. 균사를 표현한 섬세한 선들은 악기의 현과 같은 모습이다. 작가는 그 현에서 소리를 듣는데, 그것은 ‘거대한 것에 밀려난 작은 존재’의 소리이며 ‘죽음의 표식’이자, ‘사자의 은유’이다. 그것은 ‘언어화되지 못한 소리로 시대의 불안정을 증언하는 타자들의 떨림을 기록하고, 삶의 터전을 잃고 몸을 바꿔가며 되돌아오는 존재를 기억하고자 함’(작가노트)이다. 



무제 Untitled, Watercolor on paper,  76cm x 56cm, 2009



무제 Untitled, Watercolor on paper,  100cm x 66cm, 2013


작가는 거대한 것에 밀려난 흩어진 작은 존재들을 세필로 쌓아 묘사했다. 2관의 주요 작품들은 포도상 구균같은 군체들이 특징이다. <곰팡이 드로잉>은 둥근 입자에서 뻗어 나온 털들이 다른 입자들과 이어져 있으며, <물의 희롱>(2017)은 아래로 내려뜨린 축을 중심으로 입자들과 털들이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 <사자의 은유>(2019)는 입자에서 뻗어 나온 털들로 이루어진 것들이 군집을 이루고, 그것이 산 같은 형태로 배열된다. 관객의 눈과 마주치는 둥근 형태는 시청각은 물론 흡입과 배설 같은 다양한 기능을 연상시키는 기관을 떠올린다. 또 다른 <사자의 은유>(2019)는 여러 봉우리를 가진 산과 많은 지류를 가진 물의 형태로 배열된 군집이다. 관으로 연결된 구체들이 있는 작품 <우리는 먼지 속을 기어갔다>(2022)에서 구체 내부의 또 다른 구멍들이 보인다. 수많은 연결 접속 지점으로 사방팔방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것은 유기체를 넘어선 다양체(manifold)다. 


작은 방 같은 느낌의 3관에는 잔상과 막 같은 내면의 풍경을 표현했다. 디지털 자수로 표현한 작가노트가 추상적 형상의 의미를 보완한다. 자수 텍스트는 ‘너의 호흡으로 태어나 불온하고 파편적인 기억을 가다듬으며...’로 시작된다. 신화와 전설같이 오래된 텍스트를 좋아하는 작가는 씨실과 날실로부터 언어의 탄생을 설명하는 아프리카의 신화를 참조했다. 3관의 작품들은 펼쳐진 모세 혈관 같은 모습이다. 뭉쳐지면 작은 부피지만 펼쳐지면 거대해지는 유기체 특유의 신축성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계에 대한 은유다. <진동하는 고요>(2016)는 핏줄을 연상시키는 관들이 섬유처럼 얽혀 좍 펼쳐져 있다. 그것들은 조용히 진동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을 벌레가 생존하려고 꿈틀거리는 움직임에서 영감 받았다. 몸 전체를 태피스트리처럼 펼쳐서 일렁이는 잔상을 표현했다. <기억의 막>(2017)은 막에 둘러싸인 세포처럼 보인다. 작가는 여기에서 생명체가 짓이겨 얽힌 흉 같은 모습을 보았다. 



무제 Untitled, Watercolor on paper,  106cm x 106cm, 2009



무제 Untitled, Watercolor on paper,  187cm x 147cm, 2010


‘문화적 유전자’라는 개념도 있으니만큼. 세포의 차원까지 영향을 준 사건의 기억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기억은 유전될 것이다. 막의 한쪽 부분부터 풀려나가는 듯한 또 다른 <기억의 막>(2017)은 막 안에 촘촘히 배열된 요소들을 바깥으로 내보낼 듯하다. <독백>(2017)에서 바깥으로 한껏 뻗은 복잡한 외곽선은 독백 또한 소통의 방식임을 알려준다. <눈물, 그 건조한 풍경>으로 붙여진 4관의 작품들은 변화에 직면한 존재에 대한 은유가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공장의 불빛이 더 밝아질수록 ‘느리고 오래된 것들이 먼저 밀려나기 시작’한 고향의 기억을 불러온다. 작가에 의하면 기억은 ‘하나의 고정된 상을 불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동일한 사건을 기점으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해석되는 과정’이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와 흩어진 껍질 같은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래처럼 흩어지는 것에 머물지 않고, ‘몸을 바꿔 되돌아 온다’ 눈물과 뿌리 같은 물은 떠나온 고향을 소환한다. 


뱀의 껍질이 무한대 같은 기호 모양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잊혀진 집들>(2015)은 순환을 포함한다. 하지만 상처와 박탈의 흔적이 강한 도상은 삶의 건강한 지속을 위한 새로움의 주기로서의 순환은 아니다. 산업단지가 세워지면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지역민들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다. 고향을 떠난 이후 여러 도시에서 산 작가는 ‘본래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깃털처럼’ 부유하였다. 작품 <숨에서 숨으로>(2015)에서 작가는 부드럽게 주름 잡힌 애벌레처럼 생긴 도상을 등신대의 높이로 만들어 관객과 마주 서게 한다. 잠재태로서의 애벌레 형상은 무엇으로 현실화될지 알 수 없다. 노랑 빛은 따스한 느낌이며 위협적이지 않다. 작가는 이 작품을 입체작품으로도 구현한다. 입체작품에서 수많은 부드러운 촉수는 철사로 만들어진다. <침묵의 목소리>(2015)는 김설아의 작품 제목들이 역설적임을 알려준다. 작가는 여러 작품 제목에서 반대되는 개념을 엮는다. 



무제 Untitled, Watercolor on paper,  195cm x 120cm, 2013



무제 Untitled, Watercolor on paper,  231cm x 121cm, 2011


가령 미시적 존재는 큰 소리를 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이러한 침묵의 목소리를 듣는 자이다. <침묵의 목소리>라는 작품이 근처에 있기에 <들었다>(2015)는 개념적으로 연결된다. 상처처럼 벌어진 붉은 부분은 소리를 낸 존재의 위험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하다. <눈물, 그 건조한 풍경>(2017)은 물 같은 형상이 위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쏟아져 내려 아래로 확 퍼진다. '기억의 팔림프세스트'로 붙여진 5관에는 잠재적 움직임이 있는 드로잉들과 대화형 텍스트들이 제시된다. <소리와 밀도를 위한 드로잉>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그룹들. 종이 위에 수채로 그린 미지의 단편들은 다양한 형상이며, 시간의 단편을 담은 공간들 같은 모습은 잠재적 운동감을 보여준다. <무제>로 붙여진 수채화들은 오래전부터 그려온 드로잉들. 어디로부터인가 탈각된 존재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화면 중심에 존재들을 배치하여 그자체로도 자족감을 부여한다. 2010년 전후에 그려진 형태들은 이후에 진화를 거듭해 왔다. 


출전;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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