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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 언어에 대한 의식과 무의식

이선영

언어에 대한 의식과 무의식 

 

이선영(미술평론가)



[색과 단어의 무게] 전은 추상적인 제목이지만 예술이 실재와 관련되기를 바란다. ‘무게’는 일상어에서 ‘마음이 무겁다’나 ‘삶의 무게’같은 표현과 비슷한 맥락이다. 박은영은 그저 감각에만 의지하지 않고, 정보혁명 시대에 일반화된 코드와 물질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조형적 언어를 탐구한다. 일정한 크기의 캔버스 위로 활주하는 색 얼룩들은 모두 다르게 붙여진 작품 제목과 더불어 다양한 연상을 낳는다. 색 얼룩으로 이루어진 추상미술이지만 전면(all over) 구도는 아니고, 작품에 따라 원근감이 내재한다. 작품 크기와 무관하게 내부로의 여행이 가능하다. 때로는 가로줄, 세로줄, 그리드, 마름모 등의 선적 형태가 분명하다. 큰 작품들의 구조는 좀 더 복잡하다. 주된 색감에 따라서 깊은 숲에서 새어 나오는 빛같은 작품부터 하얀 포말이 이는 바다같은 자연 풍경까지 느껴진다. 일상의 한 모퉁이에서 우주적 공간까지 박은영이 구사하는 조형 어법은 신축성이 있다. 



싹트다,솟아오르다,생장하다 [germinate,upheave,grow]_2023 (x24ea)



세로줄이나 그리드처럼 인공물을 연상시키는 구조 또한 칠하고 지우고 덮는 식으로 복잡한 층을 이룬다. 자연뿐 아니라, 인공적 소재 또한 복잡한 붓질의 궤적이 남겨진다. 빠르게 그어진 붓자국은 선적 요소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 [적다 write]에서 화면을 가로지르는 붓자국은 마치 깨알같이 쓴 문자의 열같다. 박은영에게 쓰기는 또한 수많은 겹쳐 쓰기이다. [색과 단어의 무게] 전은 언어에 대한 의식과 무의식의 장(場)이다. 박은영의 작품에서 언어와 회화의 관계는 작가가 다양한 종류의 문학책 뿐 아니라, 두터운 사전을 곁에 두고 작업하는데서 알 수 있다. 언어를 주요 매체로 삼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현실을 마주한다. 현실이 가장 중요하지만, 언어로 풀면 되는 현실이라는 보따리가 어딘가 따로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재현주의의 전제인 상투적 현실의식은 조형 언어의 수많은 변주에 의해 해체된다. 박은영에게 현실-회화-언어는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돌고돌면서 서로를 변형시키는 관계이다. 


있는 것을 반영하거나 ‘내면’이라고 가정된 것을 표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상호적 변화를 요구한다. 예술작품에 의해 변화된 체험이 있었기에 자신의 작품 역시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화가에게 회화와 언어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회화가 조형적 언어이긴 하지만 언어는 또다른 차원에 있다. 무언가 그린 후 제목을 붙이거나 단어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거나 하는 왕래가 있다. 박은영에게 조형적 언어는 현실과 언어 사이에 있다. 세계를 언어화한다는 것은 인식론적이면서도 미학적인 문제다. 그리고 철학적인 문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 세계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엄격히 말해서 사실들은 정의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진다. 사실들은 ‘단지 과제에만 속할 뿐, 해결에는 속하지 않는다’. ‘명제는 사물이 어떻게 있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 사물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은 현실과 언어와의 불연속적 관계를 말한다. 



싹트다,솟아오르다,생장하다 [germinate,upheave,grow]_2023



그는 철학자 러쎌의 공적이 명제의 외견상의 논리적 형식이 반드시 그것의 실제 형식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면서, 현실과 언어/논리의 간극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간극은 예술에게는 기회가 된다. 질 들뢰즈는 [앙티 외디푸스]에서 말과 사물의 간극이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말한다. 말과 사물, 이 양자가 피차 환원할 수 없게 벌어져 있음 때문에 지시된 사물이 미지의 한 면을 숨은 내용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호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낱말들은 그것들이 지시하는 사물이나 신체를 기호로 변형시킨다. 코드화를 통해 현실을 코드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대세가 되는 가운데 예술가들은 엄밀한 철학자만큼이나 현실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진다. 하지만 단순한 지시관계를 넘어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제시하는 것은 예술가의 몫 아닌가. 언어와 조형 언어가 동시에 작용하는 박은영의 작품에서 관객은 현실의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전적인 새로움은 아니다. 인간은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발견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찾았는지 안다.’(비트겐슈타인)는 점에서 예술작품의 발견적 차원은 주목할 만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조형 언어의 문제를 따로 논한다. 그에 의하면 그림과 모사 된 것 속에 뭔가 동일한 것이 있어야, 그 하나는 다른 하나의 그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모사할 수 있기 위해 현실과 공통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 그림의 모사 형식이다. 그림은 논리적 형식을 사실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모델이다. 추상 또한 그림의 모사형식 중의 하나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그림은 현실에 잣대처럼 대어져 있다. 현실을 올바르게 모사할 수 있기 위해 모든 그림 각각이 현실과 공통으로 가져야만 하는 것이 논리적 형식, 즉 현실의 형식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과 색깔은 대상들의 형식이다. 




달리다[run]_캔버스에 아크릴_26.0 x 18.0 cm_2023



동경하다[yearn]_캔버스에 아크릴_162.2 x 130.3cm_2020



형태나 색은 분명한 의지와 의식에 의한 것이지만, 작업 결과는 작가도 예측하기 힘들다. 부지런한 어부처럼 매일 작업실에 와서 이리저리 그물망을 칠 수 있을 뿐, 그날 무엇이 낚일지 보장되지는 않는다. 다른 화면 안의 모호한 경계를 한정 짓는 것은 캔버스지만, 여러 겹의 물감이 흐른 가장자리 또한 작품의 일부다. 얼룩진 가장자리는 창이나 거울의 패러다임에 국한되었던 투명성에 물성이라는 불투명성을 강조한다. 작가는 관객이 이 회회의 층도 볼 수 있도록 설치한다. 시리즈별로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 책의 한 페이지 같은 비율은 공통적이다. 1호 크기는 책, 4호 크기는 도록 정도의 느낌이다. 처음에는 분명했지만, 시간의 흐름에 의해 서서히 변형된 것처럼, 출발점도 종착점도 알 수 없는 과정 그자체가 된다. 얼마 전 전시 제목인 [흘린 단어들](2021, 도로시 살롱)과 [선은 형용사가 되고 색은 동사가 되었다](2021, 영은미술관)에서도 동사적 감각이 있다. 동사형 제목은 행위에 대한 내용과 잘 어울린다. 


작품 [달리다 run]에서 양 끝의 다른 색 사이로 작은 점 하나는 마치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리는 것 같다. [은둔하다 seclude]에서 두터운 담요같은 느낌의 색은 은둔과 관련된다. [밀려오다 surge]에서는 색과 밀도의 분포 차이에 의한 동감이 있으며, [늘어나다 stretch]에서는 푸른색이 붉은색 부분으로 확장하는 듯하다. [헤아리다 fathom]는 은하수 속 별빛같은 점점의 흔적들을, [포개다 pile]는 뭔가 포개면 더 짙어지는 푸른색을 보여준다. 과정적인 작품은 의미의 투명한 전달 보다는 교감과 공감, 또는 전염의 방식으로 소통된다. 그러한 과정은 불투명하지만 더 강렬하다. 박은영에게 캔버스는 다양한 은유로 확장될 수 있는 색의 형상으로 관객과 교감한다. 색이든 형태든 특정지을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대의 작가는 표현불가능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다. 재현주의에 전제되는 확실성을 거부하면 결국 작가의 감성과 태도만 남는다. 




드러나다[come out]_캔버스에 아크릴_130.5 x 89.5 cm_2023



생장하다[grow]03_캔버스에 아크릴_33.4 x 24.2 cm_2023



작가는 ‘나의 작품 속에서 색은 감성 표현의 수단으로, 선은 작품에 임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요소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감성과 태도는 선과 색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아름다움만이 주체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게 한다. 작가가 먼저 깊이 체험한다. 작가에게는 작업 과정이 가장 진한 체험일 것이다. 작품 [철야하다 stay up all night]에는 밤샘 작업을 한 사람이 보았을 법한 짙푸른 새벽녘이 있다. 작가는 ‘작업의 묘미는 변화의 흔들림을 빠르게 느끼는 동시에 몰입의 상태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응해 반응하는 생생한 나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 몰입이다. 작가에게는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생생한 감각이 가장 중요하다. 감각과 관련된 심미적 현상은 더욱 밀도 있게 표현된다. 뭐라 특정할 수 없이 얼룩진 색/형태에 작가는 ‘매혹’되었을 것이며, 이는 [매혹하다 fascinate]로 나타났다. [반짝이다 twinkle]에서 번진 흔적들은 발광체의 궤적처럼 보인다. 


[피어나다 bloom]에서 제목과 관련된 색은 진달래를 연상하게 한다. [맡다 smell]는 색과 냄새의 연결, 즉 추상과 구체적 감각의 연결이다. [모사하다 imitate]에서 대각선 교차 구성 속에 식물 실루엣이. 재현주의에 내재된 기하학적 요소가 드러난다. 르네상스식 원근법에서 전형적이듯, 재현주의는 기하학적이다. 재현주의의 관습으로 굳어져 온 원근법적 규칙은 의미를 명확히 읽기 위해 동결된 순간을 지향한다. 흐르는 물같은 실재를 유의미한 형식으로 고정시킬 수 있겠는가. 태초의 원시 수프(primeval soup)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가 발생하고 진화한 이래 얼마나 많은 흐름이 있었겠는가. 생명체가 육지로 올라와 생존의 몸짓으로 흘리는 땀이나 포식자에게 희생된 존재가 흘리는 피같이 원초적인 흐름을 비롯한 수많은 흐름들은 별다른 기록 없이 그저 흘러갔을 따름이다. 거시적인 계통의 역사뿐 아니라 개체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생장하다[grow]05_캔버스에 아크릴_33.4 x 24.2 cm_2023



싹트다[germinate]06_캔버스에 아크릴_33.4 x 24.2 cm_2023



체액처럼 끈적한 액체인 물감을 다루는 예술가들은 그러한 거시적이고도 미시적인 역사를 내재화한다. 시리즈로 된 작품들을 함께 보면 각 화면들은 마치 애니매이션의 한 장면들같이 잠재적 동감으로 연결된다. 회화가 속해 있는 공간 예술은 시간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화가는 단면의 강렬함을 보존한 채 그 전후의 맥락을 살리려 한다. 시리즈 형식은 맥락을 만들어준다. 맥락은 동일성 속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초록빛 작품들이 그렇다. 군집으로 전시되는 초록 시리즈 작업 24개는 같은 크기이며, 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 및 경험과도 관련된다. 초록 계열의 색들은 생명력의 상징에 머물지 않고 동사형 제목을 통해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개인의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연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계열의 표현에 방점이 찍혀있다. 


프랑시스 퐁주가 [사물의 광란]에서 인간적 경험(누보 로망으로 대변되는 작가들에게는 인간중심주의에 해당)에 한정된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사물의 편’에 서고자 했던 방식이다. 프랑시스 퐁주는 시를 희생시키고서라도 시의 대상으로서의 사물, 즉 ‘다른 것(defferent)으로서의 대상 그 자체로 되돌아 올 것’을 천명했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이 동시에 조화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새로운 세상, 가장 단순한 사물들의 인간 세상 속에서의 탄생, 인간 정신에 의한 인간의 사물들의 자질 획득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나의 시적, 정치적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퐁주에게 말은 ‘로고스의 질료들’이며 ‘사물의 새로운 면들을 이러한 말을 바탕으로 하여 이성 속에서 재구성’ 된다. 바로 그때에만이 ‘인간의 지식과 발견들이 순간적이거나 덧없는 것이 아닌 굳건한 것이 될 수 있을 것’(퐁주)이다. 감각적인 붓질 이외에 언어적 기술을 활용한 박은영은 이를 통해 의미와의 통로를 좀 더 견고하게 만들고자 한다. 




열리고있다[opening]_캔버스에 아크릴_162.2 x 130.3 cm_2023



열었다[opened]_캔버스에 아크릴_162.2 x 130.3 cm_2023



초록 시리즈의 경우 이미지들 뿐 아니라 언어적 연결망도 확장성을 가진다. 초록 물이 흘러간 것같은 [펼치다 unroll], 초록 물감의 밀도 차로 만들어진 화면이 마치 기체같은 [포옹하다 hug],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상시적인 활동인 호흡이 표현된 [호흡하다 breathe]는 식물의 동적인 삶이 나타나 있다. 초록 톤의 얼룩덜룩한 작품 [자라다 02 grow 02]는 생장을 위해 세포분열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모습이다. 푸른색 계열의 물감들이 여러 겹으로 막을 형성하면서 추상적인 공간감을 보여주는 [건너가다 cross]는 식물에 다가갈 때의 느낌이 있다. 식물은 [걷다 walk]에서 좀 더 거시적인 차원으로 나타나는데, 빠른 속도감이 있는 붓질이 지배하는 화면 아래의 고동색 물감은 마치 산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식물들의 주된 서식지인)산으로 보면 화면 위의 둥근 입자들은 별이 된다. 2-3개의 작품이 개념적으로 연결되는 경우에도 시리즈처럼 맥락이 형성된다. 


구조주의 세례를 거친 현대 언어학의 주장처럼, 언어는 그자체의 실체가 아니라 차이 속에서, 맥락 속에서 분명해진다. 그것은 색이 차이를 통해서 작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색이야말로 단독으로가 아니라 주변에 무슨 색이 있는가에 대한 관계 속에서 분명해진다. 바탕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색의 흐름이 있는 [열다 open]는 안개 속에 무언가 가려진 듯한 [사라지다 disappear]와 대조된다. 어둠이 내린 듯한 화폭의 [모르다 don't know]는 매우 밝아진 화면인 [알다 know]와 비교된다. 무채색으로 장막이 처진 듯한 [예견하다 predict]는 보이지 않는 것을 ‘예견’해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작품 [추측하다 guess]에서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은 색에 의한 차이일 뿐 명확한 경계가 없다. 작품 [상기하다 remind]에서 짙푸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상기’이며, 작품 [상상하다 imagine]에서 겹치고 얼룩진다. 많은 겹이 있지만 뭉개지지는 않는 이미지는 작가의 상상에 대한 생각이다. 




욕망하다[desire]_캔버스에 아크릴_26.0 x 18.0 cm_2023



은둔하다[seclude]_캔버스에 아크릴_26.0 x 18.0 cm_2023



이러한 교차에서 상상은 심층과 표층 사이의 움직임이며, 그것이 열려있음을 말한다. 체크무늬 커튼 너머로 빛나는 듯한 별들은 [동경하다 yearn]와 관련되며, 작품 [꿈꾸다 dream]에서 꿈은 안개나 구름 속에 가려진 듯한 무대다. 시대의 화두 중 하나인 욕망에 대한 이미지는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욕망하다 desire]로 나타나는데, 이 작품이 [전념하다 concentrate]와 비슷한 분위기라는 것은, 작업을 포함한 모든 전념이 욕망과 무관치 않음을 말한다. 양자는 특히 끝이 없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비슷하게는 할 수 있겠지만, 전적인 반복은 불가능한 박은영의 작품에서 그 일회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형태보다는 색이다. 작품 속 색은 흐른다. 때로는 진동하며 퍼지기도 한다. 화면을 벗어나 가장자리로 흐른다. 물감이 흘러내린 가장자리는 일종의 회화의 단층으로, 화면이 몇 개의 물감층으로 이루어졌는지 보여준다. 작업실에 붙은 참고용 차트에서 색은 수백 가지 이름으로 분류된다. 


전문가용이라서 그런지 한 색차트는 무려 369개의 이름이 붙어있다. 연금술사처럼 여러 라벨이 붙은 많은 용기(用器)들은 궁극적으로는 분류될 수 없는 색감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이름 붙일 수 있는 색은 색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박은영의 작품에서 색들의 흐름은 색과 색 사이를 영역을 탐색한다. 작품 제목들은 동사형인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색이름은 아니다. 특정 작품과 짝을 이루며 붙여진 제각각의 이름은 결코 무언가를 고정하지 않지만, 자의적이지도 않다. 필연과 우연이 반대된다고 해도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진이나 선이나 미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며, 작가란 그러한 맥락을 자연의 법칙이나 사회적 규칙과도 다른 방식으로 구축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 작가는 매일 오후 1시와 새벽 1시에 사진 찍어서 작업에 활용한다. 특히 새벽 1시는 감성적 시간대로 정신적 활동이 활성화된다. 박은영의 작품에서는 정신적 영역도 행위로 표현된다. 




전념하다[concentrate]_캔버스에 아크릴_26.0 x 18.0 cm_2023



피어나다[bloom]_캔버스에 아크릴_26.0 x 18.0 cm_2023



[기도하다 pray]는 절대적 타자에게 몰입하는 이미지이며, [경외하다 stand in awe]는 추상미술을 해석하는 ‘숭고’와 관련된다. 숭고는 미와 달리 무한한 것이다. 작품 [간직하다 cherish]에서 대각선 안쪽의 삼각형 형상은 따로 챙겨준 무엇이다. [관계하다 relate]에서 교차하며 화면을 가로지르는 대각선은 인접한 여러면들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동의하다 agree]는 다른 작품에 비해 더 복잡한 기하적 구성으로, 대각선이 모이는 형상이다. 동의하는 절차의 합리성을 예시한다. 기하적 구성 중에서 대각선이 만나는 형식이 자주 나타나는데, 맹세에 관련될 응집되는 요소가 두드러지는 [맹세하다 swear]가 그렇다. [인내하다 endure]에서 바둑판처럼 나뉜 작은 사각형은 수많은 물감층으로 뒤덮인다. 마치 오랜 인내의 시간처럼 축적된 층이다. 추상미술은 그림의 형식으로 내용을 전달하려 한다. 비슷한 제목이 별로 없는 작업목록에서 일련번호를 바꿔 붙인 시리즈 [있다 be]는 존재에 대한 이미지들이다. 


박은영에게 각각의 존재는 색을 달리하며 모노톤의 화면 내부의 얼룩도 각기 다르다. 말그대로 자기 색이 있는 개성적 존재들이다, 찍은 사진들에서 색을 꺼내 자신만의 차트를 만들고 기록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특정 시공간에 대한 기억은 색으로 번역된다. 그림 뒷면에는 관련 단상이 적혀있다.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작업이라는 지속적 맥락을 통해서 타자에게도 제시될 수 있는 형식을 갖추게 된다. 기록의 힘을 통해 자신의 감각을 보전하며 작업에 활용한다. 다른 단어들만큼이나 모두 다르다. 동사형 제목들은 추상회화가 그렇듯이 답이 아닌 질문이며, 지시가 아닌 방향이다. 관념이 아닌 행위이며, 연역이 아닌 귀납이다. 연속성이 아닌 불연속성이고, 동일성이 아닌 차이다. 제목 또한 이미지와 더불어 맥락을 형성하며, 관객의 작품 해석에 최소한의 방향타가 되어준다. 어떤 제목은 해당 작품의 분위기와 찰떡궁합인 경우도 있다. 




흐르다[flow]_캔버스에 아크릴_130.0 x 89.0 cm_2023


하지만 대개 명확한 관련은 없다. 미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말하듯이 재현주의의 가정인 확언이 아니다. 대개 확언은 지시된 무언가와 의미를 동일시한다. 그러나 말과 사물에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작가의 자유가 가능한 곳 또한 간극들이다. 작가가 말과 사물의 간극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지론이나 표현하기 힘듦에 대한 변명은 아니다. 박은영의 경우 언어적 감수성은 세분화 전략에 필요하다. 언어, 또는 조형적 언어는 단순하게 보여지는 현실의 다른 측면을 포착하고 의미화하는 매개가 된다. 박은영은 많이 그리는 만큼이나 많이 읽고 쓴다. 양자는 서로를 자극한다. 모더니즘은 문학적 서사와 조형적 언어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미술만의 영역을 구축하려 했지만, 극단의 지점에서 ‘목욕물과 더불어 아기도 버리는’ 자충수를 두었다. 그렇다고 또 다른 서사의 대명사가 된 영상이 범람하는 정보화 사회에 백기 투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형적 언어를 살리면서 외연의 확대와 내포적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외형상 이미지라는 유사성이 있지만, 그림에 우호적이지 않은 스펙터클의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현재 자신에게서 나온 또는 자신과 관련된 단 얼마의 영감이나 생각조차 허트루 빠져나갈 틈 없는 그물망을 쳐놓았다. 언어적 상상력이나 문학이나 어학 텍스트의 참조는 그러한 그물망을 더욱 촘촘하게 만든다. 예고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작업을 해왔고 앞으로 계속할 작가로서는 누군가에게는 비슷해 보일 수도 있는 작품 속 차이의 계열을 무한히 펼치는 것이 요구된다. NFT같은 경우처럼 일련의 코드명을 부여받는 것으로 일회적인 것을 보장받고, 물신의 체계 속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기억 또는 지각되는 차이 말이다. 그래서 차이의 체계 그자체라고 할 수 있는 언어는 유력한 참조점이 된다. 작업실 벽에 붙은 메모들 가운데 한 장만 그대로 베껴보자. ‘연유하다, 기록하다, 사라지다, 형성하다, 배합하다, 간지럽히다, 벗다, 씻다, 호흡하다, 관조하다.’ 




인내하다[endure]_캔버스에 아크릴_162.2 x 130.3cm_2021



우리가 평상시에 사용하는 어휘의 단순함과 비교할 때, 작가가 참조하고 활용하는 어휘는 매우 많다. 전시 제목에 포함된 ‘-무게’라는 단어가 지향하는 바는 예술의 실재성에 대한 희망이다. 박은영의 추상회화는 현실과 연관된다. 가령 작품 [외치다 call]는 화면 아래의 색/형태에 중력감이 있다. 산이 하늘보다 물질적으로 밀도가 높듯이 말이다. 날아가는 존재가 속해 있었을 공간이 있는 작품 [날아가다 fly]에서 공간은 물질적 밀도의 차이가 있는 공간을 보여준다. 인물이나 풍경 등 작가가 찍은 사진들 옆에는 그 사진에서 뽑은 몇 개의 색 띠가 있다. 어떤 색이 뽑힐지는 작가가 현실에서 수집한 이미지에 달려있다. 거기에 없는 것을 뽑아내지는 않는다. 사진은 그림보다 더 방대한 현실을 수집해왔다. 박은영의 작품에서 색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사진처럼 인덱스같은 성격을 가진다. 그러한 섬세한 그물망이 아니라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을 그림이라는 약속된 관례 속에 남김없이 포획하려는 것이다.

 

경제적 차원에서 보자면 예술은 그 자체가 생존을 넘어서는 일종의 사치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에, 작업하는 삶에서 낭비란 금기다. 그것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엄청난 노동강도를 가진 작업으로, 촉이 살아있지 않아도 대략 진행될 수 있는 유형이 아니다. 마치 시험관에 수집된 것처럼 내용물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담는 틀은 고정시킨다. 박은영의 작품에 시리즈 작업이 많은 이유다. 문학, 특히 시를 좋아하는 작가는 사전을 비롯한 다른 텍스트에서도 영감받는다. 문학적이라고 해서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려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에서 아무 책 펼쳐서 눈에 띄는 단어를 확장하기도 하는 방식은 인과적이지 않다. 경험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산문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현대 언어학이 ‘인간’보다 ‘구조’를 중시하는 것과 같은 방향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예술작품에 대한 열망은 시인들과 마찬가지다. 작가의 영감이 펼쳐지는 방식, 조형적 언어가 구사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적다[write]_캔버스에 아크릴_45.5 x 53.0 cm_2020



앞서 인용한 [사물의 광란]의 역자(허정아)는 퐁주가 사물이 어떻게 말로서, 시적 형태로 탄생하는가를 보여준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표현이란 ‘표현이 도달하려는 목적지를 향하여 치닫는 것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하늘을 군청색 잉크로 칠하듯 말들을 쏟아 놓는 행위 그 자체’라고 말한다. 박은영에게 조형적 언어는 주로 색이며, 색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화면 내 형태들은 분절화 된 단어의 형식에 해당한다. 박은영의 그림들은 그가 좋아하는 문학처럼 화면 하나하나가 페이지 같은 느낌도 든다. 인쇄물의 이미지는 하얀 종이에 검은 글자들로 일률화 되지만, 선택된 단어들과 글자들 사이의 간격이 모두 다른 내용을 담지 않는가. 박은영의 작업을 문학과 비유하는 것은 어떤 내용을 묘사하는 것과 무관하다. 작가는 그림의 의미에 대해 ‘그림이 어떤 단어와 연결되는 순간은 짧지만 조금은 극적이다. 설명한다는 것은 그림 위에 의미가 엉겨 붙는 것이지만 비춘다는 것은 그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어떤 순간에 선명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출전; 진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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