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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묘수 / 삶의 지평에 편재하는 빛

이선영

삶의 지평에 편재하는 빛

  

이선영(미술평론가)

  


레드와 블랙 계열의 색이 위아래로 마주한 강묘수의 최근(2022-2023) 작품 [1000개의 空.光] 시리즈는 화면 중간의 수평선이라는 조형적 요소 때문에, 땅/바다와 하늘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강한 대조를 이루는 두 색이 리넨에 얇게 칠해져 있어서, 색은 곧 빛을 머금는다. 색이 지상적 요소라면 빛은 천상적 요소이며 양자는 서로를 끌어들인다.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은 그 예가 될 것이다. 창세기의 신화가 알려주듯, 빛은 가장 숭고한 소재이자 주제이기도 했다. 공간은 색으로 현현된 빛으로 가득하다. 블랙은 빛이 없는 상태지만, 빛이 탄생할 수 있는 잠재적 모태다. 블랙은 모든 색을 포함하고 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발생하듯, 깊은 어둠의 색은 세계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강묘수의 작품은 화투에서 팔광 이미지가 어둠 속에서 붉은빛을 발하며 떠오르는 태양의 이미지가 추상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세속적 기원은 뿌리가 깊다. 






반복, 즉 거듭해서 되돌아오는 것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신화론]에서 주목했듯이 대중문화는 신화와 밀접하다. 얇은 화면은 배후의 십자형 지지대 또한 어스름하게 비춘다. 그것이 없다면 화폭이 팽팽해질 수 없는 지지대는 회화라는 매체가 평면적임을 새삼 강조한다. 그래서 지지대는 그자체로 현대미술의 실험 요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쉐이프트 캔버스’ 같은 지지대의 실험으로 회화의 환영적 요소가 떠내려 간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것은 회화의 가능성을 축소한 채, 또 하나의 사물을 추가한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지지대가 슬쩍 비춰지는 강묘수의 작품은 풍경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두 개의 평평한 색면이 마주한 추상회화이기도 하다. 재현주의는 평면에 풍경을 담기 위해 이런저런 환영의 장치가 필요하지만, 추상은 수직/수평이나 색채의 대조 같은 조형 언어의 상징성으로 풍경을 암시한다. 어둠 속에서 빛이 등장하는 장면은 너무나 극적이어서 그것을 일순간의 장면으로 재현할 수 없다. 


누군가는 여기서 세계 창조의 비유를 보지 않았는가. 추상이 재현과 갈라서는 지점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의 묘사를 넘어서 형언할 수 없는 것, 즉 숭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2000년대 초반에 시작한 숭고 시리즈가 2022년의 전시로 이어져 왔다’고 밝힌다. 특히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본인의 작업의 중요한 토대로 자리매김해 온 것’은 ‘빛의 숭고’라고 말한다. 모호한 자연현상으로 가득한 터너의 바다 풍경처럼 요란한 숭고도 있지만, 마크 로스코의 추상회화처럼 신비한 숭고도 있다. 강묘수의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 작가는 숭고에서 ‘정중동에 내재한 고요 속 평화’를 표현하고자 한다. 고요함은 많은 작품에 깔려 있는 수(지)평선의 구조가 한몫한다. 재현할 수 없는 것과 관련된 숭고는 재현 대신에 제시라는 서술어를 요구한다. 숭고는 멀게는 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사진을 비롯해서 기계적 재현의 수단이 발명된 이래, 회화가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형태 없는 형상들은 화가만의 행위의 흔적들이다. 색이 다른 상단/하단의 영역 모두에서 지지대가 드러나는 강도가 큰 작품들도 있다. 십자형 지지대는 마치 창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화면이 오랫동안 창문이라는 비유를 가져서 그렇지만, 색과 빛의 수렴을 지향하는 강묘수의 작품 특성을 나타낸다. 창문으로서의 회화는 창밖을 내다보게 하는 투명한 막을 가정한다. 하지만 강묘수의 ‘창문’은 창틀 건너편이 아니라 창틀과 그 표면을 주목하게 한다. 여느 창과 달리 그것은 투명하지 않다. 저편의 무엇을 파악해서 알고 소유하는 재현주의의 방식은 도구적이다. 도구의 특징은 투명한 기능성에 있다. 하지만 추상은 수단이 아니라 그자체가 목적이 되길 바란다. 추상은 재현처럼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 그자체다. 존재는 기능만큼 투명하지 않다. 의미의 비움, 무의미의 의미가 논해지는 시점에서 ‘공(空)’같은 관념과 만난다. 


하지만 강묘수의 작품에서 공은 하나가 아니다. 이 시리즈의 작품 제목에 나타나듯이 무려 1000 개다. 대개의 철학적 관념이 환원주의를 동반한다면, 그 반대 방향이다. 물론 1000은 정확한 숫자라기보다는 많음을 상징한다. [천개의 고원]이라는 책 제목이 있듯이 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은 하나의 지고한 이상세계를 꿈꾸고 그러한 관념을 재현하려는 동일성의 철학에 반대하여, 세계의 다양함을 긍정하는 생성의 철학을 담고 있다. 동일성의 철학의 유래는 깊다. 아서 러브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서 ‘위대한 하나’라는 관념을 소개한다. [존재의 대연쇄]에 의하면 일원적 철학은 보편적 하나(Universal Oneness), 영원불변에 대한 파토스를 가진다. 저자는 셸리의 [아도니스]의 문구를 인용한다; ‘하나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다수는 변화하고 소멸하며 하늘의 빛은 영원히 밝지만 지구의 그림자는 덧없이 사라진다’ 그러한 관념의 기원은 종교적이다. 








그것은 ‘창조된 우주의 성질이 허용하는 한 완전하게 신의 이성 속의 이데아의 영원한 질서를 모델로 해서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그 본질적 구조에 있어 불변하는 우주’(아서 러브조이)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에서 ‘신 안에서는 모든 관점들이 절대적인 존재의 동일성으로 빠져들어 간다’고 말한 바 있다. 하나라는 관념 그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하나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가 이미 완성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자발적 타발적 복종을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강묘수의 작품은 두 개의 대조항이 상호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를 향한 여정에 있다. 또한 천이라는 한국어 발음은 동음이의어인 하늘을 연상시킴으로서 공, 광과 함께 일련의 상보적인 의미망을 이룬다. 미술사적으로 추상미술은 환원주의와 밀접하다. 대상과 서사 등 그림 외적인 것을 하나씩 배제하는 가운데 점 선 면 같은 조형 언어로의 환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환원은 순수미술로 귀결되기보다는 그림을 사물이나 장식, 철학이라는 그림 외적인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작가는 특정 관념으로의 환원이 아닌 보다 많은 뉘앙스를 원하며 추상적으로 제한된 언어 와중에도 미세한 차이를 실행한다. [1000개의 空.光] 시리즈의 기본을 이루는 두 색 면은 가장자리부터 변화의 흔적을 담아낸다. 밝은색의 얼룩들은 기성에 자리잡은 두 색 면을 잠식하려는 것인지 잠식당하는 것인지 불확실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변화의 징후임은 확실하다. 공간에 표시된 시간이다. [1000개의 空.光] 시리즈는 크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형식을 체택 한다. 서사가 명시적이지 않은 비재현적 회화에서 시간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다. 블랙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다른 작품들처럼 화면 중간에 두 면이 만나서 생기는 흔적이 남아 있다. 위와 아래가 분별이 되지 않는 우주적 어둠에 잠겨있다. 또 다른 작품은 중간의 선조차 사라져 하나가 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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