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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소 / 기표들의 숲에서 헤매기

이선영

기표들의 숲에서 헤매기

김상소 전 (2022년10월 26일 - 11월 12일, 지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추상미술을 향한 진화로 현대미술사를 서술하는 경향은 그림에 내재되어 있던 서사적 요소를  제거하는 방향을 취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림만이 가능한 경쟁력을 위해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나 영화같은 장르는 배제되어야 했다. 그렇게 팔다리를 자른 회화의 몸통은 지속가능성이 떨어져 결국 역풍을 맞았다. 순수미술이라는 짧은 물마루를 넘고, 서사를 비롯해 억압된 것들이 복귀한 것이다. 21세기에 화가가 된 김상소는 서사 예술의 대명사인 소설을 출발로 한다. 실제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에 바탕 한 그 소설은 인기가 있어서 영화나 연극 같은 다른 장르로도 만들어졌으며, 이번 전시에서 가상의 지도나 영화음악같은 방식으로 끼어든다. 장르별 순수성이 아닌, 하나의 원천으로 많은 파생 작품, 또는 상품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취한다. 전시장에 작은 엽서 형식으로도 비치된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어른거리는 패턴을 출력해서 전시장 벽을 장식한다. 












전시전경



비치된 지도를 들고 전시장을 도는 관객에게 유의미한 위치를 암시하는 공백과 함께 하는 그림은 다소 간 설치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만, 그래도 이번 전시의 주요 매체는 회화다. 지갤러리에서 지원하는 신진작가 전은 김상소(B. 1996)에게 첫 개인전이기도 하다. 회화를 전공하고 주로 그리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코로나 국면에서 비대면 방식의 전시 패턴이 확대된 점이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는 여전히 총력을 기울여 전시회를 준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 전시장을 방문하기 보다는 온라인 뷰잉 룸을 비롯해 인터넷에 올라온 전시 정보들로 퉁 치는 분위기가 보편화된 것이다. 예술작품이 만들어지고 향유될 때 몸과 물질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고 작품은 점차 정보로 소진되어 간다. 정보 미학에서 정보는 물질도 정신도 아닌 제 3의 것으로 규정된다. 회화는 정보가 아니다. 하지만 수동적인 소비가 문화 뿐 아니라 예술도 잠식한다. 


정보홍수 시대에 정보 또한 귀하게 대접받지 않는다. 미술에 대한 정보들도 빠르게 스크롤하는 손가락 사이로 떠밀려 흘러가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은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더 쉽게, 더 의미 있게, 더 새롭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가야 할까. 김상소의 선택은 그 반대다. 애써 전시장까지 찾아온 관객들에게도 여러 장벽을 친다. ‘Great Exhibition 2022: XXXX_XXX_XXXX_XX’라는 수수께끼같은 전시부제부터 그렇다. 이 이상한 전시 제목은 작품의 소재로 사용된 동명의 이야기인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의 제목을 디지털 매체에서 폰트가 소실된 형태로 차용했다고 한다. 그리는 방식 또한 복합적이다. 작가는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속의 해당 장면에서 색감을 추출해서 작업했고. 심지어는 ‘해당 장면과 비슷한 구도와 내용을 가지고 있는 다른 영화의 장면을 소스로 활용하여 추출한 색감’을 이용하기도 했다. 작품 제목도 동일한 장면을 다룬 소설의 문장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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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할 수 있는 한 상호적 참조망을 늘려 나간다. 하지만 그러한 상호적 참조가 대상이나 의미를 더 확실하게 하지 않는다. 김상소의 작품에서 비밀스러움은 여러 층위에서 작동한다. 그의 작품은 크레이그 오웬스가 [알레고리적 충동: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향하여]에서 비유했듯이, 거듭해서 쓴 양피지와 비교할 수 있는 작품, 즉 알레고리적인 작품이다. 김상소 전에서 관람을 위해 관객이 들고가야 하는 지도 또한 두 장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크레이그 오웬스에 의하면 알레고리에서 이미지는 상형문자와 같다. 말하자면 알레고리는 수수께끼 그림이며, 구체적인 이미지들로 구성된 글이다. [알레고리적 충동]은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을 혼합하는 것은 모든 미학적 매체와 수사적 범주를 절망적으로 혼합하는 알레고리의 한 측면이라고 말한다. 알레고리적 작품에는 기표와 기의 거리가 편재한다. 알레고리를 모든 작품 속에 내재 된 구조적 가능성으로 보는 크레이그 오웬스는 알레고리가 더 이상 예술작품에 단순하게 덧붙여진 어떤 것으로 비난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모더니즘에서 알레고리는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했지만, 이제 알레고리는 모든 억압된 충동과 마찬가지로 회귀한다. 알레고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일반의 특징이며, 모더니즘의 자기비판적인 경향과는 구별된다. 크레이그 오웬스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경우,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자율성, 자족성, 초월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의 우연성, 미흡성, 그리고 초월성의 결여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은 영원히 좌절될 수 밖에 없는 욕망과 영원히 유보될 수밖에 없는 야심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결론 내린다. 여러가지 교란적 장치에 의해 기호를 동요시키는 김상소의 작품은 [알레고리적 충동]에 인용되어 있듯이, ‘숨어있는 의미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재현 그자체에 균열을 내는 것이며, 또한 상징을 변화시키거나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 자체에 도전’(바르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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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자체가 모호한데, 여기에 설치적인 방식을 통해 한 술 더 뜬다. 작가가 던져 준 작은 힌트를 유념하면서 이야기를 추적하는 관객이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은 안갯속인지 구름 속인지 모호한 모노 톤의 화면이다. 전시 벽면의 일부를 작품 크기로 잘라 놓은 듯한 연출이다. 구멍 뚫린 곳은 ‘작중 특정한 장면들이 시간적으로 위치한 곳을 잘라낸 것’이며, 그렇게 잘라낸 장면들은 유화로 그려졌다. 관객에게 주어진 가상의 지도는 장면 속 사건이 일어난 실제 위치를 가리키며, 유화는 바로 그 자리에 걸리게 된다. 김상소의 방식은 특정 대상이 아니라 맥락을 통해서 의미를 구축하라고 제의한다. 바탕에 깔려 있던 것은 화면이 된다. 화면들 근처의 바탕 면을 화면의 모양대로 빈 구멍이 나 있다. 전경과 후경의 관계는 보는 시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중심과 주변은 수시로 자리를 바꿀 수 있다. 이야기나 그 의미는 매번 다르게 짜여질 수 있다. 


그것이 공간예술인 미술이 시간예술에 첨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모노 톤의 출력본과 달리 작가의 붓터치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총천연색의 메인 작품들은 분명한가? 시계 방향으로 관람하라고 안내된 작품들의 순서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바뀌는 시공간들과 등장인물들이 내재해 있겠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의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순서대로 묘사한 일화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들 간의 간격은 크고, 작품 자체 내에서의 간격도 크다. 작가는 벌어진 간격 그자체를 메시지로 삼는다. 메시지가 읽히기 위해서는 글자만큼이나 띄어쓰기도 중요하다. 김상소의 그림은 한 작품에도 여러 층의 화면이 복합되어 있지만, 하나의 덩어리로 뭉개지지는 않게 차이를 보존한다. 김상소는 무엇인가로부터 출발은 하지만 과정과 끝은 모호하다. 출발점이 된 특정 작품은 노벨상까지 받은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조차도 작가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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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출발점이 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어떤 평범한 여성이 우연히 얽혀든 비극적인 사건이 주요 내용이다. 그것이 단순히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점은 예술이 실제와 허구 모두에 관련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런 복합적인 현실에서 출발한 작품은 처음부터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작가가 이 소설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서 선택했을 뿐, 이 작품이 어떠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상징성 보다는 거의 편의적인 선택인 것이다. 기승전결을 가지는 이야기와 그것이 전개되는 지역 또한 확실하다는 점은 플로어 맵을 가지고 탐방하는 식의 관람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끌렸다. 또한 부조리라는 주제에 대한 공감대도 있었다. 작품을 추동하는 또 다른 작품의 실재는 모호하며, 단지 그림을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로 다가온다. 무엇이어도 상관은 없지만, 전적인 무(無)로부터 시작될 수는 없는 텍스트들로 엮인 그 세계에서 말이다. 


관객이 마지막에 보게 되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흑백의 입자로 해체된 듯한 화면은 또 다른 조합을 위한 분해다. 물리학의 법칙처럼 양태는 바뀔지언정 총량은 보존되는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작품은 이야기의 시작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다른 작품들보다 크고, 뭔가 다양한 요소들이 전조를 암시한다. 이 작품은 벽돌, 울타리같은 건축적 요소와 녹색조로 연상되는 식물들처럼 뒤에 풍경이 있지만, 층층이 자유롭게 칠해진 굵고 가는 붓터치들은 일종의 베일같은 느낌이다. 얽히고 설킨 붓터치들은 그림이라는 무대에서 일어났을 사건의 흔적이다. 이 작품은 이후의 다른 작품과 스타일을 공유한다. 어떤 장면을 여러 겹 덮는 필치들과 칼로 그어낸 듯한 공간적 분할이 공존이 그것이다. 인파가 많이 몰려있는 듯한 거리의 모습이 있는 작품에서 화면을 가로지르는 직선들은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이야기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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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추상이지만 빛이 들어오는 실내같은 공간감이 있는 작품 녹색빛이 가득한 자연의 느낌이 있는 작품 등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로서의 시공간에 차이를 둔다. 어떤 작품은 소설의 주인공일 법한 여성의 옷차림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다. 관객과 눈을 마주칠 수 있을 법한 인물상이 크게 자리한 작품은 화면 위 보랏빛 선들이 교란적 요소다. 피사체가 된 어떤 인물이 모습이 흐릿하게 포착된 작품이나 신문같은 실루엣이 있는 작품은 탐정소설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무엇보다도 어둠 속에서 엎치락뒷치락 하는 듯한 어지러운 선들이 가득한 작품은 어두운 사건의 내용을 암시한다. 가용 가능한 텍스트들을 총동원하여 만들어진 김상소의 작품은 명확히 드러내기 보다는 덮는다, 하지만 완전히 덮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은 상호적인 얽힘 속에 유희한다. 전시장의 벽지처럼 사용된 흐릿한 이미지는 작가의 드로잉을 확대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자세히 보려 할수록 모호해지는 현실을 말한다.


출전; 미술평단 202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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