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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 / 그렇게 지속되는 일상

이선영

그렇게 지속되는 일상


이선영(미술평론가)



작가 황지의 전시에서 화이트 큐브에 가까운 청주창작 스튜디오의 한 벽면은 다른 벽면과 달리 한 줄로 죽 걸어 놓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여러 화면들이 복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극장의 대형스크린과 경쟁하면서 등장한 장(場)으로서의 현대 회화의 범례에 비한다면, 크기가 작기에 여러 작품의 관계를 통해서 효과를 낸다. 이러한 집합적 배치에서 크기의 관계가 눈에 띈다. 대부분 풍경인 황지의 작품에 뚫린 창문의 크기가 다른 셈이다. 어떤 것은 가까이에 어떤 것은 멀리 있고, 어떤 것은 색이 날아간 듯한 풍경도 있다. 이런 식의 배치에서 공간은 곧 시간이다. 현전(現前)하는 공간에 대한 생생한 지각은 큰 창으로,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보다 작은 창이 어울릴 것이다. 압도적 스펙터클이어도 그저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시공간이 있을 수 있고, 작아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시공간이 있을 수 있다. 창을 넘어서 벽 그 자체가 스크린이 되는 시대, 그림 또한 연동되는 변화에 직면한다. 





청주창작스튜디오 전시전경



그곳4 33x45.5 광목에 흙 2019



그곳5 21X26 광목에 흙, 2019


시대의 획을 긋는 식의 의미있는 커다란 변화도 있지만, 꾸준한 작은 실천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변화 또한 중요하다. 황지의 경우 후자에 해당된다. 작가는 추상적인 공간이 아닌, 자기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고향을 포함해서 지금 살고 작업하고 있는 청주 등, 거의 변하지 않는 장면을 연도의 차이를 두고 그리다 보면, 지각과 기억은 분리 불가능하게 얽힌다. 고향 풍경이 포함된 [기억을 걷는 시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광목에 흙으로 그린 풍경은 오래도록 변치 않는 풍경을 담았다. 모노톤의 화면은 잡다함과 낡음조차도 시적 분위기에 감싸이게 한다. 황지의 풍경 속에 사람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환상적이다. 가령 모노톤 화면에 담은 오래된 동네 풍경인 [기억을 걷는 시간](2013)에 등장하는 사람은 마치 옛 사진처럼 그것이 현재에도 가능한 모습일까 묻게 한다. 학생들 없는 학교가 있는 [기억을 걷는 시간6](2013)은 학교야말로 기억된 풍경의 원형임을 알려준다. 


왁구를 뺀 광목천에 그려진 낡은 도시는 천의 표면만큼이나 주름져 있다. 최근 그려진 [집으로 가는 마지막 신호등](2020)은 집이라는 단어를 통해 장소를 암시한다. 그곳은 횡단보도 앞의 길목 좋은 곳의 가게조차도 허름하다. 근대화에 들어선 이래 한국 사회를 몇 번씩 갈아엎었을 변화로부터 면제된 곳이다. 유난히 강조된 전경의 횡단보도 마크와 화살표는 풍경 저 켠으로 물러난 건물들에 비해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다. 법규를 나타내는 기호는 풍경을 지배한다. 작가의 현재 거주지는 고향 인근 도시로, 아파트들과 가로수 길이 잘 정비된 스튜디오 근처의 풍경이 작품에 자주 담긴다, 캔버스에 과슈로 그려진 [끌림] 시리즈는 특정 도시의 풍경을 넘어서 보편적인 삶을 담고 있다. 황지의 도시풍경에는 사람보다는 건물이나 물건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끌림2](2021)에서 다세대 주택 앞에 빽빽하게 주차된 차들은 사람 대신에 사람 사는 모습을 대변한다. 



기억을 걷는 시간 51.2x75.6  광목에 흙 2013



기억을 걷는 시간.31.7x40.8.광목에 흙 .2013



기억을 걷는 시간2, 45.7X53.1, 광목에 흙 2013



기억을 걷는 시간7. 24X33광목에 흙, 2013



기억을 걷는 시간8, 91X116.7, 광목에 흙 2013


[끌림] 시리즈에서의 밤 풍경에서 인공조명을 단 상업용 시설 만이 활기를 띤다. 인적은 없거나 드물거나 매우 작게 표현되어 있다. 길과 나무가 잘 정돈된 도심의 공원 풍경에서 빈 의자와 가로등은 더욱 적적하다. 화면에서 인간의 비중이 점은 대자연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작품 [바다로](2019)에서는 거대한 자연과 작은 인간의 대조되며, [바닷가에서](2019)는 모노톤 임에도 불구하고 화면 가득한 빛은 바닷물과 해안가의 구별을 해체한다. 거기에서 즐거운 사람들은 그림자같이 표현된다. 풍경 속 빛은 조명에 해당되지만, 그것이 비추는 무대는 그리 화려하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성격은 이 전시에 출품된 많은 작품에 일관적이다. [끌림](2021-2022) 시리즈의 크고 작은 건축물은 자연의 빛을 받아 환해지기 보다는 더 어두워진다. 황혼녘을 배경으로 한 아파트는 거의 그림자같다. 하늘의 빛은 인간의 도시를 어두운 그림자로 만들어 버린다. 


세부가 생략된 채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육중한 건물은 자연의 빛과 대조되는 문명의 어둠이다. 상대적으로 도시의 자연은 존재감이 있다, [끌림11](2021)에서 밝은 하늘에 할애한 화면이 큰 덕분에 나뭇가지의 실루엣이 극적으로 드러나 있다. 땅바닥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자세하게 그려지거나 흑백으로 번역된 풍경을 지배하는 어두운 나무줄기가 있는 작품들도 그렇다. 얼룩덜룩한 과슈의 터치가 바로 구름 낀 하늘이 되는 [끌림17](2022)은 자연에 존재하는 촉각성이 풍부하게 표현된다. 황지의 붓터치는 질서화할 수 없는 대표적 대상인 구름(또는 기후적 현상)과 가장 잘 어울린다. 다소간 고정적인 시각적 요소를 보충하는 것은 작가가 나만의 것이라고 자부하는 붓의 흔적이다. 붓터치 크기가 제각각인 화면은 소재의 단조로움에 활기를 부여하는 요소다. 각기 다른 크기의 붓터치들이 조화를 향하는 가운데, 기억을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사진과 다른 촉각적 화면을 구축한다. 



거리에서 41X32 광목에 흙, 2021



거리에서2 18X14  광목에 흙 2021



끌림16 41.5x31 캔버스에 과슈 2022



끌림17 27x22 캔버스에 과슈 2022


영원회귀의 신화가 암시하듯이, 되돌아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인공물 중에서 순환적인 이미지에 해당되는 것은 길이다. 황지의 풍경에는 궤도의 순환처럼 길이 자주 등장한다. 길에서 저만치 앞 서 가는 사람은 비록 조그맣게 표현되어 있지만 작가 또한 통과할 그 길이다. 가로등이 켜있거나 태양 빛 가득한 그 길가는 나무들이 있고, 저편에는 집들이 보인다. 벤치에 앉아서 보거나 그 사잇길을 가면서 보는 풍경이다. 그것들은 현대인에게 일상의 무대를 이루는 보편적 요소들로 다가온다. 그 잔잔한 풍경에서 작가에 대한 인상을 겹쳐 본다면, 삶과 예술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일까? 황지의 첫인상은 작고 마르고 목소리마저도 너무 작다. 더 특이한 것은 작업실이 훵하다는 것이다. 딱 몰두해야 할 한 작품만 펼쳐 놓고 나머지는 다 뒤집어 놓는다. 생활공간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조건이 좋은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위한 최소한의 집기만 놓여있다. 


뭔가 쌓아두지 않으며, 한번 산 공책을 여백 없이 빼곡히 다 쓰는 무소유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박탈감을 주는 현실에 대한 대용으로 몰두하는 소비(물건의 소비는 물론 SNS같은 관계의 소비 포함)에서 벗어나 있다. 대체로 작은 크기(작가는 6호 정도가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본다)의 화면에 흙이나 과슈같은 물감으로 칠하는 모노톤의 작품은 작가의 삶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소재가 주변적이다. 거기에는 주목할 만한 광경이 없다. 모두들 SNS에 사진을 올리려는 이미지 사냥꾼이 된 시대적 기준에서 본다면 말이다. 감정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화폭에 거의 한 붓으로 찍은 물감을 다 쓸 때까지 그리는, 색상의 차이가 적은 화면, 대부분 모노 톤으로 그려진 황지의 풍경은 현실의 어떤 한 차원이 삭감되어 있다. 색이 바로 그것이다. 전시된 수많은 작품을 사진과 비교하자면 대부분이 흑백 사진인 셈이다. 



끌림 19x33 캔버스에 과슈 2021



끌림3 22x27 캔버스에 과슈 2021



끌림13 33.2X45.5 . 캔버스에 과슈 2021



끌림14 33.2x45.5 캔버스에 과슈 2021



끌림22 22x33 캔버스에 과슈 2022



끌림24 22x35 캔버스에 과슈 2021


모노 톤의 세계에서 빛의 힘은 크다. 풍경의 색은 빠졌지만 빛까지 바랜 것은 아니다. 어떤 흑백 풍경에서 빛은 마치 쓰나미처럼 쇄도한다. 하지만 색이 빠져 나감으로서 마치 소리도 향기도 사라진 듯하다. 현실은 공(共)감각의 세계지만 차원이 감축됨으로서 연쇄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같은 풍경의 다른 모습을 즐겨 그리는 작가에게 시간은 차이의 동력이다. 30세를 넘어서는 지점의 작가는 스튜디오에 들어오면서 개명할 정도로 자신을 새로운 출발점에 놓고자 했다. 지배적 질서가 인정하는 현실에 자리 잡기 위해 또래 젊은이들도 공유했을 만한 시행착오를 거친 후, 오롯이 작업에 몰두하는 삶을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었다고 한다. 20대를 차지했었을 사랑, 일, 예술 그 뜨거운 것들이 지나간 자리. 열기는 빠져 나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쓸쓸함이 황지 작품에 깔린 주된 정조(情調)다. 하지만 예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쓸쓸함은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 감정일 수 있지만, ‘그림 앞에 있을 때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작업을 하기’(작가노트) 위한 준비일수도 있다. 몰입은 예술의 크나큰 선물이다. 예술은 몰입을 통해서 텅 빔마저도 충만하게 한다. 황지는 열기로 들뜬 기운이 빠진 일상을 붓으로 어루만진다. 허구에 비해 현실은 썰렁하다. 그 현실은 질서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언젠가의 변화와 발생의 산물이지만, 굳은 채 지속되는 질서다. 황량하고도 공허하지만, 아름답기도 한 현실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 전염병과 전쟁, 기후 위기 등에 의해 일상이 요동치는 격동의 시대, 이제 우리는 아무 일도 없길 바란다. 낡은 다세대 주택의 면면을 매우 자세하게 표현한 작품 [끌림13]( 2021)은 삶의 흔적이 구조적으로 드러난다. 오래된 상가들 위로 가득 엉켜있는 전선 줄에서 나타나듯이 근대도시는 겉보기의 질서 이면에 무질서를 품고 있다.

 


끌림27 31.5x41 캔버스에 과슈 2022



끌림28 31.5x41 캔버스에 과슈 2022



끌림36 31.5x41 캔버스에 과슈 2022



끌림38 31.5x41. 캔버스에 과슈 2022



끌림40 31.5x41 캔버스에 과슈 2022



끌림51 80X117 캔버스에 과슈, 2022


황지의 시선이 머무는 지방 도시에서는 무질서의 모습이 더 적나라하지만, 반듯반듯한 곳도 사정의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현실은 과학과 합리성에 의해 구축되고 지배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과학은 지시관계의 도식으로 행해진다고 지적하면서 예술과의 차이를 지적한다. 이미지와 비교한다면 과학의 경우 정지된 이미지와 같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과학은 온갖 한계들이나 경계들로 구축된 지시체게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 그러한 한계 내에서 카오스와 대적한다. 이러한 (과학적)지시관계는 무한의 포기를 말한다. 미셀 세르는 [혼돈의 과학]에서 과학적 합리성의 상대성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합리적인 것은 완벽한 효율을 갖는 이상적인 기계장치지만 한계와 경계를 중시한다, 하지만 세계의 질서가 단 하나의 중요한 현실인 듯이 진행되는 것은 억압적이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철학의 규격화 활동은 안정성, 항구성, 곧 현상을 선택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균형만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지배적 철학의 관심은 결코 주변이 아니라 중심의 특이점에 있다. 철학은 무질서가 배제된 상태에서 언제나 질서와 권력에 봉사한다. 사회는 핵심 가치를 설정하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경쟁과 시험에 들게 하며 그 가치를 독점하고 관리한다. 예술 그자체는 아닐지 모르지만, 예술계는 지배적인 상징적 질서에서 예외가 아니다. 작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지만, 자기식대로 삶의 게임에 참여하고자 한다. 지배 질서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러한 각자 나름의 방식이다. 괴리감은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을 따름이다. 우리의 일상이 추동하는 욕망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유한하지 않다. 이러한 불균형이 형식적 제도에 의해서 해결될까. 보다 긍정적인 의미의 무한, 즉 결핍이나 억압에 근거하지 않는 욕망은 내재적이고 자발적인 실천인 예술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직관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작가일 것이다. 



바다로 40.4X52 광목에 흙 2019



바닷가에서  22x27 광목에 흙, 2019



아지트 90.0x72.7 캔버스에 유화 2010



아지트2 27X34 광목에 흙 2019


그림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말린다고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닌 자기만의 일이자 동시에 세상과 만나는 방식으로 소중하다. 황지는 지배적 질서의 가장자리에 주목한다. 굳어진 일상에 미묘한 균열을 내는 것은 매우 다양한 터치로 가득한 화폭이다. 작가는 그것이 자기만의 특성이라고 자부한다. 색을 제한하거나 중간색조로 차분하게 유지하는 것은 붓터치의 유희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작가는 강고해 보이는 굳은 질서를 이렇게도 쪼아보고 저렇게도 쪼아본다. 광목에 흙으로 그린 [거리에서](2021) 시리즈는 삶의 주변부를 강조한다. 근경에 잡초를 크게 배치하고 원경에 작은 건물들은 작가가 방점을 찍는 부분을 알려준다. 보도블럭 사이에서 머리를 디민 잡초가 있는 작품은 단단한 구조의 틈새에서 생성하는 생명의 힘을 보여준다. 황지의 작품에서 문명은 오래된 자연과 큰 변별력이 없다. 문명 또한 시간이 흐르면 자연화된다. 


작품 [그곳](2019) 시리즈에서 돌을 하나하나 올려 쌓은 고풍스러운 건물은 그 장소의 기념비일텐데 주변의 나목과도 잘 어울린다. 오래된 건축물이 주변의 대기 속으로 녹아버릴 듯한 작품은 광목 위의 흙이 먼지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작지만 많은 작품이 출품된 탓인지, 관객은 색의 유무에 따라서도 의미를 다르게 읽게 된다. 가령 천변과 저 멀리 보이는 동네의 대조되는 아름다운 풍경 [끌림36](2022)은 흑백 사진 같은 분위기 때문에 그곳이 지금도 있는 곳인지 의문이 든다. 한편 [끌림23](2022)같이 색이 있는 작품은 갑자기 현재적 활기로 가득 찬다. 시간예술인 영화에서는 이런 기법이 종종 사용된다. 공간예술인 미술에서 그런 효과를 내는 방식은 병치일 것이다. 자연에 풍부한 빛과 색감은 지상 풍경의 어두운 실루엣과 대조된다. 실제와 유사한 총천연색 풍경이지만, 중앙선 그어진 아스팔트 길가의 사람은 그림자처럼 검은 작품은 세상의 축도인 풍경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상을 암시한다. 



포근하네  33.4x45.7, 광목에 흙, 2020



집으로 가는 마지막 신호등 53X45 광목에 흙, 2020



햇살이 내맘을 녹이네 116.8x91, 종이에 수채, 2011


작품 제작 연도가 오래되었지만, 색이 있는 유화 [아지트](2010)에서 추억이 서린 듯한 가로수 길은 그때의 색을 그대로 간직한다. 하지만 10여 년이 흐른 광목에 흙으로 그린 [아지트2](2019)는 생생했던 모든 것이 다 휘발되어 흔적만 남은 듯이 보인다. 흙으로 그려진 작품은 모든 것을 먼지로 만들어 버릴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심지어 작가는 이 작품의 캔버스 프레임도 제거해 버렸다. 색이 빠진 듯한 풍경에 캔버스 틀까지 빠진 풍경의 시공간성은 지워진다. 늘어진 캔버스 위에 간신히 안착되어 있는 이미지는 창이라는 환영의 속성이 제거되고 단지 이미지로 나타난다. 종이에 수채로 그린 [햇살이 내 맘을 녹이네](2011)는 최근의 작품과 소재나 구도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때는 색이 있고 지금은 색이 빠진다. 최근 그려진 풍경 [포근하네](2020)는 희미한 모노 톤에도 햇살이 가득한 충만한 분위기를 담는다. 같은 소재지만 형식적 선택의 변주는 굳어진 질서를 교란하는 예술만의 유희일 것이다. 


출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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