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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삼 / 역설의 세계

이선영

역설의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자신의 일상에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한 수첩이나 비망록은 처음 시작할 때는 그저 빈 노트일 뿐이지만, 가차 없이 흐르는 시간의 축은 예측할 수 없는 것들 또한 기록될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의지와 능력에 따라서 거의 예상과 결과를 일치시킬 수도 있지만, 완료된 노트를 미리 볼 수는 없다. 시간은 그만큼 큰 변수이며, 그래서 인간은 그 시간을 알고 지배하기 위해 애써왔다. 현대처럼 시공간적인 그물망이 조밀한 시대는 조그만 변화도 파급력이 크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단지 시계나 달력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자연의 변화 주기를 파악하여 만든 달력이나 시계는 인간의 규칙이다. 그래서 시간의 기준은 문명마다 달랐었고, 시간 자체가 역사를 가진다. 인류가 과학기술이라는 통일된 언어를 공유하면서 시간은 하나로 ‘객관화’ 되었다. 거시역사 뿐 아니라 개인사도 마찬가지다. 



[UNFOLD 20230421001], 설치미술, 3000x250cm, 2023, 두남재 아트센터, (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두남재아트센터)



 [UNFOLD 20230421001] 부분

전병삼의 작품에 여러 형식으로 새겨 있는 달력들은 그저 무덤덤한 숫자로 특별한 방점 없이 기계적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유한하기에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숫자를 그냥 숫자로 볼 수 없다. 한편 그가 다루는 시간대는 너무나 광대하고, 그것을 접어 넣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전체를 보기 힘들다. 하지만 대략 어떤 방식으로 수나 문자가 나열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작가는 그 모두를 순차적으로 새겨 넣었지만 관객은 선택된 부분을 불연속적으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시간이 지나면 작가도 관객과 같은 입장이 된다. 그는 다소 무모하리만큼의 방식으로 선적으로 나열된 시간을 기록하지만, 그 질서를 재확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재현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동종어법으로 지배적 질서의 상대성을 암시한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행돼야 하는 전병삼의 프로젝트는 건축적 규모이든 작은 화면이든 일관되게 관철된다.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치밀함은 거의 편집증적인 작업을 전제한다. 스스로 정한 규칙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걸림돌은 최대한 배제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현실에서의 빡빡함을 예술이나 문화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지만, 그의 경우 한 술 더 뜨기 전략으로 현실을 초월하고자 한다. 하루 12시간 가까이 작업하기 때문에 가능한 ‘초월’이다. ‘사라졌을 때 비로소 보이는 세계’, ‘불가능한 세계’들에 초점을 맞춘 전병삼의 작품은 작업방식부터 반어적(irony)이다. 리차드 로티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아이러니의 반대는 상식이라고 말한다. 리차드 로티에 의하면 아이러니스트의 방법은 추론이 아니라, 재서술이다. 반어적인 작가는 영감을 받은 소재의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속적인 재서술을 통한 변화를 꾀한다. 전병삼이 자신의 작품을 ‘사실적인 추상’이라고도 말할 때, 여기에도 역설은 선명하다. 하지만 그는 지적 유희로 그칠 수 있는 개념주의가 아니라 작품으로 말하는 작가다. 



 [UNFOLD] 전시전경



 [UNFOLD 210220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유리 커버 나무 프레임 피니쉬, 300x150cm. 2021.



 [UNFOLD 210220001] 부분


한 뼘 크기의 작은 CD들로 건물의 외벽을 덮은 설치작업이 대표적이다. 작품의 구성요소는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구체적인 물건이지만, 거리를 두면 반짝이는 거대한 물결로 보인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된 옛 연초제조장 전체 180미터를 덮은 그의 작품은 9개국에 걸쳐 있는 다양한 참여자 25000명에게 기부받은 CD 50만 장을 모아서 건물 외벽에 설치한 것이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뒤안길로 접어든 매체는 예술에 활용되었다. 그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물건을 하나의 구조적 단위로 해서 작업해왔다. 대량생산 시스템이 가능한 사회에서 가능한 선택이다. 그가 활용하는 오브제는 이발소 회전등부터 선풍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하나하나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이지만 그것이 미시적인 입자가 되어 거시적인 차원을 만들면 불확실해진다. 이러한 선택을 통해 변화는 기능부터 상징까지 여러 차원에서 일어난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당연하지만 쓰라린 진실을 역설 어법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요컨대 ‘사라짐을 통해 나타나게 한다’. 자연과 전통의 많은 부분을 급격하게 사라지게 한 근대 이후 사라짐은 ‘과도기’처럼 변수가 아닌 항수가 되었다. 이브 미쇼가 [기체 상태의 예술]에서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을수록 예술작품이 더 적어지거나, 예술이 ‘미학적 에테르’로 증발하는 역설을 주목했듯이 말이다. 이브 미쇼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아름다움이 마치 기체와도 같이 널리 퍼지고 확산되는 반면 예술작품은 점점 더 소멸되어 간다. 미술이 소비문화의 형태로 해소되면서 현대 미술은 자신의 사라짐에 대한 위기의식을 작품의 내용과 형식으로 삼는다. 하지만 미술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파괴된 세계대전의 여파로부터 강화되었지만, 인류 문명의 멸망을 야기하는 기후위기나 핵위기 등으로 현대의 무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UNFOLD 210220002],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유리 커버 나무 프레임 피니쉬, 300x150cm. 2021.



 [UNFOLD 210220002] 부분 



 [UNFOLD 200215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무반사 디아섹 피니쉬, 150x150cm, 2020.



 [UNFOLD 200215001] 부분


전병삼에게 예술은 과학기술과 더불어 그러한 방법을 제공해주는 유력한 형식이다. 이 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은 공간을 가로질러 구부러진 강물 형태로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관객은 시간의 바깥에서 소요하며 명상하게 된다. 병 만개가 만년을 담은 ‘시간의 유리병’으로 재탄생한 이 작품은 시간의 역사를 거시적, 미시적 차원에서 동시에 조망한다. 여기에 활용된 달력은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이다. 두 가지 역법 사이의 오차는 만년의 흐름을 나타내는 만개의 병 가운데 어딘가(1582년 10월 4일 다음에 곧바로 15일로 점프)에 남아있을 것이다. 서기 1년부터 시작되어 서기 만년을 아우르는 이 작품에서 시간의 스케일은 100년 남짓 사는 인간에게는 거대하게 다가온다. 50ml짜리 작은 병에는 1년치 달력 또한 담긴다. 뒷면은 파란색으로 통일되어있는데 하루 24시간을 만개의 유리병에 균등하게 나눠 밀리초 단위로 적혀있다. 


각 병에는 약 8.3-8.7 초 분량의 시간이 담겨 있는 셈이다. 작가는 1만년을 24시간과 동급으로 다룬다. 기하학(geometry)이 공간측정법이라면, 시간의 과학은 시간측정법(chronometry)을 가질 것이다. 기하학이 땅으로부터 출발했다면, 시간측정법은 시간예술인 문학이나 영화가 적절한 출발이 될 것이다. 연속되는 숫자와 문자들이 다수 등장하며 사라짐을 표현하는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은 각각의 시간측정법을 가진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너무 길거나 너무 짧은 시간은 무의미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그런 시간들이 예술을 포함한 인간적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다. 시간이 가속화되어 흐르기 시작한 근대부터 미시적 시간대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만 개의 병 속 달력의 색상은 미세하게 변한다. 개념적으로는 만 년의 흐름이 색으로도 파악되는 것이지만 많은 거리를 둬야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하다. 메시지를 담아서 강물에 띄워 보내기도 했던 시적인 분위기는 마치 2.5x30m 길이의 금속 구조물 사이에 매달린 병들의 흐름으로 연출됐다. 



(참고도판) [MOMENT], 사진 후가공 및 접고 쌓기, 180x100cm, 2019.



 [MOMENT] 부분



(참고도판) [COSMOS], 사진 후가공 및 접고 감기, d180cm, 2019.



 [COSMOS], 부분


시간은 풍경 속에도 새겨 있다. 인공위성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거대한 사막과 산맥이다. 인공위성에서 촬영되었던 사하라 사막의 부분 사진들을 모아 연결하여 만든 사하라 사막 이미지를 배경으로 서기 1년부터 서기 4000년까지의 달력을 새겨넣은 작품이나 히말라야 산맥의 이미지 안에 하루 24시간을 밀리 초 단위로 864,000 조각을 내서 펼쳐 놓은 작품 또한 거시와 미시의 조합을 꾀한다. 달력과 시간을 소재로 한 평면작품에서도 관객은 전체와 부분의 간극이 크다. 거시와 미시세계를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하는 것이 그의 기술이다. 한국에서 조소과를 졸업했지만, 이후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면서 구조나 역학과 관련된 계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미시/거시세계를 왕래하는 연출이 가능했다. 이러한 계산적 요소 때문에 그는 ‘내 작업에는 우연이 없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바로 그 필연성 때문에 우연은 맥락을 가질 수 있다. 그 또한 역설이다. 


전병삼의 작품은 잘 짜여진 계획에 따른다는 점에서 개념성이 강하지만, 동시에 수작업의 힘 또한 강력하다. 책을 통째로 타이핑을 하여 작품화한 것에서 중세의 필사가 같은 실수가 없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만약 그의 작품이 물신숭배의 대상이 된다면, 작은 실수의 흔적은 매우 귀하게 대접받을 것이다. 개념 지향적인 작품은 대개 손의 노동을 배제하려 하지만, 어릴 적 주변에 흔했던 벽돌이나 천으로 놀았던 그에게 몸의 움직임은 중요하다. 결국 구조나 개념 또한 어떤 내용이나 감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성에 대한 지향 또한 초월적일 수 없는 현실로부터 온 것 아니겠는가. 전병삼의 작품은 때로 스펙터클하지만, 이러한 인간적 요소 때문에 노동과 자본을 맘껏 활용하는 지배적 스펙터클과 경쟁하지 않는다. 하지만 속도나 복제를 특징으로 하는 정보매체의 기능은 적극 활용한다. 원근법의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듯한 구성이 있는 원주율을 담은 작품은 속도감이 있다. 



(참고도판) [RELATION], 명함 콜라주, 100x100cm, 2016.



 [RELATION] 부분



 [UNFOLD 200706002],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무반사 디아섹 피니쉬, 240x150cm, 2020.



 [UNFOLD 200706002] 부분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듯한 또는 다가오는 듯한 쨍한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3.14로 시작되는 숫자가 난수표같이 배열된다. 지구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모년 모월 모일에 대한 기록인 달력은 그것을 보고 있는 여기 우리들을 줌 아웃시켜 거의 사라지게 해야 지금의 좌표가 파악될 것이다. 중간의 단계들은 빛의 속도로 생략되어야 가능한 차원의 이동이다. 그의 작품은 전체를 조망해서 정보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완벽한 정보 게임에 대한 욕망이 있다. 동시에 그러한 욕망의 실현 불가능성 또한 예시한다. 타이핑을 비롯해서 오브제를 일일이 설치하는 작가의 노동력이 전제되는 작업 과정과 복제와 속도 면에서 아날로그적 방식을 추월하는 디지털 방식이 공존한다. 작품 소재에서 경전이나 책이나 영화 등에 대한 취향은 복잡한 수작업이 포함된 원본 파일을 없앤 작품의 경우 디지털 방식에 아날로그같은 일회적 속성을 부여한다. 


사라짐에 대한 은유는 ‘불가능의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으로 중요하다. 작가는 ‘인간의 제한된 육체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를 동경’해왔다. 사라짐에 대한 관심은 인간이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각성에서 왔다. 하지만 세익스피어가 [햄릿]에서 비유했듯, 인간은 ‘호두알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무한한 공간의 왕’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무한하지 않지만 그것을 상상할 수 있다. 직립을 통해 손을 자유롭게 하고 두뇌를 키운 인간은 땅을 딛고서 하늘을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존재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지상과 천상, 즉 유한과 무한 사이에서 상상하고 행동한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무한에 대한 직관이다. 과학도 다르지 않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수학에서 무한에 대한 직관을 통해 불완전성의 원리를 주장한 괴델의 평전 [불완전성]에서 무한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단순한 산술도 불가능함을 말하면서, 무한을 우리의 유한한 형식체계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완벽한 타협책을 얻어내는 셈이라고 말한다. 



 [UNFOLD 200706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무반사 디아섹 피니쉬,300x150cm, 2020.



[UNFOLD 200706001] 부분



 [UNFOLD 200706003],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무반사 디아섹 피니쉬, 250x150cm, 2020.



 [UNFOLD 200706003] 부분


여러 분야에서 생각된 무한에 대한 관념은 도달할 수는 없는 불가능한 세계지만 최대한 가까이 가려는 도전을 야기한다. 전병삼에게 ‘불가능의 세계’는 비실재적이라기 보다는 인간적 경험으로는 가능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시공간을 말한다. 가령 거시세계는 물론 미시세계, 탄생 이전과 이후의 세계 등이 그것이다. 시오반 로버츠는 [무한 공간의 왕]에서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범위를 보다 고차원의 영역, 즉 초공간, 혹은 n 차원 기하학으로 확장하는 것은 19세기 후반 3차원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면서 유행했다고 서술한다. 그에 의하면 차원들은 좌표가 되는데, 이는 우리의 존재, 세계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정량화하는 항행 도구이다.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현실일 수 있다. 작가가 보기에는 그러한 거리감이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역설의 세계는 역설적 방법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 


그래서 전병삼은 ‘사라졌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을 작업의 대상으로 한다. 가령 남대문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남대문에 대한 대대적인 관심이 일었듯이 말이다. 코로나 이후 ‘비정상의 정상화’가 보편화된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예술 자체에 내재한 거리두기 방식이다. 낯설게 하기, 소격효과 등으로도 불리는 형식의 변주이다.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 시각예술의 목표다. 보이게 하려면 형식의 조율이 있어야 한다. [UNFOLD] 시리즈의 관람에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일별이 아니라 관찰이다. 현대인을 둘러싼 정보의 포화 속에서 선택받은 항목은 각별한 관찰의 대상이다. 작가는 이러한 ‘관찰’에서 사랑을 감지한다. 전병삼은 일상을 약간 비트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차원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 유기체는 때가 되면 배가 고픈 배꼽시계부터 선천적 후천적 요인이 복합되어 생존이 결정되는 생물학적 시계까지를 내장한다. 



 [UNFOLD 200310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무반사 디아섹 피니쉬, 150x150cm, 2020.



 [UNFOLD 200308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무반사 디아섹 피니쉬, 150x150cm, 2020.



[UNFOLD 220810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무반사 디아섹 피니쉬, 300x150cm, 2022.



 [UNFOLD 200229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무반사 디아섹 피니쉬, 240x150cm, 2020.



 [UNFOLD 210219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유리커버 나무 프레임 피니쉬, 300x150cm, 2021.


작가가 화면이나 병 속에 새겨넣은 객관적 시간뿐 아니라, 개인의 희로애락과 관련된 주관적 시간이 있다. 전병삼의 분야인 예술은 선형적인 시간을 상대화하면서 자기만의 질적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현실에 더 주목하게 하기 위해 현실을 사라지게 하는 그의 방식은 접기와 펼치기이다. 이를 통해 현실의 다른 면이 현실을 대신해서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서 집중적으로 전시되는 [UNFOLD]는 펼치기에 집중한다. 또 다른 시리즈인 [MOMENT]와 [COSMOS]가 수백 장의 사진을 접어서 이미지를 사라지게 하는 것과 대조되는 방식이다. 그에 의하면 ‘접기는 대상의 사진을 접어서 형상의 일부분만 보이도록 하여 나머지 안보이는 부분을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고, 펼치기는 지구와 같이 한 번에 전체를 볼 수 없는 거대한 대상을 지도처럼 한눈에 보이도록 작게 축소하고 펼쳐 놓음으로써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유도하는 것’이다. 


접기는 유한과 무한의 관계를 보여준다. 질 들뢰즈는 [주름]에서 접기 놀이가 단 하나의 세계로부터 무한히 많은 존재들이 태어나는 비밀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질 들뢰즈에 의하면 접는다는 것은 두 부분을 나누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서로 차이 나는 것으로 관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름]에 의하면 접지술, 즉 종이 접는 기술은 물질의 과학을 위한 모델이다. 유기체 또한 원초적인 주름, 접힌 것, 접기로 간주된다. 들뢰즈는 그 예를 주름잡혀 있는 구형 단백질의 형태에서 본다. [UNFOLD] 시리즈 외에 이전의 [MOMENT] 시리즈는 같은 사진들을 의도된 위치대로 접어서 이미지를 줄무늬로 사라지게 한다. 사진 수천장을 접어서 만든 추상적 줄무늬는 순간의 단면들이 가로로 또는 세로로 쌓아 만들어진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넘어서, 다루어진 소재에 따라 상징적 메시지를 전한다. 가령 국기를 접어서 사라지게 작품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일 수 있다. 



 [UNFOLD 230418001],  특수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및 하이글로시 디아섹 피니쉬, 50x80cm, 2023.



 [UNFOLD 230418001] 


전병삼의 작품에 의하면 개별 인간들 역시 수많은 복제 이미지 속으로 사라지곤 한다. [UNFOLD] 시리즈의 시작은 명함을 이름, 전화번호, 직장 등의 정보로 분해해서 만든 [RELATION]이다. 피상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명함은 현대사회에서의 인적 관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이후 그가 선택한 오브제들은 쓰레기부터 람보르기니까지 실로 다양했지만, 최초의 상징적 가치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 즉 사라짐으로서 나타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동일하다. 그의 작품에 명시적이거나 잠재적인 움직임은 변화의 한 축이다. 하지만 접기/펼치기는 서로를 전제하는 상호성을 가진다. 들뢰즈는 [주름]에서 펼침은 접힘의 반대나 소멸이 아니라, 접힘 작용의 연속 또는 확장, 접힘이 현시되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펼침은 주름들에서 다른 주름들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접기의 밀도가 펼치기의 장관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접는 것은 한 차원의 연속성에 단절을 꾀하면서 급격한 변형을 가능하게 한다. 


펼쳐서 사라지게 하는 그의 방식은 일정한 물리적 크기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공간에 시간을 집어 넣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가로줄 패턴이 있는 추상미술같은 작품에 작가는 2시간 분량의 영화를 담았다. 영화의 진행을 그대로 압축 재현하면서 공간적인 형식에 시간을 담은 것이다. 영화를 소재로 한 작품군들은 1초에 20-30여 장의 정지 사진들로 움직임의 환영을 주는 영화를 프레임 단위의 사진으로 펼쳐 한 화면에 넣은 것으로 시간의 공간화인 셈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 수십만 장의 사진이 펼쳐지며, 어느 영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든 엔딩 크레딧이 뜨는 끝자락은 대개 검은색으로 나타난다. 관객은 손톱만한 이미지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볼 수도 있다. [라라랜드], [인터스텔라], [포레스트검프], 그리고 우리 영화 [기생충] 까지 잘 알려진 작품을 소재로 해서 소격효과를 확실히 했다. 관객은 영화에 몰입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본다. 



(참고도판) [CD Project], 설치미술, 180x35m, 청주연초제조장, 2015



(참고도판) [BARBERSHOP WONDERLAND], 설치미술, 3200x240cm,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2016.


공기처럼 편재하는 영상은 현대인에게 현실과 가상의 관계를 교란시키는 대표적인 것인데, 작가는 영상이 현실이 아닌 사진의 나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개별적 단편을 주시하면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거리를 두고 전체를 보면 장면들은 추상적 패턴으로 사라진다. 말 그대로 펼쳐서 사라지게 한다. 숫자나 문자들을 집어넣어 사라지게 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숫자의 경우 시작과 끝에서 단서가 나온다. 소수점 백만 단위까지 집어넣은, 원주율을 소재로 한 작품은 유한에 무한을 넣는 시도를 압축한다. [사피엔스], [코스모스], [원주율]을 내용으로 담은 작품들은 모두 150x150cm의 정방형 크기로 알처럼 압축된 모양새다. 소재가 된 [성경], [코스모스], [사피엔스]는 베스트셀러이며, 그 내용은 전체든 부분이든 음미할만하다. 영감을 주는 책은 전체와 세부 간의 조화가 있기 마련이다. [사피엔스는] 화려한 겉모습으로 내용을 숨긴다. 


이 책을 소재로 한 작품은 소실점 부근에서 빛이 발사되는 듯한 강렬한 구성으로, 독자에게 번쩍하는 깨달음을 주는 내용을 은유한다. 훌륭한 책은 일상의 상식에서 우리를 떼어내고 또 다른 차원을 향유하게 한다. 진부한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작가는 책의 핵심 키워드인 ‘sapiens’라는 단어를 다른 색으로 강조하면서 문장이라는 선형적 형식을 교란시킨다. 필사가 같은 노고가 요구되는 작업이어서 웬만큼 공감 가는 고전이 아니라면 작품화하기 힘들 것이다. 20세기의 정보혁명만큼이나 파급력이 컸던 인쇄술의 첫 시연 대상이 경전이었던 이유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동서양이 최초를 다투는 인쇄술과 경전들의 관계는 정보를 시각화하는 작푸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전병삼의 이전 작품인 성경과 직지 소재의 설치작업이 그렇다. 그것은 근대를 연 정보혁명의 중요한 계기가 된 최초의 금속활자인 직지를 그것이 있는 프랑스에서 스캔까지 받아와서 가설 건물 구조에 펼치는 작품이었다. 



(참고도판) [The Moment of Enlightenment], 설치미술, 옛 흥덕사 절터, 2016.



(참고도판) [The Moment of Enlightenment] 부분


수많은 플라스틱 박스 안에 LED를 넣어 작동시켜 야간에는 미디어 파사드가 되는 직지 소재의 작품은 관객들이 책의 안팎을 거닐 수 있게 한 대형 설치작업이었다. 20x20cm의 스테인리스 강판 6770개에 성경의 문구들을 담아 설치한 작품의 경우 바람에 일렁이는 판이 말씀을 세상으로 전달하는 듯하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암흑기’로 알려진 중세 시대 말에 발명되어 근대 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륙하는 계기가 된 것이 인쇄술이라고 평가한다. 마샬 맥루한에 의하면 중세 후기부터 르네상스에 걸쳐 정보가 쌓이기 시작했는데, 이와 같이 정보 데이터의 처리 조직화가 필요해지자 이는 시각적 도식과 조직화에 대한 강한 요청과 압력을 낳았고 그것이 인쇄술의 발명을 추동했다는 것이다. 문자가 인쇄된 형태는 선형적이고 균질적이어서 명료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계 또한 가진다. 그것은 시각성의 장단점을 공유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되었지만 현대인은 잘 보지 못한다. 하지만 마샬 맥루한이 ‘구텐베르크 은하계’라는 표현을 쓴 것은 2차원이 아니라 더 복잡한 차원을 암시한다. 은하계는 우주공간에 수없이 많은 별들이 입체적으로 모여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2차원적인 회화적 공간에 펼쳐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은 선형적으로 정리되고 체계화될 수 있는 그런 구조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다차원적이다. 맥루한은 문자와 인쇄술 이전의 구술성을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촌이라는 맥루한의 표현은 시각중심주의의 독주에 대해 소리에 대한 감수성을 고양시킨다. 맥루한이 펼치는 미디어의 역사에는 독서도 소리 내어 읽기였다는 예가 있다. 한글 성경을 소재로 한 전병삼의 작품에서 일렬로 나열된 문자가 별이 되고 우주가 되는 것은 인쇄문화의 가능성을 확장한 것이다. 글자들은 시각적인 메아리가 된다. 



(참고도판) [UNFOLD 230409001], 설치미술, 8300x770cm, 안데르센 메모리얼 파크, 2023.



(참고도판) [UNFOLD 230409001] 부분


영문으로 된 성경에서 ‘Love’라는 단어가 나오는 부분. 그리고 한글로 된 성경에서 ‘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부분을 강조하여 배열한 작품들은 각 경전에 대한 작가의 이해를 반영한다. 그것은 그 텍스트의 키워드일 것이다. 성경을 소재로 한 작품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150만 글자를 한 화면에 담았다. 조형적이면서도 내용적인 방점은 있다. 성경 속 사랑이라는 단어는 둥근 파장을 일으키며 퍼져나간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화면 가장자리에 큰 붓이 지나간 듯한 여백도 주었다. 글자 입력부터 자간조절, 인쇄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 작가는 ‘보기와 달리 모든 작업 과정이 숨 막히는 도전이고 나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작품’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그는 영겁의 시간을 담지만, 또 다른 전시 공간에 걸린 작은 100년치 달력은 개인의 생애와 관련될만한 시간대를 보여준다. 그것은 대부분 0000 생(生)일 누군가가 어디쯤 와있는가에 대한 각성을 야기한다. 


출전; 두남재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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