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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하기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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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미술평론가)

  

들어가기; 현대의 언어적 조건과 추상미술


[추상하기] 전은 현대의 언어적 조건과 추상미술의 관계를 다룬다. 추상미술 작품들은 근대와 더불어 지나간 유파에 지나지 않을까.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추상미술이 놓이는 현실적 맥락이 다시금 호출돼야 한다. 전시 부제는 ‘추상’이 아니라 ‘추상하기’다.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 것이 강조된다. 추상이 결과라면, 추상하기는 추상의 대상, 그 출발 또한 전제되는 것이며, 그 과정도 포함된다. 이러한 연관은 예술이 단순한 허구나 코드가 아니라 현실과의 관련을 말한다. 코드가 지배하는 정보화 사회를 통해서 현실은 허구의 비율을 높여가고 있기에 추상미술이 등장할 때 비교되던 ‘19세기적인 사실주의’와도 맥락이 다르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코드의 요소들의 조합에 근거하는 완전한 인조품인 네오 리얼리티가 도처에서 현실을 대체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미지/ 기호는 세계의 철저한 허구화, 즉 현실 세계를 전면적으로 이미지화’한다고 본다. 



권재나,Surf the Wind


소비사회와 대응하는 팝아트 등이 출현하기도 했지만, 팝아트 또한 추상과 무관하지 않다. 팝아트의 도상 자체가 차이를 통해 작동하는 기호를 소재로 하며 평평한 화면 또한 추상적이다. 추상미술은 재현과 의미를 동일시한 관례를 문제삼으며 출발했지만, 현실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초창기 추상화가로 평가되는 칸딘스키는 ‘예술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의 완전한 분리’를 원했지만, ‘나는 자연을 그리는 것을 그만둔 이후 자연을 더욱 사랑했다’고 덧붙이며, 추상미술이 ‘사실주의’와는 다른 의미의 리얼리티에 근거함을 강조한다. 칸딘스키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추상미술이 단순한 장식으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현대미술에서의 현실에는 언어적 현실 또한 포함된다. 현실과의 관련은 예술이 한갓된 유희나 우연이 아니라 자유와 실험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의 논거를 제시할 때마다 인용되는 유명한 말이 있다. 화가이자 상징주의 이론가였던 모리스 드니의 ‘그림은 군마, 누드 여인, 혹은 어떤 에피소드이기 전에 색채들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논제다. 


로제 보르디에가 [현대미술과 오브제] 말하듯이 미술은 ‘모델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자기 자신의 모델’이 된다. 하지만 미술이 현실을 단순히 지시하는 것 만큼이나 언어를 지시한다는 자가지시성 또한 크게 나아간 바는 아니다. 미학에서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은 현실이냐 언어이냐의 문제로 경쟁해왔다. 하지만 양자는 현실만큼이나 언어의 완결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현실도 언어도 변화시키기 힘들다. 현실은 언어에 의해, 언어는 현실에 의해 변화한다. 현실과 언어의 이러한 교차가 중요하다. 즉물적 현실이나 기계적 언어는 동어반복의 논리에 대해 어떤 틈도 주려하지 않겠지만, 틈은 있기 마련이며 작가는 이 틈새를 늘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과도적 영역에서 작업한다. 한편 현실이 언어를 변화시키는 것은 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회화적 언어에 자의식을 가지는 이번 전시의 작가들은 평면이라는 조건과의 게임에 임했다. 



조현선



차승언, One thing-3_cotton yarn, polyester yarn, wood frame_160x465cm _2018


회화의 기본인 붓질의 차원을 다양한 매체로 변주하면서 현대미술의 방법론을 구축하는 권재나, 지시대상이 부재한 것으로 여겨지던 추상회화에서 인덱스를 염두에 두는 조현선, 짜는 행위를 통해 회화를 포함한 모든 것이 짜여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승언은 추상과 현실의 우회적 관계를 암시한다. 추상하기는 추상이 현실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동일시될 수 없는 평행한 세계를 전제한다. 이전 시대의 리얼리즘과 구별되는 새로운 미학을 주장한 미셀 뷔토르는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에서 ‘한 작품의 허구적 요소들이 단 하나의 이야기로 즉 현실 세계와 평행하는 단 하나의 세계로 통일됨으로서 이 현실 세계를 보완하고 밝힐 경우’에만 예술이라고 본다. 비슷한 맥락에서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는 ‘미술작품이 점점 더 ‘이미 존재하는 사물의 반영이기 보다는, 사물의 세계에 덧붙여진 것’이 되었다고 언급 한 바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미술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상호작용 한다.


미니멀리즘을 비롯해서 현대미술이 사물화되는 흐름이 있었지만 이 전시의 작가들은 평면이 단지 물리적인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평면을 물질로 환원하는 순간 미술의 가능성은 축소된다. 의미나 소통과 거리를 둔 채 부조리한 덩어리들로 가득한 현대미술관은 단지 제도적 차원만 강조될 따름이다. 환영만큼이나 물질 또한 지양돼야 한다. 추상은 단지 자연이나 지시대상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간격을 통해서 현실에 작동한다. 형식주의의 가정처럼 언어는 자족적이지 않다. 현실로부터 ‘추상하기’는 메타적인 차원을 확보하지만 건조한 관념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조형 언어의 풍부한 가능성을 살린다. 가장 기대되는 가능성은 현실을 변형하는 힘이다. 사람들은 ‘예술을 보는 방식과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을 조금씩 바꿀 것이고 따라서 사물들은 새로운 일시적 균형을 취할 것이고 그 균형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모험을 시작될 것’(미셀 뷔토르)이다. 

  

1. 권재나; 조형의 기본 단위를 현실에 세우다 


파스텔 톤의 색들로 자유분방하게 칠한 유화 [Floating Heart]는 색뿐 아니라 붓터치 또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제목처럼 마음이 가는 대로 그었을 듯한 필획에서 부분을 따서 파이버보드로 만드는 작업도 이어졌다. 실제 이 작품을 출발로 했는지와 상관없이, 벽에 거는 얇은 입체작업은 일회적 붓질을 모델로 한다. 만들기는 보다 의식적인 과정을 요구한다. 정확하게 잘라 접고 그 형태와 어울리는 색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것일수록 자유로운 원천이 필요하다. 예술은 코드에서 코드로 이어질 뿐인 자기복제로부터 탈주하고자 한다. 작가는 2022년 한국에서의 개인전 [Unfolding Duologue](2022) 인터뷰에서, 붓자국으로부터 시작된 오브제 작업에 대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를 찾으려는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일회적인 것을 안정성이 있지 못하지만 작가는 그 해법을 미술사에서 ‘변형캔버스’라고 알려진 오브제 회화를 통해 제시했다. 



권재나. Pink Strip


아무리 창조적인 것도 완전한 무(無)에서 시작될 수는 없다. 어쨌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일에서 새로움은 그 간극과 균열을 살피는 것에서 온다. 필체를 확인하기 위해 부분을 확대하는 과정이 있는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나왔지만 자기도 모르는 채 실행되는 습관적이고 반사적인 필획들에서 새로운 형태가 탄생한다. 재현주의에 충실한 작품이라면 우연성은 배제된다. 특정 대상을 유화로 정확히 표현하는 방식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주의’는 그것을 자동적으로 실행하는 기계인 사진기에게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미술사는 추상미술이 사진과의 역학관계에서 발생했음을 말한다. 추상미술은 사진이 할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하려는 듯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환영은 배제되어야 했다. 붓자국을 오브제로 만든 것같은 권재나의 작품은 성조기를 소재로 한 재스퍼 존스의 작품 [깃발들]처럼 비(非) 환영(illusion)적이다. 


배경이 없이 성조기를 평면적으로 표현한 작품에 대해 미니멀리즘 작가이자 이론가인 로버트 모리스는 ‘재스퍼 존스는 그 누구보다도 회화를 비 묘사적인 상태로 이끌었다. 그스는 회화에서 배경을 제거하고 사물을 고립시켰다. 배경은 벽이었다. 이전에는 중립적이었던 것이 현실적인 것이 되었고, 이전에 이미지였던 것이 사물이 되었다’고 해설한 바 있다. 권재나의 유화에서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꾼 붓의 흐름은 아크릴 물감으로 칠해진 입체작품에서 접힌 형태로 만들어진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면 거의 부조같은 효과를 낼 수도 있는데 작가는 그러한 잠재성을 현실화한다. 붓의 운용에서 접기와 펼치기라는 잠재적 과정은 변형 캔버스 같은 형식이 되었으며, 때로 벽을 넘어서 조각작품처럼 확장되기도 한다. ‘폴드(fold)의 개념은 종이를 접는 데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작가는 ‘종이를 접었다 펼쳤다 하는 구조가 회화를 떠올린다’고 한다. 접기는 꼴라주처럼 서로 다른 시공간을 만나게 한다. 


입체파가 발견했지만 초현실주의에서 더 진가를 발한 꼴라주는 ‘우리의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는 두 개의 서로 거리가 먼 현실을 파악하고 그 둘의 병치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감각을 강렬하게 하고 고양시키며, 모든 외부적인 의미의 체계를 제거함으로서 우리의 추억과 충돌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앙드레 브르통)으로 평가된다. 접기로 만들어진 권재나의 변형 캔버스는 ‘확대된 붓자국이자 연속된 평면으로 지지체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이다. 캔버스가 아닌 화이버 보드에, 그리기가 아닌 만들어진 작품들은 단색으로 칠해진 기이한 외곽선을 가진 얇은 부조같은 형식이다. 재현 대상은 물론이고 캔버스와 틀이라는 정형성으로부터도 벗어나 형태와 색채의 유희를 극대화한다. 작품 제목은 그림의 핵심적인 언어인 색과 형태와 관련된 것이 많다. 특정 색이나 형태의 지시가 아니라 그로부터 연상이 되는 경우다. 가령 푸른색 계열의 작품에 붙여진 제목인 [Surf the Wind], [Swirls], [Wind Tree]가 그것이다. 


추상미술의 언어에서 말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는 거짓이 아니라 자유의 시공간이 된다. 하지만 완전히 임의적이지도 않다. 작품 [Ravine]에서는 움푹 파인 지형인 협곡이 떠오르고, 작품 [Pink Strip]은 말그대로 핑크색 껍질같은 형태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Blossom]은 그 색이 꽃의 대명사이기도 함을 암시한다. 하지만 [Halfway mark]나 [Helios]같은 제목은 색/형태와 의미의 연관에 많은 도약이 있다. 비슷한 크기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서 보면 변모하는 형상들의 무리로 보이며, 지시 대상이나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탓에 변모는 무한히 지속될 듯하다. 접기 놀이는 생각지 못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기에 가위까지 가세한다. 권재나에게 작품의 동일성은 그 내부가 아니라 차이의 계열 속에 있다. 회화의 기본 단위인 붓자국은 일루전을 벗어나 현실 속에 자리 잡게 하는 작품에서 섬세한 붓자국은 공간적으로 확장됨으로서 ‘유동성, 속도감, 명확성, 호쾌함, 상쾌함 등의 결과’를 만든다.    

 


2, 조현선; 인덱스로서의 회화


일정한 규격의 종이에 오일파스텔로 그려진 조현선의 [반달색인_위장된 오렌지_초콜렛] 시리즈에서 ‘반달색인’이라는 낯선 용어는 종이로 된 두툼한 사전에서 단어를 찾기 쉽게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모양으로 도려낸 부분을 지칭한다. [반달색인(Thumb Index_Half Moon Index)]은 ‘지난 몇 년간의 작업들을 하나의 사전으로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한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작가에게 작품은 색인을 펼쳐보기 과정과 비교된 것이다. 과거에 일반적이었던 두꺼운 책자 형태의 사전은 디지털로 전환됐다. 그래도 흔적은 남아서 프린트된 용지를 보관하는 파일 겉면에 반달 모양이 있다. 또한 디지털 화면의 파일의 형태 또한 이전의 물리적 흔적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코드화되어 있는 사이버 세상에서 보다 직관적인 형태로 소통을 돕는 것이다. 점차 소통의 기준은 코드로 넘어가고 있지만, 몸은 최후로 남아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몸은 회화의 바탕이기도 하다. 



조현선


물론 재현 대상이 아니라 기억과 무의식의 원천으로서의 몸이다. 코드화된 정보들은 책을 특징짓던 ‘볼륨’이라는 물리적 차원의 ‘구체성’을 갖지는 못한다. NFT 등 디지털 인증과정에 대한 물신 숭배도 있지만, 예술은 누군가의 기억과 무의식에 각인된 소통을 요구한다. 단어가 풀이되어 있는 사전은 그자체가 추상적이다. 하지만 내용을 알려주고 자신은 사라지는 기능은 기계들이 더 정확하고 빠르게 수행한다. 모든 종류의 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화가에게 종이사전의 부침(浮沈)은 영감을 주었다. 사전에는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정의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다. 하지만 작가는 사전처럼 한 문장 안에 명료하게 정의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추상과 회화라는 거대한 몸체에 불안하게 정차한 상태로 그것을 은유하고, 묘사하고, 구체화시키고, 예를 들고, 결론을 내리고, 결과를 제시하고, 취소하고, 돌아가고, 보완하기를 반복하며, 만들기와 수정하기 사이를 끝없이 오가며 미완의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조현선)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세계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엄격히 말해서 사실들은 정의될 수 없다.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 사실들은 단지 과제에만 속할 뿐, 해결에는 속하지 않는다. 명제는 사물이 어떻게 있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 사물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집이다’...그런데, 무엇이 ‘이것’인가? ‘삶의 규칙들이 비유의 옷으로 포장된다. 그런데 이 비유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서술하는데 봉사할 수 있을 뿐, 근거짓는 데는 봉사할 수 없다’ 고 덧붙인다. 현대철학과 미학의 흐름은 ‘언어는 어떤 사물을 표현할 수는 없고 단지 관계들(소쉬르), 혹은 순전한 부재(말라르메)만을 나타낸다’는 언명처럼 언어의 준거점을 모호하게 한다. 현실이 있고 그것을 명명하는 단어가 있고, 이후 양자의 관계, 의미 등등이 연속적으로 따라온다. 


하지만 이러한 연속성이 자명하지는 않다는 것을 미술 분야에서 보여준 것은 추상이다. 조형 언어는 대상을 가리킴으로서 의미를 자동적으로 전달한다고 믿어지는 투명성은 거부된다. 추상은 조형 언어의 자율성을 촉구한다. 여기에서 언어는 의미가 아닌 존재이다. 전시된 작품명 [반달색인_위장된 오렌지_초콜렛]은 작품에 대한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는 제목이다. 형태가 고정되다시피 해서 주로 색의 대조를 보게 되는 작품이지만 오렌지나 초콜렛 색도 찾아볼 수 없다. 단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문학이나 철학 분야에서도 말이 말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흐름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즘은 텍스트 이론이나 해체주의일 것이다. 크게 후기구조주의로 알려진 이러한 흐름에서 사전찾기의 예가 많이 인용되었다. 단어와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다른 단어와 의미를 지칭하는 연쇄망이라는 사실은 차이나 차연에 대한 개념을 직관적으로 이해시켰다. 


‘드로잉과 회화가 큰 차이가 없다’는 조현선의 작품은 규격화된 종이에 색만 다르게 칠한 추상미술이다. 오일 파스텔로 칠해진 색은 화면을 고르게 덮지는 않고 면에 따라서 밀도의 차이가 있다. 안으로 옴폭 들어간 듯한 반달색인을 떠올리는 형태는 고정되고 색의 변주만이 이어진다. 두툼하게 묶여진 지면을 용이하게 펼치기 위해 반달색인에 손가락을 집어넣듯이 관객의 눈은 다른 색으로 표시된 화면 하단의 작은 형태에 먼저 가 닿는다. 현실과 달리 그것은 들춰지지는 않으며 밝혀질 내용 또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것이 그 전부라는 점에서 추상미술이 의도했던 것을 일정부분 성취한다. 크게 두 색의 대조가 이어진다. 그렇게 규칙을 정한 이상 조합의 수는 무한할 것이다. 이 추상미술작품들은 텍스트로서의 세상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텍스트는 또다른 텍스트만을 지시하며, 이는 책뿐 아니라 세계 자체가 그렇다고 간주된다. 작가는 그러한 상태를 조형적으로 기술(記述)한다.

 


3. 차승언 ; 규칙의 위반을 통해 드러나는 장


차승언의 작품에서 ‘텍스트로서의 세계’는 비유를 넘어선다. 추상적인 무늬처럼 짜여진 천은 그림의 기본 도구인 캔버스와도 비교될 수 있다. 작품 [One thing] 처럼 창처럼 생긴 캔버스의 지지대인 왁구를 떠올리는 작품도 있다. 가로줄과 세로줄이라는 기본좌표가 설정되는 직조는 기하적 추상에 어울릴 법한 조합이 있다.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세잔의 작품이 태피스트리와 비교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잔은 사과나 산을 그렸지만 동시에 그림으로서의 자율성도 원했기 때문에 대상은 조금씩 변형되었고 화면의 응집성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응집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화면이 평평하다는 자의식이다. 보다 평평해진 화면으로의 이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캔버스 올의 차원까지 갔으며 섬유 미술을 하는 작가에게도 유의미한 개입지점이 생겨났다. 모더니즘 회화는 수직 수평의 지지대와 평면으로 이루어진 캔버스의 물리적 조건과 밀접해진다. 



차승언, TwillStainH-4_cotton yarn, polyester yarn, dye_455x97cm_2019


차승언의 [세개의 일] 시리즈는 얼룩이라는 더 난이도 높은 이미지를 표현한다. 그 또한 날실과 씨실로 만들어진 기하학적 패턴으로 나타나지만 복잡성은 더 크다. 기하/서정, 차가운/뜨거운 추상이라는 분류법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하학적 방식으로 얼룩을 표현하는 것은 그러한 이항 대립을 무색하게 한다. [Twill Stain] 시리즈는 ‘추상회화에서 뿌리기, 그리기, 칠하기, 번짐 등의 얼룩이 가지고 있는 즉흥성과 신화를 참조해서 제작했다. 염색으로 얼룩을 만들고, 그 얼룩을 참조하여 태피스트리 기법으로 얼룩을 직조’한 것이다. 얼룩인 이미지 즉 환영은 직조를 통해서 캔버스와 ‘교차 편집’되는 것이다. 직조를 통해 환영과 물질성을 교차시키면서, 이미지와 언어는 분리 불가능하게 얽힌다. 폭발이나 얼룩의 이미지는 추상미술에서 자주 나타났다, 원자핵의 구조나 핵폭발의 가능성이 예견을 넘어서는 시대에 이전 시대의 대상은 해체되거나 재구성 되기 때문이다. 


로제 보르디에는 [현대미술과 오브제]에서 타시즘의 예를 들면서, ‘아르퉁에게 타슈들은 활력 가득한 공간, 분자의 확산, 전개. 다시 말해 색의 원천, 가장 포착할 수 없는 빛의 형태들의 자연스런 침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발은 공간의 커다란 직조가 다시 시작하는 장소’라고 평가한다. [Segment] 시리즈에서는 사각형, 원, 세모 같은 대표적인 기하학 형상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이 추상 형태에 약간의 입체감을 부여했다. 미술사에서는 추상미술에서 구체(concret)예술로의 흐름이 있었다. 현실이나 자연으로부터 추상을 넘어서 추상으로부터 구체로 가는 방식이다. 입체파가 분석단계에서 종합단계로 나아가면서 ‘나는 내 그림을 조직화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오브제들을 규정’(후앙 그리)하게 된다. 코드화를 통해서 모든 것이 생성, 생산되는 정보화시대를 앞서 보여준 구체예술은 궁극적으로 미술이나 예술 자체를 지양하고 건축이나 디자인으로 해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작가에게 그러한 구별을 지양할 또 다른 판이 절실했는데, 차승언은 가장 오래된 컴퓨터의 방식인 직기를 갱신된 종합의 도구로 사용한다. 언어는 틀을 벗어나 늘어지면서 자신의 물질성을 드러낸다. [흐트흐트 위반의 기술](2019) 전에서 작가는 섬유 미술 고유의 기법을 작품 제목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작업하면서 굳이 밝히지 않았던 것을 바꾼 이유는 자신에게 익숙한 어법일수록 위반의 강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Ebony and Ivory] (2018) 전에서 밝히듯이 ‘고정된 크기와 면적 안에서 밀도의 역할은 무엇인가? 크기에 어울리는 밀도는, 밀도에 어울리는 크기는 어떻게 발견하는가?’ 등의 중요한 문제를 작가의 모국어 영역에서 실험한 것이다. 이러한 실험에서 작가는 ‘지금까지 반드시 지켜왔던 직조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본다. 작가는 그 조건을 대략 열가지 정도 나열하면서 그 조건을 위반한다. 


이를 통해 ‘규칙의 확실성에 틈을 내고 매체 사용을 반성하며 행위, 매체, 시각성의 관계를 새롭게 경험하길’ 바란다. 우연성의 상징처럼 보이는 얼룩 또한 다 짜여지지 않은 풀린 실을 통해 구조화된 것임을 보여준다. 구조화된 것은 해체될 수 있다. 풀은 실은 다시 짤 수 있다. 세계가 텍스트라면 텍스트를 짜고 풀고, 그 물성을 드러내는 이는 전능한 창조자에 버금간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창조에 대한 신화에서처럼 주체가 대상을 창조하는 식은 아니다. 차승언의 작업은 누보로망의 작가들처럼 ‘새로운 예술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조직하고 조직되는 관계’(알랭 로브그리예)이다. 차승언은 현대철학과도 함께 가는 현대미술의 어법 변화를 매우 섬세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개념만 내세우고 작품은 사라지는 ‘재현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개념을 담은 존재의 차원을 향한다. 분리 불가능한 것을 분리했던 모더니즘은 다시 짜야 하는 담론이 된다.      


출전; 갤러리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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