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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희의 누아주(Nouage) 작업

이선영

신성희의 누아주(Nouage) 작업

 

이선영(미술평론가)

 


신성희(1948-2009)는 평면이라는 회화적 조건과 관련된 실험에 몰입했던 작가다. 1966년에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1971년에 홍대 회화과 졸업한 후, 1980년에서 2009년 별세할 때까지 프랑스에서만 30여년 간 작품 활동을 했다. 2022년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제목이 ‘에콜 드 파리, 신성희’일 정도다. 예고 때 스승이었던 김창열 화백이 평생 하나의 주제로 일관된 작업을 해왔던 것과도 비교될 수 있지만, 미학적 방향은 달랐다. 일찍이 그림에 관한 한 한국에서 인정받는 엘리트 코스라는 것을 거친 신성희는 오롯이 타국에서 수십년 작업에만 몰두한 경우다. 미술계의 많은 작가들이 한국에 있을 때 더욱 바쁘고 초조해진다고들 한다. 한국이 그만큼 역동적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신성희가 몰입했던 회화적 실험은 미학적 신념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가능하다. 그 또한 작업에만 몰입하기 위해 떠났던 이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실험이란 조건을 한정시켜 놓고 다양한 조합을 통해 행해진다는 점에서 놀이와 같다. 



결합Entrelacs 1998 163x130cm   acrylic canvas. Nauage(이하 모든 사진 출전; 정이녹)



60여 년의 짧은 생애 속에서 제작되고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수집돼 있는 작품 목록들을 보면, 캔버스는 그에게 유일하고도 유력한 놀이의 장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르네상스 이후의 시각 미술 전통에서 창이나 거울과도 같은 위상을 지녔던 팽팽하게 당겨진 하얀 캔버스는 세계를 담기 위한 평면예술의 중성적 조건이다. 신성희의 작업은 이 조건을 흔든다. 미술사적 선례로는 입체파의 꼴라주가 있다. 꼴라주는 화면 저편에 잠재된 소실점을 중심으로 평행하게 배열된 가상의 층들이 연출하는 환영(illusion)을 파괴한다. 꼴라주는 환영이 아니라 그자체가 현실의 단편으로 화면에 난입한다. 의미와 연관될 대상을 담아내는 상자는 막혀버렸거나 좀 더 얇아진다. 꼴라주 이후 화면은 쌓는 식이 되었다. 물감을 쌓든 일상의 사물을 붙이든, 화면은 이제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이 아니라 손 그자체가 된다. 물감의 재질감이 두드러지는 회화적 방식이 붓질을 감추는 고전적 방식을 대체한다. 


예술은 의미가 아닌 존재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된 것이다. 기능과 쓸모, 의미에 대한 담지체들이 굳이 그림이 아니어도 되는 분야로 옮아간 시대도 반영한다. 사진의 출현이 결정적이고, 이후 움직이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영상은 스펙터클을 장악해 나간다. 물론 회화에서의 시각성과 문화적 스펙터클은 차이가 있으며, 전자에 몰입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화가다. 시각예술은 파악하고 이해하며 소유하는 방식을 넘어서, 보는 것과 관련된 미학적 담론을 포괄하는 개념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근대미술이 순수와 자율성을 찾아가는 여정에 참조되고 선택된 형식들이 전대미문의 새로움인지는 의문이다. 꼴라주만해도 세계 여러 민속 예술의 전통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방식이다. 모더니즘에 의해 억압된 전통들이 부활되는 와중에, 타자화되었던 공예가 부각된 바도 있다. 꼴라주가 혁명일 수 있었던 것은 근대 이후 각 분야가 전문화되면서 각자의 맥락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원근법에 기반한 재현주의라는 전통적 맥락에서 꼴라주는 혁명적이었다. 신성희의 독특한 기법인 ‘누아주(Nouage)’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공예나 장식을 떠올리는 ‘매듭’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신성희의 작품 제작방식은 (롤랑 바르트가 후기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주장한)텍스트 짜기/풀기라는 보다 현대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바르트)로서의 작업은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부정하기에 재현도 표현도 아닌 방식을 부각시킨다. 신성희의 작업에는 ‘차이와 반복’이 있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현대적 사유가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탄생한다고 하면서, 반복이 재현의 일관성을 교란하고 재현의 근거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질 들뢰즈는 동일성의 우위가 재현의 세계를 정의하지만, 모든 동일성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보다 심층적인 유희에 의한 광학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재현의 대상은 물론, 그것이 놓이는 기본 좌표 죽을 재정의하는 신성희의 작품은 [차이와 반복]의 매락에 놓고 보자면 ‘바탕의 자유’를 구가한다. 



공간을 향하여 1999.200x200cm  Acrylic canvas. Nauage 



그것은 미메시스처럼 실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결여를 전제로 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신성희의 화면은 ‘근거 와해’(들뢰즈)의 장이다. 새로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기보다는, 각 매체의 전통 속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야기한 것이 혁명으로 간주된다. 신성희는 캔버스를 ‘손상’시킨다. 칼을 대서 풀려나온 것은 ‘천 조각’이 되며 작가는 이것으로 화면을 다시 짠다. 가로올과 세로올의 교차로 짜여진 캔버스는 작가만의 좌표축을 따라 다시 짜여지는 것이다. 텍스트라는 조건으로 한정 짓는다면 새로운 좌표축의 제시이며, 신성희의 작품 목록을 볼 때 축은 매번 새롭게 정의된다. 구멍이 난 신성희의 화면은 뒷부분도 활성화된다.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재현의 논리에 의해 장악되어 버린 평면에 숨구멍을 뚫는다. 작가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정이녹의 전언에 의하면, 종교적 심성이 있었던 작가는 이러한 구멍(공간)에서 신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신심 또한 작업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중성적 표면에 물성을 부여한 결과는 무엇을 오롯이 담아 전달하는 가상적 상자의 부정이다. 신성희의 작품은 바닥이 줄줄 새는 ‘부실한’ 상자인 셈이다. 무엇을 담아서 관객에게 제출할 수 없는 상자다. 관객은 (변형된) 상자 그자체만을 보게 될 따름이다. 신성희의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환영이 물자체로 변화하는 과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복한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신성희는 평면의 조건을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캔버스는 오려지고 자유롭게 엮이지만, 그 전체는 다시 캔버스/평면에 속해 있곤 한다. 물감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작품은 칠해진 화면이 잘려 텍스트의 새로운 엮기가 이루어진다. 회화가 평면이라는 방식을 지양하고 사물화되는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수수께끼같은 입체나 연극성으로 해소되는 흐름 와중에도 그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 자체는 시각예술의 기본으로 존재해왔다. 평면이 사물로 해소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회화의 물적 조건만큼이나 정신성을 중시한 신성희는 회화의 평면적 조건과 게임이 의미와 연결되기를 원했다. 관객은 닫혀진 상자가 전달하는 대상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자 자체를 구성하는 좌표축의 구성과 해체라는 유희에 동참하게 된다. 화면을 관통하는 여러 단면의 구멍은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단선적 논리에 난 구멍이다. 그림이 시작되는 굳건한 토대를 의문시하는 신성희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어법을 구사한다. 모더니즘은 이성과 진보를 앞세운 모더니티와도 구별된다. 신성희의 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를 지배한 두 가지 이성을 구별해야 한다. 알렝 투렌은 [현대성 비판]에서 이성은 보편주의의 근거가 되며, 사회계약은 이성이라는 최상의 주권자를 설정한다고 지적한다. 계시에 근거한 유일신 종교의 목적론에 의해 마비되었던 인간의 실천과 세계 질서 사이의 일치는 이성의 승리에 의해 확립되었다. 



소우주 1999.  microcasme 100x100cm  Acrylic canvas 



알렝 투렌은 과학과 그 응용을 활성화시킨 것도 이성이고, 개인과 집단적 필요에 사회적 삶을 적응시킨 것도 이성이며, 폭력과 전횡을 법치국가의 시장으로 대체시킨 것도 이성이었다고 평가한다. 현대성은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의 긍정적 이미지에 의해 완성되어야 했다. 하지만 알렝 투렌은 오늘날 정형화된 이성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른, 계시와 연결된 이성의 전통을 밝힌다. 그에 의하면 17-18세기는 기독교 사상의 세속화와 신적 주체에서 인간 주체로의 변형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전통은 계몽철학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이성과 의지를 결합하고, 사회질서에 대한 저항이라기 보다는 자연질서에 대한 복종으로서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것이 현대성이라 부를 수 있는 계몽주의의 중심 원칙이다. 그것은 진보의 철학이 아니라, 고대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결합하는 질서의 철학이었다. 알렝 투렌은 세속화된 문화 내부에서 인간과 우주와의 화합을 유지하려는 강력한 시도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적인 철학을 가졌던 신성희의 작품을 추동하는 근대적 이성은 알렝 투렌이 부각시킨 ‘주체’와 관련된다. 텍스트 학파들이 아무리 인간의 종말과 작가의 죽음을 주장한다 해도 말이다. 어떤 의미로 변화된 주체이든 회화와 주체의 유착관계는 부정될 수 없다. 빈 상자에 대한 비유는 뉴턴으로 대변되는 고전적 물리학에서 이루어졌다. 전통적 상징주의로 가득했던 질적 공간을 중성적인 공간으로 비워낸 것은 과학혁명이 이루어낸 일련의 진보였다. 황금빛 하늘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것이다. 하지만 현대물리학에서 공간은 중성적 배경이 아니다. 이제 새롭게 가정되는 공간은 그 안에 담겨 있다고 가정되는 물질의 양태에 영향을 준다. 현대미술에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있었다. 산이나 사과를 그렸지만 동시에 화면의 자율성도 고민했던 세잔의 작품 속에서 대상은 조금씩 조정되어 있다. 대상과 공간은 한 판의 태피스트리처럼 같이 짜여지면서 상호작용한다. 


신성희의 누아주 기법은 재현주의가 가정하는 연속적 공간에 균열을 낸다. 이 균열에서 새로운 형태를 짜여지는(짜깁기 되는) 것은 시공간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반영한다. 시공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좌표적으로 정의된다. 현대물리학처럼 어떤 기하학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다. 아직도 일상의 어떤 부분은 고대의 유클리드 기하학이 지배하지만,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다. 가령 획기적인 속도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고 기대되는 양자 컴퓨터는 일상의 기하학과 다른 차원을 전제할 것이다. 누아주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 [결합 entrelacs](2005)은 풍자적이게도 그릇 모양을 닮았다. 하지만 신성희의 ‘그릇’은 담지 않는다. 환영의 연출에 방점을 찍는 투명한 언어는 불투명해진다. 시각성보다 촉각성이 두드러진다. 그 너머로 눈길을 돌리기보다는 그자체에 탐닉하게 된다. 누아주 기법의 시각적 효과는 시각적 촉각성이다. 현대회화의 혁명을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세잔은 공간을 촉각적으로 표현했으며, 피카소와 브라크가 입체파 실험이 그것을 이었다. 촉각적 공간은 광학적 공간과 달리,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화면의 자율성을 구가한다. 


작품 [공간별곡 Peinture spatiale](2008)처럼 통상적인 화면의 비율을 많이 벗어난 작품은 설치가 유동적이다. 캔버스를 찢어내 새로운 텍스쳐를 만드는 작업은 재현적이지 않기 때문에, 좌우로 긴 작품을 위아래로 긴 작품으로 걸어도 큰 차이는 없다. 작품 [결합entrelacs](2005)에서 무엇인가 담아내야 할 캔버스는 한가운데서 색채의 다발로 폭발한다. 폭발은 해체로 귀결되지 않고 평면의 조건 속에서 단단히 자리잡는다. 작가는 회화적 환영이 사물 그자체로 해소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평면은 여전히 작가의 감각과 사유의 실험을 담아내는 가장 밀도 있는 장이다. 신성희의 작품은 자르기와 엮기 뿐 아니라 바느질을 통해 평면의 조건을 다변화한다. 작품 [연속성의 마무리 Solution de continuite](1996)는 화면을 잘라 재봉틀로 박아 칠해진 표면과 캔버스 뒷면이 한 화면에서 상호작용하게 한다. 솔기로 가려져야 하는 부분이 겉으로 나온 것이다. 같은 시리즈의 또 다른 작품에서 여러 개가 병렬된 단위에서 하나만을 작품화 한 것은 그림이자 입체로 다가온다. 캔버스의 뒷면은 둥글게 말려 응집력을 가진 채 색칠된 평면과 병렬된다. 빈 공간은 색칠된 부분의 배경이나 여백 같이 소극적 역할이 아니라 현대물리학의 가설처럼 같이 주연을 맡는다.


출전; 미래에셋증권 아트테크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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