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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광 / 삶의 역동적 구조를 드러내는 빛

이선영

삶의 역동적 구조를 드러내는 빛

  

이선영(미술평론가)

 


다양성과 질서의 감각이 공존하는 김학광의 작품은 예술의 자율성을 가지면서도 세상과의 연결을 견지한다. 세상과의 연결이 수년 동안 가다듬어진 정제된 형식에 차이를 도입하며 의미를 발생시키고 확장시킨다. 형식과 내용은 본래 동전의 앞뒷면같이 연동되는 것이지만, 현대사회에 편재하는 파편화된 삶은 이러한 연결을 끊어낸다. 개별적 존재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분업의 전제는 교환의 공정성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이상주의에 머문다. 세상은 더욱 양극화되어가고 있다. 톱니 바퀴의 일부가 되어 행하는 단조로운 노동은 한 개체가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한 총체적 비전을 왜곡한다. 이러한 분열적 삶의 조건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신성한 체험을 낳는다. 그 연결망 속에 나의 자리도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배적 상징체계의 추상적 기준에 의해 허공에 매달린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구체적 자리를 원한다. 



 Dynamic air-Guernica 162.2cm x 390.9cm Oil on Canvas 2022


현대사회 이전에 그러한 역할을 주로 수행한 것은 종교였지만, 예술은 그 역할의 일부를 계승한다. 예술 또한 종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학광은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선과, 선의 조각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내게 보이는 것, 내가 안다고 하는 것, 기억하는 것, 이해하는 것 등 소통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문의 표현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라고 한다.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화가의 역할은 자신의 내부에서 보이는(보여지고 있는) 것의 윤곽을 그리고 투영 하는데 있다’(막스 에른스트)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림이나 드로잉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산출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선, 붓질, 눈에 보이는 작품은 존재 전체를 향해 가는 말의 총체적 운동의 흔적’(메를로 퐁티)이다. 


그러한 흔적들로 중층적 표면을 만드는 김학광의 작품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연결망을 깨닫게 하는 빛의 편재가 특징적이다. 일상적 차원에 초월의 분위기를 제공하는 것은 빛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그리스 종교에는 자연신이 풍부하게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의 신은 없다고 지적한다. 빛이 신으로 포착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빛은 부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하나의 매개체처럼 우주를 채우고 있는 밝음은 수축되고 집중되어 형이상학적인 단위로 대상화된다고 말한다.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 의하면 빛의 은유와 빛의 형이상학이 기독교적으로 수용되는 출발점은, 천지창조에 관한 성서의 기록이 창조의 첫날의 빛이라는 근원과 창조의 넷째날의 등불들의 근원을 특별히 분리한 지점이다. 요컨대 빛은 최초로 창조된 것,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 초현세적인 것이다. 



 Dynamic air-Pieta 130.3cm x 162.2cm Oil on Canvas 2018



 Dynamic air-Life 53.0cm x 72.7cm Oil on Canvas 2021



 Dynamic air-Life 227.3cm x 181.8cm Oil on Canvas 2021



 Dynamic air-Life 227.3cm x 181.8cm Oil on Canvas 2021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의하면 창조자로서의 신은 빛(phos)이다. ‘신이란 단순히 빛은 아니다. 신은 빛나는 빛이다‘(아우구스티누스). 빛은 작품마다 다양한 밀도와 강도를 가지는 연결망을 돋보이게 한다. 연결망은 구조적 견고함과 역동성을 동시에 표현한다. 형태나 색채같은 조형적 언어를 지시 대상과 단절시키면 더 수월할 것이다. 발생기의 추상은 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언어를 순화시켜왔지만, 그 언어는 곧 코드화되고 의미와 단절된 유희, 즉 장식으로 전락한다. 세상을 재현하는 과제는 사진이나 영상같은 보다 경쟁력 있는 매체로 이동했다. 장식도 재현도 아니라면, 현대의 화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장식과 재현은 현대미술이 그것을 배제하기 전에 이미 기계의 힘으로 문화를 장악해 나갔다. 화가는 미술 또한 왜곡시키는 파편화된 현실을 다시 엮어낼 과제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형적 언어 이상이 필요하다. 


김학광 작업은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출발한다. 세계는 일상과 이상을 모두 포괄한다. ’이것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규정할 수 없는 세계, 즉 창조 세계에 대한 동경이며, 나의 존재를 비롯하여 일상의 경험, 기억 등과 지각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존재와 관계 등의 근원적 질문을 동반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세계는 눈앞에 존재하지만 자명하지 않다. 그것을 구축을 통해 해석되어야 하는 미지의 대상이다. 선에 의해 분절화된 화면을 통해 명료하게 말하는 듯한 작품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 그것은 언어의 분석을 통해 세계를 보다 명증하게 해석하고자 했던 한 철학자의 역설적 결론을 떠오르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서문을 쓴 철학자 러쎌은 논리상 말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비트겐슈타인이 간주하는 총체는 그의 생각에 의하면 존재하며, 그의 신비주의의 주제라고 평가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영원의 상 아래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세계를 한계지어진 전체로서 본다는 것이다.’



 Dynamic air-Life 91.0cm x 193.9cm Oil on Canvas 2021



  Dynamic air-Life 181.8cm x 181.8cm Oil on Canvas 2015



 Dynamic air-Life 72.7cm x 60.0cm Oil on Canvas 2021



  Dynamic air-Life 145.5cm x 112.1 cm Oil on Canvas 2017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실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라고 말한다.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였지만, 예술가의 도전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일이다. 이 과제는 기약 없는 무수한 심신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대개 예술가들은 예술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주변화되어 있다. 자신의 일부가 아닌 전 존재의 노력이 투입되어야 하고 전체에 대한 비전을 요구하는 예술과 파편화된 세계와의 괴리가 그 원인이다. 하지만 소외도 긍정적인 면은 있다. 소외는 그 원인에 대한 진정한 문제의식을 야기한다. 무언가 만드는 자만이 만들어지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 반대 유형은 전형적인 소비자다. 


무언가 만들 수 없는 자의 관심사는 피상적이고, 결국은 소비를 통한 더 큰 자극을 원할 뿐이다. 예술가는 작은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감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부류 중 하나다. 우리가 잡초 한 포기도 창조할 수 없다면, 잡초는 여전히 미지의 것이다. 작가는 생은 물론 작업을 하는 과정 순간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호흡 자체를 기적으로 생각한다. ‘호흡을 깊이 인지하는 것. 사고의 틀을 깨뜨리는 것. 그것은 신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통로’(김학광)이다. 물론 생산과 소비는 연동되는 것이지만, 부와 권력의 집중을 향하는 세상의 어떤 경향은 보다 많은 것들을 코드화 시키며, 보다 많은 사람들을 단순한 소비자로 만들고자 한다. 생산 또한 더욱 단편화, 익명화되고 무엇과도 누구와도 호환될 수 있다. 클릭하고 소비하는 인간 단말기로서의 운명을 벗어나려면, 이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예술가의 위상은 보다 많은 것이 기계화되는 시점에서 다시 규정될 필요가 있다. 



  Dynamic air-Life 181.8cm x 227.3cm Oil on Canvas 2021



 Dynamic air-Life 97.0cm x 130.3 cm Oil on Canvas 2021



 Dynamic air-Life 130.3cm x 193.9 cm Oil on Canvas 2021 



 Dynamic air-life 72.5x116.5cm   Oil on Canvas 2021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는 작업에 필요한 것은 본질에 대한 추구다. 예술가의 작업에 전적인 새로움은 없겠지만, 완전한 반복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은 중요한 모델이 된다. 물론 예술도 감상이나 교육 등을 통한 소비에 포함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드처럼 쉽게 통용되지 않는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자는 자신을 둘러싼 일상과 현실뿐 아니라, 보다 깊은 차원의 창조에까지 뻗어있는 호기심이 작업에 대한 필연성을 확보한다. 자신의 전면적인 관심사와 재능을 쏟아 넣는 예술은 그 밀도와 강도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한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동된 몰입적 활동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그것을 특화시킨 부류라 할 수 있다. 작품 제목이자 전시 제목인 [Dynamic air-]는 구조적으로 탄탄해 보이는 그의 작품의 관심이 역동적 흐름에 있음을 알려준다. 이번 전시는 2022년에 제작된 작품이 주가 되지만, 이전작품과의 연결은 중요하다. 


80여 평의 전시장을 채울 40여점의 작품은 2014년부터 시작된 스타일이다. 이전 작업에는 곡선이 많았지만, 2020년 이후에는 선들이 차갑고 간결 명료해지는 경향이 있다. 최대한 단순화되고 있지만 덜 그리는 것이 단순화는 아니다. 일 획으로 모든 것을 담아낸다는 식의 초월적 태도는 아니지만, 단순해졌다고 해서 그 형상을 만드는 붓질의 수는 다르지 않다. 본질적 메시지에 집중하고자 함이다. 작품 [Dynamic air-Life](2017)에는 현실적 출발점이 있다. 김학광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추상적인 화면이 되지만 굳이 어떤 감춰진 출발점이 있는 것은 그것이 차이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는 정해진 규칙이 없어도 하다 보면 작가에게만 익숙한 어떤 것이 반복되고 패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딘스키를 비롯한 최초의 추상화가들이 염려한 것은 그러한 패턴화, 즉 장식화였다. 물론 패턴이나 장식도 자연에서 나왔으며, 오래된 유래를 가진 무늬들처럼 문화적 상징성을 가질 수 있다. 



 Dynamic air-life 130.3x162.2cm Oil on Canvas 2015 



 Dynamic air-life 130.3x193 



 Dynamic air-life 130.3x193.9cm Oil on Canvas 2021 


하지만 그것이 당대의 공기로부터 멀어진 이후에는 결국 기계적 반복만 남게 된다. 작가가 현실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실재의 감각을 유지해주고 다른 현실들에서 기인한 차이들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출발로 귀결되는 재현주의가 아니라, 생성이 가능한 믿음직한 밑바탕으로서의 현실이다. 작가에게 현실은 그가 예술가로서 단련되기 위해 대화했던 이전의 작품을 포함한다. 김학광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관객이 찾지 못할 수도 있는 소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령 이 전시의 한 작품처럼 화면에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담은 모종의 기호를 삽입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비밀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무작위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도 않는다. 원점이 있기는 하지만 과정 중에 변형이 심해서 원인과 관계없는 목적지에 도달하곤 한다. 하지만 과정이라고 해서 우연적인 궤적으로 와해되지도 않는다. 김학광의 작품은 과정적이면서도 견고한 형식미를 갖춘다. 


재현적 요소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잘게 나누어진 선과 면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실의 어떤 대상과도 거리를 둔 자율적 화면을 구축한다. 하지만 특정 도상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어도 제목에 모두 부제를 붙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대개 [–life]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런 점에서 참조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부제가 달린 몇몇 작품들은 특이하다. [Dynamic air-Guernica](2022)는 피카소의 작품 제목을 염두에 두면서 보면 고통에 절규하는 요소들의 이미지가 감춰져 있다. 대상과 배경의 구별 없이 다양한 굵기의 선으로 구획된 화면은 전면구도(all over)에 가까운 추상화다. 물질적인 것은 물론, 인간의 육체와 영혼마저 파괴하는 전쟁의 참화에 어울리는 구성이며, 피카소가 그린 비극보다 더 나아간다. 현대사회의 비극은 피카소의 시대보다 더 자주 발발하고 그 파급력도 크다. 작가는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짠다. 



 Dynamic air-life 116.8x91.0cm   Oil on Canvas 2022 



 Dynamic air-life 145.5x112.1cm     Oil on Canvas 2021 



 Dynamic air-life 162.2x130.3 cm     Oil on Canvas 2018 



 Dynamic air-life 162.2x130.3cm   Oil on Canvas 2022 


그것은 이미 입체파가 대상과 공간을 뒤섞는 실험을 했기에 가능한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입체파의 해결책은 화면의 물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화했고, 미술에 있어서 ‘내용’은 전근대적인 것으로 강등되었다. 김학광에게 형식은 어떤 내용에 대한 형식이며, 메시지는 형식을 변화시킬 정도로 중요하다. 추상적 화면에서 메시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특히 ‘숨은 그림’이 내재한 작품들은 보이고자 하는 것일까 숨기고자 하는 것일까. 제목으로만 약간의 힌트를 주는 작품은 예술은 창조지만 전적인 무(無)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무로부터의 창조란 신만이 가능한 경지 아닌가. 예술이 아무리 자유롭다한들 작가는 불경을 저지르지 않는다. 태양 아래 새로움은 없는 법이다. 작품 [Dynamic air-Pieta](2018)의 제목은 청과 백의 형태로 나눠진 공간에 내재한 검은 선의 흐름에서 피에타를 어렴풋이 드러나게 한다. 보편적인 사랑과 연민의 상징인 피에타상은 추상적인 방식을 통해서도 정념을 잃지 않았다. 


최근 그려진 대부분의 작품 부제인 ‘life’는 ‘air’에 상응할 만큼의 포괄성을 가진다. 미술사적 도상뿐 아니라 추상적 기호도 자주 발견된다. 작품 [Dynamic air-Life](2021)에서 잘게 쪼개진 화면을 이어주는 듯한 플러스 모양의 기호와 별같은 이미지들이 산재한 화면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을 긍정해야 함을 말하는 듯하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둥근 원 안의 마이너스 기호도 읽히기는 할 것이다. 김학광의 작품은 복잡한 퍼즐처럼 잠재적인 움직임이 있다. 선들이 형태를 만드는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여백 같은 공간은 그러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다. 마치 숫자의 0 처럼 모든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바탕 같은 역할을 한다. 어두운 선과 대조되는 밝은 형태는 빛 같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빛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원론적 세계관에 속했다고 하면서, 마치 불과 흙처럼 빛과 어둠은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진리라고 말한다. 



 Dynamic air-life 181.8x181.8 cm  Oil on Canvas 2015 



 Dynamic air-life 227.3x181.8cm   Oil on Canvas 2020 



 Dynamic air-Life 112.1cm x 145.5 cm Oil on Canvas 2019 


그는 빛으로서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이 형상화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들면서, 선(善)이라는 개념이 등장함을 지적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의하면 선은 다른 모든 것들에 가시성과 ‘대상성’을 부여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 없다. 빛은 그것이 가시적이게 한 것들을 통해서만 보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빛은 진리가 출현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명약관화한 명백함을 창조한다.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은 형이상학의 역사가 애초부터 더 이상 소재적인 맥락으로는 포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준거를 확보하기 위해 빛의 은유를 활용해왔다고 지적한다. 어두운 선과 밝은 면의 조합은 중세 시대 육중한 벽체 안의 어두컴컴한 실내에 빛을 끌어들였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창같은 느낌이다. 김학광의 작품은 재현주의 미술에서처럼 특정한 광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면구도의 작품에 편재한다. 


2021년에 제작된 [Dynamic air-Life] 시리즈에서 바탕은 더욱 빛을 발한다. 바탕색은 동시에 빛으로 보이며 그 위의 구조를 비추면서 구조의 짜임새와 역동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조밀한 망으로 짜여있으면서도 엎치락뒤치락하는 관계로 얽혀 있는 삶의 양태를 표현한다. 빛이자 색은 그것이 아니었으면 모호했을 여러 관계망을 비춘다. 누르스름한 바탕색은 빛의 느낌을 더 강조한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고른 판으로서의 세상에 대한 이미지다. 김학광에게 세계는 관계망이며, 그와 마주한 주체 또한 위상의 변화가 있다.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사유는 타인들과의 관계임과 동시에, 자기와의 관계이며 세계와의 관계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공간을 관통하여 투명무늬 모양으로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은 서로의 주위를 회전하는 내부와 외부’이다. 대상의 모호성은 주체 또한 마찬가지의 차원에 놓는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것과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Dynamic air-life (24.2x33.4cm)x12  Oil on Canvas 2022 



 Dynamic air-자화상   (33.4x24.2cm)x8 Oil on Canvas 2022 


‘나의 중심적인 무(無), 그것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누구도 아닌 자’(메를로 퐁티)이다. 김학광의 작품에서 관계망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짜여진다. 작품마다 역동적으로 구획되는 화면들은 선적 요소가 주도적이다. 김학광은 ‘선은 상상한다’고 말한다. 색은 작품마다 5가지 정도로 제한한다. 5가지 색의 조합이 주는 색다른 정서가 있다. 색감의 차이는 미리 시뮬레이션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며 매번의 도전과제이다. 기하학적인 형태들은 도시적이다. 2021에 제작 된 [Dynamic air-Life] 시리즈의 작품들은 도시적 느낌이다. 다양한 굵기의 어두운 선이 화면을 분할 하는 작품들은 밀집되어 살아가는 도시 구조의 표현이다. 그의 작품에서 구조는 정적이지 않고 역동적이다. 퍼즐처럼 조밀하게 맞춰지지만, 운동의 여지는 있다. 수직 수평의 고정적 좌표계가 아니라, 틈을 만들어 벌려 나가야 하는 방식이 중첩된다. 근현대는 자연을 파괴한 후 구축되었지만, 그만큼 자연을 도시의 허파로 포함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자연을 먼저 도구화시킨 선진국들은 자연을 ‘보호’하자면서 자신들이 올라섰던 사다리를 던져 버린다. 기후 위기를 비롯한 인간이 자연에 가한 파괴의 결과는 평등하지 않다. 녹색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작품 [Dynamic air-Life](2015)는 자연 속에서 힘차게 달리는 인간의 모습도 보인다. 태양의 빛을 고정시켜 지구의 유기체에게 최초의 에너지를 공급했던 녹색 생명체는 광합성의 과정처럼 복잡한 순환 체계를 이룬다. 덩굴처럼 이어지는 관은 자연의 네트워크가 인공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려준다. 인간은 자연의 극히 일부를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아직도 자연은 미지의 대륙이며, 근시안적인 기능주의만이 자연을 수동적인 자원으로만 간주한다. 자연의 법칙을 인간의 규칙으로 변형 함에 있어 과학기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만물이 자기의 자리와 역할이 있는, 순리에 바탕 한 사회질서의 생성에 예술의 역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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