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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 킴 / 성의 재구성을 위한 의례(儀禮) 1

이선영

성의 재구성을 위한 의례(儀禮) 1

  

이선영(미술평론가)

  


문화비축기지 T1에서 열린 다발 킴의 [헤르마프로디토스 돌기신화-드리밍 클럽] 전은 양성이라는 중간적 존재를 불러들인다. 이성애에 기반한 지배적인 상징계는 이러한 중간적 존재를 이단시한다. 고대 신화에서 온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os)는 소년과 요정이 합쳐진 존재로, 남성의 성기를 가진 여성같이 반남반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화적 관념이 아닌 일반적 삶 속에서의 양성의 결합은 보통 결혼으로 상징된다. 양성은 연금술처럼 이상적인 완성체를 추구하는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작가는 헤르마프로디테로 대변되는 양성구유의 다양한 예로 ‘조선시대의 사방지,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인도의 아르마나라슈와라, 티벳의 탱화 불상, 중국인의 시조라는 복희·여와(머리는 각각 이되 몸통은 하나)’의 예를 든다. 이러한 예들은 남성과 이성으로 구별된 성을 초월하는 완전함에 대한 이상이 동서고금을 횡단하는 소재임을 알려준다. 




돋아난 돌기-생성, 설치작품





다발 킴의 전시는 다양한 곳에서 온 진기한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축제를 방불케 하며, 이는 작가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국, 중국, 인도, 몽골, 코스타리카, 독일, 오스트리아, 호주, 스페인, 모로코 등 국내외 다양한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전시에 참여한 경력 탓인지, 작품의 소재가 전방위적이다. 다양한 소재만큼이나 다양한 형식이 활용되어 프로젝트의 성격을 띄는 전시는 여러 장르가 융복합되는 무대가 되곤 한다. 많은 협업자가 동원된 이번 전시에서도 다발 킴은 작가이자 예술감독의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종합이란 늘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 가치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반대되는 것의 조화같은 신화적 완전성은 현대에 적용되기는 힘들다. [헤르마프로디토스 돌기신화-드리밍 클럽] 전의 작품 속 양성적 존재는 조화 그자체가 아닌 조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양성에 함축된 중간은 평균이 아니라 과정이며 과정은 안정적이지 않다. 


과정 중의 주체는 ‘남녀의 성을 뛰어넘는 복수의 성’, 즉 ‘제3의 성, 무성, 사이보그, 사회적 규범에서 이탈한 표현 양식을 보여주는 모든 신체’(다발 킴)를 가진다. 작가는 기존의 경계를 교란시켜 ‘새로운 신체의 가능성을 암시’하고자 한다. 명확히 분류할 수 없는 ‘수상한’ 성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로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반신불수같은 이분법적 질서를 재구조화하는 긍정적 가치로 나타난다. 양성을 비롯해서 다발 킴이 체택하는 소재들은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분리 이전에 대한 기대치와 관련된다. 분리는 근대에 와서 강화되었다. 분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sex’라는 단어는 분리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sexus’에서 유래했다고 보면서, 근대 경제학은 그자체가 본질적으로 섹시스트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묘사된 과거와의 단절을 젠더의 시대에서 섹스의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묘사한다. 




신의 가면_9명의 신(무사이)와 사천왕 등 퍼포먼스 사진 작품







자본주의적 경제인(Homo oeconomicus)이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하면서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와 사영역의 여성화를 통해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다발 킴의 작품에서 각 영역을 나누는 경계는 수시로 침범된다. 전시는 조형 의상의 설치, 사진, 영상 등으로 채워져 있으나 어느 것도 자족적이지 못하고 서로를 지시하면서 보완적 관계를 가진다. 물론 공연이라는 총체적 방식이 있을 수 있지만, 공연은 관객과의 만남에 있어 한계가 있는 만큼, 많은 접면을 만들고자 한다. 전시는 퍼포먼스 배우, 의상 제작자, 거문고 연주자, 영상 연출가, 사진가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다발 킴이 양성이라는 괴물적 존재를 호명한 것은 그 자신이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사회적 불만을 포함하지만, 페미니즘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성 또한 호명한다. 작가는 이 전시의 기획 의도를 ‘헤르마프로디티즘을 통한 이분법적 성규범의 해체’라고 밝힌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잣대에서 자유롭고 경계를 짓고, 벽을 쌓아올리고 구분하려 드는 이분법적 가치관을 벗어나 대립 넘기,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다. 신화와 종교 등 전통사회에 바탕을 둔 관념에 도전한 인간중심주의는 이전의 신학적 세계관을 계승한 것이며, 그 주체인 ‘인간’ 또한 남성적 특성을 띄었다. 근대적 진보나 발전주의가 의문에 붙여지면서 근대적 주체인 (남성적) 인간에 대한 수정이 요구되었고, ‘포스트 휴머니즘’이 주장되기에 이르렀다. 다발 킴의 영상 작품 [신의 가면]은 ‘포스트 휴먼의 시대에 다시금 조명된 신화적 사유에서 태초의 신들과 인간의 관계를 연극적으로 표현한다,’고 밝힌다. 정체성은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조화되는 것이라는 인식에 현대의 생명공학이나 정보혁명은 날개를 달아주었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최근의 발명품인 곧 인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패션의상 조형





영상필름





포스트 휴먼의 미래는 인간 대신 컴퓨터화한 인공지능과 여타 모사된 삶의 형태들로 가득하다. 클라우디아 스프링거는 [사이버 에로스; 탈 산업시대의 육체와 욕망]에서 사이보그가 감정으로부터 이성을 나누는 데카르트의 구분이 정점에 이른 것이면서, 동시에 그런 대립이 폐기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사이보그는 인간 이성이 중심 무대를 차지하는 이성적으로 계몽된 우주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념 자체를 침식한다. ‘사이보그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다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가 해체와 재결합의 한 유형이며, 이것은 페미니스트가 코드화해야 할 자아라고 말한다. 다나 해러웨이는 ‘의사소통 테크놀로지와 바이오 테크놀로지가 육체를 재 정교화하는데’ 핵심적인 도구라고 본다. 기계들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비유적으로 다양한 접속이 행해지는 다발 킴의 작품들은 포스트 휴먼의 비전을 가진다. 작가는 이 전시를 ‘전통적인 인간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인간관의 실천미학’이라고 정의한다. 


편향된 ‘인간’ 중심주의에 반발하는 작품들은 사이보그 같은 SF적 상상력을 포함하지만, 이 전시의 주축을 이루는 조형적 의상은 한복같은 전통이 모델이다. 전통 시대의 상징적 우주인 신화가 깔려있다. 영상 속에서 매우 엄격하게 실행되는 퍼포먼스를 보면, 예술이라기 보다는 제의적인 양상을 띤다. 하지만 자유분방하게 조합된 의상은 착용만으로도 축제적이다. 축제와 제의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장식이 풍부한 축제 또는 제의는 근대의 생산주의와 대별 된다. 근대에도 축제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기능 및 생산에 복속되어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거울]에서 근대성의 신화에서 생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본다. 장 보드리야르는 생산과 유혹을 대립시키면서, 유혹을 복잡한 의례나 놀이(장식도 해당)로 본다. 유혹은 생산과 욕망의 논리를 거부하고, 사상과 기호와 매혹의 차원에서 자신의 미적 내기를 추구한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유혹은 가상으로서 실재의 모든 깊이를 뒤집는다. 




파빌리온 메인 작품 뷰





이 세계는 변별적인 구조와 대립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혹적인 가역성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시되는 실재로 간주된 성을 교란하는 다발 킴의 작품은 유혹적이다. 유혹은 ‘축적, 진보, 성장, 생산, 가치, 에너지, 욕망과는 달리, 유희와 도전의 공간, 불확정적인 질서’(장 보드리야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부르주아의 시대는 생산과 본능의 시대였다. 이에 반해 다발 킴의 주제인 양성은 생식과 관련되지 않는 성을 말하며, 기호적 차원에 있다. [생산의 거울]에 의하면 부르주아 혁명은 귀족적 유혹을 끝장냈다. 반면 유혹은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본능의 해방 및 생산, 리얼리즘의 질서에 도전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유혹이 욕망의 소박함이나 자연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라, 기호들의 놀이이고 기교라고 본다. 장식적 유희의 목적은 쾌락을 통해 쾌락의 끝이나 그 너머로 나아가는 데 있으며, 유희의 논리는 현기증 나는 열정이라는 것이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제한 없는 형태와 기호들의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 진정한 존재, 절대성에 이르려는 욕망이 없다면, 어떤 개인이나 행위이든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으며, 오직 유용성이 있을 뿐이라고 본다. 다발 킴의 작품에 내재된 의례적 측면 또한 유혹적이다.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의례적 규칙을 사회적 법칙과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 사회적인 것에는 유혹이 없다. 놀이와 의례의 세계를 사로잡는 죽음과 유혹의 내기에 비한다면, 현대의 사회성과 그것이 확립하는 의사소통과 교환의 방식은 추상적이고 빈약하다. 보드리야르는 화장을 비롯하여, 의례화하는 것, 의식화하는 것, 괴상한 옷을 입는 것, 가면을 씌우는 것, 팔다리를 자르는 것, 모양을 그리는 것, 고문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의 주축을 이루는 조형적 패션은 ‘유혹을 통해 실재의 체계를 종결짓는’ ‘장식’에 해당된다. 




돌기가 돋아나다-꺽고



돌기가 돋아나다-밀고



돌기가 돋아나다-당기고



돌기가 돋아나다 - 밀고2022



그것은 ‘육체를 가상으로, 속임수로, 덫으로, 동물적인 모방으로, 제의적인 모사로’(장 보드리야르) 덮어씌운다.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원형 공간으로 통하는 통로 같은 공간에 매달린 의상들은 의례를 위한 것처럼 특별하다. 대부분 갓 모양의 모자와 세트로 만들어진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들은 맞은 편에 걸려 있다. 다발 킴에게 작품은 그자체로도 시각적인 재미와 의미가 있지만, 행위의 흔적이기도 해서, 공연을 겸한 전시는 사진과 영상이 동반되곤 한다. 의상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 지을 수 있는 주요한 기표이다. 털이 부숭부숭난 남자의 다리에 착용된 여성의 신발이나, 게이 공연자들이 착용하는 하이힐은 작은 변화로도 자극적이다. 다발 킴은 여러 복장을 소화하고 있지만, 레드 스타킹과 구두는 공통적이다. 색은 늘 단독이 아니라 비교 속에서 정의된다. 적어도 근현대에 와서는, 블루와의 관계 속에서 레드는 여성을 상징한다. 남녀가 철저하게 구별되는 공간인 화장실은 레드/블루로 표시된다. 


여성이 레드와 관련되는 것은 그녀들이 생리혈을 흘리는 존재, 이를 통해서 생식하는 존재라는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양성의 관계를 교란하는 와중에 고수된 레드 스타킹을 보면, 다발 킴은 자신의 생물학적 성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사진, 영상, 공연 등에서 레드 스타킹의 착용자가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가 있다면 ‘블루 스타킹’일 것이다. 블루 스타킹은 레드 스타킹보다 문예사조사에서 확실하게 의미화되어 있다. 블루 스타킹은 ‘문학이나 학문에 관심이 있는 척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뜻’을 지니며, ‘W.S.스콧의 [블루스타킹 부인들 The Bluestocking Ladies](1947)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다음 백과 참조). 여성이 살림이 아닌 지성에 몰두하는 것에 대한 풍자적 용어인 셈이다, 근대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뒤따른 산업 혁명에 의해 사회적 모순에 대한 민감도가 컸던 최초의 나라 중의 하나인 영국은 여성운동 또한 앞서 있었다. 




돋아난 돌기신화-드리밍클럽(0_00_01_28)



돋아난 돌기신화-드리밍클럽(0_00_22_27)



돋아난 돌기신화-드리밍클럽(0_00_41_15)



돋아난 돌기신화-드리밍클럽 (0_00_44_06)



‘블루 스타킹’은 여성 예술가들의 지적인 자의식을 상징한 패션 코드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적 이성’을 더 보충하는 것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다발 킴의 레드 스타킹은 여성성의 배제나 수정보다는, 극대화를 통해 기존의 여성성/ 남성성의 극복을 동시에 겨냥한다. [헤르마프로디토스 돌기신화-드리밍 클럽]에서 체택된 양성이라는 코드는 손쉬운 종합이라기 보다는, 경계선 상에 있는 미묘한 존재다. 패션을 매개로 하다 보니 복장도착적인 면모도 보인다. 애매한 성은 이분법적 질서에 완전히 순응한 보수주의자들에게 격렬한 반감을 주며, 사랑만이 전부인 그들에게 증오를 쏟아붓기도 한다. 소외된 이가 타자화된 이들을 희생물 삼아서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는 식의 테러는 자주 일어난다. 이분법적으로 나뉜 성을 해체하는 이번 전시의 조형적 패션은 성별을 교란한다. 물론 현대에는 남녀 구별이 없는 ‘유니섹스’ 디자인의 의상도 있지만, 다발 김의 작품은 남녀가 유별했던 시대인 전통에 일부 기대고 있다. 


수제작에 바탕 한 의상은 그것을 마름질하고 바느질하는 과정을 통해 코드를 섞을 수 있다. 천과 천이 이어지는 부분 어디나 다른 것이 접속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경계가 된다. 여성과 남성, 전통과 현대, 일상과 성스러움 등 대조군들이 실험 대상이 된다. 현대의 작가 중에는 실제의 몸을 변형시키는 등의 과격한 ‘실험’을 하기도 하지만, 다발 킴은 몸의 연장인 의상으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몸/성을 옷처럼 재단하고 자유롭게 갈아입을 수 있다. 패션은 해부학적 실험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 있다. 한복을 전문으로 하는 공간에서도 전시를 하곤 하는 다발 킴의 작품은 전통이라는 다소간 분명한 모델을 체택하여 변형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이질성은 동일성을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다. 한국 사람처럼 민속의상 안 입는 나라가 없다고들 한다. 단절의 역사는 우리의 것조차 이국적으로 만든다. 작가는 여기에 한 술 더 뜨기를 시도한다. 




돌기가 돋아나다-전시뷰



돌기가 돋아나다2021



한복 천 자체의 색과 무늬가 화려한데 여기에다가 인조털과 금속 등 다양한 부재료가 장식된 조형적 의상은 기이함을 더한다. 무대나 의식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옷들 또한 몸의 연장이다. 전시장에 걸린 옷들은 몸이라는 알맹이가 빠진 상태지만, 사진과 영상을 통해 보충될 수 있다. 문화비축기지 T1의 파빌리온에 전시된 가장 큰 의상은 장소와 작품과의 조화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아낸다. 거의 큰 텐트처럼 보이는 건축적인 스케일이다. ‘일개’ 옷이 그럴 수 있다는 점은 연출력의 승리라고 할 것이다. 크기도 크기지만 다른 옷에 비해 매우 안정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굳이 몸이 그 안에 안 들어가도 그자체의 존재감으로 서 있다. 팔을 벌린 모습은 마치 십자가 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다발 킴이 혼합하는 여러 항목 중에 동/서양이 포함되는 지점이다. 팔을 한껏 벌린 동양풍의 의상에서는 십자가에 내재 된 불안과 초월에 대한 열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지와 접속해 있다. 


작가는 대지의 상징으로 살아있는 식물로 초록빛 융단을 깔아줬다. 거대한 온실같은 유리창 안으로 들어오는 가을빛이 완연한 자연 또한 총체적인 분위기의 일부다. 자연은 먹고 싸는 유기적 존재들을 의상의 무늬로 집어 넣음으로서 부연된다. 멀리서 보면 추상적 무늬같지만, 인간의 몸 실루엣 안에 또 다른 이미지들이 있다. 그것은 옷의 무늬이자 몸에 새겨진 문신같은 이중의 효과를 발휘한다. 마스크 형상에 새겨놓은 동물 형상도 그렇고, 신화의 시대까지 소급되는 다발 킴의 작품은 몸과 그 연장인 옷에 새겨지는 무늬의 인류학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빈 성과학연구소가 편집한 [성학 사전]에 인용된 많은 전승에 의하면, 문신이 인간과 신의 혈연관계를 나타내며, 이런 의미에서 문신은 부적, 또는 효험이 확실한 마력의 표시로서 그려진다. 플레하노프는 [주소 없는 편지]에서 북아메리카 몇몇 부족은 문신으로 부족의 시조 동물을 그려 넣음으로서, 선조와의 신비적 관계와 씨족 관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체 장식은 출생증명, 통행증, 비망록 등의 유용한 역할과 심미성을 지닌 것이다. 




헝가리 한국문화원 exhibition view



몸에 하는 장식은 원시 민족들만의 관습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하위문화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현대를 거슬러 원초적인 것과 직접 접속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과시적 효과도 있다. 마리아 크리스틴 홀터(평론가이자 큐레이터, 오스트리아)는 2005년 다발 킴의 전시 오프닝에서 사람(여성) 몸의 윤곽선 안에 그림이 새겨지는 이야기가 담긴 정밀한 삽화 드로잉에 주목하면서, ‘Proto-Surrealist(초현실주의자)이자 Mannerist로서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6-1593)를 연상하게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가령 다발 킴의 작품 [자화상](2009)에는 ‘의인화된 생선, 육류, 소시지들로 축적된 형체와 작가로서의 붓을 휘두르는 자신을 묘사’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여기에는 한 사람에게 있어 어떤 것이 주요한 대상인지, 성과 먹는 것, 예술을 만들어 가는 한 단면적인 삶을 읽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파빌리온에 걸린 의상의 길게 늘린 뒷태는 꼬리를 물고 배치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출력물로 의상에 안착 된 만화 풍의 도상들은 하늘로 날아가기 직전같은 숭고한 의상을 다시 지상에 매어 놓는다. 다소간 육중해 보이는 인간 실루엣도 그렇고 먹어야 하는 유기체들의 운명 또한 그렇다. 머리를 제거하고 모래시계처럼 붙여 좋은 몸통은 생존을 위해 외부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고, 배설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하는 바로 그 주체이다. 배변하는 적나라한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여왕의 고상한 의상에 똥 싸는 이미지라니, 작가의 의도는 다소간 명확하다. 다발 킴은 숭고와 비천을 하나로 만든다. 두 극단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부분은 그의 작품들은 신화나 종교에 연결 시킬 수 있게 한다. 음식은 단지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서 권력이 된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아마존의 한 부족의 예를 든다. 거기에서 남자와 여자는 노동에서의 분명한 성구분을 가지는데, 밭 가꾸기는 여성에게, 사냥은 남성에게 분담한다. 




눈물을 마시는 새



그렇게 성은 서로 다른 노동의 산물--여성은 채소와 남성은 육류--과 동일시된다. 캐롤 코니한에 의하면 결혼은 밭에서 재배된 농산물과 사냥해온 고기와 같은 음식과 음식의 상호교환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는 교환이 균등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주인/노예, 자본가/노동자처럼, 남성/여성의 권력의 차이가 생겨난다. 권력의 불균등에 의해 차이는 차별이 되고, 이항 대립은 자연스러운 질서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된다. 풍만한 여성의 실루엣에 먹고 싸는 도상이 새겨진 다발 킴의 작품은 인류학의 대상이 되는 오랜 세월 중 비교적 음식이 풍부해진 현대에도 여전한 먹을 것을 통한 권력을 암시한다. 여성은 날씬해야 하고 우걱우걱 먹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이러한 금기와 가부장적 권력과의 관계는 명확하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가부장제 사회는 ‘여자들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치가 하락되고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회’(캐롤 코니한)로 정의된다. 


(2편으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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