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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 / 부재하는 존재

이선영

부재하는 존재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연주의 작품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죽 걸리지 않는다. 여러 크기의 캔버스가 붙은 벽면은 이야기가 구성되는 판이 된다. 여기에서 작품의 크기는 물리적 크기보다는 시간의 공간적 단면같은 모습이다. 가령 작은 작품은 좀 더 멀리 가 있는 장면처럼 보인다. 시간적으로 그것은 좀 더 과거일 수 있다. 물론 크기가 다른 각 장면을 줌인/줌아웃 하면서 다시 이야기를 짤 수 있는 여지는 많다. 재현적 요소가 있지만, 다소간 두리뭉실하게 표현된 장면들은 만능 퍼즐처럼 유연한 맥락을 만든다. 최근 작품에는 상실감이 지배하면서 기존에 해왔던 작품들도 재맥락화된다. 특히 산의 위상 변화가 극적이다. 작가는 이전에 ‘산지로 둘러싸인 대구에서 익숙하게 바라볼 수 있던 산은 나에게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각인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믿음직한 대상인 산은 영원성을 상징했다. 그 산은 자는 모습과 중첩되면서 인간 사회에도 기준이 되었다.   




[Walk the Walk] 아양아트센터 전시전경 1



[Walk the Walk] 아양아트센터 전시전경 2



[기억분기점;시작] 예술발전소 전시전경 1



[기억분기점;시작] 예술발전소 전시전경 2



아빠잠, 엄마잠_60.6x90.9cm, oil on canvas, 2022



산에 준하는 인간은 부모님 정도일 것이다. 이연주의 작품 목록에는 [아빠 잠], [엄마 잠]도 있다. 하지만 이불을 둘러쓰고 누운 듯한 사람의 실루엣은 양가적이다. 든든해 보이면서도 취약하다. 대부분 뒷모습이기에 더욱 그렇다. 잠과 죽음의 유사성은 낭만주의적 상상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산도 달라진다. 산 또한 지구 심층의 운동을 반영하는 표층의 주름이며, 그자체도 서서히 변화한다, 특히 나무 옷을 입은 산은 사계절의 극적 변화를 전달하는 시간의 메신저다. 하지만 사람이 변할 경우는? 생로병사 하는 생명의 운명, 작게는 상대의 변심에 따른 상처 등은 긍정적이지 않다, 20대의 젊은 감수성은 이제 사물의 명암에서 암(暗) 쪽도 주시한다. 안정적인 것에 대한 욕구 자체가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온 것일 수 있다. 특히 얼마 전 사랑하는 고양이가 갑작스럽게 떠난 이후, 영원성, 안정성, 보편성 등의 가치는 당위가 아닌 희망 사항으로 급변했다. 영원함은 좋은 것일 뿐, 영원하지는 않은 것이다. 


산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색감인 녹색도 최근 작품에서는 더 가라앉아 있다. 덩어리로 보이는 형상들도 육중한 산보다는 작은 언덕 같다. 멀리서 본 산이 아니라 산 안으로 들어간 상황, 즉 숲이나 나무가 더 많이 보인다. 숲이나 나무도 여타의 다른 인공물에 비한다면 안정감을 주는 소재다. 인류의 상상력에서 지상과 천상을 잇는 나무는 세계수의 상징으로도 많이 등장하지 않았나.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뿌리를 내리고 서 있으면서 생의 연약한 불안정성에 대항하는 나무의 위상을 말한다. 나무는 그것이 어제 서 있었듯이 내일도 여전히 서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어진다고 하면서, 나무의 평온한 삶을 높이 평가한 프루스트의 예를 든다. 로베르 뒤마는 시간의 시험 앞에 승리자로서 나타나는 나무를 높이 평가한다. ‘저곳에 인간보다 앞서서, 저곳에 인간보다 뒤에서, 언제나 나무는 있을 것이다.’ 동시에 나무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형상적 변이를 실현한다’(로베르 뒤마). 




각자의 방법, 65.1x53cm, oil on canvas, 2022



이따금, 65.1x53cm, oil on canvas, 2022



포개어진 자리, 162.2x112.1cm, oil on canvas, 2022



나의 하루에는, 90.9x65.1cm, oil on canvas, 2022



강한 것일수록 취약하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그래서 현대는 굳건한 뿌리보다는 유연한 뿌리줄기가 더 설득력 있는지도 모른다. 이연주의 작품에서 나무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으로 나타나며, 태양 쪽 보다는 뿌리를 향한 움직임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연주의 작품은 하나하나를 읽기보다는 구역을 봐야 한다. 가령 [나의 하루에는], [이따금], [각자의 방법]은 제목을 이어주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된다. 고개를 숙인 뒷모습이 포착된 두 개의 작품은 슬픔이 느껴진다. 한 화면이 아니라 각 화면에 각자 그려진 애도하는 듯한 인물은 제목 그대로 [각자의 방법]으로 슬픔을 이겨내야 한다. 같이 배열된 [길]과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한때의 인연을 같이 짜나간 존재의 부재를 표현한다. 죽죽 내리그은 초록빛 커튼 같은 화면은 같이 했던 무대가 닫힌 순간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막 뒤에 조명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여전히]와 [포개어진 자리]는 애도하는 사람 옆에 또 다른 사람이 온 것같은 구도다. 물론 보는 (읽는) 방향에 따라 둘이 있다가 한 명은 떠났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 둘은 같은 슬픔을 공유하는 친근한 사이임을 유추할 수 있다. 


화면 위아래를 관통하면서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는 원래 든든한 기둥같은 존재지만, 이연주의 작품에서는 아래로 내리긋는 붓질로 뿌리 깊은 슬픔을 표현한다. 나무 밑둥지를 표현한 [남은 자리]는 화면 중앙에 무엇인가 있어야 할 것이 빠진듯한 부재감이 존재한다. [남겨둔 자리]에서 노란색 빛을 품은 거대한 기둥은 사람이자 산인 형상 사이에서 기념비적인 존재로 우뚝 서 있다. 남아있는 존재와 떠나버린 존재를 극적으로 대조한다, [황금시간]에서는 자주 그리던 녹색 산이 황금빛 산으로 변조된다. 산은 영원한 것이고 영원해야만 하는 어떤 존재와 중첩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산만큼의 많은 시간을 함께 쌓아온 통통한 노랑 고양이는 그렇게 산이 되었다. 고양이 뿐 아니라 동물을 보면 자연과의 조화가 기가 막히다. 물론 그것은 개체가 주어진 자연에 적응하여 최적화된 존재만 생존하고 진화를 이어왔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바꿔 생각하는 것이다.




남겨둔 자리, 193.9x112.1cm, oil on canvas, 2022



여전히, 112.1x112.1cm, oil on canvas, 2022



황금 시간, 45.5x53cm, oil on canvas, 2022



하지만 그러한 생물학적 인과관계가 자연의 경이로움마저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노랑 고양이나 삼색 고양이의 색감은 단풍지고 낙엽이 흩날리는 이즈음 색감 그자체다. 자연으로부터 온 존재는 자연과 닮았으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다시금 원자의 이합집산을 통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나무, 숲, 산 같은 더 큰 자연이 잠시 함께 했던 또다른 자연을 대표한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지만 부재나 상실, 상처와 기억같은 보편적인 감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연주가 다름 아닌 화가라는 점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낱낱이 작품을 통해서 기억되고 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작품을 통해 반추된 슬픔은 더욱 슬프고 기쁨은 더욱 기쁠 수 있다. 하지만 슬픔이든 기쁨이든 예술이라는 차원의 변주를 통해서 객관화되고 타자와 소통하면서 치유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했던 그리기는 이제 더 중요해진 것이다. 


출전; 가창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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