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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 유근택 전 / 보이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이선영

보이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이기봉 전 (2022.11.17.--12.31. 국제갤러리 서울점 K1, K2, 부산점)

유근택 전 (2022.11.8.--2023.1.15, 대구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크게 풍경이라는 방식을 취하는 이기봉과 유근택의 작품은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한 감수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불확실성은 확실성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수 십 년 째 쉬지 않고 이어진 예술적 여정에 대한 확실성이다. 그들에게 예술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확인하고 대응하는 유연하고도 유력한 형식이다. 안개에 감싸인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기봉의 작품은 불확실성에 대한 표현이라고 쳐도, 드넓은 대구미술관의 여러 방을 구석구석 채운 유근택도 그럴까. 하지만 세계의 여러 면면을 섭렵하는 작가의 왕성한 추동력은 한 발 다가설수록 한 발 멀어지는 세상 또는 그림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욕망에 의한 것이다. 이기봉 전은 물가의 나무숲과 텍스트라는 소재로 한정되어 있고, 유근택은 가능한 많은 소재를 소화한다는 차이가 있다. 


한정된 소재지만 그 안에서 무한의 겹과 뉘앙스를 창출하는 환원적인 태도, 무한 탐구적 시선을 가진 확산적 방식 모두에 세계의 불확실성에 반응하는 공통된 감각과 사유가 있다. 이기봉의 경우 캔버스 외에 여러 겹의 장치를 통한 모호한 분위기를 통해, 유근택의 경우 세상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를 통해 그렇게 한다. 이기봉의 작품은 신비로운 침묵에 잠겨있고, 유근택은 자신과 마주치는 많은 것들과 진지하게 대화한다. 다름 아닌 작가이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관심이다. 자세히 볼수록 오히려 모호해지는 세상에 대한 양자의 가늠자는 다르다. 이기봉의 경우 언어의 한계에 대한 사유이고, 유근택의 경우 모든 것의 끝인 죽음이다. 그들은 모두 보이지만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실재를 말하려는 불가능성에 도전한다. 



불확실성에 잠긴 세계




 이기봉_Where You Stand D-1(사진출전; 국제갤러리)


이기봉은 ‘내가 관심을 갖는 주요 모티브는 물과 안개다’라고 밝힌다. 물안개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담아내는 형식적 장치는 캔버스 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한 플렉시글라스나 폴리에스테르 섬유다. 이전 전시에서 거대한 수조를 동원하기도 했듯이, 캔버스에 겹쳐진 판을 제거하면 내부의 수증기가 밖으로 빠져나올 것은 농밀함과 잠재적인 움직임이 가득하다. 물과 안개같은 유동적 원소의 흐름은 정밀한 구조적 장치로 인해 가능한 셈이다. 생성되거나 사라지는 실재와 상호작용하는 장치 또는 형식에 대한 관심은 언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 펼쳐진 페이지처럼 보이는 작품 [A Thousand Pages](2022)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문장들이 담겨 있다. 무엇을 정확히 지시하거나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안개처럼 희미한 텍스트는 언어가 실재의 진면목에 얼마큼 다가갈 수 있을지에 대한 철학자의 회의를 공유한다. 자연에는 없는 직선은 글자가 배열되는 수평적 층들이 텍스트에 대한 이미지다. 


작가는 언어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적 태도를 거친 후 신비주의에 이르른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공감한다. 인식론적 확실성을 전제하는 언어의 투명성에 대한 믿음의 변화다. 불가지론이라기 보다는 실재의 불확실성에 대한 확인이다. 불확정성에 대한 현대물리학의 논리(하이젠베르크)나 불완전성에 대한 현대수학의 논리(괴델)처럼 말이다. 텍스트를 연상시키는 가로줄 패턴 위를 잠식하는 얼룩이나 흘러내리는 선을 통해 멍들거나 훼손되는 실증주의적 확실성을 암시한다. 탐구할수록 더 복잡해지는 실재의 양상은 작업에 대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작품 [Passage to Illogic A](2021)에서는 비논리적이거나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사유가 제목 속 개념어로 나타난다. 얼룩은 물에 비친 나무가 연상되는 이미지지만 반사면의 기준점은 사라진다. 흐린 날 바다 풍경에서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가느다란 수평선이 사라지듯 말이다. 풍경 화가에게 명시적 또는 잠재적인 좌표축인 수평선은 어두운 얼룩에 의해 잠식된다. 목적지도 나침반도 없이 우리는 그 불확실한 영역을 통과해야 한다. 


‘Passage’는 근대 이후의 조각을 설명하기 위해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도입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근대 조각의 합리적 투명성에서 부조리한 불투명성의 추이를 서술한 바 있는데. 이때 초현실주의 오브제나 미니멀리즘에서 강조한 사물성은 중요한 물마루가 된다. 캔버스 뿐 아니라 다양한 소재가 활용된 작품 [Black ShadowㅡThe Void](2022)는 얇은 종이나 천에 먹이 번진 듯하다. 대형 얼룩 같기도 한 이미지가 있는 작품에서 화면의 하단 여백은 물인지 공기인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모호함은 이기봉의 풍경이 전체를 일괄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 제목에 포함된 어휘들(Black, Shadow, Void)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깝다. 숲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은 습기 많은 날처럼 축축하게 적셔온다. 보이는 것의 선명성으로 승부를 거는 스펙터클과 다른 방식의 소통을 향한다. 그것은 알아보고 이해한 후 소유하거나 버리는 전형적인 소비사회의 방식과 큰 차이다. 작품 [Where You Stand D-1](2022)은 흐릿한 와중에서 전경과 중경 후경 등이 나뉜다. 


어떻게 만들어 진지 알 수 없는 무수한 겹과 결을 가진 자연은 실재의 양상이다. 실재는 단번에 파악되지 않으며 점근선을 따라 무한히 접근될 따름이다. 자연의 대표색을 입은 녹색조의 작품은 습지나 우기를 떠올린다. 우리의 습기에 대한 애호는 태곳적 이유를 가진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원시의 바다에서 기원했으며, 그 환경을 구현한 모체에서의 발생과 생장은 모두 물을 매개로 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 식생은 수직성을 통해서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이라는 여러 계(界)를 연결짓는다. 이기봉의 안개 자욱한 풍경은 신비롭지만. 안개는 현대에 와서 황사 등 공해를 연상시키는 징후이다. 알 수 없는 것은 매혹이자 공포라는 양가성을 가진다. 캔버스 위에 덧댄 또 다른 층은 사물의 실루엣을 몸 위에 난 멍자국처럼 흐릿하게 한다. 농담의 차이를 통해서 암시되는 사물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거나 사라질 것이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담아내려는 이기봉의 실험은 정지된 매체인 회화에 잠재된 움직임을 부여한다.   




유근택, [분수], 2022년. black ink and powder of white and gouache on korea , 290x202cm(사진출전; 대구미술관)


제 22회 이인성 미술상자 유근택의 ‘대화’ 전은 세상과의 대화인 그림이 작가 스스로와의 대화이기도 하다. 청년기에 1980년대를 관통했던 세대로, 역사와 인간에 대한 관심부터 자연과 일상에 대한 관심이 두루 펼쳐진 거의 회고전 급의 스케일이지만, 최근작의 비중 또한 높아서 아직 진행 중의 작가임을 알려준다. 빛이 들어오는 높은 천정의 공간에 건 [분수](2022) 시리즈는 전체가 연동되어 요란한 물줄기 소리들이 들릴 것 같다. [또 다른 오늘](2021-2022) 시리즈와 함께 묵음(默音)의 소통을 꾀한다. 소리 없는 형식인 회화에서 소리가 들릴 듯한 느낌은 작가가 회화가 가능할 수 있는 최대치를 실현하고 있음을 말한다. 나무숲이 반영되는 분수, 거기에서 솟은 물은 한 사람의 모습과 중첩된다. 솟구친 후 다시 떨어지는 분수에서 작가는 삶을 본다. 분수는 한줄기, 두 줄기, 여러 줄기 등의 여러 버전이 있다. 물줄기 수가 많아질수록 장면은 추상화되어 풍경이 재현된다기보다는 여러 겹의 막이 된다. 화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일획을 긋는 대신에, 일획과 유사한 시각상을 가지는 분수의 여러 모습으로 잠재적인 동감도 표현한다. 


여기에서 재현과 표현, 구상과 추상,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별은 무색해진다. 옆방의 [또 다른 오늘] 시리즈는 같은 크기의 종이에 그려진 200여 개의 작품들로, 모두에게 재갈이 물려졌던 팬데믹 기간 동안 소통의 차단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특히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요양병원에서 죽음과 싸우던 부친과 가능했던 유일한 시각적 대화가 계기가 되었다. 마치 손팻말의 글자처럼 적힌/그려진 작품을 통해 불가능한 대화의 끈을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은 돌아가신 부친의 모습이 포함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확실한 것이다. 하지만 애써 그 사실을 억압한다. 작가이기 때문에 직시하기 어려운 삶의 진실이 작업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심각한 상황 또한 일상의 단편과 다른 큰 비중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죽음은 가장 중요한 실존적 사건 중의 하나지만 삶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경중은 없다. 열린 형식을 취하는 [또 다른 오늘] 시리즈는 살아남은 자의 작업이 계속될 것임을 예시한다. 


다른 전시실들은 80년대부터 최근까지 시기별 주제별로 나뉜다. 초기의 대작이 포함된 전시실 ‘역사와 할머니’(1986-1995)로 붙여진 전시실에는 40미터나 되는 대작 [유적-토카타(질주)](1991)가 31년 만에 전시된다. 역사에 대한 파토스는 그가 작업을 개시한 80년대의 특징이었지만, 그에게 한국의 근대사는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거대 담론이기보다는 할머니의 인생과 겹쳐질 수 있는 소박한 관점을 취한다. 작품 [나의 신비스러운 자리](1991)에서는 할머니의 옆모습과 작가일 수도 있는 어린이의 얼굴이 화면 귀퉁이에 함께 등장한다. 역사란 세대와 세대의 연결이자 도약이다. 쪽진 머리는 할머니가 우리의 근대사를 관통하여 살아온 세대임을 증거 한다. 유근택에게 역사적 관념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미시적인 차원으로 옮아갔는데, 할머니라는 존재는 후자를 대변한다. 이후 아버지의 병환에 있는 모습을 포함해서 생로병사하는 인생의 마침표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아무리 냉철한 시선도 죽음을 온전히 담아내기는 힘들다. 


‘장면을 포착하는 언어들’(1999-2004)은 ‘만유사생(萬有寫生)’(2004-2014)으로 이어지는 일상으로의 선회가 있다. 화면 위를 물에 비친 반영상에 할애하고 화면 하단에 풍경을 배치한 [산수, 당신의 끝없는 내일](2014)은 물에 비친 하늘이 마치 샌드위치처럼 풍경 사이에 끼어있다. 풍경화 속에서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작가는 이러한 특이한 각도를 통해서 유한한 일상이 품은 무한(하늘)을 예시한다. 뻔해 보이는 반복적 일상에 도입된 무한은  일상의 딱딱한 껍데기를 뚫고 들어가 미시적 우주의 광활함이다. ‘어떤 풍경과 시간’(2016-2022)에서는 신문 기사의 한 줄이 불에 타는 모습의 작품들이 자주 등장한다, 신문의 한 귀퉁이가 타기도 하고 아직 안 탄 부분과 불, 재와 연기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신문지 타는 장면은 매일의 ‘새로운’ 역사를 담는 신문지가 재라는 물질이 되어 흩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술 또한 영원할 것인가. 유근택은 ‘...그것은 어쩌면 소멸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가련한 저항이 될 것이고 사라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의의 한 형식이 될 것이다’고 말한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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