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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승 / 먹으로 피운 꽃

이선영

먹으로 피운 꽃

 

이선영(미술평론가)

  


유희승은 자신의 논문에서도 직접 밝히듯이 인간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인물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수묵이라는 동양의 고전적 예술형식을 추구함과 동시에 금욕적인 수행성을 중시해온 작가에게 인간, 특히 현대인의 모습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 그가 주로 그렸던 삐에로가 대표적이다. 그가 그려왔던 탈춤 시리즈도 피에로에 상응하는 소재이자 주제이다. 삐에로 분장이든 탈이든 원래의 얼굴은 감춰지고 전형적인 모습만 남는다. 물론 전형성은 문자보다는 구술이 지배했던 전통사회에서 용이한 전승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삶과 축제가 분리된 이후 그것은 피상성이나 장식성으로 추락했다. 삐에로 시리즈에서 작가는 가면같은 분장에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분열적 인간상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물론 그 가면 뒤에 본질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가면 뒤에 또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고, 이러한 조건은 실제로부터 분리된 기표의 연쇄가 지배하는 현대의 조건과 관련된다. 




내 마음의 꽃-'또 다른 꿈, 한지,먹,금니,45.5x53cm, 2020



기표의 분열적 조건은 언어에 의해 주체를 구축하는데 영향을 주는 결정적 요소다. 단순한 소리가 아닌 말은 인간만의 소통방식이다. 언어가 아니더라도 노동과 일, 예술과 일상 등이 분리되어 있는 삶 자체가 분열적이다. 지나치게 분업화되어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조건 자체가 분열적이라고 하면서, 분열증을 병이 아닌 시대의 증후로 해석한 문화 비평가도 있을 정도다. 작가는 ‘인간은 독립된 개체로 파악되기 보다는 사회나 문명 안의 존재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 자체가 동물과 다른 오랜 사회화 기간이 필요한 만큼 자연과 문명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차이는 차별이 되고 문명의 한계가 되는 것이 문제다. 유희승의 사고에는 개체와 문명과의 대조항이 있다. 있는 그자체가 아니라 뭔가 숨기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요즘 그가 주로 그리고 있는 꽃에 적용되면 어떤 모습일까. 작품 [내 마음의 꽃](2019)을 보면 화병의 꽃무늬와 위치상 병에 꽃혀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꽃에 큰 차이가 없다. 


먹의 농담이나 외곽선의 표현에 있어서, 하나(꽃)는 흐트러져 있고 다른 하나(도자기의 꽃무늬)는 정확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둘 다 꽃무늬일 수 있다. 다만 작가는 나비가 위쪽을 꽃 형상을 찾아 날아가는 모습을 통해 이미지(물건에 그려진 무늬)와 실제(살아 있는 꽃)의 차이를 암시한다. 그림 속의 형상은 모두 이미지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이미지 간의 위상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요즘 그리고 있는 [내 마음의 꽃] 시리즈의 한 작품에서 화병의 경계를 거의 지우다시피 함으로서, 차이를 모호하게 만든다. 또한 작가는 그려진 이미지의 애매함을 화면의 형식으로도 관철시켰다. 가령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들을 충분히 관조하기에 부족한 좁은 폭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족자나 병풍 등, 위아래로 긴 동양화 고유의 형식이 있기는 하지만, 유희승의 작품에서 긴 띠 같은 화면들은 마치 잠깐 열린 문 틈으로 바라본 대상 같은 느낌이다. 




내 마음의 꽃-'또 다른 꿈', 한지,먹,금니,72.7x50cm, 2020



내 마음의 꽃-'또 다른 꿈, 한지에 먹, 금니 2020



작가는 이에 대해 ‘대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기 위해 현실 사회에 나타난 위선, 허위성 등의 비판을 통해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은유적으로 표출하고자 하였으므로, 화면의 폭도 전통적인 화폭이 아니라 폭을 나누어 잇거나 세로로 길다란 폭으로 그에 맞게 수정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좁은 폭의 작품들은 화병에 꽂힌 꽃의 모습이 공통적인데, 한 장면을 잘게 자른 것이 아니라 같은 비율로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군들이다. 여러 방식의 꽃병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포착되어 있지만 모두 부분으로 나타난다. 꽃의 상징적 짝인 나비들도 빠지지 않는다. 나비는 꽃보다 작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물이라 그런지 잘려 있지는 않다. 꽃은 아름다운 여성을 대변해왔고 장인의 솜씨로 완성된 부드럽게 흐르는 선으로 연결된 잘빠진 도자기 또한 여성적이다. 그러한 시점은 특유의 엿보기 시각과 더불어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일까? 그것은 유희승의 작품 전반과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할 문제라고 보여진다. 


작가는 특히 여성에게서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분열 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상황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가 분열적 조건에 있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약자가 더 나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작가는 현대의 ‘여성과 꽃은 현대 여성의 현실과 이상, 자아의 인식과 개발을 욕구하는 여성의 욕구의 이중성을 말한다’고 밝힌다. 대부분의 전통적 역사 속에서 남성이 주체였고. 바로 그 인간 주체가 모두 현대인으로 ‘진보’했을 때, 출산과 육아를 비롯한 자연의 역할을 떠맡았던 여성은 온전히 현대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개 자연의 질곡에 문명의 질곡이 더해지는 양상이다. [내 마음의 꽃](2019) 시리즈에서 화병에 꽃힌 꽃들은 물을 너무 많이 머금은 나머지 확 번져 있는 모습이다. 꽃의 명확한 형태가 아니라 얼룩으로 표현된 형상은 활짝 피어나다 못해 흐드러진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흑백’이지만 다양한 농담을 가진 먹의 흔적들은 그것이 다채로운 색을 가진 꽃임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의 꽃-'또 다른 꿈',한지,먹,금니,112x194cm, 2020



작가는 이에 대해 ‘컬러 사진보다 흑백 사진이나 영화가 감상자에게 무한한 이야기를 하듯이’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의 꽃-‘또 다른 꿈’](2020) 시리즈에서 피어난 꽃은 꿈과 비유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짧은 화려함을 뒤로 하고 사라지는 꽃과 꿈의 비슷함에 주목한다. 하지만 꽃이든 꿈이든 세세한 기억은 사라져도 느낌은 남는다. 화면을 한가득 차지하는 먹의 흔적은 강렬하게 남은 기억에 대한 인상이다. 한지에 먹, 금니 등이 사용된 [내 마음의 꽃] 시리즈는 수묵화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수묵 비엔날레가 창설되어 주기적으로 열리기도 하지만, 한 분야에 비엔날레급 행사가 열리는 것은 그만큼 위기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작년에 관련 세미나도 들었는데, 발제자 중의 한 명이 수묵화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얼룩’을 제시했던 기억이 있다. 유희승의 [내 마음의 꽃] 시리즈는 한지에서 번지는 먹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다는 점에서 수묵화의 ‘본질적’ 특징을 보여준다. 


늘 상 위기와 함께 하는 예술이지만 수묵이 포함되는 한국화의 위기는 오랫동안 이야기되어 왔다. 예술의 정체성인 전통과 현대의 문제를 홀로 걸머지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수묵이 아닌 유화를 하면 서구=현대성의 도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현대적이라고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희승은 색을 현대적 속성이라고 간주하지만 [내 마음의 꽃] 시리즈에서는 화병이 놓이는 기저 면을 표시하는 노란 선만 보인다. 하지만 그가 활용하는 ‘검정’ 색은 매우 많다. 마가레테 브룬스가 [색의 수수께끼]에서 검정색은 ‘모든 파장을 받아들여 자신 속에 머물게 하는 유일한 색으로서 상당한 정도의 빛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듯이, 검정에는 이미 모든 색이 들어가 있다. 또한 ‘먹을 다루는 자는 다섯가지 색을 지배한다’는 동양의 사고가 있듯이, 먹 또한 하나의 색이 아니라고 간주되어 왔다. 유희승의 [내 마음의 꽃] 시리즈는 모든 색을 포함하는 먹의 특징을 아름다운 색들의 상징인 꽃과 비유하고 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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